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덕식 복수
복수의 계절이 돌아왔다.
피.. 피가 나도록
에.. 에누리없이
타.. 타격하라.
이 영화는 복수에 관한 영화다. 복수가 곧 구원이라고 김기덕은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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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덕.. 화가 난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그를 두고.. 이해못하겠다는 식의 초딩스런 말을 뱉어내곤 하기 때문이다. 심지어 며칠전에도 어떤 기자가.. 영화를 18편이나 만들면서도 변한게 없다. 옛날 방식으로 되돌아갔다..는 식의 악평을 썼더라.. 미친 쇄끼. 프레스로 찍어죽일 놈이 아닌가. 왜 ‘이해’라는 말을 쓰는 걸까? 이해는 ‘풀어버리는’ 거다. 보쌈을 싸줬더니.. 이 보쌈 어떻게 풀어먹죠?.. 하고 반문하는 격이다. 밥통아. 보쌈은 풀어먹는게 아니라 싸먹는 거야. 모르겠냐? 왜 풀어? 누가 풀랬어? 해(解)는 角刀牛다. 칼로 쇠뿔을 쳐버리는 거다. 살벌한 단어다. 하여간 쇠뿔을 자르지 말라. 소는 뿔이 있어야 스타일이 산다. 김기덕의 모든 영화는 깨달음의 영화다. 깨달음은 분해하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다. 깨달음은 관계의 깨달음이며 관계는 통하는 것이다. 통짜덩어리 그대로를 훼손하지 말아야 한다. 뾰족한 뿔을 자르지 말라. 깨달음은 정해져 있다. 여러 가지 깨달음이 있는 것이 아니라 우주 안에는 단 하나의 깨달음이 있다. 인간이 깨달음을 논한지 2500년이 지났다. 2500년 동안 줄기차게 말해줘도 알아듣지 못한대서야.. 어휴 밥통들. 늘 하는 말이지만 조세희의 ‘난쟁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이 그대로 깨달음이다. 탈무드의 가르침대로.. 두 굴뚝청소부가 자본주의라는 굴뚝을 청소하러 굴뚝 속에 들어갔는데.. 청소를 마치고 나온 상황에서 어느 청소부 얼굴이 더 희냐다. 자본주의라는 굴뚝에서 흰 것도 검은 것도 없다. 선과 악의 투쟁은 오른팔과 왼팔이 싸우는 격이라 모두가 가해자이고 동시에 모두가 피해자이다. 그러므로 상부구조를 뜯어고쳐야 한다. 그 방법은 관계의 재설정이다. 조세희의 깨달음과 김기덕의 깨달음은 같다. 관계를 바꾸는 것이다. 관계를 어떻게 바꾸냐는 스포일러이므로 이 정도만 하겠다. 하긴 어차피 한국관객들은 김기덕 영화를 안 보므로 말해도 무방할테지만.하여감 김기덕의 모든 영화는 관계를 바꾸어 깨달음에 이르는 내용이다. 악어부터 모두 다 그렇다. 파란대문의 마지막 장면에서 잘 표현되었다. 옛부터 그래왔다. 모세는 노예였던 유태인들을 해방시켰다. 세상과의 관계를 바꾼 것이다. 그러나 유태인들은 여전히 노예의 관습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들은 모든 사물을 노예의 관점에서 바라본다. 신과 인간의 관계를 주인과 노예의 관계로 본 것이다. 그런데 예수가 처음 신과 인간의 관계를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로 바꾸었다. 그래서 골난 유태인들이 예수를 죽였다. 인생에서 진정한 방법은 하나 뿐이다. 그것은 관계를 바꾸는 것이다. 관계를 바꾸려면 스타일을 바꾸어야 한다. 스타일은 단순한 하나의 양식으로 끝까지 가는 것이다. 스타일을 바꾸려면 전체를 한 줄에 꿰어내는 소실점을 찾아야 한다. 그것은 구성원 모두가 쳐다보게 되는 하나의 섬이다.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 김기덕의 섬도 같다. 사슬은 가장 약한 고리에서 끊어진다. 소실점은 약한 고리다. 조직의 약한 고리가 섬이다. 조직의 구성원 모두가 약한 고리를 보호할 때 그 조직은 놀라운 발전을 이룬다. 가족이라는 조직에서 약한 고리는 아기다. 모든 가족은 아기 중심으로 사고하고 행동하여야 한다. 담배를 피우고 싶어도 아기가 있으므로 참아야 한다. 물론 고삼병에 걸린 한국의 가족들은 고삼을 중심으로 사고하고 행동하지만. 그 경우는 고삼이 가족의 소실점이자 약한 고리다. 고삼스타일 탄생이다. 스타일은 조직의 구성원 중에서 약한 고리를 보호하는 형태로 만들어지며 한국은 노인을 조직의 약한 고리로 보고 효도스타일을 만들었고, 프랑스인은 개를 가족의 약한 고리로 보고 애완견스타일을 만들었다. 손오공과 그 일행들 중에서 약한 고리는 당삼장이다. 일행은 도무지 도움이 안 되는 ‘전력외’ 당삼장을 위해 노심초사 한다. 그리하여 그 조직은 견고해진다. 가장 약한 고리가 가장 강한 구심점이 된다. 만약 당삼장이 손오공 뺨치는 무술고수였다면? 손오공 패거리는 단박에 분열된다. 선진국이 특히 여성과 어린이와 노약자를 보호하는 것은 그 방법으로 그 조직을 견고하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을 경험칙으로 알기 때문이다. 