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관위 "투표관리 미숙…훼손가능성 없다"
서울 강남을의 국회의원 총선 투표함을 둘러싼 의혹이 법원에서 가려지게 됐다. 서울중앙지법 민사57단독 표극창 판사는 17일 강남을 선관위가 보관하고 있던 '하자 투표함' 21개를 법원으로 옮겼다. 앞서 민주통합당은 16일 강남을 선관위를 상대로 이들 투표함에 대한 증거보전 신청을 냈다.
지난 11일 총선 개표과정에서 불거진 강남을 투표함 문제는 애초 정동영 의원이 패배를 인정함으로써 사그라지는 듯 했다. 하지만, 그의 지지자와 일부 시민단체 등은 선거 결과가 확정된 뒤에도 부정선거를 배제할 수 없다는 의혹을 줄곧 제기해왔다. 서울시장 보궐선거 당시 디도스 공격과 투표장소 변경 등으로 인한 선관위의 신뢰 추락과 맞물리면서 이러한 의혹은 증폭돼 왔다. 이에 민주당도 당 차원의 부정선거진상조사특위(위원장 우윤근)를 만들어 대응에 나섰다. 박용진 민주당 대변인은 17일 브리핑에서 "민주주의의 기본인 선거관리가 주먹구구식으로 진행된 데 대해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 없다"며 "이번 일이 단순 실수이기를 바라지만 민주당은 선거 부정의 가능성에 대해서도 긴장을 늦추지 않고 법적 대응과 책임 추궁을 할 것"이라고 밝혔다.
최종 판단은 법원에서 나오겠지만, 우선 지금까지 나온 사실과 의혹, 해명 등을 정리해본다.
투표함 하자 내용 뭔가
강남을 투표함 55개 가운데 문제가 발견된 21개는 세가지 유형으로 크게 나눌 수 있다.
첫째, 봉인 테이프와 관련한 사안이다. 선관위의 자체 메뉴얼에는 투표함의 바닥과 모서리 등 접합면을 종이 테이프로 붙인 뒤 투표소 관리관의 도장을 찍도록 하고 있다. 그런데, 수서 4 투표함 등 2개는 바닥면에 봉인 테이프가 없었다. 또, 일원2-4 투표함과 재외국민, 우편투표함 등 모두 12개는 바닥면에 테이프가 처리됐지만, 그 위에 도장이 안 찍혀 있었다.
둘째 유형은 투표용지를 넣은 투입구 구멍 처리가 안 된 것이다. 선관위 메뉴얼에 따르면 투표가 끝나면 이 투입구 역시 테이프로 막고 도장을 찍어야 한다. 그러나 세곡 1, 일원 2-5 투표함 등 4개는 이 구멍이 안 막혀 있다.
세째 유형은 자물쇠다. 투입구를 막은 뒤 투표함에 달려 있는 뚜껑을 덮고 특수 자물쇠를 채운다. 이 자물쇠는 찰칵 닫히면 열 수가 없기에 개표시에 고리를 끊어서 해제하도록 돼 있다. 자물쇠를 채운 다음에 테이프로 봉하고 도장을 찍어야 한다. 그런데, 개표를 위해 봉인 테이프를 뗐을 때 대치 2-3 투표함은 자물쇠가 안 잠겨 있었으며, 대치 4-3 투표함은 자물쇠가 잠겨있긴 했는데 위치가 비뚤어져 있었다. 위치만 어색할 뿐 잠그는 기능에는 문제가 없었다. 또, 개포 1-5 투표함은 자물쇠에 봉인테이프가 없었다.
이들 21개 투표함은 각각 하나씩의 문제가 있었을 뿐 두가지 이상 중첩되지는 않았다.
"심각한 훼손" 대 "단순 실수"
위의 내용 가운데 바닥 봉인 건은 비교적 가벼운 사안이라는 게 선관위 등 관련 종사자들의 설명이며, 정동영 의원실쪽에서도 어느 정도 동의하고 있다. 메뉴얼에는 있지만, 바닥 테이프 봉인이 안 됐다고 해서 투표함 관리의 본질적인 부분이 위협받는 정도는 아니기 때문이다.
민주당이나 정 의원 지지자들이 중요하다고 보는 부분은 투입구 봉인과 자물쇠 부분이다. 민주당의 증거보전신청 법률대리인인 장철우 변호사는 이날 "투입구 봉인이 안 된 것이나 자물쇠가 제대로 안 잠긴 것 등은 심각한 수준의 훼손"이라며 "이런 상태라고 한다면 선거 부정이 이뤄질 수도 있다는 것을 방증한다"고 말했다. 일부에서는 이런 상태라면 불법 투표용지를 넣거나 뺄 수도 있지 않겠느냐고 의문을 제기한다.
