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님,
어제는 아버님 생신이셨지요.
어머님 근래 기분 안좋으시니 맞춰드려야 한다고 큰누님이 지시하셔서,
30개월 6개월, 두 아이들 데리고 불고기에 전 네가지, 특별히 산지에서 주문해서 받은 횟감에 낙지까지..
한상 거하게 차려드렸더니 어머님 밥 한술 뜨시고 배부르다 하시더군요.
큰누님부터 넷째누님네까지 빠짐없이 다 참석하셔서 다 돌아가시고 난 후
뒷설거지를 마치니 새벽 3시더라구요. 제가 일을 해서 그랬는지 간밤에 날씨가 그랬던 것인지,
새벽녘에도 날이 후텁지근해서 창문을 열었다 닫았다 하면서 자는둥 마는둥 하다 보니 아침이 밝았어요.
상쾌한 월요일 아침을 만들어줘야 하는데,
저는 아침부터 밥 잘 안먹는다고 저희 큰애를 잡고, 이유식 다 흘린다고 둘째를 잡고,
깨워도 깨워도 일어나지 않는 남편을 목이 터져라 부르다가 기어이 악을 질러 큰애 작은애 울리고,
어머님이 금쪽같이 생각하시는 그 귀한 아드님, 애비를 인상쓰며 일어나게 만들었네요.
애들 밥 챙기랴, 남편 늦지 않게 챙기랴, 동동거리다가 문득 허기가 느껴져 내 배도 좀 채워야겠다 생각하고
냉장고를 열어보니 변변히 먹을건 없고 한켠에 놓아둔 마시다 만 청하가 반병 보이네요.
네, 저 아침부터 청하 반병 들이켰어요. 그렇게라도 안하면 제 속이 꽉 막혀 터져버릴것 같아서요.
취기는 오르지 않고 그냥 속이 무척 쓰리더군요. 그리고 눈물이 마구 쏟아지더군요.
그런데 어디선가 타닥타닥 소리가 나서 그 와중에도 이 소리가 어디서 나는건가.. 찾아보니
다용도실 창문 밖으로 뻗은 보일러 연통에 빗방울이 부딪혀 떨어지는 소리였어요.
오랜만에 들어보는 그 소리에 한참을 멍하니 다용도실 문에 기대어 있다가 기어이 꺼이꺼이 소리내어 울었네요.
어머님, 저희 빚이 8천인데, 어떻게 더 포장해서 잘 사는걸 보여드릴까요.
어머님 금쪽같이 귀한 아드님이 이 좁은 27평 아파트에 사는게 그리 못마땅하신가요.
은연중에 말씀하신대로 제가 친정에 손이라도 벌려 한 40평쯤 되는 아파트로 이사갈까요.
어머님, 제게도 금쪽같은 아이들이 있어요. 어머님이 그리 좋아하는 아들은 아니지만
저희 큰 딸, 작은 딸, 제게는 정말 제 영혼을 걸고라도 지켜내고픈 제 귀한 아이들이에요.
저희 큰 아이, 세돌 다 되어가도록 어머니께서 한번이라도 살갑게 안아주셨나요.
작은애 태어났을 땐 백일 지나서야 한번 봐 주셨죠.
지금 세월이야 그렇지 않지만 어머님이 살아내신 세월을 알기에,
아들 아들 아들 아들 아들 아들 아들.. 하시는 어머님 마음은 이해해 드렸어요.
그런데요, 어머님, 죄송하지만 저는 셋째를 낳을 생각은 추호도 없어요.
저도 제 인생을 좀 챙기고 싶어요. 저희 아이들 웬만큼 키워놓고 미뤄둔 공부도 마저해야 겠고,
저도 많이 포기한 부분들 조금이라도 되찾으면서 하루라도 빨리 제 시간을 보내고 싶어요.
그래서 저는 큰딸, 작은딸, 딸만 둘 낳았지만 아들 미련도 없고 그냥 만족하며 저희 아이들 사랑하며 지내요.
어머님이 아무리 아드님을 금쪽같이 여기신다해도 자식을 낳는건 저에요.
어머님이 정말 아들 낳을 생각없냐, 하나만 더 낳아봐라, 딸 다 소용없다, 아들이 최고다, 아무리 말씀하셔도,
누님들 앞에서 그리 눈물바람 하시며 아들한테 제사상 못 받을 우리 아들 불쌍해서 어쩌냐 하소연 하셔도,
저는 정말 셋째는 원하지 않아요. 그러니 제발 저희 부부 보실 때 마다 그렇게 울지 마세요.
어른께 드리는 말씀이니 울지 마세요, 하는 것이지.. 저희 세살짜리 큰애 징징거리는 것과 별 다를게 없어보여요.
큰시누님은 같이 박자맞춰 눈물 지으시며 어머님 편 들어드리더군요.
저희 둘째 뱃속에 있을 때, 둘째도 딸이라는 얘기에 어머님과 손 맞잡고 통곡했다구요.
칠순 어머님은 그렇다쳐도, 어찌 젊은 시누님까지 그렇게 생각하실 수 있는지,
설령 서운하셨다 하더라도, 저희 큰애가 다 듣고, 제가 뻔히 바로 앞에 있는데
딸만 둘이라는 우리 아들이, 또 우리 동생이 너무 불쌍해서 어쩌냐고. 그렇게 말씀하실 수가 있는지요.
결혼해서 5년 째,
어머님께 지나는 말로라도 따뜻한 말씀 한번 들어본 적 없고,
큰애 작은애 낳았어도 단 한번 저희 아이들 예쁘다 안아주신적 없고,
뻔히 저희 대출에 대출 쌓여가는거 아시면서도
모피코트 아들한테 한번 받아보면 소원이 없다하셔서 소원들어드렸죠.
네, 어머님, 차라리 모피코트를 원하시면 제 살과 피를 팔아서라도 열벌이라도 더 해드릴테니,
이제는 제발 그 아들타령 좀 멈춰주세요. 아들하나 못 낳는 딸 시집보내고 친정부모님 속상하겠다는
그런 저희 부모님까지 욕되게 하는 말씀 좀 속으로 거둬주세요.
어머님 제사는 나중에 제가 서운치 않게 잘 모셔드릴테니,
멀쩡히 건강히 잘 사는 어머님 금쪽같은 아들 나중에 누가 제사 지내줄지 걱정하지 마시구요,
제발 그런 얘기는 저 안듣게 시누님과만 나눠주세요.
제 속이, 속이, 까맣게 타 들어가고, 울화가, 울화가, 치밀어올라서..
어머님 생각만 하면.. 자꾸 술이 들어가네요.
어머님 제발 그만 좀 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