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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석사 & 소백산(下)

| 조회수 : 1,275 | 추천수 : 3
작성일 : 2021-08-11 16:20:03


부석사가 멋진 데에는 멀리 소백연봉을 앞마당으로 거느리는 부석사의 로케이션 때문.

무량수전 배흘림 기둥에 기대어 서서 보거나,

안양루 누각에 걸터 앉아서 보거나,

안양루와 무량수전 까지 동시에 시야로 들어오는 3층석탑 둔덕에서 보거나....

그러나 내겐 따로 있으니,

절 마당 우측 끝 저 반석 보이시죠?


베낭 있는 곳.


다시 반석 위에 섭니다.

서남진 하는 소백연봉이 낳은 지능선 사이사이엔 많은 사람이 살고 문화를 일궜죠.

지금부터 그들의 삶,역사를 얘기해보려구요.

원경서 근경으로 풍기읍~순흥면~단산면~부석면.

 

/ 저 산은 사람을 살리는 산이다!/

명종 때 풍수가 남사고가 소백산에 이른 말입니다.

원경으로 보아도 (아래 사진 처럼) 직접 올라도 힐링의 산,힐링의 라르고!

 

헨델/라르고

https://www.youtube.com/watch?v=oRzca9LdmuI


소백 능선 좌측 끝 지점(사선) 아래가 죽령입니다.

2/3 지점 봉우리가 비로봉 정상.

우측 끝 봉우리가 국망봉.

소백 등줄기 너머는 충북 단양.

이쪽은 영주시로 좌 끝에서 부터 소백 연봉을 따라 풍기읍~순흥면~단산면~부석면.

나는 풍기읍에서 부터 20키로 찻길을 소백 연봉을 벗삼아 달려왔고.

찻길과 소백 능선은 기찻길 처럼 평행합니다.

연봉 우측 끝으로 고치령과 마구령이 나오는데,

이를 넘으면 충북 단양군 영춘면과 강원도 김삿갓면.

그러니까 경북,충북,강원 3도가 만나는 곳으로 남한강,구인사,온달산성,김삿갓 유적지 등등이 그곳에 있습니다.

 

부석사는 부석면 부석리.

 

그럼 직접 소백 능선 위로 올라가 보죠!

아래 참고 사진은 고치령 지나고 상월봉~국망봉~비로봉~연화봉~죽령까지.


고치령 지나 상월봉에서 바라본 국망봉 능선길.



앞 국망봉 너머로 정상 비로봉이 보이고


국망봉 지나 바로 앞이 비로봉(1,440m)

 

비로봉은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의 준말.

본래의 뜻은 '몸의 빛, 지혜의 빛이 법계에 두루 비치어 가득하다'는 것이니 '부처의 진신(眞身)'을 의미.

 비로봉이라는 이름을 가진 봉우리들이 많아요.

금강산 비로봉(1638m), 오대산 비로봉(1563m), 치악산 비로봉(1288m), 속리산도 비로봉(1057m).

모두 부처의 산으로 그러고 보니 명산의 정상은 다 비로봉.

형제봉~국방봉~비로봉~제1연화봉~제2연화봉~도솔봉으로 이어지는 1천미터 이상의 연봉들이 장대하죠.

소백산은 종종 여성산의 상징으로 불리기도.

푸근한 여성적 산세가 금계촌을 십승지 으뜸으로 여기게 했는지도 모르겠네요.

소백은 부드러운 선의 연속이기에 연봉을 걷다보면 여체의 굴곡미가 연상되죠.

 한눈에 드러나는 고운 곡선의 육감이 감탄스럽고.

소백산 지역의 연평균 강우량은 평균치 보다 월등히 많고 눈도 많이.

반면 청명일수가 국립공원 중 가장 많아 1975년 최초의 현대적 천문대가 세워졌다는.


비로봉 서사면 주목 군락지.

왼쪽 너머로 국망봉이 보이고.


