[류석춘 교수·김광동 원장, 80년대 운동권 史觀에 반박]
①명확한 청산 자료 없다… 그저 많았다, 철저했다 반복
②정작 처벌된 건 '친일'보단 공산혁명에 반대한 사람들
③김일성 동생 김영주·친일파 강양욱도 北서 승승장구
'북한은 1946년 2월부터 '민주개혁'이라는 이름 아래 일제의 식민 지배를 청산하고 사회 체제를 바꾸는 일련의 정책을 시행하였다. 친일파를 숙청하는 한편….'
'(한국에서는) 친일파 처벌이 거의 이뤄지지 못하였으며, 민족정신에 토대를 둔 새로운 나라의 출발은 수포로 돌아갔다.'
노무현 정부 당시 좌(左)편향 논란을 빚었던 금성출판사 고교 '한국근현대사'는 광복 후 북한의 친일파 청산을 기정사실화하는 한편, 대한민국에 대해서는 '좌절된 친일파 청산'이라는 제목으로 친일 청산이 실패했다고 기술했다.
80년대 대학가, 90년대 이후 중고교에는 '북한에서는 철저히 친일파를 청산했다'는 신화가 퍼졌고, 이는 민족 정통성이 김일성에게 있다는 논리로 연결됐다. 최근 문제가 된 동영상 '백년전쟁'도 이런 사관(史觀)의 연장선에서 나온 것이다.
류석춘 연세대 교수와 김광동 나라정책연구원 원장은 '북한이 친일파를 철저하게 숙청했다는 주장은 거짓 신화'라며 조목조목 반박한다. 시사 계간지 '시대정신' 봄호에 기고한 글을 통해서다.
①친일파 청산, 주장만 있고 자료 없다
북한의 친일 청산은 누가 어떤 친일 행위로 어떤 처벌을 받았는지 명확한 근거나 자료가 없다. 그저 '많았고, 철저했다'는 식의 대답만 되풀이할 뿐이다. 북한의 공식 역사서인 '조선통사' '조선전사' '현대조선역사'는 단 한 명도 구체적 실명을 들어 어떤 친일 행위를 했는지, 어떤 처벌을 받았는지 밝히지 못하고 있다.
②친일파 청산 명목으로 공산혁명 반대자 처벌
1946년 3월 북한에서 사실상 정부 역할을 한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가 채택한 '친일파, 민족 반역자에 대한 규정'은 광복 이후의 '반동 행위'를 친일과 같은 민족 반역으로 규정하고 있다. 사법적 절차 없이 사형까지 선고할 수 있었고, 인민재판을 통해 사실상 공산혁명에 반대하는 자를 처벌하는 데 활용했다. 1946년 조만식 등 민족주의자들이 이끈 조선민주당 지도부를 '친일 반동분자'로 규정하고 숙청한 것이 대표적. 신탁통치에 반대한 북한의 개신교 목사들은 신사참배를 선동하고 학도지원병 모집에 협력한 '왜놈들의 앞잡이'로 몰렸다.
1945년 소련군이 북한에 진주한 뒤, 북한 주민들이 스탈린과 김일성의 대형 초상화를 들고 행진하고 있다. 소련 군정은 1946년 모스크바의 신탁통치 결의안에 반대한 조만식 조선민주당 당수 등 민족주의 세력을‘친일반동분자’로 몰아 숙청했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제공
③북한 지도부엔 친일 인사 다수 포함
친일파 청산은 자의적이었다. 일제에 협력한 사실이 있어도, 공산 정권에 적극 협력하거나 필요한 능력이 있으면 발탁했다. 일제 때 도의원을 지낸 강양욱은 1946년 2월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 서기장을 맡았다. 광산을 경영하며 일제에 협력한 혐의가 있는 정준택은 북한 최초의 중앙행정기관인 행정 10국의 산업국장, 국가계획위원회 위원장으로 북한 경제를 지휘했다. 만주에서 검사장을 했던 한낙규는 검찰총장, 일본군 파일럿 출신인 이활은 인민군 공군 사령관에 올랐다. 1970년대 중반까지 실질적 2인자 행세였던 김일성 동생, 김영주는 헌병 보조원 출신이다. 이에 반해 대한민국 초대 내각은 상해 임시정부 지도자와 항일운동가로 채워졌다.
류석춘 교수는 "한국의 친일 청산에 한계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최소한 북한보다는 훨씬 철저하고 합리적으로 친일파에 대한 단죄가 이뤄졌다"면서 "북한의 '철저한 친일파 청산' 선전은 있지도 않았던 역사적 사실을 호도하는 것"이라고 했다.
북한 지도부 내 주요 친일 경력자
이름 / 일제시대 경력 / 북한 정권 직책
강양욱 / 도의원 / 최고인민회의 부위원장
김영주 / 헌병보조원 / 부주석
한희진 / 함흥철도국장 /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교통국장
장헌근 / 중추원 참의 / 임시인민위원회 사법부장
김정제 / 양주군수 / 보위성 부상
이활 / 나고야 항공학교 / 인민군 공군사령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