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시대 한글을 둘러싼 논쟁- 인간은 변화될 수 있는가?
“한글은 21세기 정보화시대를 500년 앞서 내다보고 만들어진 것 같기도 하다. 오늘날 정보화시대를 세계 최첨단으로 누리고 있는 한국인들은 세종대왕께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인간의 자질이 타고 나는 것이라고 믿는 믿음은 잘 타고난 사람들의 특권적 위치를 유지하고 강화하는 닫힌 사회를 만든다. 이와 달리 인간이 교육에 의해 변화될 수 있다는 믿음은 더 열린사회를 만든다.
스마트폰으로 문자를 주고받는 것이 일상화되었다. 이 때문에 열 손가락을 쓰던 타이핑에서 엄지손가락만 쓰는 엄지타법으로 입력방식의 주류가 바뀌었다. 현란한 엄지손가락 놀림으로 빠르게 문자를 주고받는 젊은이들을 ‘엄지족’이라고 하는 말도 생겼다. 나이든 사람들도 “문자로 보내 줘”와 같은 대화를 일상적으로 하게 되었다. 이런 편리한 정보통신 문화를 열어가는 데에 한글의 편리성이 크게 기여하고 있다.
한글은 모음을 동양사상에서 우주의 세 가지 기본 요소라고 말하는 하늘, 땅, 사람에서 도출했다. 그러므로 한글 모음은 단추 3개( ᆞ, ㅡ, ㅣ)만으로 다 만들 수 있다. 인간 세계의 수많은 소리의 표현을 극히 단순한 원리에 대입하여 세계에서 가장 간단한 모음 표시 체계를 만들어 낸 놀라운 일이었다. 자음은 발음 기관인 입과 혀의 모양을 본떠 ㄱ, ㄴ, ㄷ 등으로 14개를 만들었다. 그리하여 한글 자판은 모음3개, 자음 14개는 한 단추에 2자씩 7개 단추에 배치하여 모두 10개의 단추로 되어 있다. 최대 둔 번만 누르면 원하는 글자 키를 찾아갈 수 있다. 이에 비하여 중국어나 일본어는 비교 대상이 되지도 못하고, 기능적이라는 영어만 해도 한 단추에 3개에서 4개의 자모를 배치하여 원하는 글자를 찾기 위해서는 단추를 세 번에서 네 번을 눌러야 된다. 한글 자판의 기능성은 탁월한 것이다. 한글은 21세기 정보화 시대를 500여 년 앞서 내다보고 만들어진 것 같기도 하다. 이런 정보화 시대에 한글이 없었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오늘날 정보화시대를 세계 최첨단으로 누리고 있는 한국인들은 세종대왕께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500년 전 세종대황이 한글을 창제할 때 많은 반대가 있었다는 것을 잘 알려져 있다. 왕립 연구소 집현전 학자 출신의 신하들은 임금이 우리 고유의 문자를 창제한다는 사실에 놀라고 실망했다.
1443년 12월에 훈민정음을 창제한 세종대왕은 석 달 뒤인 이듬해 2월, 새로 만든 문자 한글을 백성들의 교육에 활용하고자 의욕에 차 있었다. 세종은 한글판 <삼강행실도>를 간행하여 보급하고자 했다.
삼강행실도는 1428년 진주에 사는 김화가 아버지를 살해한 사건이 일어났을 때 사람이 지켜야 할 가장 기본적인 도리에 어긋난 강상죄로 엄벌하는 주장이 제기되자, 세종이 엄벌에 앞서 세상에 효행의 풍습을 널리 알릴 수 있는 서적을 간행하여 백성들에게 항상 읽게 하는 것이 좋겠다고 하여 만들게 한 책이다. 충신, 효자, 열녀 3편으로 되어 있는 <삼강행실도>에는 중국과 조선의 여러 책에 나오는 특출한 인물 이야기를 110명씩 뽑아 그림과 함께 그들의 이야기를 적고 찬시를 한 수씩 붙여 만든 책이었다. 그림은 안견 같은 조선 초기 도화서 화가들이 참여하여 그려 당시의 풍속이나 복식을 알 수 있는 좋은 자료가 되기도 한다. 이런 책을 새로 만든 문자인 한글로 번역하여 간행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세종은 집현전 학자로서 응교인 정창손에게 다음과 같이 하교했다.
“내가 만일 언문으로 삼강행실을 번역하여 민간에 반포하면 어리석은 남녀가 모두 쉽게 깨달아서 충신·효자·열녀가 반드시 무리로 나올 것이다.”
정창손은 정색하며 말했다.
“삼강행실을 반포한 후에 충신·효자·열녀의 무리가 나옴을 볼 수 없을 것입니다. 그것은, 사람이 행하고 행하지 않는 것이 사람의 자질 여하에 있기 때문입니다. 어찌 꼭 언문으로 번역한 후에야 사람이 모두 본받을 것입니까.”