비로봉 서사면 하산길 연화봉이 보이고

우측으로 하산하면 충북 단양읍,좌측을 택하면 경북 영주시 풍기읍이 나옵니다.

왼편 작은 봉우리 너머가 죽령.


등산객 지나는 곳에서 우측 길을 택하면 단양 다라얀 관광단지,고수동굴이 나옵니다.

멀리 연화봉.


소백산은 길고,높고,포근하죠

높고 깊고 넓은 지리산의 경외감하곤 또 다른.

두솔봉~죽령~연화봉~바로봉~국망봉~형제봉 이어지는

소백 연봉(連峰)을 걷는 것은 한편으론 걷는 자에겐 축복.


다시 부석사로 돌아옵니다.


이 산은 사람을 살리는 산이다!!

 

명종 때 풍수지리학자인 격암 남사고(南師古)는

소백산을 보고 말에서 내려 넙죽 절을 하면서 이리 말했답니다.

이보다 소백산을 잘 표현한 말을 없을 터.

조선 초기의 학자 서거정(徐居正)은,

/소백산을 한번이라도 찾은 사람은 영원히 소백산의 환영을 떨쳐버릴 수가 없을 것이다/ 했죠.

 

도대체 어떤 산이길레 사람을 살리는 산일까요?

소백산은 동쪽 고치령(774m) 부터 서쪽 죽령(700m) 까지 25키로.

사이로 마당치(937m)~늦은맥이재(1046m)~상월봉(1272m)~

국망봉(1420m)~정상 비로봉(1438m)~제1연화봉(1395m)~

연화봉(1376.9m)~제2연화봉(1357m)이 장대하게 지납니다.


소백산 등줄기 왼쪽 사선으로 끝나는 지점 보이시죠?

경북 풍기와 충북 단양을 잇는 죽령입니다.소백산은 충북과 경북을 가르죠.

소백산을 남북을 잇는 '걸어 산길은' 죽령이요,

찻길은 5번 국도요,땅 아래는 중앙선 터널이 지납니다.

근래엔 중앙고속도로의 터널이 하나 더 생겼네요.

고갯길이란게 산의 가장 부드러운,그리고 가장 낮은 곳을 지나는 속성이.

사진에서 보이듯 죽령 남쪽 아래가 바로 풍기읍.

 

부석사엔 다섯번 온듯해요.

그러나 가장 최근이 10년 전이니 강산이 변했듯 나도 변했음을 느낍니다.

그 땐 일주문,당간지주,대석단,범종각,안양루,부량수전 등 유적에 눈을 빼았겼지만 오늘은 패스하게 되네요.

몸은 무량수전을 향해 직진이데 눈은 자꾸 뒤 소백연봉을 보려합니다.

그리고  GPS 켜고 퍼즐을 풀듯 위치를 확인.

 죽령,마당치,고치령은 어드메며,

연화봉,비로봉,국망봉은?

연화봉 아래 십승지 금계마을은?

비로봉 아래 비로사는?

국망봉 아래 안축이 경기체가를 썼던 죽계계곡은?

죽계천 변 소수서원,금성대군의 금성단은?

 


서사1....죽령

 

신라의 역사는 백두대간인 태백산~소백산~조령산~속리산 구간을 넘어 북진의 역사.

삼국사기에 의하면 이 구간이 가장 먼저 열린게

AD 156년 문경~충주를 잇는 계립령(하늘재~지릅재),

그리고 2년 뒤 풍기~단양을 연결하는 죽령(689m). 

국가의 북방 기간도로다 보니 삼국시대부터 죽령에는 나라가 주관하는 국행제(國行祭)가 있었죠

세종실록지리지에서는 이리.

/봄가을로 나라에서 향과 축문을 내려보내 작은 제사를 지낸다/

죽령사(竹嶺祠)라는 신사를 세우고 산신에게 제도 올렸고.

이때는 단양·제천·청풍·풍기·영춘의 다섯 고을 수령이 제주가 되었답니다.

죽령같은 국가 기간 도로엔 산신각은 기본이고 사찰,역원이 있기 마련.

