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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게시판

드러낼 수 없는 고민을 풀어보는 속풀이방

36년 전 어느 날

중년아줌마 조회수 : 2,954
작성일 : 2012-01-18 17:01:51

가끔,
어린시절의 기억이 새록새록, 그러나 아프게 떠오르곤 합니다.

초등 3학년이었던 1976년 겨울.
그때 당시에도 비상연락망이라는 것이 있었지요.
집에 전화를 두고 사는 아이들 비율이 그리 높지 않은 강북
변두리 동네에 있는 초등학교를 다녔습니다.
그러다 보니 전화가 없는 아이들은 반 아이들 중 누군가
그 집의 위치를 알고 있어야 했어요.

슬레이트를 지붕으로 얹은 초라한 한 칸 짜리 집이 그 때도
몹시 부끄러웠던가 봅니다. 새침하고, 자존심 강했던 탓에 반 친구
그 누구에게도 집을 보여준 적이 없었답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집 전화가 없었으니 방학 전에 비상연락망을 만드려면 누군가
우리 집의 위치를 확인해야 했어요.

그 당시, 친하게 지냈던 우리반 반장 아이.
어렵던 그 시절에도 빨간색 모직 코트를 입고 다니던,
윤연선의 "얼굴"이라는 당시 유행곡을 청아한 목소리로
잘 불러 선생님의 사랑을 등뿍 받던 아이였답니다.

어느 날 방과 후, 선생님의 명령으로 반장아이가 우리집에
함께 가서 위치를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집으로 걸어가는
그 길이 너무도 힘들었고, 당장이라도 혼자 내달리고 싶은
마음에 죽을 것만 같았습니다. 내 속을 모르는 그 아이는
천진하게 너희 집에서 놀다 가고 싶노라고 했었지요.
지금도 10살 소녀의 그 터질 것 같은 마음이 생생히
떠오릅니다.

누구에게도 보여주고 싶지 않았던 초라하기 이를 데 없는
집에 도착을 하니 그 아이의 얼굴이 싸늘하게 변하더군요.
좋은 옷은 아니었지만 늘 깨끗한 입성에 똘똘하기도 했던 내가
그리 초라한 집에 살고 있으리란 생각을 못했던 듯 싶습니다.
그 자리에서 전 생애 최초로 "절교"라는 단어를 들어 보았습니다.
"이제 부터 너랑 절교야"라는 생소한 문장을 남기고 그 아이는
총총 사라졌습니다.

아... 그 이후로는 기억이 별로 없습니다. 절교라는 생경한 단어의
뜻을 한참 후에나 알게 된 것과, 반장아이와는 더 이상 친하게
지내지 않게 된 것.

그 아이와는 같은 중학교를 또 같은 고등학교를 진학했습니다.
같은 반이 된 적은 한 번도 없었고, 학생 수가 워낙 많은
학교였으므로, 가끔 마주치기는 했지만 단 한번도 대화를
나눈 적은 없었습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그 아이는 S여대
독문학과로  진학을 했다고 들었습니다.

36년 전 슬레이트 지붕을 얹은 단칸방에 살던 그 소녀는
이제 직장에서 꽤 높은 직급을 달았고, 넓은 아파트와
중형차를 지닌 중년이 되었습니다.

굴곡지고, 험난한 시절을 겪었어도 현재 행복하고 충만하면
과거는 좋을 기억으로 남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네요. 30년도 훨씬 넘은 시절의
기억이지만 가끔은 저를 아프게합니다. 10살 짜리 어린 아이가
겪었을 좌절감, 무기력, 자존감의 붕괴가 생생한 참담함으로 아직
남아 있으니까요.

그 아이는 잘 살고 있을까요? 가끔 궁금합니다.
82쿡을 알고 있다면, 그래서 이 이야기를 읽는다면
기억할 수 있을 것 같은데...

IP : 175.213.xxx.80
13 개의 댓글이 있습니다.
  • 1. 토닥토닥
    '12.1.18 5:05 PM (183.100.xxx.68)

    제가 위로해드릴께요.
    유년의 상처받은 기억이 아직도 마음을 할퀴는 경험... 저도 있어요. 10살 그 나이대.... 그 아이도 어렸으니 어쩌겠어요.
    잘 살아가시는 님이 멋지십니다. 마음 속 상처받은 소녀를 잘 위로해주시고, 벗어나세요.

  • 2. 원글
    '12.1.18 5:08 PM (175.213.xxx.80)

    실은 담담히 쓴 글이었는데, "토닥토닥"님의 댓글을 읽고는 갑자기 눈물이 났습니다. 감사해요. 따뜻한 마음 을 깊이깊이 느낍니다.