정창손은 인간의 자질이 타고난다고 믿었던 것 같다. 그런 신념을 가진 사람의 생각에는 타고난 자질을 가진 사람이 아니면 아무리 가르친들 변화되지 않는다는 결론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세종은 인간의 자질은 교육으로서 닦을 수 있고, 변화될 수 있다고 보았다. 세종이 보기에 인간이 교육에 의해 변할 수 없다고 보는 정창손 같은 사람은 유학의 가장 근본적인 원리를 모르는 유학자였다. 세종은 정창손에게 말했다.
“이따위 말이 어찌 선비의 이치를 아는 말이겠느냐, 아무짝에도 쓸데없는 용속한 선비이다.”
그즈음 유신들, 즉 집현전 실무책임자인 부제학 최만리·직제학 신석조·직전 김문·응교 정창손·부교리 하위지·부수찬 송처검·저작랑 조근이 한글창제 반대 상소를 올렸다. 이유는 ‘대국(중국)을 섬기고 중화의 제도를 따르는 데 부끄러운 일로서’ 비문명적 또는 전례가 없는 야만스런 일이라는 것이었다. 오늘날 우리의 눈으로 보면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 사대주의적 비굴한 생각이다. 그들은 국가의 새 문자 창제가 한문을 매개로 하여 중화 문화와 교류하고 소통하는 데 방해가 될 뿐 아니라, 조선을 중화문화, 즉 한문으로 축적되어 있는 광대한 문화적 컨텐츠에서 분리시켜 야만의 상태로 전락시키는 일이 되지 않을까 우려했다. 중국 중심의 문화에 기울어진 학자 관료로부터 그런 강력한 반대가 나올 만큼 한글 창제가 문화적 주체성, 한국문화의 개성과 밀접하게 관련된 사안임을 알 수 있다.
세종은 학자 왕이었다. 왕 스스로 많은 학문으로 유학의 근본 원리를 꿰고 있었다. 게다가 음운학에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할 만큼 깊이 연구하여 훈민정음을 창제할 정도였다. 생각해 보라. 한 인간이 문자 체계를 발명한 일이 세계 역사에서 있었는지. 그것도 오늘날의 정보화시대에 아주 잘 맞는 가장 뛰어난 문자를 말이다. 이것은 조선이 학문의 나라였고, 최고 통치자가 깊은 학문적 식견을 가졌기 때문이며, 말소리를 적을 수 있는 문자가 백성들의 삶에 편리함을 줄 것이라는 혜안을 가진 통치자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세종은 학자 신하들의 반대에 실망했다. 특히 학습과 학문에 의해 인간이 변할 수 없다고 한 정창손에게 더욱 그러했다. 세종은 이들 반대자들에게 상징적인 징벌을 내렸다. “이들을 의금부에 가두었다가 이튿날 석방하라!” 그중 인간의 자질은 타고나는 것으로서 교육에 의해 변할 수 없다고 한 정창손은 파직시켰다. (정창손도 곧 복직되었다.) 이 일은 최만리에게는 충격이었던 것 같다. 최만리는 부정과 타협을 모르는 깨끗한 관료였다. 이튿날 의금부에서 풀려난 최만리는 그 길로 사직하고 초야로 돌아갔다.
경복궁의 정문은 인간이 변화될 수 있다는 유학의 근본 신념을 나타개고 있다. 즉 ‘광화’문이다. 왕이 덕과 도의의 정치를 하면 백성이 왕의 덕에 교화되어 변화된다는 것이다. 조선사회는 그런 사회였다. 학문과 교육을 중요시 했으며, 금속활자를 개발하여 각종 서적을 인쇄하여 보급했다. 훈민정음 창제와 언해본 서적을 반포하여 교육과 문화사업에 힘을 기울였다. 어린이들은 어릴 때부터 집안 사숙이나 서당에서 글을 읽었고, 향교와 오늘날 사립대학 격인 서원이 곳곳마다 설치되고 번성했다. 이런 유교문화의 근저에 인간이 교육에 의해 변화될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다.
인간의 자질은 타고나는 것이라는 믿음은 잘 타고난 사람들의 특권적 위치를 유지하고 강화하는 닫힌 사회를 만든다. 이와 달리 인간이 교육에 의해 변화될 수 있다는 믿음은 더 열린 사회를 만든다. 그런 점에서 유교적 조선에서도 유학을 깊이 연마한 정창손 같은 학자들이 ‘타고나는 자질’론을 주장하며 교육에 의한 변화를 부정했던 것은 새 왕조의 최고 지식인마저 여전히 전 시대적인 혈통적, 특권적 사고에 머물러 있었음을 말해 준다. 세종은 조선사회가 기초하고 있는 유학의 원리가 그것이 아님을 분명히 하고자 그들에게 상징적인 징벌을 내렸다. 교육에 의한 변화 가능성이라는 유학의 근본정신을 강조한 세종의 정신을 조선을 더 열린사회로 만들고자 하였다. 그러나 조선사회는 세종 이전에 권력 장악을 위해 닫힘과 열림의 두 길 사이에서 시험에 들어서 있었다.
출처: 글마루 11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