산신각은 넘나드는 백성들이 치성드리는 성소요,사찰은 역원이나 간이 시장,병영까지 겸했습니다.

죽령 정상 대강면 용부원리의 보국사지(輔國寺址)와 산신당도 그런 곳이네요.

 

그 상징적인 유물이 있으니~~아래.


서사2...향가 '모죽지랑가'

 

죽령 옛길 '용부원'(단양군 대강면)의 기슭에는 목이 부러진 대형 석상이 있어요.

용부원(龍夫院)은 예전 관리들의 숙소인 院이 있어서 붙혀진 이름.

미륵불은 불두 ( 佛頭 ) 까지 하면 5.5m는 되지만

몸체만으로도 4m나 되는 ‘장육불상(丈六佛像)'으로 양식으로 보면 나말여초 9 세기경 .

몸 전체가 네 부분으로 파손된 채 수풀 속에 있던 것을 일으켜 세워 놓았네요 .

미륵 장육불상은 몸체 , 좌대 , 지대석 등 3 개의 돌로 만들어졌고 .

 

삼국유사에는 이 미륵불과 관련 다음의 이야기가 전합니다.
/술종공(述宗公)이 서쪽 지역의 지방관으로 임명되어 임지로 가던중 죽지령(죽령)에 이르러 한 거사를 만났다.
술종공이 임지에 이르러 달포를 보내고 밤에 꿈을 꾸었는데

일전에 죽지령에서 만난 거사가 집으로 걸어 들어오는 것이 아닌가.
같은 시각 술종공의 아내도 똑같은 꿈을 꾸고 있었다.

괴히 여긴 술종공이 사람을 보내 알아보았더니,꿈꾸던 날에 거사가 죽었다는 것이다.
술종공은 거사가 자신의 아들로 환생하는 것이라 믿고,

죽은 거사를 죽지령 위 북쪽 봉우리에 장사 지내게 했다.

그리고 미륵불을 만들어 무덤 앞에 세웠다.
꿈을 꾼 후 과연 아내는 태기가 있고 아이를 낳았는데 죽지령의 고개 이름을 따서 죽지(竹旨)라 했다.
죽지는 자라서 인품있는 화랑이 되었는데,낭도인 득오가 죽지랑의 고매한 인품을 사모하여
8구체 향가인 ‘모죽지랑가(慕竹旨郞歌)’를 지었다./

우리가 학교에서 배운 모죽지랑가는 이렇게 탄생합니다.

수십년 후 장년이 되어 죽령에 와서 보는 모죽지랑가는 특별할수 밖에.

가는 봄이 그리워
모든 것이 서러워 우네
아담한 얼굴에
주름살 지는 것을
잠시 사이 나마
만나 뵙게 되었으면
임이여 그리운 마음으로 가시는 길
쑥대마을에 자고 갈 밤 있으실까

-모죽지랑가(慕竹旨郞歌)-


비로봉서 바라본 연화봉,죽령 방향....좌측 계곡 따라 내려가면 풍기읍

 

서사3....핍박받은 백성들의 꿈 십승지

 

비로봉과 소백산천문대가 있는 연화봉 아래는 금계리.

이땡 최고 십승지로 회자되곤했던 곳이죠.

당시 상황은 이러합니다.

정감록 등 비기(秘記),비결(秘訣)서들은 지금도 인기가 있는데 예전엔 오죽했을라구요.

단언하건데 정감록등 당시 비기,비결서에 대한 사회적 맥락 이해없이

조선 후기 사회를 이해한다는 것은 어불성설.

/조선 왕조가 망하리니 살고 싶은자 십승지로 들어가라.

곧 정씨 진인이 나타나 계룡산 아래 새 왕조를 열리라/

이게 정감록의 요체.

힘든 세상, 신천지로 개벽하기를 바라는 기대가 숨쉰 거죠.

내세가 아닌 현세의 평화와 풍요를 희구하는 미륵신앙과도 맥이 통하고.

