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 연초에 골치 아프고 바쁜 직장일이라 자게 들어오기도 정말 띄엄띄엄합니다.
대문에 올라간 같이 잘 살고 싶었다는 글 읽고 그 즈음 저의 기억이 떠올라 맥주 한잔과 안주 조금 챙겨서 컴퓨터 앞에 앉았습니다.
저는 IMF가 터지던 그해 겨울에 스무살을 막 벗어나고 있었습니다. 부모님이 등록금과 용돈을 해결해주셨지만, 청바지 두벌을 교복으로 입어야하는 신입생이었지요.
고향집에 내려가는 저녁, 눈이 제법 내리고 있었습니다.
지갑에 딱 차비가 있었고, 주머니에 500원, 50원 동전 두개.
한산한 버스터미널 앞에 누가 엎드려 구걸을 하고 있었습니다. 오랫동안 움직이지 않은 듯 등에 눈이 쌓인 채...
주머니를 뒤적여 500원을 동냥그릇에 넣어주고 저 사람이 저러다 죽지는 않을까 염려하며 집에 내려와서 옷을 갈아입다가 500원짜리 동전이 떨어졌습니다.
그날 조금 많이 울다가 잠이 들었습니다.
겁 많고 소심하고 나이브한 제가 도심을 뛰어다니는 학생시위에 참가하게 된 건 그 다음이었습니다.
꽤나 괜찮은 선배들의 꼬임(?)이나 똘똘한 동기들의 힐난에도 불구하고 꿈쩍도 안하던 마음이 무신경했던 500원의 기억 때문에 접어졌습니다. 제대로 된 의미의 정권교체가 이미 있었지만 그 전과 후를 갈라보기엔 제 삶이 짧았지요.
이리저리 두리번두리번....... 두들겨맞고 쫓겨나는 철거민이 있고, 죽음으로 말하는 노동자가 있고... 하늘은 맑은데 그늘은 여전히 그늘이고 오히려 더 깊어보였습니다.
개표부정... 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2002년 겨울에도 이번에도 개표참관으로 지켜보았지만... 마음에 들지 않는 규정, 좀더 촘촘하게 짜넣어야 할 것 같은 관리상황은 있지만...
이제 멈추어주었으면 바라지만, 하지만 굳이 비난하고 하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그 좌절도 책임도 다른 누구에게 넘길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몸부림치고 있기 때문에... 저 역시 심장이 뛰는대로 꿈틀거려본 기억이 있기에... 노동자들이 줄줄이 목숨을 끊었던 어느 해 가을, 저는 종로 대로를 막고 화염병과 쇠파이프를 든 시위대의 앞쪽 줄에 서 있었습니다. 수년만에 화염병이 등장했다고 언론이 보도하고... 관련자를 엄벌하겠다던 그 날이었습니다. (화염병은 써보지 못하고 거의 박스 채 경찰 손에 넘어갔습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아무리 생각해도 초라한 불과 몇명의 사수대가 쇠파이프로 아스팔트를 긁어댈 때 튀어오르던 불꽃이 기억납니다. 맞은편에서 전경들이 진압봉을 치켜들고 달려나올 때 제가 얼마만에 등을 돌리고 달아나기 시작했는지 누군가의 머리가 터지고, 정신을 잃을 듯 한자리에서 발을 구르고 소리를 지르며 우는 처음 보는 어린 아가씨의 손을 잡아 끌고 골목길로 달리다가 멈췄을 때 여전히 울부짖던 그 소녀를 두고 저를 향해 황망한 눈빛으로 '저 이는 왜 저런가' 묻던 단병호위원장... 한 프레임 한 프레임 영화 필름을 한칸씩 빛에 비춰 볼 때처럼 기억합니다.
그리고 기억은 판단하지 않습니다. 제가 좀 더 인내심을 가지고 세상이 좋아지기를 기다려야 했는지, 전경이 아니라 탱크가 와도 뒤돌아 뛰지 않고 버텼어야 했는지 저는 가끔 고민합니다.
이미 너무 추웠던 5년이 지나고 또다시 겨울이 옵니다. 자게에서 모호하게-저만 그렇게 믿고 싶은 걸까요- 우리라고 부를 수 있었던 님들과 저에게도 다시 긴 겨울이 옵니다. 우리는 묻어두었지만 긴긴 인내와 생명력을 지닌 씨앗이 될 수 있을까요 아니면 썩어 없어질까요.
원한 적은 없지만 길고길고 또 긴 겨울을 보내보니, 겨울은 끝나 않지만 봄이 올 거라는 희망은 여전히 죽지 않고 묻혀있습니다.
가볍게 맥주 한잔이라고 생각했는데 집들이에 쓰고 남은 맥주 피처가 저를 취하게 합니다. 결이 다르고 그래서 누구를 지지했고 누구를 지지했지만... 자게에서는 막장가족드라마 며느리를 응원했고, 죽고 싶어요 엉엉 글에 힘내라 토닥토닥 등을 두드려 주었던 마음 따뜻한 많은 님들... 대선 승자는 승자의 만족 속에 패자는 와신상담 속에 그리고 잊혀진 자들은 가진 것 없기에 더 절실하게 품을 수 밖에 없는 희망 속에서 가진 것 없고 가장 약한 사람들도 사람처럼 살 수 있는 그날이 오기까지 한땀한땀 스스로의 생활을 다졌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