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가던 시절이 생각나서 마음이 아픕니다. 전두환이 광기어린 몸부림을 치던 시절 자고나면 해맑은 대학생들이 수배당하고 잡혀가고 고문당하고 군대(를 위장한 보안대)끌려가서 매맞고 죽임당하고 실종 후 변사로 발견되고... 심지어는 분신 등 자결하기까지... 가장 기본적인 원칙인 민주주의를 돌려달라는 학생들의 호소는 그렇게 응답받았습니다. 살아남은 저는 아직도 눈물을 흘립니다.
[토요판] 김두식의 고백
‘인생3기’ 유시주 희망제작소 기획이사
난 프티부르주아, 죄책감은 사라졌다1986년 5월3일 인천에서는 대규모 민주화 시위가 벌어졌습니다. 당황한 전두환 군사독재정권은 배후세력 검거에 나섰고, 5월6일 밤 국군 보안사는 서울 잠실의 한 아파트를 급습하여 서울노동운동연합(서노련) 핵심 간부들을 검거했습니다. 베란다 유리창을 깨고 들어오는 보안사 요원들에 맞서 김문수 등 남성들이 대걸레 자루로 대항하는 동안, 서혜경, 유시주 등 여성들은 화장실 세숫대야에 문건들을 불태웠습니다. 서울대 국어교육과를 졸업하고 짧은 교사생활을 거쳐 가리봉전자에 위장취업해 이미 해고자가 되어 있던 24살의 유시주는 그날 밤 말로만 듣던 송파 보안사의 ‘하얀방’에서 자신도 고문을 당하면서 밤새 김문수의 끔찍한 비명소리를 들어야 했습니다. 고문자들이 알고 싶어했던 것은 심상정·박노해의 소재였습니다. 사라진 동생의 행방을 찾아 나선 유시민은 다른 구속자 가족들과 함께 송파 보안사의 대문을 흔들며 불법구금에 항의했고, 조영래·박원순을 비롯한 인권변호사들은 구속자들의 변론을 맡았습니다. ‘젊은 그들’ 중 김문수·심상정·유시민은 2010년 경기도지사 선거에서 격돌했고, 박원순은 2011년 가을 서울시장이 되었습니다.
오빠 유시민 소개로 서클활동
운동권 시절 확신없는 주장들
돌이켜보면 우리 시대의 운명
초등학교 백일장 장원을 시작으로 고교생 때는 <여학생> 문학상까지 거머쥐었던 문학소녀 유시주는 1987년 출소 후 구로노동자문학회에서 노동자문예운동을 벌였고, 생계를 위해 출판사 편집장, 자서전 대필 작가, 대기업의 사사 집필자 등으로 일하며 <거꾸로 읽는 그리스 로마 신화>라는 스테디셀러를 남겼습니다. 결혼하여 아들을 키우면서는 어린이집 공동운영, 생협, 아파트입주자회의 등에 참여해 (본인 표현에 따르면) “겸손한 또는 저렴한” 이력을 쌓았고, 박원순의 제안으로 희망제작소에 참여한 후 ‘우리시대 희망찾기’ 연구위원을 거쳐 부소장과 소장을 지냈습니다. 사람 앞에 나서기 싫어하는 그의 성격을 알기 때문에 몇 차례 거절당하고 인터뷰를 포기했는데, 며칠 전 예상치 못한 전화를 받았습니다. 희망제작소 소장을 그만두고 기획이사로 내려앉으면서 편안한 마음으로 북한산에 올랐다는 그의 목소리는 밝았습니다. “인생 3기 시작 기념으로 인터뷰에 응할게요. 좀더 명랑하고 밝은 분위기로 자유롭게 살고 싶다는 선언이에요.” 부리나케 짐을 챙겨 희망제작소를 찾았습니다.
하하, 박원순이 이명박과 뭐가 다르죠?
-소장을 그만두고 뭘 하며 지내셨어요?
“해방 기념 주간을 보내고 있어요. 청소와 빨래 하고, 애 밥해 주고, 산에 가고, 책 읽고.”
