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서른여섯살.. 77년생으로, 네살 두살 딸 둘을 키우는 전업주부입니다.
첫 아이 출산 전까지 7년 정도 학생들과 학부형들을 상대하는 일을 했었죠.
이게 현재의 제 모습을 알려줄 정보의 전부에요.
최근에 큰 아이 어린이집 친구 엄마와 두어번 만날 일이 있었는데,
그 분은 늦둥이를 낳으셔서 저보다 대여섯살은 더 나이가 많은 언니에요.
그 언니가 저를 처음 봤을 때도, 두번째 봤을 때도, 저를 보고
인상이 너무 좋다, 밝고 긍정적이고 명랑해서 같이 얘기하니 좋다, 참 선한 사람 같다.. 이렇게 얘기하시네요.
저는 예의 그 .. 선한 웃음으로 그 말들을 넘기며 아니에요 아니에요 두 손을 내저었지요.
이런 말 듣는거 처음 아니에요.
제 기억에 그런 평을 들은건 중학교 1학년 때, 제 친구의 친구가 저를 보고
참 착하게 생겼다.. 친구하고 싶다.. 라고 했다는 말을 건네들은게 처음 이었죠.
그 후로 저는 쭉 그런 인상과 성격을 가진 사람으로 살고 있어요.
부모님과 함께 살 때.. 아니, 남편과 연애하고 결혼하고 아이를 낳기 전까지도
저는 제가 그런 사람인 줄 알았어요. 밝고 명랑하고 긍정적이고 선하고 차분한 그런 사람이요.
그런데 큰애를 낳고 키우고, 사이 사이 남편과 크고 작은 언쟁을 치루며, 둘째를 또 낳고 키우고..
그러다보니 어느새 결혼 7년차, 큰애가 37개월, 작은애가 11개월.. 어느 순간부터인가
제 속에는 또 다른 제가 살고 있습니다. 그게 또 다른 제 모습인지, 아니면 제 원모습인지 모르게요.
그래서 누군가 저에게 인상좋다, 참 밝은 사람이다.. 하는 말을 하면 겉으론 웃지만
속으론 생각해요. 아니..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에요.. 나도 내가 누군지 모르겠어요.. 그래요.
아이를 키운다는 것은, 정말 저 깊은 곳에 숨어있는 제 본성을 끌어내는 일이 아닌가 싶어요.
저희 엄마가 그러셨던 것 같아요. 학교 선생님이셨는데, 참 훌륭한 선생님이셨어요.
잘 가르치시고 학교 일 잘하고 학생들도 잘 따르고 학부형들도 줄을 서서 좋아하고 그러셨죠.
하지만 집에서의 엄마는 늘 바쁘고 냉정하고 피곤에 지쳐있고 한숨을 자주 쉬는 그런 분이셨어요.
거슬러올라가보면 외할머니도 그러셨던 것 같아요. 젊어서 과부가 되셔서 7남매 대학 졸업시키고 결혼시키느라
밖에선 대장부처럼 사셨지만 집에선 엄격하고 무뚝뚝하고 무섭기도 한.. 그런 분이셨던 것 같아요.
저 역시도 그런 성품을 타고난게 아닐까 싶게 제가 싫어하고 무서워했던
우리 엄마의, 외할머니의, 그 모습들이 제게서 밖으로 자꾸 드러나요.
아직은 아이들이 어려서 다른 사람들이 저를 보고 좋게 평해줄 때 그저 듣고만 있지만
이 아이들이 자라고 온전히 자기 생각을 품게 되면 그 말을 들을 때 옆에서 저처럼 생각하겠죠.
- 아니에요, 우리 엄마는 그렇게 밝고 긍정적이고 선한 사람이 아니에요.
매섭고 냉정하고 자기 일이 먼저인 그런 사람이에요 - 이렇게요.
대를 이어 내려오는 이 본성을 제가 끊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제 딸들도 저를 보고 자라서 훗날 엄마가 되면 저를 보며 싫어했던 그대로의
말과 행동들을 답습할지도 모른다는 생각, 그러면서 저 아이들도 괴로울거라는 생각.. 그런 생각해요.
그래서 내 모습을 바꿔야 한다, 내 깊은 본성을 송두리째 드러내야 한다, 다짐하고 또 다짐하지만..
이런 저런 사정으로 오로지 저 혼자서 애 둘을 돌봐야 하는 주말 아침이면
여지없이 또 큰애는 밥먹다가 혼나고, 설거지 하는 제 다리에 매달려 작은애는 울고,
저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빠릿빠릿 움직이며 일을 처리하지도 못하면서
이런 제 자신이 못마땅하고 울고 매달리는 아이들을 이해하면서도 바로 해결해 주지도 못하고
결국엔 참다 참다 폭발하고 소리지르고, 오늘 아침엔 기어이 큰애 엉덩이도 두어번 세게 때렸어요.
큰애 키우며 육아 스트레스 받을 땐, 그 이유를 남편에게 돌렸어요.
술을 좋아하고 사람을 좋아해서 집에 있는 시간도 별로 없고 집에 있어봤자 잠만 자고,
이게 다 당신이 나를 안도와주니 그런거라며 닥달을 하고, 울고 불고, 그런 몇번의 과정을 거쳐서
결국 남편은 술을 끊었고 이전보다 사업도 더 열심히 해서 가계도 좀 나아졌고,
집에 있는 동안은 최선을 다해서 아이들을 봐주고, 집안 일을 도와주고 그렇게 됐지요.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 모습이 나아지지 않는거에요.
그래서 깨달았지요. 아, 문제는 나야. 문제는 나였어.
아이들과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고, 아이들에게 우주 전부의 모습을 나를 통해 투영시켜줘야하는,
이 엄마가, 이 엄마라는 사람이 이 집에선 가장 큰 문제야.. 그런 생각이 끊임없이 드네요.
주중에 큰애가 어린이집에 다니느라 피곤했을거에요.
주말이니 아침에 많이 서두르지 않아도 되고 엄마랑 시간도 더 보낼 수 있고.. 좋았을테죠.
그러면 저는 좀 더 느긋하게, 밥을 좀 안먹으면 어떠니, 좀 어지르면 어떠니, 동생 좀 울리면 어떠니..하면서
넉넉하고 여유롭게 대해주면 다 풀릴 일인데 평소와 똑같은 잣대로
밥 먹을 때 장난치지 마라, 싸인펜 뚜껑 제대로 덮어라, 동생 밀지 마라.. 하면서 화를 냈다가
이도 저도 못하고 그냥 큰애는 큰애대로 dvd 앞에 앉혀놓고 작은애는 재우고..
이렇게 무기력하게 컴퓨터 앞에나 앉아있네요.
두서없지요.
어딘가에, 누군가에게든, 이렇게 다 말해보고 싶었어요.
주말에도 남편은 바쁘고 친구들은 다 멀리있고 친정 부모님은 편찮으시고..
아무라도 읽어주고 들어줄 이 익명게시판밖에 기댈데가 없네요.
저는.. 누구일까요.
아이들에게 막 대하는 그 모습이 과연 제 모습일까요,
남들이 봐 주는, 그런 선량하고 넉넉한 인상의.. 그 낯선 사람이 제 모습인걸까요.
날씨가.. 눈물겹게 화창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