  • 3. ..
    '12.1.18 5:09 PM (125.152.xxx.145)

    원글님에게는 아픈 기억이라서 아직까지 아프게 기억하시는 것 같은데...
    아마도 그 친구는 잊어 버리고 살 것 같네요.........10살이면 솔직히 철 없잖아요.

    원글님 무엇 보다 잘 되셨고....잘 살고 계시니....글 읽는 제가 다 좋으네요.

    36전 아픈...기억을 털어 놓으셨으니......이젠 가벼운 마음이 되셨음 좋겠어요.

  • 4. 원글
    '12.1.18 5:13 PM (175.213.xxx.80)

    그렇겠지요. 그 친구는 그 때의 상황을 전혀 기억하지 못할 듯도 싶습디다. 혼자만의 상처였을뿐.

  • 5. 아마 그 아픈 기억은
    '12.1.18 5:20 PM (1.245.xxx.8)

    원글님이 현재 이루신 모든 것들을 가능하게 하는 동인이 되었을 거에요.
    똑같지는 않지만 비슷한 경험이 있어서 잠시 울컥 했습니다.
    그 애들을 이해하려고 무척 노력했어요. 나라도 싫었을꺼라고...
    하지만 마흔을 넘기는 동안 가끔 그 친구들이 생각날 때면 우울해지는 건 어쩔수가 없더라구요.
    원글님! 과거를 뛰어 넘자구요^^.

  • 6. ..
    '12.1.18 5:26 PM (125.128.xxx.145)

    저도 비슷한 경험이 있어요 초등때부터 듣던 소리였어요
    친할머니께서 저는 대학을 가지 말고, 남동생 뒷바라지를 하라구요
    그렇게 못사는 집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잘 사는 편도 아니었구요
    그 얘기를 들을때마다 저는 하염없이 울기만 했구요
    대학이 뭔지도 공부를 얼마나 해야 가는지도 잘 모르고 어렴풋이 알던 대학이었는데..
    할머니의 그런 말과 그런 상황이 싫었지만.. 자주 되풀이 되더군요
    저와 여동생 둘다 여자였지만..
    제가 장녀다 보니 오롯이 그런 말을 다 받았어요
    뭐라 대답도 못하고 그냥 받아들이는 기분.. 말대신 눈물이 하염없이 나오던 어린시절이었죠
    나는 대학 가면 안되는구나..ㅜㅜ 내 인생에 대학은 없다...
    그런데 세월이 좋아지다 보니.. 저도 대학 나왔어요..ㅋㅋ

  • 7. ....
    '12.1.18 5:44 PM (14.33.xxx.86)

    아주 오래전 생각나는 일화 하나,
    중학 1학년때 기억 안나는 어떤일로 여름방학중 소집명령이 있었던가봐요.(잘 모르겠으나 아뭏든 전달사항이 있었어요.)
    각 반의 비상연락망에 제가 그 친구에게 연락하는 역할이었는데 그 친구집에 전화가 없어서 주소 하나 들고 산동네를 돌았습니다.
    이름도 부르고 부동산마다 다 들러봤는데 그 번지수를 찾을 길이 없는겁니다.
    다닥다닥 붙어있는 집들이 그게 그 집이고 저게 저 집이고...
    한여름에 산동네을 돌아다니느라 눈물 반 땀 반으로 얼룩진 얼굴로 녹초가 되어서야 저녁이 되어서야 그 친구 친척이 울며 이름부르는 제 소리를 듣고 알려줘서 친구 집을 찾았습니다.
    그 당시는 제가 죽고 싶었습니다. 너무 힘들어서...ㅠㅠ
    친구 집에서 샤워를 하고 따뜻하게 지어주시는 저녁도 먹고 돌아왔습니다.
    그 친구는 아버지가 안계시고 어머니와 형제들과 살고 있었는데 늘 단정하고 공부도 곧잘 했었던 좋은 친구였다고 기억합니다.
    저도 참 책임감 강한 학생이었던가봅니다. ㅎㅎ

  • 8. 저도...
    '12.1.18 5:53 PM (115.161.xxx.180)

    초등학교 때 어울려 놀던 일곱 명 중 한 명이 하루는 우리 집에 옵니다.
    그애는 아버지가 회사사장이어서 친구들 중 제일 좋은 집에 살았지요.
    저는 울안에 네 집이 모여사는 슬레이트집에 살았구요.
    집을 보더니 마구마구 소리를 질러대네요.
    그 땐 너무 당황해서 그애가 무슨 소리를 했는지도 잘 모르겠어요.
    쌍욕만 안 했지 정말 심한 말을 퍼부었어요.
    싸움을 못하던 저는 아무 말도 못하고 멍해있었어요.
    그 후로 그냥 모르는 척 지냈어요.
    고등학교 때에도 같은 학교였지만 그냥 모른는 척...