퇴임 후 한달 동안 그는 <밀레니엄>부터 <백의 그림자>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소설을 읽었다고 했습니다. 인터뷰 도중에도 쿤데라, 하벨, 오웰, 숄로호프, 아렌트, 임화 등의 작품에 나오는 여러 묘사들을 적절히 인용하며 자신의 상황을 설명했습니다. 문학은 여전히 그의 힘이었습니다.
-희망제작소 소장은 어떻게 맡게 됐나요?
“원래는 어떤 조직에도 소속될 마음이 없었는데, <우리는 더 많은 민주주의를 원한다>의 집필을 마친 후에 ‘우리시대 희망찾기’ 시리즈 전체의 감수를 맡게 되었고, 그 과정에서 연구원들과 친해지다 보니 발목이 잡혔어요. 희망제작소가 급성장하면서 일이 굉장히 많아졌고, 조직 내부의 여러 문제도 발생해서 해결책을 찾고자 2008년에 ‘성장통’이란 이름의 티에프티(TFT)가 만들어졌거든요. 제가 팀장으로 최종보고서를 작성했는데 그 발표 때 상임이사님(박원순 변호사)이 불쑥 제게 소장을 하라시는 거예요. 말도 안 된다고 거절했지만 결국 부소장을 맡게 됐고 2009년 6월에 소장이 됐죠.”
-당시 ‘성장통’ 티에프티가 진단한 희망제작소의 문제는 무엇이었나요?
“일은 많고 높은 질까지 요구되는데 그걸 따라가지 못해서 힘들어하는 연구원들이 많았어요. 조직을 효율적으로 이끌어갈 시스템을 갖추지 못한 게 문제였는데, 상임이사의 독특한 리더십도 원인 중의 하나였죠.”
-독특한 리더십이라면?
“상임이사가 엄청난 일중독자거든요. ‘두 개의 뇌, 두 개의 심장, 두 개의 폐를 가졌다’고 저희가 농담을 하는데, 열성에 비해서 일을 조직적으로 꾸려나가는 훈련된 미덕이 부족하세요. 여러 직급이 섞여서 일을 하는데, 상임이사는 관료적이거나 권위적인 걸 싫어하셔서 자기 방식대로 일을 하다 보니 상임이사 한분에게만 힘이 집중되는 문제가 생겼죠. 남에게 요청하는 것 이상으로 자신도 열심히 일하는 분이라서 연구원들은 반발도 못하고 기만 죽었어요. 그래서 티에프티에서는 상임이사에게 집중된 힘을 완화시키자는 제안을 했죠.”
-여러 번 거절하다가 결국 소장 제의를 받아들인 이유는 뭐였죠?
“상임이사는 창립 후 5년이 되면 조직을 떠나는 지병이 있어요. (웃음) 의미있는 작업을 시작해 튼튼한 토대를 만들지만 떠날 때는 완전히 내려놓는 훌륭한 분인데, 희망제작소에서도 마찬가지일 거라고 다들 예상했죠. 상임이사가 떠나기까지의 과도기에 제가 일정한 역할을 수행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어요. 무엇보다 일 욕심과 아이디어가 많은 상임이사가 투하하는 ‘폭탄’(일거리)을 막을 사람이 필요했거든요. 다행히 저는 운동권 시절 자라를 보고 놀란 적이 있기 때문에 솥뚜껑을 봐도 항상 경계심을 늦추지 않는 습관이 있어서 어떤 교리, 권력, 위대한 인물에도 백 퍼센트 빠져들지 않아요. 인간은 누구든지 불완전하고, 불완전한 인간이 만드는 어떤 조직도 불완전하다고 생각하죠. 그래서 상임이사가 굉장히 훌륭한 분이기는 하지만, 저는 충성심 같은 걸 갖고 있지 않았어요. 제가 소리 내서 싸우는 스타일은 아니지만 저만의 방식으로 조직 내부를 조정하며 상임이사의 폭탄을 막았죠.”
-어떤 방식이죠?
