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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게시판

드러낼 수 없는 고민을 풀어보는 속풀이방

..선배

패랭이꽃 조회수 : 1,206
작성일 : 2012-04-12 23:46:33
형...
우리가 학교 다녔을 땐 여학생들도 무조건 남선배에게 형이라고 부르곤 했었지.
병완이 형...
이렇게 불러 본다.
형이 백혈병 투병 속에 하늘나라로 간지 어언 이십 년이 넘었네.
미안해 까마득히 잊고 있었어. 나 살기 바빠서.

오늘 아침에 가게로 가는 전철에서 형 생각이 유독 오버랩 되는거야.
전철에는 많은 서민들이 있고 가끔 걸인들이 지나면서 구걸도 하고 그러네.
그 서민들은 한국인이 아니라 얼굴 색깔이 다른 이방인이었지만
그 얼굴들에 나타난 표정은 한국 출근 길 서민들과 다르지 않았어.
꼭 제일 오래되었고 역사가 허름한 지하철 1호선을  주로 타는 서민들의 모습과 똑 같았어.
팔 없는 걸인, 껌파는 할머니에게 마음 아파하며 가진 돈을 쪼개 그들을 돕는 모습도 똑 같네.
당시 중병에 걸려서 생사가 오락가락 했던 선배를 위해 우린 가두 모금을 나갔었어.
나도 팀을 짜서 가두 모금을 나갔어. 지금은 고시에 패스해 한 자리하고 있는
어떤 선배는 창피하다고 뒤로 숨기도 했지만
나와 다른 후배들은 선배에 대한 끓는 마음으로 열심히 모금을 했어.
누가 우리를 어떻게 볼까는 생각도 안 났어.
1호선, 2호선, 3호선, 4호선...모두 다녔어.
4호선은 주공 임대 아파트 사는 아주머니들이 맘 아파하며 장바구니에서
천원, 이천원을 모금함에 집어 넣었지. 착하고 인정 많았던 상계동, 중계동 아주머님들 고마워요.
그때는 그리 될 줄 모르고 그 분들이 엄청 나이들었다고 생각했었네. 그런데 지금 내가 그 나이.
우리에게 가장 큰 인정을 베풀었던 곳은 지하철 1호선이었어.
깔끔하고 세련된 3호선과 극명히 대비되는 덥고 찌고 오래되고 더러웠던 지하철 역사,
하지만 오래된 전동차 속에 탄 넥타이 맨 샐러리맨들, 아저씨들, 아줌마들, 꼬마들이
맘 아파하며 넣은 돈으로 모금함은 금방 채워졌어.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모았던 헌혈증, 바램, 가족들의 애끓는 기원도 아랑곳없이
6개월 후 선배는 하늘나라로 영원한 여행을 떠났지.

형은 박종철, 이한열 열사와 함께 가두 시위를 나갔었지.
단과대 학생회장이었던 선배는 늘 선두에 섰고.
시위를 하고 토론을 하다보면 새벽 별이 밝아오고
밥도 제대로 챙겨먹지 못하고 술로 때우다 잠들면서 살았던 선배.
그게 형을 야금 야금 갉아 먹었던 거야. 형도 민주화를 위한 한 떨기 꽃처럼 서서히 스러져 갔던 거지.
비록 열사라는 칭호는 없었지만 가장 젊고 아름다웠던 시절 그렇게 청춘을 불태우고 떠났지.

가끔 나는 지금도 꿈을 꾼다. 태평양을 건너 다시 교정에 선 내게
지금은 키가 엄청 커진 교정의 꽃나무들이 입을 벌리고 그 때의 산 역사들을 내게 말해주는 것을.
그들도 매운 최루탄 가스를 견뎌야 했고 해마다 5월이 오면 꽃을 피운 채
가두행진과 함께 전경과의 대치도 생생히 목격해야 했으며
누구는 이런 와중에 그 나무 그늘서 중간고사 시험공부하고 누구는 꽃잎을 따며 연인과 데이트하고
누구는 늦잠을 자다 늦게 오는 바람에 재수없이 시위대로 오인받아 경찰로 끌려가고.

군사독재정권을 몰아내고 이 땅에 피웠던 민주주의는 쉽게 오지 않았어.
많은 청춘들이 피를 흘렸고 선배들이 옥사했고 무고히 재판정의 이슬로 사라졌지.
많은 노동자들이 언론의 조명도 제대로 못 받은 채 산업현장에서 저임금, 고강도 노동으로 희생됐었지.
민주주의는 쉽게 오지 않았어. 꼭 누군가의 희생과 피를 요구했어.
그만큼 기득권자들이 자기 것을 지키고자 하는 욕심과 이기심의 죄가 그만큼 크기 때문이야.
선배들의 피와 헌신으로 우리는 민주주의를 가져왔고 지켜냈어.

아, 하지만 수십년이 지난 2012년 4월 11일, 나는 처참했어.
꼭 87년  전두환 하야에도 불구하고 단일화를 못해 다시 군사정권의 후예
노태우 정부에게 정권을 넘겨준 그 때,
김영삼이 자민련과 민자당과 3당 야합을 했던 소식을 듣던 날.
92 대선 직후 김대중 전 대통령이 낙선하고 정계은퇴를 선언했던 날,
2008년 뉴타운 광풍으로 야당이 죽어가는 소식을 들은 때랑.
2009년 노무현 대통령 서거 소식을 듣던 때랑 기분이 너무 너무 같은 거야.

