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오늘도 약속대로 어김없이 돌아온 7세애엄마입니다.*^^*
많은 분들이 읽어주시고 댓글도 달아주시고, 정말 너무너무 감사합니다.
또 제 글이 불러올 수도 있는 부작용에 대해 진심어린 근심과 우려를 보여주신 분들 또한 감사드립니다.
정말 맞는 말씀입니다.
백인백색이라 하였던가요...모든 사람이 가진 기질과, 재능과 환경이 다른데 어찌 저 하나의 경우를 예로 들어,
이것이 맞는 길이다, 라고 감히 얘기하겠습니까.
세상에 독이 되는 칭찬, 해가 되는 격려도 얼마나 많습니까.
어제 이런 저런 글들을 읽다 보니 제가 많은 생각이 들더군요.
그래서 오늘은 그놈의 낯간지러운 찌라시 제목을 떼어버리고
다른 이야기를 좀 해볼까하고요.
이전의 두 글이 많은 분들이 읽어주시기를, 공감해주시기를, 누군가에게 도움을 드렸으면 하는 마음으로 쓴 글이라면,
이 글은...그냥 제 마음이 원해서 쓰는 글입니다.
제가 첫 번째 글에서 간단하게 밝혔듯이
전 참 우수한 형제들 사이에서 자란, 뭐든지 느리고 몸도 약한 아이였습니다.
근데, 이 몸이 약하다는 게, 단순히 감기에 잘 걸린다거나, 코피가 잘 나는 그런 것 이 아니었습니다.
아주 어릴 때부터 전 귀가 잘 안들렸습니다.
제 어린 시절의 기억 속에 늘 이비인후과 병원이 있었으니 언제부터 시작된 병인지도, 정확한 병명도 모릅니다.
제가 기억하는 의사선생님의 설명은, 고막 앞에 있는 어떤 부분이 자꾸 부어올라 그게 소리가 들어가는 길을 막게 되면
점점 귀가 안 들리게 되는 것이라는 거였죠. 그럼 병원에 가서 치료를 해 부은 것을 가라앉히고, 그럼 또 얼마동안은 잘 들리게 되고...이런 과정의 반복이었습니다.
어릴 때부터 가지고 있던 병이라고, 계속 반복되는 치료라고
절대 익숙하거나 두려움이 덜해지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초등학교 2,3학년 때쯤부터 선명하게 기억이 나는군요. 귀가 쿡쿡 쑤시고 욱신거리기 시작하면 그게 신호였습니다.
그럼 그때부터 모든 게 공포죠. 학교에서 친구들이 하는 말을 못 알아듣지 않을까, 선생님이 불렀는데 대답을 못하면 어쩌나,
아이들이 알게되면 놀리지나 않을까...
학교에서 신경을 바짝바짝 태우고 녹초가 되어 집에 돌아오면
그때부턴 모든 소리가 다 듣기도 싫었습니다. 방문을 꼭 닫고 방안에 앉아만 있었죠.
그럼 저희 엄마도 눈치를 채시는 거죠. 다시 병원에 가야되겠구나....하고요.
엄마가 병원을 예약하는 순간부터 엄마와의 전쟁이 시작되었습니다.
그 아픈 치료를 또 하러 가자니요...
잘 들리는 척 연기도 해보고, 일주일 정도는 더 들을 수 있다고 애원도 해보고,
엄마가 이렇게 낳아놓고는 왜 아픈 치료는 나더러 받으라고 하냐고, 다 엄마 때문이라고 울고불고...
무슨 투정은 안 부려봤겠습니까....
그래도 엄마는 한번도, 정말 한번도 제 앞에서 화를 내지도, 울지도 않으셨습니다.
하지만 제가 한 번씩 저 난리를 치고 나면, 엄마는 냉장고에서 얼음을 한 사발 꺼내와서는 식탁에 앉아
그걸 오도독 오도독 씹어드셨지요. 아직도 엄마의 그 모습이... 정말 잊혀지지가 않습니다.
그리고 엄마 손에 끌려 병원에 가면, 아...그 의자...
코와 귀에 호스를 꽂아놓고, 움직이면 위험하니까, 안전벨트 같은 걸로 몸을 꽉 묶어놓습니다.
그리고는 의사선생님이 손에 쥐고있는 펌프를 누를 때 저도 정확하게 침을 꿀꺽 삼켜야 하는 겁니다.
코와 귀에 약이 들어가는 고통의 순간이지요. 그런데 그 고통이 무섭다고 침을 안 삼키면, 귀안에 상처를 입어
정말 큰일날 수 있다고 늘 의사선생님은 강조하셨어요. 그 때 느꼈던 공포란...
전 지금도 비행기 의자에 앉으면 숨쉬기가 힘들더군요.
그렇게 치료를 마치고 나면, 뭐, 어린 저야 그냥 좋기만 했습니다.
귀도 잘 들려졌겠다, 한 동안은 병원 안와도 되겠다...그럼 엄마는 저를 데리고 꼭 병원 매점으로 가시곤 했습니다.
평소에는 초코렛, 사탕 등에 아주 엄격한 엄마셨는데, 그 날만은 제 마음껏 고르게 해주셨지요.