“‘네’ 해놓고 뭉갤 때도 있었고요. 크게 충돌해서 한번은 사표를 쓴 적도 있어요.”(웃음)
-박 시장의 장점과 약점을 꼽는다면?
“우리 사회의 공적 과제에 대한 엄청난 몰입과 헌신성이 장점이죠. 자신을 돋보이게 하려는 사심이나 위선이 전혀 없고, 선량한 얼굴이 보여주는 그대로예요. 약점이라면 ‘일중독이라는 면에서 박정희·이명박과 뭐가 달라요?’ 하고 제가 직접 말씀드린 적도 있어요.(웃음) 공적인 마인드로 충일한 분이어서 제 개인적으로는 사실 매력을 못 느꼈어요. 저는 어떤 위대한 인물이라도 자연인 아무개로서 매력을 느끼는 게 중요하거든요.”
“저는 상임이사와 있을 때만 의미가 있는 상호보완적인 카드였어요. 상임이사는 ‘늘 감격시대’라고 부를 수 있을 만큼 감동을 잘 하고, 일을 막 벌이는 스타일이시죠. 저는 남에게 잘 안 넘어가고 과장을 싫어하는 성격인데다, 자원을 동원할 능력도 없고 큰 비전을 만들어 나를 따르라고도 못하죠. 그런 상보적인 팀이었는데, 상임이사가 떠나시면 제 역할도 끝나는 게 맞죠.”
-박 변호사가 시장을 잘할 것 같으세요?
“굉장히 잘하실 거예요. 공무원들은 괴롭겠죠.(웃음) 하급직 공무원들은 좋아하는데 간부들은 괴로워한다는 소문이 벌써 돌고 있던데요.”
20대엔 운동, 30대엔 사후보정
인생 3기인데 다르게 살아야지
연애하고 에로스도 경험하고…
김문수 연설 듣다 버스에서 토할 뻔한 사연
유시주는 경북 경주에서 4녀2남의 막내로 태어나 대구에서 성장했습니다. 아버지가 교사셨는데도 “왜 그렇게 가난했는지 모르겠다 싶을 정도”의 형편이라 두 살 터울의 오빠 유시민과 어머니의 구멍가게 일을 도와야 했습니다. 대학 진학 뒤에는 운동권 중에서 “착한 애들”이 모인 곳을 오빠에게 추천받아 지하서클에 가입했습니다. 조희연, 김동춘, 한홍구 등이 선배였던 모임입니다. 그리고 80년 12월 그곳에서 평생 잊지 못할 경험을 하게 되죠.
“처음에는 학습하는 것과 현실 사이에 약간의 틈을 느꼈어요. 학습이 레토릭 같아서 거부감을 느낄 때가 있었거든요. 그러다가 휴교가 풀리고 처음 일어난 시위에 참여하라는 지시를 전달받았어요. 무림사건의 시작이었죠. 당시 시위는 학생식당에서 시간 딱 되면 누군가 ‘학우여!’ 하고 일어나면서 유인물을 뿌리며 시작되는 방식이었어요. 그날 마침 제가 앉은 곳에서 세 테이블 건너 주동이 떴어요. 학생식당의 절반은 사복형사들이었는데 ‘학우여!’ 하자마자 형사들이 달려들어서 식판으로 머리를 내려치고 발을 잡아 질질 끌고 가는 걸 바로 옆에서 목격했죠. 폭력을 뚫고 솟구치는 힘, 그리고 저쪽의 응전, 그 생생한 리얼리티를 본 거예요. 며칠 후 엠티에서 밤을 새우고 버스 내릴 곳을 놓쳐서 눈 덮인 허허벌판을 물어물어 둔촌동 큰언니 집으로 가는데, 문득 내가 살아가는 시대가 구체적인 현실로 몸에 착 감겨 오는 걸 느꼈어요. 소위 역사적 책임이 완벽하게 접수되어, 시인 유진오의 말처럼 ‘시인이 되기는 바쁘지 않다, 먼저 철저한 민주주의자가 되어야겠다’고 깨달은 순간이었죠.”
