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성과 성찰은 용산에서 시작되었습니다
2009년 6월, 저는 남일당 용산참사현장에 있었습니다.
“여기 정동영 의원이 왔습니다. 일년 반 전 정 의원이 조금만 잘했더라면 이 분들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추모미사에서 문정현 신부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권력을 빼앗겼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참담하게 느꼈습니다. 저로 인해 평범한 서민들이 목숨을 잃었다는 사무치는 자책감에 유족들의 얼굴을 제대로 볼 수도 없었습니다. 비통함과 자괴감으로 6개월 동안 매주 참사 현장을 찾아 유가족들과 함께 했지만 죄책감을 지울 수 없었습니다.
2007년 대선 패배는 제 삶의 가장 처참한 실패였습니다. 저는 일찍이 그렇게 매서운 국민의 회초리를 맞아본 일이 없었습니다. 미국으로 떠나 시간을 갖기도 하고 여러 사람들의 조언도 들었지만 방황의 시간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런 저에게 용산은 새로운 반성과 성찰의 시작점이 되었습니다.
돌이켜보건대 저는 국민의 과분한 사랑을 받으며 커 온 정치인이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시대의 아픔과 함께 하지 못했습니다. 진심으로 국민의 눈물을 닦아주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죽어가는 용산의 평범한 시민들을 보호하지도 못했습니다.
용산 뿐만이 아닙니다. '비정규직 노동자, 영세 자영업자, 청년 실업자, 농민... 그 분들에게서 받은 기대와 사랑을 나는 어떻게 보답했는가? 나는 무엇을 위해 정치를 하고 있는가?' 그런 자책감 앞에 저는 해답을 찾아야 했습니다.
결국 너무나 비극적인 깨우침이었지만, 국민 앞에 부끄러울수록 더욱더 치열하게 실천하는 것이 진정한 속죄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지금 저의 정치는 그날 이후 새롭게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저는 국회로 돌아온 첫 날 의원선서를 하는 자리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용산참사의 눈물을 닦아 주는 것이 정치의 본분입니다!”
국민의 사랑을 희망으로 돌려드리지 못했다는 통한은 아직도 저의 가슴을 채우고 있습니다. 저는 민주정부를 지키지 못했습니다. 10년 동안 국민이 키워주신 개혁과 진보의 힘을 빼앗긴 장본인입니다.
이제 저는 진정성있는 대안을 내놓고 실천함으로써 국민 앞에 반성할 것입니다. 더 이상 2007년 겨울, 저의 패배를 국민의 패배로 만들지 않을 것입니다.
당을 아프게 했습니다 - 당과 당원 앞에 엎드려 사죄드립니다
지난 2009년 탈당과 무소속 출마로 많은 당원 동지들의 마음을 아프게 했습니다. 당과 당원 앞에 엎드려 사죄드립니다.
당시 저는 대선과 총선에서의 연이은 패배 후 미국으로 건너가 지친 몸과 정신을 추스르고 있었습니다. 오바마 대통령이 당선된 이후부터는 미국 15개 대학을 찾아가며 북핵문제의 평화적 해결과 한반도의 평화체제, 그리고 대륙철도시대라는 평소 저의 생각을 현지 대학생들과 함께 이야기하는 기회도 가졌습니다.
그러던 중 제가 정치를 시작했던 전주에서 재선거가 확정되었습니다. 저는 2004년 총선 직후 당의장직과 비례대표 국회의원직을 던진 후, 오랫동안 국회를 떠나 있었습니다. 많이 망설였습니다. 민주주의와 서민경제, 그리고 남북관계의 위기가 깊어가는 고국의 소식을 간간이 들으며 안타까움이 더해갔습니다. 여기에 맞서는 민주당이 중심에 서지 못하고 오히려 국민의 지지에서 멀어지는 것을 보며 더 큰 안타까움을 느꼈습니다. ‘이렇게 혼자 타국에 머물러 있어도 되는가’하는 생각이 밀려왔습니다. 그러나 막상 결정을 하기도 쉽지 않았습니다. 비난이 쏟아질 것이 너무 당연했기 때문입니다.
