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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게시판

드러낼 수 없는 고민을 풀어보는 속풀이방

아무 것도 아닌 줄 알았던 인연...이제야 가슴이 먹먹하네요

가을에... 조회수 : 5,601
작성일 : 2012-10-10 01:23:46

아주 오래된 얘기입니다.

대학 때 유럽으로 배낭여행을 갔었습니다.

친구랑 같이 갔었는데 친구 집에 일이 생겨 중간에 귀국하고 저 혼자 여행을 계속하고 있었습니다.

가는 곳마다 한국인들 만났지만 그저 스쳐지나갔었지요.

그러다 만난 대학 후배인 남자아이...나와는 정반대 코스로 여행하다 만나서 다시 각자 갈 길을 가야 했었습니다.

그런데 그 아이 일정을 바꿔 저랑 동행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계획했던 일정의 반을 포기하고 이미 거쳐왔던 곳을 다시 가야 하는데 그러겠다고 우기더군요.

뭔가 달콤한 분위기 그런 거 전혀 없었고 그냥 갔던 곳 다시 가고싶어졌다고 무덤덤하게 얘기하길래 정색하고 반대할 수도 없어 얼떨결에 동행하게 됐습니다.

무덤덤, 무뚝뚝했지만 보이지않는 배려에 여러번 놀랐었지요.

그러다 마지막 일정인 파리에 늦은 밤에 도착, 미리 점찍은 숙소로 갔더니 남은 방은 딱 하나...다른 곳을 찾기에는 너무 늦어버린 시간..어색했지만 아무렇지도 않은 척 같은 방을 쓰기로 합니다.

둘 다 참 도덕적이었다고 할까요...순진했다고 할까요...어색함을 서로 감추려고 무던히 애를 썼던 기억이 납니다.

그 방엔 특이하게도 2층 침대가 있어 제가 1층, 그 아이가 2층을 쓰기로 했습니다.

너무너무 피곤했는데 웬지 모를 긴장으로 좀처럼 잠이 들지 못했습니다.

그 아이도 그랬는지 한참을 뒤척이다 누나 옆에 누우면 잠이 올 것 같다더군요. 그 때까지 그 아이 태도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말이라서 당시에는 화들짝 놀라 나 혼자도 좁은데 뭔 소리냐며 자라, 퉁명스럽게 말하고 얼마 뒤 저는 잠이 들었던 것 같습니다.

생각해보면 남자 경험이 전무해서 어떤 상황에서도 나만 정신차리면 된다는 근거없는 배짱이 있었기도 하고 그 아이 남자로 느껴지지가 않아 그랬던 것 같긴 하지만 이상한 혼란스러움에 심란해했던 기억도 나니 제 마음이 전혀 흔들리지 않았던 건 아니었던 것 같기도 합니다.

그 밤을 끝으로 제가 먼저 귀국했고 사진을 돌려준다는 명목 등으로 몇 번 만났습니다.

마지막에 제 카메라가 고장났었거든요.

이후에 미묘한 감정의 엇갈림이 있었고 그렇게 어찌어찌 아주 오랜 시간 못만났고 서로 연락조차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아이 연락이 왔어요. 바로 어제 헤어진 사람처럼...사진 한 장을 돌려주지 않았다고...그걸 돌려주고 싶다고...

이제 완전 아줌마가 된 저...그렇게 오랜 시간이 흘러 고작 사진 한 장을 돌려주겠다는 그 말을 순진하게 받아들일 수가 없어 거절했습니다.

그러나 계속 연락이 왔어요. 딱 한 번만이라고...

가을이라 그랬을까요...결국 나갔습니다.

그 아이는 별로 변하지 않았더군요. 결혼을 안했더라구요. 난 학부형이라고 했더니 조용히 웃었습니다. 그 웃음...그 웃음이 참 좋았던 기억이 납니다. 맑고 따뜻한, 그렇지만 조금 쓸쓸한...

그 아이가 건네준 사진...알프스에서 내려오면서 너무 지쳐 잠깐 졸고 있는 내 모습...이런 사진이 있는 줄도 몰랐던...

뒷면에 날짜와 함께 이렇게 적혀 있었어요, 내 하이디...

미숙하고 유치하고 자존심만 강해서 그 혼란스러운 감정이 뭔지 서로 애써 인정하지 않으려했던  20대 초반의 우리가 우습기도 하고 애틋하기도 해서 그저 한참 사진만 보다 자리에서 일어섰네요.

그 아이 말하더군요...그 때 내가 왜 누나랑 같이 가려고 갔던 곳 또 간 줄 알아...? 되게 강한 척 씩씩한 척 했지만 사실은 여리고 마음 약한 거 뻔히 보이는데 혼자 보내기가 도무지 마음이 놓이지 않았어...사람 너무 잘 믿고 맘 약해 거절도 잘 못하고 물가에 내놓은 아이 같았거든...그 말 듣는데 주책맞게 눈물이 핑 돌아 겨우 참았습니다.

그렇지만...그 때나 지금이나 고지식하고 강박적으로 도덕적인 저는 단 한번의 만남 후에 그 아이 연락처를 지워버리고 전화와 문자 모두 스팸 처리했습니다.

극단적으로 이기적이고 배려심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남편과의 불행한 결혼생활 중에 혹시나 마음 한 구석이라도 그 아이에게 기대게 될까봐서요.

그게...2년 전 가을의 일입니다.

다시 가을이 오니...생각이 나네요. 아이들 엄마로 시댁의 충실한 도우미로 열심히 살고 있으니 나를 아내로, 여자로 전혀 생각하지 않는 남편에게 이 정도, 가끔 생각하는 것 정도가 죄는 아니겠거니 하면서요.

