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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게시판

드러낼 수 없는 고민을 풀어보는 속풀이방

버스에게 감사 인사 받아보셨나요? ^^

오늘도무사히 조회수 : 1,999
작성일 : 2011-10-28 21:50:45

남편이 학원을 합니다.

학생 수가 좀 늘어나니 강사를 충원해야겠는데 사람 구하는게 녹록치 않네요.

그래서 급한대로 제가 새로운 선생님이 오시기 전에 분반된 아이들을 좀 맡아주기로 했습니다.

아.. 제가 무자격 강사는 아니구요 나름대로 자격, 경력은 갖췄어요. ^^

겨우 하루에 한시간 수업이지만 수업 준비에 몇 시간, 애들 친정에 맡겨야 하니 데려다 주고

학원가서 수업하고 다시 친정으로 퇴근해서 집으로 애들 데리고 가면 한나절이 후딱 지나가는 요즈음 입니다.

 

수업은 5시 20분 부터 6시 10분까지.

네네. 친정으로 어서 돌아가서 애들 챙겨야 하는데,

하필 금요일 6시 반,

하필 우리 지역에서 가장 많이 막히는 사거리를 지나야 하는군요.

신호 세번에 가면 운이 좋은거고 그냥 딱 마음 비우고 네번 바뀌도록 기다리면 어쨌든 사거리는 건넙니다.

그런데 오늘은 무척 운이 좋았는지 무려 두번만에! 사거리를 관통했어요.

휴, 운이 좋은 것도 거기까지. 그 다음 삼거리에 모든 차 들이 모여서 한 곳을 향하고 있었지요.

 

해는 진작에 넘어가고 사방엔 오직 자동차 불빛, 클랙션 소리, 경찰 아저씨들의 반짝이는 형광색 조끼들.

무념무상.. 언제 여기를 지나 집으로 갈까. 애들은 저녁 잘 먹고 말 잘 듣고 있을까.

아빠는 오늘은 좀 일찍 와서 엄마랑 같이 애들 좀 봐주고 계실까..

엄마 오늘 저녁 약속 있다하셨으니 많이 늦지 않게 도착해야 할텐데..

이런 저런 생각들을 하다 문득 옆 차선을 보니, 버스가 한대 서 있네요.

 

버스에 사람들이 참 많이 타고 있었습니다.

그럴 수 밖에요. 저녁 6시 반이니까요.

손잡이에 대롱대롱 매달린 학생들, 자리에 앉아 피곤한 하루를 마저 보내고 계신 아버지 어머니들..

문득, 제 차가 그리 크고 좋은 차는 아니지만 이렇게 차 속에 저 혼자 편히 앉아

라디오 음악이나 감상하는게 참 미안하다.. 싶은 마음이 들더군요.

어라, 그런데 이 버스 기사님, 길을 착각하셨는지 직진 차선에 서 있다가

좌회전 차선쪽으로 쭈뼛쭈뼛 바퀴를 움직이시네요.

그 시간에, 그 거리에서, 차선을 바꾸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닌데요.

 

신호가 바뀌었고, 저는 길을 무찌르지 않고

눈치보며 좌측 방향등을 깜박이는 그 버스에게 자리를 비워줬습니다.

그리고는 신호 끄트머리라도 매달러 나도 좀 가보자~ 하며 버스를 뒤따랐지요.

아, 이런, 양보를 받은 버스 기사님이 비상등을 두세번 깜박깜박 인사를 주십니다. 고맙다구요.

일반 승용차에게 저런 감사 신호를 받는건 종종 있는 일이지만,

왠지 저 커다란 버스에게 감사 인사를 받으니 괜시리 미소가 나옵니다.

저 혼자말로 답변을 하지요. 아유, 별 것도 아닌데요 뭘.. 종점까지 안전운행하세요.. 하면서요.

 

그렇게 오늘도 무사히 친정에 돌아와보니 아이들은 밥 한그릇씩 뚝딱 하고 잘  놀고 있고.