    고등학교 때 다른 애한테 들은 이야기론 그애는 자기보다 못살면 인간취급 안 하고
    자기보다 공부 못하면 인간취급을 안 한다더군요....

  • 9. ..
    '12.1.18 6:05 PM (61.43.xxx.191) - 삭제된댓글

    10살이면 아마 그 반장아이도 자기가 절교라고 했던 거 기억할지도 몰라요..나이들고 생각해보면 어린시절 철없이 누군가에게 상처줬던 일이 기억날수도 있거든요..아마 그반장아이도 가끔 그일이 떠올라 괴롭고 민망한 기억일지도 몰라요..저도 님처럼 가끔 의지와 상관없이 떠올려야 하는 아픈 기억이 있어요..그래도 이제 기억은 떠오르되 아파하진 않으려고 해요..^^

  • 10. 기가 막힌...
    '12.1.18 6:05 PM (121.130.xxx.78)

    아무리 어리다지만 참 어찌 그런 애들이 다있나요?
    저도 원글님 비슷한 나이예요.
    당시로선 좀 부자집 소리 듣던 편, 2층집에 식모언니 있고..
    엄마는 계절 별로 커튼 바꿔 달던 그림 같은 집에 살았어요.
    하지만 가끔 어떤 친구집에 가보면 정말 쓰러져가는 산동네에 살거나
    단칸 셋방에 살거나.. 다양했어요.
    전 그 친구들 집에 가서 참 재밌게 잘 놀다 오고
    그 친구들도 우리집 와서 잘 놀고 그랬거든요.

    그 애들이 나쁜 거예요.
    타임머신이 있다면 다시 그 때로 돌아가 그 아이에게 외쳐주세요.
    너는 친구를 겉모습으로만 판단하니?
    네 아버지가 부자인 거지 넌 정말 마음이 가난한 애구나

  • 11. 비슷한 연배여서
    '12.1.18 6:56 PM (175.214.xxx.43)

    너무 공감하면서 읽었습니다.
    .............

    그시절 그런 생각한 분들 많을꺼라 생각들어요..
    가정방문이란것도 있었구요..
    그아이는 과연 어찌살고있을까...!
    아무리 어렸다면...참 못된아이였네요.!
    우연히라도 마주쳐서 원글님이 잘나가는 중년임을 보여줬음 좋겠다는~~
    유치한 희망 가져봅니다.

  • 12. 저도 떠오르는 얼굴이 있어요.
    '12.1.18 8:26 PM (115.137.xxx.181)

    원글님의 글을 읽고 나니
    중2때 반장이고 짝꿍이었는데 너무나 세상물정이 밝았던 얄미운 친구가 떠오르네요.
    걔한테 받은 상처가 사춘기때 너무 컸기에 오히려 일부러 좋았던 친구를 떠올려보려해요.
    원글님도 제 글 읽고 잠시라도 무거운 마음 내려놓으세요.
    중학교 때 전교1등으로 들어와 1,3학년때 저와 같은반이었고 두번 다 반장이었던 친구였어요.
    당시 저희 집은 버스에서 내려 30분 정도를 걸어 들어가야 하는 깡촌이었는데
    여름방학 때 혼자서 저희 집에 놀러 왔더라구요.
    중3때였는지는 고1때였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하네요.
    그 친구는 시내에 살았고, 당시에 아버지가 농협에 근무하시고 어머니가 의상실을 하셨었고요.
    저희 집이 너무나 누추하고 간식 거리가 없어 참 속상해 했던 기억과
    저희 어머니가 감자를 삶아 주셨던 것,
    저희 아버지가 "더운데 이렇게 먼 길을 어떻게 왔느냐"며
    반갑게 맞아주셨던 기억은 납니다.
    그런데 시골길이 갈래갈래 샛길도 많고 동네도 띄엄띄엄 떨어져 있는데다
    저희 동네는 특히나 가구수도 적고 읍내에서 멀었는데 어떻게 찾아왔을까 참 의아하기만 합니다.
    아마 그 때도 어떻게 찾을 수 있었느냐고 물었던것 같은데 그 친구가 한 말은 기억이 안납니다.
    물론 저희 집에 찾아온 이루에도 계속 연락을 주고 받으며 친하게 지냈고,
    서로 결혼식에 번갈아 참석했었는데
    아쉽게도 지금은 소식이 끊겼어요.
    하지만 그 초롱초롱한 눈과 흰 피부를 가진 그 친구를 생각할 때면 지금도 행복하답니다.

  • 13. 초록빛바다
    '12.1.18 11:55 PM (112.170.xxx.51)

    어릴적의 상처는 정말 오래가죠 하지만 그 아이가 미성숙해서 그런거라고 오히려 불쌍하게 생각해보세요 그아이가 커서 좋은 어른이 되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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