백성들은 지푸라기라도 움켜쥐는 심정으로 정감록에 열광했네요.

  정감록은 정감(鄭鑑)과 이심(李沁)이라는 두 인물의 대화 형식으로 되어있어요.

1) 난세에 복정(卜定)된 피난처에서만 복을 누릴 수 있으며,

2) 정씨(鄭氏)의 성을 지닌 진인(眞人)이 출현하여 李씨 왕조는 망하고 새로운 세계가 올 것이며,

3) 그 왕조는 李씨의 한양(漢陽),정(鄭)씨의 계룡산,조(趙)씨의 가야산,범(范)씨의 완산(完山) 이라는 것 등등.

19세기 대부분의 농민봉기는 정감록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동학을 비롯한 신흥종교에도 사상적 기반을 제공해 조선 후기 사상계에 강한 영향을 미쳤죠.

오늘날 계룡산이 유사 종교 성지가 된 것도 그 영향 하에 있었습니다.

 

도선(道詵),무학(無學),토정(土亭),격암(格庵) 등등

여러 예언서에서 발췌,수록했듯 정감록은 다양한 예언서들의 모음집 성격.

그러니 들쑥날쑥하고 체계도 없고 내용이 산만하고 신비주의적으로

한번도 일관된 관점에서 정리된 적도 없다는.

조선후기 민간에서 몰래 유통되던 금서들이라 인쇄본은 없고 모두 필사본 한자로 쓰였습니다.

그러나 1차 자료들이라 때묻지 않은 백성들의 숨결을 맛볼 수 있다는.

정감록이란 제목에서 보듯 메시아로 정(鄭)씨에 대한 믿음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네요.

메시아가 예수나 미륵이 아니라 '정씨'인 이유는 무었일가?

혹자는 조선 개국부터 유달리 정씨 성을 가진 자들이 反왕조적인 사건을 주동했기 때문으로 보고있네요.

정몽주,정도전,평등주의자 정여립,영조의 군주 자격에 시비를 걸고 반란을 일으킨 정희량 등등.

 

 정감록의 핵심은 '세상은 변화한다!'

하늘은 봄,여름,가을,겨울로 순환하죠.

땅의 기운은 중국 곤륜산에서 백두산으로 이동하고,

이는 금강산에서 태백산과 소백산을 거쳐 결국 계룡산으로 들어간다는 것.

이렇게 천지가 바뀌는 데 사람이 바뀌지 않을 수 있겠어요

그래서 나라의 주인도 정씨와 조씨로 바뀐다는 것.

내외적인 핍박에 시달린 백성인지라 택리(擇里) 혹은 피지(避地)에 대한 사상이 강렬할수 밖에.

정감록은 그런 백성들의 속내를 읽은 것이죠.

그리고 삼재나 난을 피해 숨어 살만한 땅인 십승지(十勝地) 사상도 그런 것.

그러나  '거처를 옮긴다'는 생각 자체가 '농경국가'인 조선의 권력에는 큰 위협.

그러니 당연히 금서.

 

그런데 여기서 놓쳐선 안되 게 있으니~

정감록 등의 비기의 허황을 엿볼수있는 부분.

정감록에서 진리는 비밀스럽게 존재한다는,이른바 '비결(秘訣)'에 대한 믿음에서 출발.

파자(破字) 통한 수수깨끼 풀이로 효과적인 정치적 프로파겐더로 활용하죠.

정감록에서 전하는 핵심 메시지는 보통 한자를 파자(破字)(애너그램)해서 암호처럼 씌어있습니다.

한자에 대한 식견을 갖춘 사람도 쉽게 알 수 없고 수수께끼 처럼 풀어야죠.

그 수수께끼가 풀리면 그 메시지가 마치 진실인양 믿기 십상이 되고 맙니다.

파자 형식을 빌었기에 적어도 결론 도달에는 설복 가능한 논리성이 있죠.

