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서른 다섯살 결혼 7년차 되어가는 두 아이의 엄마입니다.
큰애 낳기 전 까지 일했었고 지금은 전업주부인데 제가 하던 일이 애들 가르치던 일이라서
둘째까지 웬만큼 키워놓고 어린이집이라도 보내게 되면 다시 일해야겠다 막연히 생각만 하는 중이구요.
또래 친구들이 많이 없기도 하고 친언니도 멀리 살아서 이런 저런 고민이 생기면 딱히 상담할 곳이 없어요.
그래서 가끔 여기 게시판에 속풀이도 하고 고민상담도 하면 얻는 댓글들로 많은 위안 삼으며 지내요.
저는 82회원분들이 저와 비슷한 연령대가 많겠거니 생각했다가 가끔 댓글들 중에서
내 나이 60이 넘어서.. 라거나.. 결혼한지 20년 넘어가니.. 라는 말씀을 들으면
정말 저희 친정 언니나 엄마에게 조언을 듣는 것 같고
그 분들이 지나온 삶의 지혜를 얻는 것 같아서 마음이 풀릴 때가 많아요.
그래서 이번 글도 결혼 20년 넘으신 분들께.. 라고 제목은 달았어요.
그렇지 않은 분이라도 제 글 읽어주시기라도 하면 누군가 조용히 내 마음을 들어주는 것 같아서 이렇게 글을 씁니다.
요즘 마음이 너무 힘듭니다. 아이들 돌보느라고 몸이 힘든건 괜찮아요.
아이들이 예쁘고 이 순간이 얼마나 귀한지 늘 생각하며 지내니 아이들 보는건 정말 어렵지 않아요.
하지만 남편과의 사이는 정말 녹록치 않습니다.
저도 남편도 어른이지만 내 마음 좀 알아줬으면 하는건 어른이 더 하는것 같아요.
남편은 성실한 사람이죠. 학원을 운영하는데 정말 꼼꼼이 잘 하는 사람이라 사업은 웬만큼 됩니다.
하지만 시부모님께서 마흔 넘어 딸 셋 아래로 낳은 막내 아들이라 집안에선 아직도 막내에요.
그렇게 35년은 넘게 살아온 사람이 결혼하고 남편이 되고 아빠가 되었다고 성격이나 습관이 바뀌진 않겠죠.
그런데 저도 막내에요. 바로 위 언니와도 나이 터울이 있어서 약간 엄한 부모님이셨지만 저는 응석받이로 자랐어요.
그랬던 저와 남편이 만났으니 결혼해서 크고 작은 일로 서로 더 서운하고 서로 더 속상하다고 싸우기도 많이 싸웠죠.
자잘한 이유는 집안일, 육아 안도와준다..는 통상적인 이유였고, 큰 이유는 늘 술이 문제였어요.
네. 술이 문제인 뻔한 경우에요. 술만 안마시면 그렇게 좋은 사람인데 술만 마시면 사람이 바뀌는.. 그런 경우..
큰애 작은애 낳고도 종종 잊을만 하면 술이 늘 문제가 됐고
작년 여름엔 제가 정말 미친듯이 난리를 쳐서 남편이 술을 끊게 됐어요.
일년 동안 제가 안보는 곳에서 사업상 어쩔 수 없이 맥주 한잔 정도는 했겠지만 정말 끊은거나 다름없이 지냈죠.
그러다 한달 쯤 전인가요.. 남편 사업이 잘 되어 가고 동료 선생님들과 다시 자주 어울리게 되고. 술을 마셨어요.
남편도 참 운도 없지요. 그날따라 동이 트는 새벽까지 술자리가 이어졌고 집에 오는 길에 싸움이 났고.
정신없이 집에 들어왔지만 싸운 상대자가 저희 집까지 쫓아왔고 경찰이 찾아왔고.. 그게 새벽 6시.
그리고 그 날은 저희 둘째 돌날이었어요.
시댁 식구들 모두 모여 가족사진을 찍고 저녁엔 직계 가족들만 모여 돌잔치를 하기로 했던 날이었어요.
경찰서에서 돌아온 남편은 술이 덜 깬 상태였고 저는 왜 술을 마셨냐 화를 냈고,
큰애가 밥을 먹다 장난을 치는 순간에 제가 큰애를 호되게 야단을 쳤고.
그 순간 남편은 우는 큰애는 달래며 제게 말했죠. '넌 엄마 자질도 없어.' 라고..
그 말을 한 순간, 제 모든게 무너졌어요. 남편이 술을 마신 것도 경찰이 집까지 온 것도 다 희미해 지고.
저 본인이.. 엄마로서 살아온 저 본인이 그냥 다 무너지는 느낌이었어요.
그 순간이 지나고 머리 끝까지 치솟았던 화가 가라앉고 아무 생각도 나지 않더군요.
남편의 그런 상황을 알게된 큰 시누이가 집까지 오셨어요.
시부모님까지 모두 모시고 가족사진을 찍는게 가장 큰 관건이었는데
남편이 그렇게 술을 마시고 정신이 없고 경찰서에 다녀왔고 사진이고 돌잔치고 다 안가겠다 - 하니..
늘 시댁 뒤치닥거리를 맡는 저희 불쌍한 시누님이 달려오신거죠. 남편을 혼내고 저를 달래고..