고민 끝에 ‘일단 국회로 돌아가 허약한 당을 돕자, 그러면 나의 진정성도 이해받을 수 있을 것이다’라며 귀국을 결심했습니다. 그러나 막상 돌아와 보니 당내 상황과 정치현실은 냉혹했습니다. 당의 공천을 받지 못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으나 결과는 저의 예상과 크게 달랐습니다. 결국 저는 전주출마를 강행했습니다. 당과 당원들에게 큰 상처를 드렸습니다. 송구스러울 따름입니다. 다시한번 고개 숙여 용서를 구합니다.
앞으로 당원동지들의 진심어린 충고와 비판을 가슴 속 깊이 새기고 더 뜨거운 열정으로 민주당과 함께 하겠습니다. 민주당을 통해 국민과 호흡하고 언제나 당원들 곁에서 함께 꿈꾸겠습니다.
용기가 부족했습니다
MBC 기자였던 저는 96년 처음 국회의원이 되어 정치에 입문했습니다. 그리고 국회의원이 되는 순간부터 국민의 과분한 사랑을 한 몸에 받았습니다. 선배들이 오랜 투쟁과 희생을 통해 힘들게 올라왔던 가파른 길을 너무나 쉽게 올랐습니다.
저는 국민의 정부 시절, 신념과 소신을 추구하는데 거침이 없었습니다. 최고위원회의 일원으로서 소장파의 쇄신정풍운동에 앞장 섰습니다. 당의 구태를 비판하는데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참여정부가 들어서면서, 저는 역동적이지도, 헌신적이지도 못했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의 집권과 동시에 더 이상 문제를 제기하고 비판하는 입장이 아니었습니다.
당시 저는 충분히 국정의 기본방향에 이의를 제기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국민이 그토록 갈망하던 새로운 정치를 보여주지 못했습니다. 왜 그때 좀더 과감하게 나서지 못했을까? 스스로를 향해 묻고 또 물었습니다.
결국 신념과 철학의 부족이었습니다. 국가를 경영할 만큼의 충분한 지식과 경험, 그리고 새로운 시대를 열어나갈 정치적 용기, 그 모든 면에서 부족했습니다.
참여정부가 좌회전 깜빡이 켜고 우회전한다는 비판에 직면했을 때에도, 저는 문제 해결을 위해 발 벗고 나서지 못했습니다. 모든 것을 걸고 대통령 앞에서 방향 전환을 주장하지도 못했습니다.
참여정부에 대한 국민의 실망을 극대화시켰던 부동산 정책에도 입장이 분명하지 못했습니다. 분양 원가 공개는 열린우리당의 총선을 지휘했던 저의 대표공약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공약이 좌초당할 때 저는 반기를 들지 못했습니다. 저에게는 이를 막지 못한 책임이 있습니다. 그 후 투기적 수요가 줄어들기는 커녕 오히려 가격폭등이 일어났고 결국 정책에 대한 신뢰 상실로 이어졌습니다.
‘한나라당과의 대연정’ 파문이 일었을 당시에도 저는 자리를 걸고 말하지 못했습니다. ‘한미FTA'를 초고속으로 밀어부칠 때도 그 중차대한 문제에 대한 심각한 검토와 고민없이 비켜서 있었습니다. 정권의 성패에 대해 공동책임을 져야 하는 위치에 있으면서 모든 것을 걸고 대통령에게 직언하지 못했습니다.
고백합니다.
그것은 현직 대통령과의 갈등이 두렵고 부담스러웠기 때문이었습니다. 차기 대선에 대한 욕망 때문에 저는 몸을 사렸습니다. 문제의식은 무뎌지고 치열함을 잃어 버렸습니다. 그 결과 저에 대한 국민의 지지와 관심은 소리없이 사그러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당시에 저는 이를 깨닫지도 못했습니다.
이것은 비단 저 개인의 지지율 문제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당의 유력한 차기 대선 주자가 자신만의 고유한 에너지를 창출하지 못함으로써 당 전체가 정체의 늪에 빠져들기 시작했습니다. 당의 무기력증은 일상이 되어버렸습니다. 여기에 대한 책임 또한 온전히 저의 몫입니다.
그 종이 한 장이 양극화 문서가 될 줄은 몰랐습니다.