그런 의미에서 비결(秘訣),감결(鑑訣)은 매우 효과적인 정치적 프로파겐더가 된다는.


풍기읍 금계리 일대.


십승지를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1. 풍기 차암 금계촌 (경북 영주시 풍기읍 금계리 일대)

2. 봉화 춘양 일대 (경북 봉화군 춘양면 석현리 일대)

3. 보은 속리 난증항 일대 (충북 보은군 내속리면과 경북 상주군 화북면 화남리 일대)

4. 공주 유구 마곡 두 강 사이 (충남 공주시 유구읍 사곡면 일대)

5. 영월 정동 상류 (강원도 영월군 상동읍 연하리 일대)

6. 예천 금당동 북쪽 (경북 예천군 용궁면 일대)

7. 합천 가야산 남쪽 만수동 일대 (경북 합천군 가야면 일대)

8. 무주 무풍 북쪽 덕유산 아래 방음 (전북 무주군 무풍면 일대)

9. 부안 변산 동쪽 호암 아래 (전북 부안군 변산면 일대)

10. 남원 운봉 두류산 아래 동점촌 (전북 남원시 운봉읍 일대)

 


서사 4....십승지 으뜸 풍기읍 금계리

 

그런데,이중 7개소가 태백,소백의 사이 소위 양백지간에 집중되어 있어요.

그곳은 한결같이 높은 산으로 둘러 쌓여 외부와 차단되어 있다는

또한 물이 풍부하며 일정한 농토가 있는 곳.

한마디로 높고 깊고 넓은 산속에 숨겨진 물 많은 평지가 있는 그곳.

  풍기에 있어 인삼,사과,인견은 풍요(豊饒)의 기초였죠.

인견(人絹)이 풍기의 특산물로 된 것도 청학동,십승지를 찾는 사람들에 의해서라는.

풍기 인견은 명주의 본고장인 평안도 영변과 덕천에서 1930년 직물기술자들의 이주로 시작되었어요.

좋은 기술력에도 수탈을 피해 정감록에서 난세의 피난처라 한 '양백'(兩白)을 찾은 것.

여기서 우리는 십승지 사상의 저력을 절감하게 됩니다.

풍기 인견은 100% 나무에서 축출한 실로 만든 '천연섬유'.

차가운 나무의 성질로 인해 가볍고 시원하며 몸에 붙지않고 통풍이 잘 된다는.

 

풍기서 부석사 까진 찻길로 20여분,20여키로.

차와 소백산은 서로 평행선을 그으며 앞서거니 뒷서거니 뜀박질이죠.

풍기읍을 막 지나 동양대학교가 있는 구릉은 소백산의 주봉인 비로봉으로 연결됩니다.

예전엔 동양대학교 부터 비로봉 산자락 까지 일대가 금계촌.

비로봉에서 부터 금계천이 흘러내리죠.

정감록에서 풍기 차암 (車岩) 금계촌 (金鷄村)이 십승지의 첫번째라고 꼽은 곳이 이곳이라는.

남사고의 십승지론에도 피란지로 소백산이 으뜸이라고 했죠.

 

금계촌은 풍기 인삼의 첫 재배지.

금계촌은 풍수적으로 닭이 알을 품는 금계포란형(金鷄抱卵形).

많은 이들이 이곳에 들어와 금계촌이 생겼죠.

인구는 늘어 일부는 더 비로봉으로 바짝 붙어가 욱금리,삼가리를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일대는 산만하게 난개발.

마을 여기 저기에 양계장과 목우장이 들어서 있죠.

또한 의상대사가 683년 창건한 금계리의 비로사도 삼재의 화재(火災)로 수차례 불탔다는.

 

다시 부석사 무량수전 앞마당으로 돌아옵니다

우측 봉우리가 소백산 제2봉 국망봉(1420).


마의태자가 금강산으로 들어가기 직전 이곳에 올라 서라벌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렸다해서 國望峰.

국망봉서 흘러내린 죽계계곡은 아랫쪽에 풍기읍을 낳았네요.

