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화를 싫어하긴 했어요.
어릴때부터
용건이 없으면 전화하지 않았고
전화를 하게 되면 5분을 넘기지 않았으며
수다전화는 전혀 하지 않습니다.
친구가 그런 전화라도 하면...듣기만 하던 저는 전화를 끊고 환자처럼 축 늘어져있는 편입니다.
네. 원래 전화를 싫어했습니다.
그래도
해야할 전화가 있음 했고
"전화를 할까말까"라는 행위를 의식한적도 없습니다.
이 회사에는 행정직으로 들어왔습니다.
어느날 팀에서 이런 오더가 내려오더라구요.
아직 시작하지 않은 정부사업인데(할지 안할지 정해지지도 않았음)
만약 이 정부사업이 시작된다면
사업에 적극참여하겠다는 동의서를
전국 불특정다수의 회사에 전화해서 회사직인을 찍어 받아내라는 오더였습니다.
준 자료는 사업안내문과
전국 A분야의 사업체리스트 - 회사명 + 대표번호가 다였습니다.
대표번호로 전화해서
총무팀 있느냐, 없음 인사팀 있느냐, 없음 관리부 있으냐, 없음 비슷한 부서라도 있느냐 알려달라고 했습니다.
(그런 부서가 있는지조차 알수없는 자료였습니다)
부서명-담당자이름-직위-연락처 알아내야했습니다.
알려줄리가 없었습니다. (그것도 기계음이면 시도할수도 없었습니다)
무슨일이냐길래 사업설명을 하면 너네가 누구냐고 물었습니다.
저희 회사..정부지원사업하지만 인지도가 전혀 없습니다.
듣도보도 못한 회사입니다.
"XX라고 합니다. " " 네? 어디라구요?' "XX라고 하구요. 저희가 이번에.." "거기가 뭔데요?"
사업설명이 아니라
이 회사가 유령회사가 아님을 설명해야했습니다.
겨우겨우 부서와 연결되면
다시 시작입니다.
유령회사가 아님을 설명하고 사업설명을 하고..
중간까지라도 들어주면 고마웠습니다.
"이거 들어야하나요?" 짜증안내면 고마웠고
"이 번호 어떻게 아시고 전화거신거에요?" 하면 구구절절히 설명하면 됐고
"지금 뭐하는거에요?" 화내면 사과하면 됐고..
그리고...............................
네. 그래도 했습니다.
이게 비효율적이고, 맨땅의 헤딩인거 알고, 회사직인을 이런식으로 찍어줄리가 없다고 생각했지만
갓 들어온 신입이
오더를 내린 부장한테
그냥 일단 해봐라하는 과장한테 못하겠다 못했습니다.
내가 행정직인지 TM으로 들어온건지 헷갈렸지만 회사일이니깐 당연하게 했습니다.
백 몇통화를 했고,
동의서는 3-4백기업중에 8장 받았습니다. (말단 3명이 나눠서 했음)
사업은 흐지부지 되었고.
회사에서는 그냥 일상적인 전화업무였을뿐입니다.
그리고 저는 전화공포증을 얻었습니다.
전화를 꼭 걸어야하는 일에도
하기전에 꼭 해야하는것인가 확인하고 또 확인하고 다른 방법을 열심히 강구하다
깊게 심호흡을 하고
머리속에 대화 시뮬레이션을 해보고
한글에 시나리오를 작성하고 전화버튼을 눌렀습니다.
네 하긴 했습니다.
두근두근하는 심장을 누르고, 무거워지는 머리를 감추고, 울컥하는 화를 참아내며 했습니다.
제 주업무는 이런 전화업무가 아닙니다.
만약 주업무라면 애초에 입사하지도 않았고 진작에 퇴사했을겁니다.
보통의 행정업무를 하고
이런 식의 전화업무는 일년에 1-2번입니다.
그리고 그 1-2번때문에 퇴사를 할까 고민중입니다.