어찌어찌 저녁 무렵엔 남편도 정신이 들었기에 사진도 찍었고 돌잔치도 치뤘어요.
그 주말이 지나고 시누님이 남편에게 그랬다네요.
올케보라고, 그렇게 속이 심난하고 힘들어도 어른들 앞이라 내색도 못하고 웃으면서 일 잘 치룬거 보라고..
남편도 그랬어요. 그 주말동안 자기가 느낀게 많은데 그 중에서도 저한테 많이 배웠다고..
남편은 그렇게 제가 화가 풀렸다고 생각한 모양이에요.
보통은 그런 식으로 남편이 사과를 하고 제가 오랜 시간 끌지않고 그냥 다짐받고 풀고.. 그랬어요.
그런데 이번엔 제 마음이 도저히 그렇게 안되요. 저도 제 마음이 이러는게 너무 힘든데 어쩔 줄을 모르겠어요.
남편은 그 주말이 그렇게 지나가고 별 일 없었는 듯이 지내는데
제 머리는 여전히 그 새벽에 취해 정신 못차리던 남편의 모습, 제게 엄마 자질이 없다며 외치던 그 목소리.
그리고 드러누워 정신없이 코를 골며 술에 취해 잠에 취해 있던 모습.. 모두 다 잊히지 않아요.
남편이 집에 있는 몇 시간 동안 한시간에도 몇번씩 미친듯이 고래고래 소리지르며 화풀이를 하고 싶은지 몰라요.
하지만 애들이 보고 있어서 큰애가 안쓰러워서 그냥 있어도 없는 듯이 그렇게 지낸게 벌써 한달 되어갑니다.
제가 그냥 마음을 풀고 한번 더 잊으면 그만일테지만.
다음에 또 언제가 분명히 이런 일이 있을거야.. 그땐 또 무슨 행동과 말로 서로를 힘들게 할까..
그게 두렵고 힘들어서 제 마음도 몸도 아무런 방법을 못 찾겠어요.
저도 이렇게까지 오래 님편과 말 한마디 하지 않고 눈 한번 마주치지 않고 지내게 될 줄은 몰랐지요.
하루 이틀 일주일 그렇게 지내다보니 이젠 이게 더 익숙해졌나 싶기도 하구요.
남편과 제가 서로 그냥 포기한 채로 관심 없는 채로 지내다 보니
남편이 거실에 드러누워 티비를 켠 채로 잠든걸 봐도. 아이에게 쓸데없이 화를 내는걸 봐도.
사소하게는 화장실에서 일 보고 손을 안씻고 나와도. 제가 뭐라 참견하지 않아도 되니 참 편하구나.. 그런 생각도 들어요.
남편이 변했으면 좋겠습니다. 하지만 남편도 제가 변하기를 원하고 있겠죠.
남편이 뭐라도 제게 대안을 제시해 줬으면 좋겠어요. 역시 남편도 제가 뭔가 액션을 취해주길 기다리는 지도 모르죠.
한달 전의 그 사건 이후, 공교롭게도 남편 학원에 일이 연달아 몇개 터졌어요.
싸움이 난 그 일도 깨끗이 처리된게 아니라 검찰로 넘어갔답니다.
남편은 제게 한마디 언급도 하지 않아요. 남편이 흘리고 간 몇몇 메모지를 보고 제가 알게 된거에요.
그렇기에 남편을 보는 제 마음은 분노도 어느 정도 있고, 안쓰러움도 있고, 원망도 좀 섞였고..
평소같으면 미주알 고주알 제 귀가 시끄러울 정도로 아주 사소한 것 까지 제게 다 말하면서 의견을 묻는 사람이라서.
강사채용이라거나 법원에 오가는 일이나 변호사를 만난 일 같은거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하고
당신도 참 힘든 시간 보내고 있구나.. 생각하면 마음이 울컥해져요.
그럼에도.. 저는 이 모든 상황을 다시 재자리로 놓을.. 의지가 없어요.
어떻게든 되겠지. 정말 일이 커지면 뭐라도 변화가 있겠지. . 그렇게 회피하고만 싶어요.
한편으론 이렇게 한달도 살아왔는데 앞으로 몇년도 금세 이렇게 지나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구요.
애들.. 특히.. 눈치 빤한 큰애 생각하면 미치도록 미안하지만 어떤게 더 나을지도 모르겠어요.
어제는 남편이 거의 종일 집에 있는데 어찌나 답답하던지요.. 머리까지 조여오는 것 같았어요.
결혼 20년차 이상인 분들께 제 하소연 좀 들어주십사 한 이유는요..
이 모든게 그냥 지나가는 일인지요.. 이렇게 제가 그냥 흐르는대로 있어도 되는건지요..
이 순간들도 지나고 나면 그저 별거 아니었던 과거가 되어 버리는건지요..
이제 네살, 두살 아이들이 스무살 정도가 될 먼 훗날에 저는 어떻게 되어 있을까요.. 저희 애들은 어떨까요..
누구라도 붙잡고 아무라도 내 속 좀 드러내서 나도 좀 잘 보이게 해 줬으면 좋겠어요.
그냥 지친다..는 생각만 들 뿐. 아무 일에도 아무런 의지가 생기지 않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