소수서원,금성단,죽계별곡등 많은 문화유산도.

 

서사 5....소백산이 내려준 풍요의 땅 순흥(順興).

 

소백산 자락인 풍기 땅을 벗어나면 순흥(順興).

豊基에 順興,,,이름부터 소백산의 풍요가 느껴지나요?

풍기읍에서 부석사 까지는 승용차로 20여분 길로 그 중간에 순흥이죠.

부석사 봉황산 뒤켠을 동북으로 넘고 넘으면 강원도 영월,

동남으로 경북 봉화이니 부석사는 영주의 끄트머리.

순흥은 도호부였을 정도로 한때 격이 높았네요.

고려 때 충렬왕,충숙왕,충목왕의 태를 묻을 정도로 명당으로 여겼고.

이는 조선조에 이르러 십승지로 이여졌을 터.

그래서 '북 송악,남 순흥'이라는 말도 있었답니다.

 

순흥 앞을 흐르는 하천이 죽계천!

이 죽계천을 타고 오르는 것은 역사의 타임 머신을 타는 것이기도 해요.

순흥읍 북쪽 큰 봉우리가 소백산 국망봉(1420).

국망봉에서 발원한 죽계천은 순흥면을 가로지르며 흐릅니다.

죽계천은 작지만 인문적으로 아주 깊습니다.

죽계천을 타고 오르는 것은 바로 '밀도 높은 역사의 타임 머신'을 타는 것이나 마찬가지죠.

 

1) 먼저 부석사의 시원이 되는 초암사,그리고 성혈사가 죽계천 상류에.

2) 고려시대 경기체가인 '관동별곡'으로 유명한 안축은 죽계천에 기거하며 '죽계별곡'을 지었죠.

안축은 안향과 더불어 이곳 순흥 출신.

3) 퇴계도 풍기군수로 있으면서 죽계계곡을 자주 들렀고 '죽계구곡'이라 이름을 지었습니다.

4) 단종 복위운동 때에는 세조의 동생인 금성대군 등 많은 이가 이곳 죽계천에서 죽어갔죠.

그때 죽계천 하류 40리 까지 피로 물들어 '피끝'이라는 마을도 생겨났고.

그리고 이들을 추모하는 제단이 숙종 때 만들어지니 '금성단'.

6) 이땅 최초의 서원인 소수서원이 죽계천 가에 들어섰고.

7) 또한 신라 지역에 발견된 고분 벽화는 딱 두곳인데

죽계천 인근 비봉산(순흥의 주산) 자락의 고구려 고분벽화가 그것.

8) 금성단 옆 죽계천을 넘는 다리를 '청다리'라고 불러요.

청다리는 아이들을 놀릴 때 쓰는 '다리 밑에서 주워왔다'는 말의 진원지가 되는 곳.

그리고 부석사와 소수서원은 바늘과 실.

조선시대 사상적으로 대척점이였던 유불(儒佛)이 지금은 영주시의 대표 문화유적이 되었네요.


서사 6....죽계계곡 변 순흥 소수서원

 

소수서원을 얘기 안할수가요.

혹자는 평지 개천가에 위치하는 분위기가 부석사보다 좋다고 말하는 이도 있을 정도.

조선시대 국가가 운영하는 교육기관으로 한양엔 성균관 및 4부학당이,지방엔 향교가.

지방교육을 담당하는 것으로는 사립대학 격인 서원(書院)이 있었고.

또 서당은 일종의 초등교육 기관으로 몇 개 마을에 한 개씩.

문중이나 집안 아이들을 모아 놓고 가르치는 소규모 글방인 초방(草房)도 있었네요.

그러다 서원(書院)은 서서히 향교를 압도하며 향교는 성현의 제사 공간으로 퇴색해져 갑니다.

동시에 향촌의 자치운영 기능까지 겸하면서 조선 사회를 문중이나 유림들이 사적으로 지배해버리죠.