지금도 저의 기억 속에 선명하게 남아있는 역사의 한 장면이 있습니다. 1997년 12월, 대선을 불과 몇 일 앞두고 청와대에서 대통령 후보들 간의 긴급회동이 열렸습니다. 김영삼 대통령과 이회창, 이인제, 그리고 김대중 후보가 모였습니다. 저는 당시 당 대변인 자격으로 김대중 후보를 모시고 청와대에 갔었습니다.
대통령 후보들 앞에 IMF가 요구한 ‘각서’가 탁자 위에 놓여져 있었습니다. 당선되면 노동유연화, 정리해고를 지체없이 이행하겠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우리는 그 서명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당선과 동시에 IMF가 강제한 금융자유화, 민영화, 규제완화, 노동유연화, 정리해고의 깃발을 들라는 강요 앞에 굴복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대통령 취임선서가 있던 날, 김대중 대통령은 "앞으로 더 힘들어질 것 같다"며 눈물을 삼켰습니다. 그 눈물은 아마도 바로 그 강요된 각서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당시만 해도 저는 그 각서 한 장이 초래할 우리 사회의 재앙을 제대로 알 수 없었습니다. 바로 그 종이가 양극화 문서가 될 줄 미처 몰랐던 것입니다.
결국 자유화, 민영화, 규제완화, 노동유연화의 10년을 거치면서 비정규직은 850만명으로 늘어났고, 600만명의 자영업자와 400만명의 농민들이 몰락의 위기에 내몰렸습니다. 400만 실업자가 집집마다 넘쳐나게 되었습니다.
저는 민주정부 10년의 모든 공과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 없는 사람입니다. 97년 이후 양극화로 치달아 버린 한국사회의 현실에 대해 가장 큰 책임을 져야 할 사람 중의 하나입니다.
저는 신자유주의의 본질을 철저히 인식하지 못했습니다. 그 부작용을 대비하기 위한 어떤 구체적 전망과 비전을 갖고 있지도 못했습니다. 관료 사회를 중심으로 전개되는 신자유주의 정책에 대해 어떤 실효성 있는 대안도 내놓지 못했습니다. 한마디로 무지했습니다.
2007년 대선이 끝나고 불과 9개월 만에 터져 나온 미국의 금융위기를 바라보면서 저는 뒤늦게 깨달았습니다. 신자유주의가 서서히 침몰하는 거대한 타이타닉호 였다는 사실을... 당시 저는 미국 듀크대학 연구소에 있으면서 금융위기의 실체를 직접 볼 수 있었습니다. 저는 마치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 충격을 느꼈습니다. 불과 9개월 전 대선후보로 전국을 뛰어다니면서 세계경제질서의 심장부가 그렇게 맥없이 무너져버릴 것이라고 단 한번도 상상해본 일이 없다는 사실에 스스로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상황을 되돌리기에는 너무나 뒤늦은 자각이었습니다. 이미 국민이 주신 천금같은 기회를 잃어버린 뒤였습니다.
참여정부 시절 여당이었던 열린우리당은 5.16 쿠데타 이후 최초로 의회권력 교체를 이뤄낸 정당이었습니다. 당시 국민은 IMF 극복과정에서 벌어지기 시작한 양극화의 고통을 호소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열린우리당은 국민이 주신 '단독과반'의 힘을 갖고 있으면서도 노동과 삶의 현장에서 제기되는 고통의 목소리를 제대로 듣지 못했습니다. 참으로 부끄럽고 뼈아픈 실책이었습니다. 저는 그 책임으로부터도 자유롭지 못합니다.
저는 부족한 대통령 후보였습니다
저는 2007년 대선에서 최악의 참패로 정권을 넘겨준 장본인입니다. 그 날의 패배로 민주정부 10년의 기대와 성과는 새로 집권한 보수정권에 의해 부정되기 시작했습니다.
저 자신이 무력감을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민심의 심판은 거대하고 냉정했습니다. 저는 수백 번, 수천 번을 곱씹었습니다. “왜? 실패했는가!”