친정아빠도 애들과 섞여 신나게 놀아주고 계시고, 엄마도 약속에 늦지않게 출발하셨네요.

별거 아닌 사건이었지요. 그냥 혼잡한 길에서 더 복잡하지 않게 1,2초 정도 제 속도를 늦춘 것 뿐이었지요.

그리고 버스 기사님도 의례히 하는 습관대로 비상등을 몇 번 깜박이셨는지도 모르지요.

그런데 그 후로도 내내 마음이 참 가볍네요.

 

모르겠습니다.

이 가벼운 마음이, 이번 주도 무사히 잘 보냈구나 하는 안도의 마음인지,

자리를 내어 주던 순간 세상의 모든 음악에서 흘러나오던 애잔한 칸쵸네의 여운인지,

남편에겐 그렇잖아도 애들 보려면 바쁜데 일을 늘려줬다며 투덜댔지만

실은 간만에 사회인 복장을 하고 학생들 앞에 서니 설레였던 제 속마음의 반영인지.

 

모두들 편한 금요일 저녁 맞이하셨는지요.

주말은 또 어떤 이벤트로 보내실건지요.

뭐, 오늘 좀 속상한 일이 있었다면 어쩌겠어요, 이미 지나간 일인걸,

이벤트 쯤이야 없어도 그저 주말이라는 사실만으로도 그냥 가벼울 수도 있을테지요.

 

마트에 가니 맥주를 특가세일 하기에 몇개 집어들었어요.

남편이 금주 선언을 한지 백일 가까이 되어가는데 눈에 보이면 그 결심 흔들릴까봐

저만 알아보게 꽁꽁 싸매서 냉장고 깊숙한 곳에 숨겨두었죠.

오늘은 숨겨둔 맥주 한캔 곱게 꺼내서 웬일로 제대로 된 맥주컵에 따라서 마셔봅니다.

뒷 맛이 알싸하네요. 이번 주도 큰 일 없이, 애들도 잘 커 주고, 그런대로 잘 보냈구나..

저도 저에게 비상등을 두세번 깜박여 고맙다 인사 해 봅니다.

 

그리고 그렇게 감사하고 감사받는 그런 평화로운 금요일 저녁들이 되시기를 바래봅니다..

IP : 121.147.xxx.188
5 개의 댓글이 있습니다.
  • 1. 웃음조각*^^*
    '11.10.28 10:22 PM (125.252.xxx.5)

    가벼운 수필을 읽은 느낌입니다^^
    원글님 마음의 여유와 행복이 느껴지네요. 즐거운 주말 보내세요^^

  • 2. 콩콩이큰언니
    '11.10.28 11:00 PM (222.234.xxx.83)

    좋은 금요일 저녁을 보내고 계시네요 ^^
    운전하다 보면 조심스레 깜박이를 켜고 들어가도 되요? 라고 하는 차 앞에 먼저 가라고 기다려주는것...
    그래서 비상등 켜면서 감사인사 하고 가는 차를 보면 왠지 뿌듯하죠..ㅎㅎ
    님글 읽다보니 입가에 미소가 그려집니다.
    편한 밤 되시길 ^^

  • 3. 글이 이뻐요
    '11.10.29 1:32 AM (211.207.xxx.10)

    님 마음도 ^^

  • 4.
    '11.10.29 10:14 AM (218.233.xxx.124)

    저장해서 다시 보고 싶은 글이네요.
    갑자기 잔잔한 감동의~~~
    (길을 무찌르지 않고..비상등을 두세번 깜박깜박 인사를 주십니다. 고맙다구요.)
    참 좋은 표현같습니다.

  • 5. 쟈크라깡
    '11.10.29 10:44 AM (121.129.xxx.153)

    원글님의 행복이 저의 마음에 와 닿습니다.
    원글님의 양보와 기사님의 인사가 여러사람 행복하게 만들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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