꼭 거대 악이 천사의 얼굴로 멋지게 포장하고 나타나서
애 쓰는 선한 의지들을 무참히 꺾어 버리는 환영을 보는 것 같아서 말이야.
언론, 돈, 인물을 다 가진 기득권자들과 그들에게 붙어야만 약간의 이득이라도 얻을까 하여
더 큰 대의와는 아랑곳없이 이기심으로 똘똘 뭉친 일부 지방사람들의 무지와 이기심에
가슴이 너무 너무 답답한 거야. 20년 전 끊은 술을 다시 벌컥 벌컥 들이켰어.

난 야당을 탓하지 않아.
그들은 가진게 너무 적어.
싸우기에는 상대당이 가진게 너무 많아.
우중을 속일 수 있는 언론의 교활한 혀,
많은 사람을 끌어 들일 수 있는 권력, 돈이라는 달콤함이 있지.
야당은 충분히 싸웠어. 편안히 싸울 수 있는 보장된 곳을 버리고 모두가 꺼리는 적지로
나가 용감히 싸운 천정배, 정동영, 김부겸, 김영춘, 김경수 후보들을 기억해.
그들에게 박수를 보내. 그리고 끝까지 사퇴하지 않고 싸운 김용민 후보에게도 박수를 보내.
그들은 또 다른 병완이 형이라고 생각되기 때문이야.
진실은 죽은 것 같아도 잡초처럼 쓰러지고 밟혀져도 다시 꿋꿋이 일어선다.
또 악이 아무리 거대해도 선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인해 언젠가는 종말을 고하게 될 것도 믿는다.
형은 떠났지만 우리 가슴에 영원히 살아 있듯이.
IP : 181.166.xxx.245
7 개의 댓글이 있습니다.
  • 1. 눈물이...
    '12.4.13 12:32 AM (116.33.xxx.149)

    글쓴 분의 마음이 제 마음입니다.
    저도 그 시대를 함께 살아온 사람으로 모든 것이 눈앞에 그려집니다.
    저희 집 냉장고엔 노통님 사진 두 장이 부착되어 있어요.
    그 사진 속의 그분을 보면서 또 눈물짓습니다.
    우리가 지켜내야 했었는데, 그렇게 외롭게 떠나 보낸 그분을 오늘밤에도 눈물흘리며 그리워합니다.

    2009년 5월 이후 복수하겠노라고 마음을 다졌었는데, 이번 선거는 너무 했지요.
    부디 먼저 가신 님들이여, 우리의 소원을 이룰 수 있도록 힘을 주세요.

  • 2. 아봉
    '12.4.13 12:35 AM (58.230.xxx.98)

    아 갑작이 쏟아지는 이 눈물....

    ㅠㅠㅠㅠㅠㅠㅠㅠ

  • 3. 마음이
    '12.4.13 12:36 AM (183.100.xxx.68)

    마음이... 아프네요
    신이 있다면 우리 나라가 왜 이렇게 가고있는지, 어디로 가는지
    물어보고싶습니다....
    어제 오늘 계속 그 생각이 들었어요
    원글님 글도... 그 의문을 깊게 하네요...
    그 선배님의 명복을 빕니다. 좋은 글 감사해요....

  • 4. 아봉
    '12.4.13 12:40 AM (58.230.xxx.98)

    저는 이번 선거때 "박정희 대통령님의 통치철학을 계승하는" 이렇게 써놓은 당 포스터를 보고 정말 너무 분노했어요. "먹고살게 해줬으니 그래도 고맙다"하는 시골 어른들은 그래도 이해하고 넘어가겠는데 "통치철학"이라니요... 그 사람 정권때 가족들 먹어살려야 하는 책임을 안고 명문대 힘들게 가서 민주화 운동했다가 유신때 끌려가고 인생 짝나고 그런 사람들 얼마나 많은데요...전두환때는 어떻구요...정말 자기네들은 그냥 앉아서 지새끼와 잘먹고 잘사는 것만 매달려 인생 살다가 민주화의 이득만 취하고 지금도 그때 희생한 사람들의 목숨과 인생에 침뱉는 사람들...너무 가슴아파요....

  • 5. 그래서..
    '12.4.13 12:46 AM (116.33.xxx.149)

    이번에 이종걸 의원, 인재근씨가 당선되어 좋았습니다.
    민족을 위해 모든 걸 바친 집안의 후손과 김근태 님의 훌륭한 동지인 아내가 당선되어 기뻤습니다.
    훌륭한 사람들을 기억하고 합당한 대우를 해 주는 사회가 되어야 합니다.

  • 6. phua
    '12.4.13 8:43 AM (203.226.xxx.117)

    눈물.................
    왜 이렇게 상식이 통하는 세상 되기가
    어려운지.

  • 7. 지나
    '12.4.13 8:47 AM (211.196.xxx.192)

    ㅠ_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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