-계속 같은 서클에 계셨나요?
“아니요, 당시 서울대에 이념서클이 여러 개 있었고, 메이저 서클의 지도부가 학생운동의 지도부가 됐거든요. 그런데 여학생이 숫자도 적은데 너무 소외를 시키는 거예요. 그래서 심상정 언니가 ‘지도부 되는 자격이 서클 지도부라는 거지? 그럼 여학생 서클을 만들겠어’ 하면서 단대별로 여학생 서클을 만들었죠. ‘자, 우리도 서클이 됐어. 티오를 줘’ 이러면서 심상정 언니가 엄청 방방 뜨고 다녔거든요.(웃음) 2학년 때 그리로 옮겼죠. 물론 그래도 위에서 티오는 안 줬어요.”
-공장 갈 때는 대학 졸업자인 걸 숨기셨죠?
“학생인 걸 숨기려고 파마를 뽀글뽀글하게 해서 갔죠. 몇 군데 면접하면서 소중한 경험도 했어요. 제가 집이 가난하네 어쩌네 해도 공부를 잘해서 남에게 무시당한 경험이 없었잖아요. 들킬까봐 쫄아서 면접을 보는데 하대를 당하니까 자존감이 팍 떨어지면서 굉장히 위축되는 거예요. 저를 보는 그 눈빛 앞에서 제 목소리가 기어들어가더라고요.”
-서노련 사건으로 함께 고생한 김문수 지사는 가끔 만나나요?
“김문수씨가 부천에서 국회의원 할 때 망년회에서 한번 본 게 마지막이었죠. 1997년 대통령 선거 때 김문수 의원이 정당연설원으로 나와서 김대중 후보를 불온한 자로 모는 걸 우연히 버스에서 듣고 토할 뻔했어요. ‘사회주의는 말짱 꽝이었다’ 이렇게 생각이 바뀔 수는 있지만, 빨갱이로 몰려 고생한 사람이 남에게 빨갱이 딱지를 붙이는 건 예의가 아니죠. 운동권 중에서 한 부류는 과거를 액자에 걸고, 다른 한 부류는 쓰레기통에 처박아요. 둘 다 올바르지 않아요. 영광과 미숙함을 다 공유해야죠. 그 연설 이후로 저는 김문수에 대해 고민해본 적이 없어요.”
-운동권 경험에서 어떤 걸 배우셨나요?
“서노련 사건으로 감방에 있으면서 제 삶의 중요한 원칙을 정했어요. 정직한 사람이 되자. 서클에서 사회주의 공부를 하면서 베른슈타인이나 칼 포퍼의 수정주의를 비판하는 글을 읽는데, 저는 오히려 그 수정주의에 너무 공감이 가는 거예요. 이런 의문을 딱 한번 선배에게 얘기한 적이 있는데, 선배가 ‘그런 얘기는 운동 청산할 때 하는 얘기인데?’ 그러더라고요. 그래서 입을 꽉 다물었죠. 천박한 반공주의 파시스트들과의 싸움 앞에서 그런 의혹을 펼쳐 보일 수가 없었던 거지만, 사상적으로 자신에게 정직하지 못했던 거죠. 나중에 사회주의가 무너지고 운동권이 지리멸렬하게 흩어지는 걸 보고, 제가 정말 부끄러워한 것은 그 부정직함이었어요. 부끄러워서 한동안 구로동 주변을 지나다니지도 못했어요. 스스로도 확신할 수 없는 이념이나 주장을 타인에게 강요했다는 게 너무나 부끄러워서요. 그때의 미숙함은 우리 나이를 빼고는 완전한 설명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해요. 20대는 혁명적이지만 매우 미숙한 시기거든요. 그걸 깨닫고 삶으로 책임질 수 있는 주장만 하기로 결심했죠.”
