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경 데스크] 서울시장과 양촌리 이장
1970년대 후반 일본에서 `마찌쓰쿠리(村作)`라는 사업이 히트했다. 우리 말로는 `마을 만들기`인데 공교롭게도 박원순 서울시장이 표방하는 뉴타운 모델과 이름까지 똑같다.
도야마현은 임야가 94%에 달하고 겨울엔 눈이 4m 이상 쌓이는 그야말로 오지 중 오지다. 공동화를 걱정하던 주민들은 `갓쇼(合掌)`라는 옛 가옥을 개ㆍ보수해 전통 컨셉트를 경쟁력으로 살렸다. 빈집들은 주민공동시설로 활용했다. 이 중 한 채는 극장으로 개조해 유명 연극인들을 초빙하고, `도카연극페스티벌`이라는 대규모 연극제까지 열었다. 30여 년 후 이곳은 해마다 관광객 13만여 명이 찾는 명소로 발돋움했다.
1968년 스코틀랜드 사우스 라나크셔 지역은 핵심 먹거리였던 방직업이 쇠퇴하면서 비슷하게 주민들이 대거 떠났다. 자치구와 주민들은 자발적으로 `뉴라나크 트러스트`라는 문화유산 보존 캠페인을 벌였다. 낡은 방직공장들을 헐지 않고 산업 박물관식으로 개조해 관광자원화했다. 주민들은 `뉴라크 홈`이라는 마을기업까지 만들어 공방 레스토랑 등에 임대했다. 수십 년 전 영국 뉴턴 책포드 지역 주민들은 폐기물과 음식물쓰레기를 처리하기 위해 `책포드 커뮤니티 비료 만들기` 캠페인을 벌였다. 원래 자원 재활용 차원에서 시작했는데 돈이 되자 `프로퍼 잡`이라는 마을기업까지 차렸다. 수익금으로 도서관 학교 카페 등도 만들었다.
박원순 시장이 기회 있을 때마다 얘기하는 걸 보면 만들고 싶은 `커뮤니티(공동체)`가 아마 이런 모습인 듯싶다. 주민 80여 명의 작은 시골마을에서 나서 자란 박 시장이니 돈이나 물질보다 이웃간 정서적 유대감에 우선순위를 둘 법도 하다.
만해 한용운 선생이 거주한 `심우장` 주변의 성북구 한옥마을을 `박원순식 마을 만들기` 시범지구로 조성하겠다는 것도 그림이 그런대로 괜찮아 보인다. 한적한 수도권 외곽 신도시 단독주택엔 상추 텃밭이, 나지막한 빨간 벽돌 빌딩엔 콘크리트 담장보다 장미꽃 울타리가 훨씬 어울릴 것이다.
삭막하기로 치면 전 세계 메트로폴리스 중 첫손가락으로 꼽아도 시원찮을 서울을 이처럼 정겨운 모습으로 바꿔줄 `슈퍼맨`이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하지만 요즘 서울시가 내놓은 소위 `박원순식 부동산정책 시리즈`를 보면 낭만주의를 넘어 왠지 SF소설 같다는 느낌마저 든다. 주민들이 그렇게 반대하는 데도 개포동에 소형주택을 절반 가까이 지으라는 게 소위 `서민정책`이라고 강조한다. 전용 60㎡형이라도 재건축 후 아파트 값은 매매가가 7억원, 전세금은 4억원을 최소한 웃돌 텐데 입주할 서민이 과연 몇이나 될까.
세들어 사는 강남 서민들 보금자리가 걱정된다면 차라리 "내 임기 중엔 돈 버는 꼴 못보겠으니 재건축 안된다"고 털어놓으면 솔직하다는 소리는 들을지 모른다. 한나라당 시장 시절 표에 눈이 멀어 구청장들이 너도 나도 지정해 놓은 뉴타운 지구 중 도저히 가망없는 곳은 하루라도 빨리 해제하는 게 백번 옳을 것이다.
하지만 뉴타운 반대파 중에는 다른 속내 탓에 주민을 선동하는 세력이 있다는 점도 염두에 둬야 한다. 한 재건축 찬성파모임 대표는 "조합마다 늘 반대 측에 서서 떡고물을 챙기려는 비대위가 있기 마련인데 이런 안티세력들이 박 시장 취임 후 서울시나 구청 자문위원에 무더기로 위촉됐다"고 하소연했다.
물론 "시장이 돈 없고 힘 없는 서민들 편에 서려다 보니 때론 반시장적인, 약간의 무리수도 둘 수 있는 것 아니냐"고 항변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부동산 정책에 관한 한 제한속도를 넘어도 한참 넘었다. 취임 후 10여 건 재건축 승인건 중 가락시영 단 한 곳만 통과시킨 것은 누가 봐도 `반(反)강남` 편파 의혹을 제기할 만하다. 텃밭이나 꽃담장이 좋아 보이면 시장이나 구청장 관사부터 고쳐서 솔선수범하면 될 일이다. 처지가 다른 모든 시민들에게 강제할 사안은 아니다. 박 시장이 벤치마크로 삼는 동서양의 `마을 만들기`도 드라마 전원일기에 나오는 양촌리 이장(최불암 분)에게나 딱 어울리는 모델이다. 이런 일 하려고 국민이나 시민들 재산권은 잠시 볼모로 잡아도 된다고 생각하는 건 정치인들의 크나 큰 착각이다. 양촌리 이장과 서울시장은 그릇 크기부터 달라야 함은 물론이다 .
[설진훈 부동산 부장 jhseol@m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