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명의 KBS 기자가 <미디어스>에 기고한 글...
http://saveourmbc.tistory.com/268
오랫동안 글을 쓰지 않았다. 뭐 이런 잡문도 감히 글이라고 할 수 있다면 말이다. 개인적인 이유도 있었지만, 좀 지겨웠다. 술 마실 시간도 없는데 무슨 얼어 죽을 글……. 이런 거 쓴다고 뭐가 달라지기나 하나? 뭐 이런 패배주의. 2008년부터 햇수로 5년이다. 지칠 때도 됐다. 보도국을 걸어 가다가 컴퓨터에 얼굴을 처박고 기사를 쓰고 있는 동료 기자들의 어깨를 바라보면 토닥여 주고 싶다. “000야, 욕본다! 씨바.”
그런데 요즘 심상치가 않다. 최시중이 사퇴하고, MBC 노조가 파업에 들어갔다. KBS에서는 보도본부장이 신임 투표에서 압도적으로 불신임을 받고 날아갔다. 여기저기에서 ‘뭔가’가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제 알량한 패배주의와 자기연민을 청산할 때가 됐나? 아마 그럴 수도.
2010년 봄 MBC가 파업을 했을 때 구호는 “MBC를 지키고 싶습니다”였다. 언론을 무자비하게 침탈하고 점령하려는 시대착오적인 권력에 무릎을 꿇지 않겠다는 의지였다. 보루를 빼앗기지 않겠다는 말이었다. 부러웠다. 샘이 났다. 얘네들은 아직 지킬 게 남아있구나.
같은 해 여름 우리 KBS가 파업을 했을 때 노조에서 내건 캐치프레이즈는 “KBS를 살리겠습니다”였다. 당시 노조 위원장은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KBS는 지키겠다는 말도 감히 하지 못할 정도로 무너졌다’며 안타까워했다. 이미 권력에 의해 목이 졸려 사경을 헤매는 KBS를 그래도 살려보겠다는 마지막 몸부림이었다. 쪽 팔렸다. 그래도 할 수 없지. 사실은 사실이니까.
2012년 겨울. 55년 만의 혹한 속에서 MBC 사람들이 다시 파업을 시작했다. 이번 파업의 제목은 “돌아갈게요”다. 어디로? 국민의 품으로 다시 돌아가겠다고 한다. MBC 노조가 만들어서 유튜브에 올린 ‘국민에 대한 사죄 동영상’에는 MBC 사람들의 현재 감정 상태를 잘 보여준다.
그 동안 진실을 외면했다고 '고백'하고 사실 또 질까봐 두려웠었다고 '변명'한다. 그래, 우리 모두는 그렇게 살아왔다. 동영상을 보면서 눈시울이 붉어진다. 낯익은 MBC 기자들의 면면을 보니 우리 보도국 기자들의 뒤통수와 처진 어깨가 생각난다. 동영상을 보다가 갑자기 누가 말을 시켜서 깜짝 놀라 눈물을 닦아 낸다.
우리는 가끔 “이게 아니잖아!”하고 용감한 척 소리 지르지만 그건 잠시 뿐이었다. 다들 일상에서는 무력했고, 좌절마저 그다지 비장하지 않았다. 찌질한 일상을 버티는 힘은 흘러간 ‘명예로운 추억’뿐이다. 하지만 사실 다 부질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MBC 사람들은 동영상 후반부에서 다시 일어 설 수 있게 해 줘서 '감사하다'고 말한다. 그리고 정말 ‘대담’하게도 '국민의 품'으로 돌아가겠다고 선언한다. “돌아간다”…… 그래 너희들은 돌아갈 곳이 있구나. 우리에게 돌아갈 곳이 있을까. 한 번이라도 '국민의 품'에 우리가 있었던 적이 있었을까. 이제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이렇게 MBC 사람들이 ‘일’을 시작했고, 그 와중에 KBS의 김인규 사장은 뭐가 그렇게 무서웠던지 재작년, 그러니까 2010년 파업을 핑계로 대규모 징계라는 카드를 던졌다. 징계 수준도 정직 6개월을 필두로 13명에게 감봉 이상의 중징계를 내렸다. 그러면서 노조의 불신임을 받은 고대영 본부장 후임으로 ‘이화섭’이라는 KBS에서는 나름 ‘걸출한’(긍정적인 쪽은 아니다 하더라도 특정한 면으로 보면 일가를 이루신 분이 분명하다)인물을 막무가내로 임명했다.
말을 안 해도 알 수 있다. 김인규의 속뜻은 이럴 것이다. “자 이제 우리도 물러설 곳이 없거든. 이렇게 했다. 너희들 어쩔래? 해 보려면 해봐!” 이렇게 해석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지금 상황에서 전혀 필요 없는 징계, 지금 상황을 더 악화시키는 인사를 통해서 도대체 무엇을 얻고 싶을 걸까. 머리는 진짜 모자를 쓰라고 달고 다니는 걸까. 울고 싶은 애 뺨을 왜 자꾸 때리냐고!
이처럼 김인규 사장 일당의 세심한 도움으로 KBS도 어쩔 수 없이 다시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들어 가고 있다. 기자협회에서 제작거부를 위한 투표에 들어가기로 결의했다. 노조도 조만간 파업을 언제 들어갈지 결정할 것 같다. 다 은혜로운 X맨 덕분이다.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가니까 경영진이 당황한 듯하다. “어? 너희들 왜 그래? 형량을 좀 깎아주면 되잖아~~~ 진정들 해~~~”
근데, 저기요. 좀 늦은 것 같거든요?
자 이제 숙제가 나왔다. 이번 우리의 구호는 무엇이어야 할까. 아니 무엇이 돼야 할까. 대부분의 KBS 기자들은 이렇게 말한다. “부끄럽습니다.” 지금 우리가 만드는 뉴스가 부끄럽고, 우리의 조직이 부끄럽게 돼 버렸다. 이 수치심, 자기모멸, 자기부정의 굴레를 이제는 우리 스스로 끊어버려야 한다. 기대하시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