대선 후보로서 준비가 부족했습니다. 시대의 요구를 제대로 꿰뚫어 보지 못했고 치밀하게 준비된 대안과 비전을 제시하지도 못했습니다. 그 상황에서 저는 BBK로 상징되는 네거티브 선거운동에 매몰되었습니다. 저는 이 대목에서 진정으로 뼈아픈 반성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대안을 내놓고 진정성으로 평가받아야 했습니다. 그것이 힘들지만 옳은 정치의 길이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상대 후보의 흠집에 의존해 반대급부를 얻어 보려는 쉬운 길을 택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저의 부족함은 정동영을 통해 자기 삶의 고통을 해소하고 싶었던 국민의 심정을 제대로 대변하지 못했습니다. 패배의 책임은 온전히 저에게 있습니다. 국민 앞에 진심으로 사죄드립니다.
당과 함께 담대한 진보의 길을 가겠습니다
반성과 성찰의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때로는 모진 비판을 받았습니다. 또 때로는 격려도 받았습니다. 지난 길을 돌아보고, 앞으로의 길을 내다보며 ‘무엇을 해야하는가’를 그 어느 때보다 치열하게 고민했습니다. 그리고 결국 진보의 가치에 대해 제대로 평가하고 이를 실현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제가 해야할 일이라는 확신을 갖게 되었습니다.
[담대한 진보]의 길을 뚜벅뚜벅 걷겠습니다. 지금까지 저의 정치 역정을 차근차근 되새김질한 결과 찾아낸 결론입니다. 이것은 제2의 정치인생을 시작하겠다는 저 스스로와의 약속이기도 합니다.
담대한 진보의 핵심은 ‘역동적 복지국가의 건설’입니다. 저는 이 모델이 한국 정치사의 새로운 미래를 열어 줄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역동적 복지국가는 부의 재분배를 넘어 적극적으로 부를 창출하는 역동적이고 창조적인 복지국가입니다. 고용, 주거, 교육, 의료, 노후 등 삶의 전 과정에서 국민의 기본적 경제인권을 보장하고 이를 근거로 경제의 역동성까지 확보하겠다는 전략입니다. 제가 역동적 복지국가 모델의 성공을 확신하는 이유는 대한민국이 갖고 있는 최고의 자산이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으로서의 기본적 삶이 보장된다면 우리 국민은 생활의 안정감 속에서 보다 더 창의적인 경제성장의 동력을 창출해 낼 것입니다.
지난 대선에서의 화두는 경제였습니다. 그러나 우리 국민은 아무리 경제지표가 좋아져도 나의 삶은 크게 바뀌지 않는다는 것을 하루하루 실감하고 있습니다. 저는 복지라는 시대적 화두가 이를 극복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이제 복지가 경제를 대체할 것입니다. 그러나 누구나 복지를 이야기하지만 누구나 역동적 복지국가를 실현하지는 못합니다. 시혜적이고 잔여적인 복지가 아니라 보편적이고 적극적인 진짜 복지가 우리가 부여잡고 가야할 길이라 확신합니다.
[담대한 진보]에서 말하는 '담대한'이란 단순히 진보를 꾸미는 형용사가 아닙니다. 진보의 방법론입니다. 역사적 소심증을 벗어던지고, 몽골기병처럼 빠르게 기동해서 당을 재무장하자는 것입니다. 당의 강령에 ‘역동적 복지국가’를 적시함으로써 당의 색깔을 명백히 하자는 것입니다.
저는 당원과 함께 민주당을 '진보적 민주당'으로 변화시켜 이 꿈을 실현하고 싶습니다. 오늘의 ‘격차사회’를 극복하기 위한 합리적 정책대안을 제시하여 민주진보세력이 연합해서 새로운 정권을 창출해야 제2, 제3의 용산참사를 막을 수 있다고 확신합니다.
저는 오직 이 길만이 그동안 부족한 저에게 보내주신 국민의 뜨거운 사랑에 보답하는 유일한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당과 당원들과 함께 ‘진보적 민주당’의 길을 가겠습니다. 다시 태어나고 다시 헌신하려 합니다. 저의 이런 마음을 진심으로 받아주시고 헤아려주시길 바랍니다. 오늘은 지난 3년 간 저의 반성과 성찰에 대한 고백을 드렸습니다. 다음에는 ‘역동적 복지국가’에 관한 저의 보다 구체적인 생각들과 한반도 평화시대의 복원, 그리고 대륙철도 시대의 개막을 위한 저의 구상들을 말씀드릴 기회가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