 

정감록 등 비결서 이해 없이 조선 후기 사회를 이해하기 불가능하듯,

서원 이해없이 조선 중후기 이해도 어불성설.

성리학 자체가 인위적인 위계질서의 구현이듯,

서원 건물들도 셩현의 제사 공간과 학문하는 공간으로 위계화되어 갑니다.

전학후묘(前學後廟).

서원의 건축 공간은 앞에 공부하는 공간이 있고 뒷쪽에 제사하는 사당이 있다는 뜻.

그런데 소수서원은 최초의 서원이어서인지 아직 공간 배치가 자유분방.

그런데 달리 보기도 합니다.

학교를 앞에 두고 사당을 뒤에 두는 전학후묘(前學後廟) 형식은 중국식.

우리나라는 서쪽을 으뜸으로 치는 전통이 있어요.

극락은 서방정토에 있고 서역이라 하듯 문물이 서쪽에서 들어왔죠.

이집트 파라오가 죽으면 나일강 서쪽 계곡에 뭍혔으니 결국 이런 고대 전통들이 면면히 흐른 것.

'서쪽을 으뜸으로 삼는다'는 우리나라 전통에 따라 서쪽에 사당을 두는 동학서묘(東學西廟) 방식.

이 원칙에 따라 교수진이 기거하는 직방재(直方齋)와 일신재(日新齋)도 서쪽에 있네요.

유생이 기거하던 학구재(學求齋)와 지락재(至樂齋)는 동쪽에.

당연 건물 기단도 스승의 직방재가 높고 학구재가 낮습니다.

매표소를 지나면 서원 정문 옆에 정자 경렴정(景濂亭)이 있죠.

신재 주세붕이 당대에 세운 정자로서 우리나라 정자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 중의 하나.

정문에 들어서면 정면 4칸,측면 3칸인 강학당을 마주하게 됩니다.

9칸이나 되는 넓은 대청마루는 강학 장소이고 측면에 3칸 온돌방이.

강학당 서쪽의 사당에는 ‘문성공묘(文成公廟)’라는 편액이 달려있습니다.

 

소수서원(紹修書院)은 이땅 최초의 서원이자,최초의 사액서원.

사액 서원은 임금으로 부터 현판,노비,토지,서적까지 하사받은 서원을 이릅니다.

임금이 특별한 관심을 준 곳이니 지역 영향력이 컸고 서원마다 사액을 받으려 별별 수단을 다 썼죠.

紹修書院은 '旣廢之學 紹而修之'의 약자.

'이미 무너진 교학을 다시 이어 닦는다'는 뜻.

여기엔 순흥에서 일어나 역사적 사건에 연유합니다.

'旣廢之學'이란 순흥에 유배되어 있던 금성대군과 순흥부사 이보흠의 단종복위 밀모사건을 말합니다.

이 밀모 사건으로 순흥 도호부도 순흥향교도 폐지되었네요.

 

숨죽여 지내던 순흥에 기운을 불어넣은 이가 바로 신재 주세붕(周世鵬,1495~1554).

1541년 중종 때 풍기 군수로 부임한 주세붕은 죽계천 옆 숙수사를 헐어버립니다.

그리고 안향(1243~1306)을 배향하기 위한 사당을 세우죠.

단종 복위운동 때 피로 물들었던 죽계천 변 숙수사 자리에 사당을 건립한 것.

그리고 안향의 영정(국보)을 한양의 종갓집에서 옮겨다 봉안하고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이라.

'백운동' 명칭은 주자가 강학한 백록동 서원을 따온 것.

주세붕이 목사 안휘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서원 건립 저간을 잘 알수있습니다.

/ 부임 며칠 만에 옛 순흥부에 이르러 보니, 한 마리 소가 울고 있는 숙수사 옛터가 있었습니다.

이곳은 안축이 '죽계별곡'을 지은 곳으로 마치 신령한 거북이 엎드린 형상의 산아래에 죽계가 있으며,

구름에 감싸인 소백산으로부터 흐르는 물등으로 풍광이 백록동서원이 있는 중국 여산에 못지않습니다.