그는 보수진영보다 같은 편에게 할 말이 많았습니다. 운동권 출신에게는 남의 말을 안 듣고, 자기 말 하기 바쁘며, 남을 평결하고, 진리를 독점한 듯 독선적 태도를 보이는 경향이 있다고 반성했습니다. 한나라당(새누리당)을 비판하는 절반만이라도 우리의 미숙함, 무능함을 성찰해봤으면 좋겠다고도 했습니다. “20대의 오류를 사후보정하느라 30대를 괴로워하며 시든 배추처럼 살았다”는 사람다웠습니다. 그 괴로움에서 어떻게 벗어났는지 물었습니다.
독선적인 진보진영, 미숙과 무능 성찰해야
“‘아, 그게 우리 세대의 운명이었구나’ 깨닫고 나니 자신이 용서가 되었어요. 사회주의 혁명이론 또는 계급적 결정론이 저에게 ‘동요하는 프티부르주아’라는 죄책감을 심어줬거든요. 그런데 지금은 그런 죄책감이 전혀 없어요. 누가 뭐라고 하면 ‘세상을 변화시키는 데는 프티부르주아도 필요해. 성실한 프티부르주아는 나태한 프롤레타리아보다 나아’라고 얘기하죠.”(웃음)
-오빠 얘기 묻지 않을 수 없네요. 유시민씨에 대한 나쁜 평가 하나만 꼽고 변론한다면?
“나쁜 평가가 하도 많아서.(웃음) 혈연이 하는 말이라 믿거나 말거나인데, 자기 이익을 위해서 뭘 선택하는 사람은 아니에요. 자기 말처럼, 섣부른 열정 때문에 실수한 적은 있지만 나 아닌 다른 존재로 위장한 적은 없는 사람이에요. 학생운동 시절부터 지금까지 사상적 변화가 가장 적었던 사람으로, 일관된 기준을 지켜왔다는 얘기를 하고 싶어요.”
-유시민 대표의 부인하고는 오랜 친구인데 불편하지 않나요?
“불편해진다고들 하던데 저희는 친구 정체성이 더 강해요. 여학생 서클과 노동운동을 같이 했죠. 제가 오빠에게 소개했고요. 수학사로 박사를 딴 올케는 제주도에서는 유명한 수재였고, 조용하지만 독립심이 강한 여자예요. 둘이 오빠 흉을 같이 보죠.”(웃음)
-혹시 정치적으로 오빠를 도울 생각은 없으신가요?
“제가 지금까지 오빠를 도운 것은 딱 두번이에요. 국회의원 선거 때 그 집의 어린 아들을 봐준 것, 경기도지사 선거 때 가족으로 편지를 쓴 것. 그 편지는 신문사의 기획이었는데 올케도, 조카도 쓰기 싫다고 해서 할 수 없이 제가 썼어요. 크게 책임 질 일은 겁나서 못해요.”
-앞으로의 계획을 듣고 싶습니다.
“운동 시기와 사후보정 시기에 이어서 인생 3기인데요, 2기와는 의식적으로 다르게 살고 싶어요. 북한산에서 ‘따질 게 뭐 있어? 인터뷰 한번 하지 뭐’ 결심한 게 그런 변화죠.(웃음) 황정은의 소설 <백의 그림자>를 읽으면서 ‘연애를 해보고 싶다’는 생각도 했어요. 생명과 창조의 에너지라는 에로스를 경험하고 싶다고나 할까요.”(웃음)
유시주는 ‘내 인생의 책’으로 네 권을 뽑았습니다. 그중 두 권이 동화입니다. 인생은 어쨌거나 좀 슬픈 것임을 알려준 <인어공주>, 지켜야 할 삶의 마지노선을 깨닫게 한 <미운오리새끼>, 사회를 구조적으로 보는 법을 가르쳐준 <공산당선언>, 위대한 개인, 해방된 단독자의 삶을 보여준 <월든>. 책 목록이 꼭 그의 삶을 닮은 것 같았습니다. 인터뷰를 마치며, 허세라고는 찾아볼 수 없이 담백한 그의 남은 생애가 앞선 세 권의 시대를 넘어 월든으로 달려가기를 기원했습니다. 그리고 제발 그만 부끄러워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