전화버튼을 누르기 위해 손가락 하나를 움직이기까지 너무도 고통스럽습니다.
회사일은 잘하고 있습니다.
(작년 근평 총점이 제가 전체2위였습니다. 관리자컴퓨터 포맷해준던 직원이 전해주더군요)
하지만 일년에 1-2번 발생하는 이런 맨땅의 헤딩식의 전화업무가 떨어질때마다
너무도 괴롭고 힘이 들어요.
해야지 해야지 하면서 자꾸만 미루고 안하려고 하는 제 모습에
제가 가장 실망스럽고
남보기도 민망합니다.
그래도 도저히 전화기에 손이 가질 않습니다.
게다가
자꾸만 그 일들이 저에게 돌아옵니다.
제 담당업무가 아닐때조차 반드시 그 업무는 저에게 돌아옵니다.
싫다고 거절을 해보고 해봐도
회사일이라는게 거절하는것이 한계가 있는거 아실겁니다.
(거절하는 것 자체도 좀 어렵습니다. 회사니깐요)
왜 자꾸 나야? 라고 말하면
네가 여자니깐..
여자가 해야지 한마디라도 들어준다..
그걸 남자가 할순없잖아..
너 목소리가 예쁘니깐 더 잘들어줄거야...
넌 상냥하니깐...
일을 미루려는게 아니라
진심으로 그런생각을 가지고 말하는 사람들은 보면..
내가 도대체 어떤걸 참아내면서 이 "짓"을 하는지 아냐고 소리치고 싶었습니다.
제가 힘들다 토로하자 다른 여직원도 그러더라구요.
"그래도 어차피 하는거 가벼운 마음으로 해요 ㅎㅎ
사실 다른 남직원은 사투리 쓰는데 그 사람이 할수 있겠어? ㅋㅋ
막말로 남자가 하는것보다 여자가 해주는게 듣는 사람도 기분 좋지...
XX씨는 목소리도 예쁘고 상냥하잖아~ 그냥 해봐~뭐어때서 그래?~"
손가락이 바들바들 떨렸습니다.
하지만 이 고통의 마음은 일반적인것이 아니기 때문에 말할수도 없고
저 스스로도 납득하기가 어렵습니다.
아마 이 글을 보는 님들도 그렇겠죠.
"회사일이 쉬운게 어딨냐"
"하고 싶은 일만 하는게 아니라, 하기 싫은 일도 해야지"
"사회생활 태반이 전화업무인데 못하면 관둬야지, 철이 안들었다..."
"노력하면 되는거지 전화가 어렵나..."
아마 회사에 전화공포증이라 이 업무는 못하겠다라고 하면
"정말 힘들면 다른 사람이 하자"가 아니라
"전화하기 싫어 그렇구나. 누군 하기 좋으냐 뭐 이런 태도가 다 있나"하겠죠.
그래서 퇴사하겠다고 하면 이유는 다른 핑계를대야겠죠.
저조차 전화하기 싫어 퇴사한다면......이해할수없었을겁니다.
하루종일 전화할 리스트만 뚫어지게 쳐다보면서
뭐가 맞는지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담주 월요일이면 이번엔 분량이 너무 많아 고용한 TM이 오는데도
1000건중에 20-30건이라도 담당이 아닌 저에게 하라고 하는걸
왜 굳이 그래야하느냐 반박할때
저도 일을 미루는거라 제 자신이 민망합니다.
("그냥..더 좋지 않을까.." 그게 답변이었고...할말도 없더군요)
정말 아무것도 아닌 일인건가요..
"그냥"하면 되는건데..제가 안되는건지...제가 부적응자인지...
머리속에 솜을 한가득 넣은거 같아요...
그걸 빼내서 써내려가다보니...정말 기네요..^^;;;;;
자게니깐...그냥 뱉어내듯 써내려간거같은데...너무 길다고 뭐라고 하진 마세요^^:;;안 그래도 민망하긴 하네요.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