옛날 중국인들은 전쟁을 일삼았는데 전력외인 노인들은 제거해 버렸다. 그러자 영화 ‘300’에 나오는 배신자 에피알데스처럼 노인이 적국에 비밀을 알려줘서 나라가 망해버렸다. 그래서 효라는 규칙을 만들어 노인을 보호한 것이다. 조직에 부담을 주는 약자를 보호하는 것이야말로 조직발전의 비결임을 그들은 알아챈 것이다. 사실이지 대부분의 문학과 영화와 드라마가 약한 고리를 설정하고 그 약한 고리를 보호하는 형태로 조직이 발전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힘으로 하면 여자가 약하므로 여주인공을 보호하는 남자들의 무리 형태로 초기세팅이 들어간다. 여주인공을 보호해야 하는 이유를 만들기 위해 몰락한 왕국의 공주라는가 하는 식의 설정 들어간다. 영화 무사가 그렇다. 그러나 한국인들은 어떤가? 약자는 패배자로 낙인찍어 조직에서 제거하려고 한다. 약자 때문에 경쟁에서 졌다고 주장한다. 그 조직은 깨지고 만다. 김기덕은 이 문제를 정면으로 제기하고 있다.한국인들은 태연하게 개고기를 먹는다. 개는 가족 중에서 가장 약자이다. 게다가 어린이의 친구이다. 가장 약자인 개조차 대접받을 때, 가장 약자인 어린이의 친구인 개를 보호할 때 그 조직은 견고해진다. 개따위? 된장발러.. 하는 조직은 미래가 없다. 조직의 구심점이 없기 때문이다. 소실점이 없기 때문이다. 스타일을 만들지 못하기 때문이다. 가정은 아기를 중심으로 작동하고 내무반은 신병을 중심으로 작동한다. 어느 집단이든 어느 조직이든 그 그룹의 가장 약자가 그 조직에 활력을 불어넣는다. 그 약자를 보호할 때 팀워크는 향상되고 조직은 무적이 된다. 이건 누구나 경험으로 다 아는 거. 이런 내막을 이해 못하겠다고 말하는 자들이 나는 이해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세계의 모든 위대한 예술가들은 모두 같은 것을 이야기하기 때문이다. 김기덕이 무슨 영화를 찍던 보나마나 그것은 예수가 한 것과 같고, 석가가 한 것과 같을 것이기 때문이다. 뻔하자나. 정상에서 보는 모습은 한결같으니까. 예수가 사랑을 말했으므로 김기덕 역시 사랑을 말하는 거고, 석가가 자비를 말했으므로 김기덕 역시 자비를 말하는 거고, 그것은 같을 수 밖에 없다. 모든 위대한 예술은 하나의 형식, 하나의 주제 밖에 없기 때문이다. 김기덕의 피에타 역시 초기작 악어와 같다.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그것은 선과 악은 한 몸뚱이의 오른팔과 왼팔처럼 섞여 있다는 것이며, 상부구조인 자본주의를 조져야만 답이 나온다는 메시지다. 왼팔과 오른팔이 서로 싸우고 있으니 이 얼마나 미련한가 하는 이야기다. 인간의 모든 비극은 신으로부터 비롯되었므로 신을 조져야 답이 나온다. 인간끼리 노력하고 애쓰다니 얼마나 미련한가? 이제부터 착하게 살아보겠다? 초딩이냐. 왜 그런 품이 많이 드는 짓을 해? 왜 생노가다를 해? 간단히 물꼬의 방향을 틀어버리면 되잖아.오늘날 인간이 이모양 이꼴로 된 것은 인간이 게을러서가 아니요 인간이 악해서가 아니요 인간이 공부를 못해서가 아니요 인간의 심성이 어질지 못해서가 아니요 다만 신이 인간을 그렇게 창조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모든 것은 오직 신의 탓이며 인간은 노력할 이유가 전혀 없다. 그러므로 간단히 신에게 전화해서 ‘애프터서비스’를 요청하면 된다. 신과 인간의 관계 재설정이다. 예수가 그렇게 했고 석가가 그렇게 했으므로 김기덕이 그렇게 한다. 이 영화는 구원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구원은 신의 임무다. 터미네이터는 과거로 돌아가 역사를 바꿔버리는데 김기덕도 비슷하다. 역사를 바꾸다니 이건 신의 역할을 침범하는 거다. 김기덕은 탄생을 바꿔버린다. 신에게 전화해서 ‘엄마가 맘에 안드는데 교환이나 환불 안 되나요?’ 영화에서는 가능하다. 강도는 채권추심하러 다니다가 뜬금없이 엄마를 하나 받았다. 하여간. ‘혹시 남는 엄마 있으면 하나 부탁.’‘옛다. 네 엄마.’김기덕의 깨달음으로 보면 구원과 복수는 같다. 그러므로 가장 위대한 구원은 가장 잔인한 복수일 수 있다. 복수의 대상은 이삽박이다. 이강도에게 복수하는 방법은 이강도의 가족을 이강도의 눈앞에서 징벌하는 것이다. 그것이 이명박을 구원하는 유일한 방법이기도 하다. 우리는 관계 속의 존재이다. 선과 악은 개인에 대한 대응이다. 그러나 진정한 피해자는 관계 그 자체다. 누군가를 사형에 처한다고 해서 사형에 처해지는 누군가가 피해를 입는 것은 아니다. 피의자는 저지른만큼 당한 것이므로 잃은 것이 없다. 본전이다. 관계가 피해자다. 관계가 존엄이다. 존엄이 피해자다. 인간과 인간의 관계가 죽고 죽이는 관계로 되는 것이다. 인간이 파괴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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