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오래된 얘기입니다.
대학 때 유럽으로 배낭여행을 갔었습니다.
친구랑 같이 갔었는데 친구 집에 일이 생겨 중간에 귀국하고 저 혼자 여행을 계속하고 있었습니다.
가는 곳마다 한국인들 만났지만 그저 스쳐지나갔었지요.
그러다 만난 대학 후배인 남자아이...나와는 정반대 코스로 여행하다 만나서 다시 각자 갈 길을 가야 했었습니다.
그런데 그 아이 일정을 바꿔 저랑 동행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계획했던 일정의 반을 포기하고 이미 거쳐왔던 곳을 다시 가야 하는데 그러겠다고 우기더군요.
뭔가 달콤한 분위기 그런 거 전혀 없었고 그냥 갔던 곳 다시 가고싶어졌다고 무덤덤하게 얘기하길래 정색하고 반대할 수도 없어 얼떨결에 동행하게 됐습니다.
무덤덤, 무뚝뚝했지만 보이지않는 배려에 여러번 놀랐었지요.
그러다 마지막 일정인 파리에 늦은 밤에 도착, 미리 점찍은 숙소로 갔더니 남은 방은 딱 하나...다른 곳을 찾기에는 너무 늦어버린 시간..어색했지만 아무렇지도 않은 척 같은 방을 쓰기로 합니다.
둘 다 참 도덕적이었다고 할까요...순진했다고 할까요...어색함을 서로 감추려고 무던히 애를 썼던 기억이 납니다.
그 방엔 특이하게도 2층 침대가 있어 제가 1층, 그 아이가 2층을 쓰기로 했습니다.
너무너무 피곤했는데 웬지 모를 긴장으로 좀처럼 잠이 들지 못했습니다.
그 아이도 그랬는지 한참을 뒤척이다 누나 옆에 누우면 잠이 올 것 같다더군요. 그 때까지 그 아이 태도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말이라서 당시에는 화들짝 놀라 나 혼자도 좁은데 뭔 소리냐며 자라, 퉁명스럽게 말하고 얼마 뒤 저는 잠이 들었던 것 같습니다.
생각해보면 남자 경험이 전무해서 어떤 상황에서도 나만 정신차리면 된다는 근거없는 배짱이 있었기도 하고 그 아이 남자로 느껴지지가 않아 그랬던 것 같긴 하지만 이상한 혼란스러움에 심란해했던 기억도 나니 제 마음이 전혀 흔들리지 않았던 건 아니었던 것 같기도 합니다.
그 밤을 끝으로 제가 먼저 귀국했고 사진을 돌려준다는 명목 등으로 몇 번 만났습니다.
마지막에 제 카메라가 고장났었거든요.
이후에 미묘한 감정의 엇갈림이 있었고 그렇게 어찌어찌 아주 오랜 시간 못만났고 서로 연락조차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아이 연락이 왔어요. 바로 어제 헤어진 사람처럼...사진 한 장을 돌려주지 않았다고...그걸 돌려주고 싶다고...
이제 완전 아줌마가 된 저...그렇게 오랜 시간이 흘러 고작 사진 한 장을 돌려주겠다는 그 말을 순진하게 받아들일 수가 없어 거절했습니다.
그러나 계속 연락이 왔어요. 딱 한 번만이라고...
가을이라 그랬을까요...결국 나갔습니다.
그 아이는 별로 변하지 않았더군요. 결혼을 안했더라구요. 난 학부형이라고 했더니 조용히 웃었습니다. 그 웃음...그 웃음이 참 좋았던 기억이 납니다. 맑고 따뜻한, 그렇지만 조금 쓸쓸한...
그 아이가 건네준 사진...알프스에서 내려오면서 너무 지쳐 잠깐 졸고 있는 내 모습...이런 사진이 있는 줄도 몰랐던...
뒷면에 날짜와 함께 이렇게 적혀 있었어요, 내 하이디...
미숙하고 유치하고 자존심만 강해서 그 혼란스러운 감정이 뭔지 서로 애써 인정하지 않으려했던 20대 초반의 우리가 우습기도 하고 애틋하기도 해서 그저 한참 사진만 보다 자리에서 일어섰네요.
그 아이 말하더군요...그 때 내가 왜 누나랑 같이 가려고 갔던 곳 또 간 줄 알아...? 되게 강한 척 씩씩한 척 했지만 사실은 여리고 마음 약한 거 뻔히 보이는데 혼자 보내기가 도무지 마음이 놓이지 않았어...사람 너무 잘 믿고 맘 약해 거절도 잘 못하고 물가에 내놓은 아이 같았거든...그 말 듣는데 주책맞게 눈물이 핑 돌아 겨우 참았습니다.
그렇지만...그 때나 지금이나 고지식하고 강박적으로 도덕적인 저는 단 한번의 만남 후에 그 아이 연락처를 지워버리고 전화와 문자 모두 스팸 처리했습니다.
극단적으로 이기적이고 배려심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남편과의 불행한 결혼생활 중에 혹시나 마음 한 구석이라도 그 아이에게 기대게 될까봐서요.
그게...2년 전 가을의 일입니다.
다시 가을이 오니...생각이 나네요. 아이들 엄마로 시댁의 충실한 도우미로 열심히 살고 있으니 나를 아내로, 여자로 전혀 생각하지 않는 남편에게 이 정도, 가끔 생각하는 것 정도가 죄는 아니겠거니 하면서요.
다음 생이 있다면...좀 더 밝은 눈을 갖고 태어나 서로 아끼고 배려하는 참된 인연을 알아볼 수 있기를 바래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