굴곡진 인생
36년 전 열아홉의 나이에 처음으로 데모에 참여했다가 퇴학생이 되고 이어 소년수가 되어 감옥에 들어가게 되었다는 ‘그’.
‘그’의 내면에 배어있는 아픔과 상처들은 마치 생채기의 흔적과도 같이 굵고 날카롭고 깊은 주름으로 그의 얼굴에 고스란히 남아있어, 그의 얼굴을 마주하는 것 자체가 누군가에게는 죄책감과 죄의식을 안겨준다.
‘그’가 들은 음성
36년이 지나 이제 ‘지천명(知天命)’을 살아야 하는 그는
“지금과는 다른 세상을 만드는 것이 내 미션이다”라고 이야기 한다.
진정 하늘은 그에게 이런 미션을 준 것일까? 아니면 그의 내면에 아직 자라지 못하고 있는 19세 소년수의 아물지 않은 트라우마가 그의 귀에 이렇게 속삭인 것일까?
19세 소년이 감옥에서 느꼈을 상처와 분노와 아픔. 그것은 그때의 시점에서의 대한민국이 저지른 과오였다고 한다면 딱히 할 말은 없다. 그러나 ‘그’ 역시도 현재의 시점을 살고 있고 그때 그 과거의 시대는 지나가버렸다.
다만 바뀐 것이 있다면 과거에 그가 입은 상처는 지금 그의 삶에 훈장이 되었고, 당시 무기력하게 당했어야만 하던 소년은 이제 몇 개의 거물급 공동체를 거느릴 만한 힘 있는 어른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는 여전히 과거를 살고 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부채감과 죄책감이 나를 이끌어 냈다.”
누가 그에게 부채감과 죄책감을 안겨 주었는가?
부채감과 죄책감은 한 사람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감정적 문제이다. 결국 그가 들은 하늘의 미션이라는 것 “지금과는 다른 세상을 만드는 것”이라는 음성은 바로 자신의 내면의 소리, 그것도 19세 소년의 트라우마가 외친 날카로운 비명이었을 뿐이다.
죄책감, 그리고 빚진 것 거두어 들이기
그때 ‘그’를 외면하고 등 돌렸던 동시대의 소년들은 그의 얼굴을 대면하며 죄책감과 부채의식을 떠안는다. ‘그’의 죄책감과 부채감은 마치 바이러스와 같이 현 시대에 떠돌고 있다.
소망과 기대를 안고 시작해도 곳곳에 숨어있는 절망과 좌절이 발목을 붙잡는 일이 많을텐데, 과연 죄책감과 부채감이라는 부정적 감정에서 시작하는 일들이 얼마나 이 시대를 ‘아름답게’ 해줄 수 있겠는가?
오직 그에게만 감옥이 되어버린 대한민국
왜 광화문에서 외치고 싶은 것을 못하게 막느냐는 19세 소년의 답답한 울분을 누가 쓸어내려줘야 하는가?
세상은 변화된 모습을 통해 그때의 시간은 지났다고, 이제는 잊어도 좋다고, 지금을 살라고 이야기 하고 있다.
감옥에서 느꼈던 한 뼘 만한 바람이 아니라, 거부할 수 없는 ‘자유민주주의의’ 도도하고 웅장한 바람을 ‘그’ 역시 고개 들고 당당히 맞이하여도 좋을 것이다. 이제는 그 역시 19세 소년수의 아픔을 스스로 위로하며 도닥여줄만한 어른이 되었으니 말이다.
하루 전이다.
‘그’가 한 인간으로, 한 어른으로 살아볼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될 시간.
대한민국 국민의 한 사람으로써, 대한민국을 누리며 살아갈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될 시간. 36년 동안 갇혀있던 부채감과 죄책감의 감옥에서 당당히 걸어 나와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의 자유로운 국민으로 살아보기를 바란다. 아무도 그에게 짐지워 주지 않았지만, 너무 어린 소년의 감수성이 스스로 떠 안아 버린 그 오랜 짐을 내려놓기를 바란다.
그리고 다시 홀가분하게, 그리고 정직하게
‘지천명’을 받들어도 늦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