이에 대해 서울시 선관위는 지나친 의혹제기라는 입장이다. 시 선관위 관계자는 "투입구가 막히지 않은 투표함의 경우 뚜껑이 확실히 닫히고 봉인까지 완벽하게 됐다. 자물쇠가 안 잠긴 투표함은 자물쇠를 씌운 테이프 봉인은 규정대로 됐다. 자물쇠 건 위치가 이상한 투표함 역시 투껑 밀봉 기능은 작동했다"며 "이런 것으로 볼 때 투표함을 누군가 사후에 훼손할 가능성은 전혀 없다"고 말했다. 그는 "투표함에 여러 하자가 있는 것은투표소 관리 업무를 맡은 구청과 동사무소 직원들이 자신의 업무가 아니다 보니 메뉴얼을 제대로 숙지하지 못해서 일어난 단순 실수"라고 말했다.
투표함 이송 때 참관인 왜 없었나
민주당과 정 의원 지지자들은 투표 참관인들이 투표함을 이송하는 차량에 타지 않은 점에 대해서도 의혹의 눈을 보내고 있다. 특히 투표소 관리관들이 참관인들에게 "집에 가도 좋다"고 말한 것을 문제삼고 있다. 사실상 귀가를 종용했고, 그 결과 투표함 이송 과정이 정당의 감독 사각지대에 놓여있었다는 것이다. 민주당 선거부정진상조사특위의 한 관계자는 "한 지역에 21개의 투표함에 문제가 있고, 이송 과정에도 참관인들이 없었다면 막말로 그 동안에 무슨 일이 일어나도 모르는 것 아니냐"고 말했다.
선관위는 전반적인 선거관리 시스템이 허술하지 않다고 반박하고 있다. 서울시 선관위 관계자는 "투표 참관인이 이송 차량에 타는 것은 법적인 의무사항이 아니라 참관인의 자유의사에 달린 것"이며 "참관인이 차에 동승하지 않더라도 개표장까지 투표소 관리관과 사무원, 경찰관, 운전기사 등 4명이 의무적으로 함께 타고 가기 때문에 선거 부정이 개입될 여지가 없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투표소 관리관이 정당 참관인한테 무엇이라고 했는지는 특별감사 결과 나오겠지만, 아마도 그동안 투표함 이송 과정 등에 별 문제가 없었기 때문에 투표소 관리직원이나 정당 참관인들도 동행할 필요를 못 느꼈기 때문이 아니겠느냐"고 덧붙였다.
선거 부정 가능한가
21개 투표함에 하자들이 있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정도의 문제다. 폐쇄된 투표함이 훼손된 흔적이 있거나 아니면 투표함 내부로 접근이 용이하다면 이는 심각한 상태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현재 제기된 하자들은 그 정도까지는 아닌 것으로 보인다. 즉, 투표함의 뚜껑을 닫은 뒤에 투표함 내외부가 소통됐을 만한 틈새는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현장에서 문제의 투표함이 발견 뒤에 개표가 진행된 것도 이런 이유에서였다. 정동영 의원실의 한 관계자는 "선거부정이 있었다고 단정하는 것이 아니라 한치의 착오가 없어야 할 투표관리에 실수가 있었다는 것 자체가 문제이며, 앞으로 유사한 사건이나 의혹 발생을 막기 위해서라도 그런 부분에 대한 책임 추궁을 하고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는 차원에서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선거부정의 보다 과감한 수법인 투표함 바꿔치기는 어떨까? 참관인이 없었기에 이송 과정이 허술하지 않았느냐는 문제제기는 투표함 바꿔치기를 상상해볼 수는 있다. 과거 독재시절에는 흔했던 부정의 유형이기도 하다. 하지만, 투표소 관리를 한 일반 공무원 2명과 경찰관이 함께 개표장까지 투표함 이송을 책임지기 때문에 이들이 작당을 하지 않는 한 이송과정에서의 부정이 발생할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다고 할 수 있다. 운전기사까지 4명이 각자의 정치적 지향성을 각자 모를 가능성이 높다. 그럴 뿐 아니라 일반 공무원들이 그런 엄청난 부정행위에 가담할 이유나 유인 요인이 일반적으로 있다고 보기 어렵다.
서울시 노원구 의혹은 "착각 탓"
일부 시민단체는 최근 서울시 노원구의 경우 투표자와 총개표수가 3천여표나 차이가 난다며 부정선거 가능성을 제기했다. 이에 대해 서울시 노원구선거관리위원회는 17일 보도자료를 통해 "노원구의 비례대표선거인수가 47만4364명이고 지역구선거인수가 47만4111명인데 비례대표선거인수를 총개표수로, 지역구선거인수를 총투표자수로 오인한 것으로 보인다"며 "해당 시민단체에서도 이와 같은 사실관계를 인정했다"고 밝혔다.
노원구 선관위는 "비례대표선거인수와 지역구선거인수가 253명의 차이가 나는 것은 외국 영주권자인 재외국민과 국내거소신고인명부에 3개월 이상 계속해 올라있지 아니한 국내거소신고인은 지역구 선거권이 없고 비례대표 선거권만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김종철 선임기자 phillki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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