다음 생이 있다면...좀 더 밝은 눈을 갖고 태어나 서로 아끼고 배려하는 참된 인연을 알아볼 수 있기를 바래봅니다.

IP : 175.114.xxx.19
14 개의 댓글이 있습니다.
  • 1. ㅇㅇ
    '12.10.10 1:29 AM (117.111.xxx.222)

    내 하이디...
    가슴이 먹먹해지네요..

  • 2. ......
    '12.10.10 1:37 AM (175.120.xxx.108)

    다음 생에서 만나 행복하게 이어질 인연의 사람을 미리 잠깐 만났던 게 아닐까요?

  • 3. 영화같네요
    '12.10.10 1:38 AM (14.45.xxx.248)

    그런 즐거운 기억으로 힘내서 살아가세요.
    슬프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기쁜 기억이잖아요

    누군가가 나를 그렇게 기억해준다는 사실만으로도 저는 자신감이 막 솟아날것 같아요 ^^

  • 4. 가을의 추억이네요..
    '12.10.10 2:08 AM (182.212.xxx.149)

    뭔가..생각에 잠기게 하는 글 이네요..젊은시절의 추억이 아름답게 느껴지네요..
    가을이라..더 애틋하게 다가오구요..
    아름다운 추억으로..힘들고 지칠때..가끔씩..마음속의 의지가 되면 좋을거같아요..

  • 5. ....
    '12.10.10 2:15 AM (218.235.xxx.42)

    컴 끄기전 다시 들여다본 이곳...
    글 읽고 눈물이....계속 나네요.
    가슴이....왠지 먹먹해지고...

    모르는 분이지만....
    다음 생이 있다면 꼭 원하시는 대로 되시길 바래봅니다.

  • 6. 눈물이 핑
    '12.10.10 2:19 AM (112.152.xxx.168)

    왜, 제가 눈물이 핑 돌까요.


    당연한 것이지만 새삼 깨달으면서 깜짝 놀라게 되는 사실이 있는데... 그건, 우리의 젊음이 단 한 번이라는 것, 나의 이십 대도 단 한 번이라는 것, 인생에서 내가 가장 예뻤을 때라는 것은 그야말로 찬란하게 빛나며 지나가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남들은 모두 시간을 이기지 못해도 어쩐지 나만은 언제까지나 고민 많은 스물 몇, 예쁘고 웃음 많은 아가씨로 머물러서 남들이 바삐 지나쳐 가는 것을 바라만 보고 있을 것 같았어요. 아, 저는 얼마나 어리석은지요.

    그러고 돌아보면, 나도 그 자리에 머물러 있지 않지만 그 사람도 그 자리에 머물러 있지 않고... 우리가 함께 했던 순간도, 나도, 너도, 모두 '그 시간'을 떠나왔더군요. 우리는 무엇을 뒤에 남겨 두고 이렇게 앞으로만 가는 것일까요. 무엇을 바라.



    밑줄 쳐 놓고 가끔 들여다보는데 요즘 좀 자주 펴 보는, 소설의 한 대목을 적어 드리고 싶습니다...


    - 무엇인가가 완성되는 순간은 그것을 완전히 잃고,
    잃었다는 것마저 완전히 잊고,
    오랜 세월이 흐른 뒤 우연히 그 언저리를 헛짚는 순간이다. (...생략...)
    한겨울 새벽 거리를 무서운 속도로 내달리는 심야 택시의 묵시록적인 관통 속에서 휙 지나가듯
    내 첫사랑은 완성되었다. 그리고 완성된 순간 비스듬히 금이 가 버렸다.
    하지만 혹시 말이다,
    사태는 너무 늦었고 나는 너무 늙었지만 말이다... (생략)


    내 하이디...
    그런 아름다운 이름을 가져 보지 못하고 지나가는 생도 있을 테니... 원글님의 생은 이미 충분히 반짝이는 부분을 가진 것이겠지요. 다음 생에서는 보다 오래 반짝이며 행복하게 사시길 바랄게요.
    그리고 우리 모두, 남은 이 생도 나름대로 곱게 가꾸고 다독이며 살아가요.

  • 7. ..
    '12.10.10 2:38 AM (219.254.xxx.34)

    저도 왠지 먹먹하네요~~
    좋은 추억으로 간직하시고.. 한번씩 꺼내보세요!
    그정도는 괜찮아요~~~^^

  • 8. bbb
    '12.10.10 3:19 AM (211.246.xxx.75)

    가슴이시리네요 한편의 영화같아요

  • 9. 눈물이
    '12.10.10 4:23 AM (222.236.xxx.39)

    납니다. 그 따뜻함 그리워지는 계절에..

  • 10. 그저
    '12.10.10 9:52 AM (75.177.xxx.145)

    저를 바라보던 그 눈이 생각이 나네요.
    글도 댓글도 제 맘에 남습니다.

  • 11. 어쩔
    '12.10.10 10:01 AM (118.46.xxx.27) - 삭제된댓글

    간만에 가슴이 말랑 말랑해지는 글을 읽고 말았네요 ㅠ.ㅠ
    마음이 아픕니다.

  • 12. 왜...
    '12.10.10 11:14 AM (220.121.xxx.152)

    글을 읽고 왜 이리 눈물이 나는지.... 마음이 아리네요ㅠ

  • 13. 아...
    '12.10.10 12:26 PM (14.37.xxx.13)

    내 하이디...
    학부형이 되어있다는 말에 쓸쓸히 웃었을 누군가가 마음아프네요.

  • 14. 저도 눈물이...
    '12.10.10 1:14 PM (1.224.xxx.47)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네요.
    저도 냉정하기 그지 없는, 저를 도우미 아줌마 정도로만 생각하는 남편이랑 살고 있어서 더 공감이 되는 지도 모르겠어요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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