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판] 가족 - ‘착한 수희씨’의 분노 “나는 언제나 시녀였다”
엄마부터 남편까지
날 시녀로 삼았던 걸까 장남은 아들이라서
여동생은 공부를 잘해서,
난 그저 살림밑천 큰딸이었다
결혼 뒤엔 착한 아내, 엄마
믿었던 남편은 바람을 피웠다 그리고 돌아본 인생 40년
늘 가족이 먼저라고 생각했지만
그게 다 무슨 소용이었을까
혹시 난 피해자가 아니었을까
‘분노? 슬픔? 억울함? 배신감?’ 도대체 이 감정의 정체는 무엇일까. 주부 이수희(가명·40)씨는 요즘 “뭐라고 이름 붙여야 할지도 모를” 복잡한 감정의 소용돌이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듯한 기분이다. “남편이 바람을 피웠다.” 이씨의 사십 인생에 ‘균열’을 불러온 사건이다. “심각한 관계는 아니다”라며 남편은 용서를 구했다. “비교적 성실했던 남편”의 말을 이씨도 믿지 않는 건 아니었다. “용서 못할 정도는 아니다”라고도 여겼다. 그래도 무너진 둑에서 물이 쏟아져 나오듯, 툭 하고 터져나온 감정들은 좀처럼 수습이 되질 않았다. ‘괜찮다’고 마음을 다독일수록 전혀 상관없는 옛 기억들까지 불쑥불쑥 떠오르곤 했다. “남편과 두 딸, 엄마와 오빠, 동생, 모두 나를 이용만 했다.” 분노 혹은 슬픔, 억울함, 배신감. 아니, 이 모든 것이 뒤엉킨 감정이 또다시 저 밑에서 치오른다. 이씨의 아버지는 경제적 능력도 없는데 병약하기까지 했다. 아버지는 방 안에 누워 있는 날이 더 많았다. 아버지의 약값과 1남2녀의 생계가 어머니의 책임이었다. 조그만 식당을 하는 엄마는 늘 바쁘고 지쳐 있었다. 어린 시절, 이씨는 엄마의 웃는 낯을 본 적이 거의 없었다. 이씨는 학교가 끝나면 늘 식당에 나가 일을 도왔다. “큰딸이니까, 당연히 해야 할 일”이었다. 엄마는 장남인 오빠에겐 ‘공부나 하라’며 아예 식당 문턱도 넘지 못하게 했다. 살살거리기 대장인 여동생은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며 잘도 놀러만 다녔다. “못된 계집애”라며 눈을 흘기긴 했어도 엄마는 여동생이 밉지 않은 눈치였다. 이씨라고 왜 오빠나 여동생처럼 놀러가고 싶은 날이 없었겠나. 하지만 투정은 부리지 않았다. “일하기 싫다는 말을 해봤자 등짝이나 맞을 게 뻔했다. 게다가 나라도 엄마를 돕지 않으면 엄마가 더 힘들 테니까.” 그 시절 이씨는 늘 엄마가 고팠다. “내가 더 잘하면 엄마가 날 한번 더 봐주겠지, 더 예뻐해주겠지 그런 생각만 했다.” 엄마는 덤덤하기만 했다. ‘그래도 너밖에 없다’란 말까진 바라지도 않았다. 그저 머리만 쓰다듬어줘도 좋았을 것이다. 하지만 엄마로부터 ‘기특하다’는 그 흔한 말조차 들어보질 못했다. 제법 공부를 하는 오빠와 동생과 달리 이씨의 학교 성적은 “그냥 그랬다.” 성적이 떨어져도, 올라도 엄마는 별로 신경쓰지 않았다. 가난한 집안 형편, 공부를 시킬 때도 당연히 ‘더 잘하는 놈’이 먼저였다. 엄마는 동생을 위해 이씨더러 대학을 포기하라고 했다. ‘미안하다’는 말도 하지 않았다. 이씨는 숨어서 눈물을 찍어내면서도 엄마 앞에서는 내색을 하지 않았다. “내가 공부를 더 잘하지 못하니까 어쩔 수 없는 것”이라고 받아들였다. 그 시절 이씨는 ‘작은 초 하나가 제 몸을 태워 세상을 밝힌다’는 말을 좋아했다. “나 하나 양보하고 희생하면 다른 가족들이 행복해질 테고, 내 맘도 알아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저 집 큰딸은 참 착해.” “이수희씨는 정말 좋은 사람이에요.” 사람들의 그런 칭찬이 위로라면 위로가 됐다. “사람들로부터 인정받는 길은 더 좋은 사람이 되는 것뿐”이라고 여겼다. 그래서 친구랑 다투기라도 하면 늘 먼저 사과를 하곤 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친구를 잃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불안했다. 회사에서도 서로 귀찮은 일을 떠맡기 싫어 눈치를 볼 때면 ‘내가 하겠다’고 먼저 나섰다. 그 편이 속이 편했다. 맘에 들지 않는 일이 있어도 주장을 내세우지 않았다. 괜한 일로 불화를 일으키는 게 싫었다. 봉사활동에도 열심히 참여했다. “순하다” “참하다” “착하다” 같은 말들이 늘 이씨를 따라다녔다. 이런 이씨를 좋아한 남자들도 여럿이었다. 하지만 연애는 썩 잘되진 않았다. 이씨는 남편을 만나기 전까지 제대로 된 연애를 해본 적이 없다. 가슴을 설레게 한 사람이 없었던 건 아니지만 제대로 속내를 드러내지는 못했다. 주저주저하다 보면, 남자는 어느새 다른 여자의 연인이 돼 있곤 했다. 그러다 친척의 소개로 “사람 좋다”는 남편과 만났다. 뜨겁지는 않았지만 나쁠 것도 없었다. ‘결혼하자’는데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결혼을 하고 나서도 이씨는 줄곧 좋은 아내, 좋은 엄마, 좋은 며느리가 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나보다는 가족이 먼저”였다. 남편과 아이들이 원하는 반찬 위주로 밥상을 차렸다. 남편의 갑작스런 주말 근무로 가족여행이 취소됐을 때도 화 한번 내지 않았다. 방청소 한번을 제대로 안 하는 두 딸에게도 웬만해선 잔소리를 하지 않았다. “어렸을 때 내가 힘이 들었으니까 딸들은 고생하지 않고 공주처럼 키워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시부모님 말씀엔 무조건 “네, 네” 복종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일주일에 한번은 시댁에 오라는 시어머님의 말씀을 이제껏 거의 어긴 일이 없다. 가고 싶지 않은 날에도, 몸이 아픈 날에도 갔다. “내가 참아야 집안이 조용해질 테니까….” ‘그게 다 무슨 소용이었을까.’ 이씨는 지금껏 살아온 삶이 다 허탈하다. “믿었던 남편은 등 뒤에서 딴짓이나 하고, 딸들은 엄마를 원래 저희들 뒤치다꺼리나 하는 사람쯤으로 보는 것 같다. 제 것만 챙기던 얄미운 동생은 대학 나와 나보다도 잘산다. 엄마는 내가 사십이 되도록 ‘니가 고생이 많았다’는 말 한마디를 안 했다. 다 꼴 보기 싫다.” 눌러도 눌러도 수그러들지 않는 분노, 이씨는 자꾸만 소리를 지르고 싶어진다. “내 인생 돌려줘”라고. 이정애 기자 hongbyul@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