너무 많이 고른다 싶어 살짝 엄마 눈치를 보면서 “엄마, 나 진짜 이거 다 먹어도 되?” 그러면
“그럼, 의사선생님이 오늘 침 많이 삼키는게 좋다셨잖아, 그럴려면 이런 거 먹는거야...”라고만 대답하셨어요.
그때의 전 ‘뭐, 의사선생님이 먹으라니까, 엄마도 별수 없구나, 헤헤’ 이 정도의 생각만 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제가 나이를 먹어 아이를 낳고 키워보니...글쎄요..그 때 엄마의 마음이 과연 그게 다 였을까요...
다른 두 형제에게는 좀 엄격하다 못해 냉정하신 엄마였는데, 저에게는 정말 과하다싶은 애정을 보여주셨습니다.
절 무시하는 사람은 누구도, 제 형제들이건, 친척들이건, 심지어 저희 아빠조차도 용납하지 않으셨습니다.
초1인지 2인지, 같은 아파트의 한 남자아이가 하교길에 절 따라오면서 쟨 한글도 잘 못읽고 말도 바보같이 한다고
많이 놀렸었나봅니다. 전 집에 와서 울면서 엄마한테 일렀겠지요.
제 형제들이 어디 가서 얻어맞고 와도 “그건 너도 잘못한거야”라고 말해 형제들을 서운하게 했던 저희 엄마가,
정말 온 아파트를 발칵 뒤집으셨답니다. 그 집 엄마, 그 애...저한테 사과할 때까지요...
사실 너무 어릴 때 일이라 전 구체적으로 기억나지 않습니다만, 제가 중1이 되어 그 아파트 단지를 떠날 때까지도 그 사건이
전설로 남아 끊임없이 옆집 아주머니들이 이야기해주시는 바람에 아직도 기억하고 있답니다.
그 당시만 해도 그 정도 사건에 엄마가 저렇게까지 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었던 가 봅니다.
이런 저였으니, 공부를 잘하냐 못하냐..이런 건 문제거리도 되지 않았지요.
6학년 때, 신체적 사춘기를 지나면서 제 귀는 많이 호전이 되었지요. 중학교, 고등학교 때는 감기에 걸리면 귀가 아프고 잘 안들리는 정도? 지금은 오른쪽 귀의 청력이 많이 약한 것만 빼면 뭐, 멀쩡합니다.
그래도 여전히 저는 엄마의 아픈 손가락인 것 같습니다...
어찌보면 저희 고등학교 때 담임 선생님, 불어과외 선생님...
아이들이라면 한번씩 들어보는 흔한 격려, 흔한 칭찬일 수도 있는 것이 저렇게까지 제 마음을 움직인 것도
저의 이런 어린시절 덕분이겠지요. 또 그것이 동기가 되었다지만, 아직 열일곱, 열 여덟, 어리다면 어린 나이에,
매일매일 두통약을 달고살며 저 자신을 그렇게까지 독하게 밀어부칠 수 있게 한 에너지도 어린시절의
저 기억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 면에서 전 저 시절들을 아주 싫어하면 안 되겠지요....
그런데 말입니다, 한 아이의 엄마로서,
저는 정말 제 아이가 저 같은 삶을 살게 되는 게 싫습니다.
덜 노력하는 삶을 살아도 좋으니, 어렸을 때부터 인정받고, 칭찬받고, 저처럼 저런 칭찬들에 목메어 하지 않으면서,
스스로에 대한 자신감으로 공부하고 행복하게 이루어나갔으면 좋겠다는 마음뿐입니다.
하지만 이런 99%의 소망 뒤에, 내 아이도 어린 시절의 나처럼
느리고 뒤처지는 아이일수도 있다는 1%의 마음은 늘 남겨놓으려고 합니다.
만약 그렇다면 그 때 저도 저희 엄마처럼, 저 두 분의 선생님처럼, 제 아이를 끝까지 믿고 보호해주는
그런 엄마로 남을 수 있을까요...
그리고 지금은 마냥 귀엽고 착하기만 한 어린 아들이지만, 언젠가 저도 저 아이 때문에 울게 될 날이 오겠지요.
잘난 자식이건 못난 자식이건 자식이란 부모에게 그런 존재니까요...
그 때 저도 저희 엄마처럼 얼음을 오독오독 씹으면서 이 글을 다시 읽고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긴 글 읽어주신 분들, 감사합니다.
어제 밤에 이글을 써놓고, 올릴까 말까 망설였습니다.
위에서 말했듯이 이건 그냥 제 마음이 원해서 쓴 글이니까요.
그리고 38년 동안 아무에게도, 정말 남편에게도 이야기하지 않은, 저와 엄마와의 아프고 소중한 기억이기도 하구요...
그럼에도 이 글을 올리는 것은 앞에 쓴 두 번의 제 글이 혹시 오만했던 건 아닐까 하는 죄송한 마음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글을 따뜻하게 읽어주시고 받아주신 모든 분들에 대한 제 마음입니다.
앞에 두 번의 글을 읽어주신 , 그리고 오늘 이 글을 읽어주실 모든 분들에게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