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해 명절마다 게시판 글들을 읽으며 제 얘기를 해드리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차일피일 미루다가
오늘 한 번 써보려고요.
저는 결혼 16년차구요, 아래로 결혼 12-3년차 된 동서가 하나 있어요.
누가 더 낫다를 논하기도 어려울 정도로 동서와 저는 양극단에 서있는 유형들이고요.
저는 전형적인 맏며느리 스타일(그러나 기가 센), 동서는 친정에서도 막내이고, 전형적인 막내스타일.
일 하는거 싫어하고, 뺀질거리고...
동서 결혼하고 첫 명절부터 명절 전날 저녁에 일이 다 끝나면 오더군요. 매번 애가 아프다는 핑계로요.
물론 아이가 아픈적도 거의 없고, 아프다고 해도 가벼운 감기였고요.
처음에는 그 말을 믿고, 애가 아프니 오지 말라고 말라고 해도 기어코 와서 착하다고 생각했는데,
애가 너무 쌩쌩해서 오히려 우리가 민망했던 적이 한두번이 아니예요
성질좀 있던 고모님 한 분이 애가 여기 오는 30분 동안 다 낫나보다고 소리를 지르신 적도 있었어요.
이런 일이 반복되자 시어머니와 시누이, 제 남편은 명절이면 제 눈치 보기 바빴어요.
저는 일하는 며느리임에도 항상 명절 이틀전에 3-4시간 거리를 내려가 자고 담날 새벽부터 일어나 명절 준비를 해요.
전업인 동서는 몇 년을 내리 전 날 일 다끝나면 오구요.
명절 세번 정도를 이렇게 보낸후 저는 과감히 혼자서 결정을 내렸어요.
명절 음식을 반으로 줄이기로요. 왜냐하면 동서가 명절에 안와도 아가씨와 어머니, 저 이렇게
셋이서 서로 꾀부리지 않고 열심히 같이 일할 때는 양이 많은줄 몰랐는데 아가씨가 결혼하고 저와
어머니 둘이서 하려니 양이 많은 거예요.
미리 계획한게 아니라 어느 명절 일을 시작하려고 부엌에 서니 갑자기 이런 생각이 밀려온거라
저 혼자 과감히 전거리를 반만 하고 나머지 재료는 다시 반으로 나누어 동서꺼와 제꺼 두개로 싸서
냉장고에 넣었어요.
각자 집에 가져가서 나중에 해먹으려고요.
양을 반으로 확 줄이니 작은 채반 하나밖에 안나오더라구요. 어머니는 밖에 있는 부엌에서 나물 삶으시고
떡 찌시고 하다 들어와서 채반을 보시더니 양이 너무 작다고 깜짝 놀라시더라구요.
저는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천진난만하게 이제 아가씨도 없는데 혼자 하려니 양이 너무 많다, 동서가
언젠가 일찍 와서 같이 일하면 그 때는 양을 늘리겠다.. 라고 제 마음 그대로를 담담히 말씀 드렸어요.
남은 재료는 동서와 나누어 가려고 반으로 나눠 냉장고에 너놨다. 집에 가져가서 해먹을테니 재료 걱정은
하지 마시라고 했어요.
어머니는 여전히 못마땅한 표정을 지으시며 안타까워 하셨죠.
채반 놓은 방에 들어갔다 나오실 때마다 "전이 너무 작다~, 니들 가져갈게 너무 없다"를 연발하셨지만
그때마다 "엄마, 전 맨날 남잖아요! 집에 가져가도 잘 안 먹어요" 라고 남편이 거드니 어머니도 별 말씀을 못하시더라구요.
그래서 그때부터 10년 정도 지금까지 이렇게 해오고 있어요. 그래서 저는 명절 스트레스가 거의 없어요.
어머니랑 저랑 나눠서 점심 먹기전까지 후딱 끝내고, 남은 반죽으로 부침개 부쳐서 막걸리를 반주로
점심 먹고, 샤워하고 어머니랑 저 각자 다른 방에서 한 숨 자고 일어나 저녁해요 ㅎㅎ.
어머니도 처음에는 저항?이 만만치 않으셨어요. 맏며느리라서 손이 크시고, 하나라도 더해서
자식들 먹이고 싶어하시는 전형적인 시골 할머니시거든요.
제가 개혁을 시작한 처음 몇년은 끊임없는 어머니의 전복 시도와 신경질, 협박 등에 다소 불안했지만
어머니께 제 마음에 한이 없어야 어머니께 더 잘할 수 있다고 끊임없이 말씀드렸구요, 무엇보다 아들(제 남편)도
개혁 의지를 보인 것이 어머니께 주요했던것 같아요.
어머니와 그동안 이런저런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하나하나 남편의 도움을 받아가며 조금씩 개선해 나가니
이제는 시댁 행사를 많이 간소화 시켰어요.
그랬더니 이제는 제 눈에 연로해지신 어머니가 보이며 더 잘해드리고 싶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