구름과 산,강물 그리고 흰 구름이 항상 골짜기에 가득하므로 이곳을 '백운동'이라 이름 짓고..../

이어 몇년 후 풍기 군수로 부임한 퇴계의 건의로 명종은 소수서원이라는 현판을 내립니다.

소수서원 풍광은 빼어나죠.노송들이 주변을 감싸고 있고.

서원 앞은 소백산서 흘러나온 죽계천이 서원 앞을 굽이 돌아흐릅니다.

 

서사 7....유불 갈등에 단종복위 거사의 현장,소수서원

 

안향이 어린 시절 보낸 숙수사터에 건립한 거라 53년 발굴 땐 금동불 수십구가 나왔네요

그래서 서원에 들어서면 서원건축의 위계질서는 없고 좀 뒤죽박죽 느낌이 듭니다.

상극의 불교,유교가 혼재해서죠.

사찰 초입에는 당간지주가 있고 서원 내 여기저기 사찰 석조물이 흩어져있으니.

원래는 숙수사라는 평지 사찰이 있던 곳.

당시에는 많은 사찰들은 폐사되고 주춧돌,석조들은 유림들 묘지나 초석등으로 강탈되었듯 숙수사도 그런 것.

숙수사를 불태운 후 서원을 세울 때 땅 속에서 구리그릇 3백 여근을 캐 책을 샀다고도 하고.

1953년에는 손바닥만한 금동불 수십 구가 함께 발견되었습니다.  

유불 갈등의 직접적인 현장이다 보니 상징적인 전설이 전해옵니다.

죽계천 건너 암벽에는 주세붕이 새겼다는 '敬'자가 붉은 글씨로 커다랗게 새겨져 있죠.

주세붕이 숙수사를 헐고 서원을 건립하면서 숙수사 불상들을 죽계천에 던져버립니다.

그러자 불상들이 밤이면 물가로 뛰어나와 유생들을 놀라게 했다네요.

이에 주세붕이 '敬'자를 써서 바위에 음각하자 귀신들은 사라졌고.

학문하는 자들의 언어 유희를 통한 사기(詐技)는 예나 지금이나 별반 다른게 없습니다.

 

또다른 전설도 있어요.

단종복위거사가 실패한 뒤 시신이 죽계천에 수장되었고

영혼이 밤이면 나타나자 주세붕이 '敬'자를 새겼다네요.

'경이직내(敬以直內) 의이방외(義以方外)'에서 '敬'한 글자로 축소한 것.

'경으로써 마음을 곧게 하고,의로써 밖으로 드러나는 행동을 반듯하게 한다'는 뜻.

불가에 대한 성리학 우월성의 은유적 표현인게죠.

서원 영정각에는 국보가 한점있어요.

안양의 영정으로 1318년 원나라 화공이 그린 것을 조선 명종 때 고쳐 그린 것.

주세붕의 영정,당간지주도 보물로 지정.

소수서원에는 안향 외에도 퇴계,안축,주세붕도 배향되어있습니다.

학창시절 국문학사에서 경기체가에 대해 배우셨죠?

안축은 경기체가인 관동별곡,죽계별곡의 저자로 죽계별곡의 배경이 이곳 죽계천.

그는 '죽계별곡'(竹溪別曲)에서 이리~

 /아,소백산 높고 죽계수 맑은 풍경 그 어떠합니까/

 

역사에 조금만 관심 있어도 '서원의 적폐성'에 분노안할수가 없죠.

조선 후기 서원은 부패 당쟁의 온상,그리고 배움은 없고 추앙과 사대만 남은 곳.

유신시절 중앙정보부를 보면 당대 정치가 보이듯 서원을 보면 조선의 정치가 보입니다.

서원의 원래 취지는 강학하고 성현들을 제사지내는 것.그러나 이는 점차 구실에 불과.

서원들은 서원을 지렛대 삼아 유생,종가의 탐욕에 열을 올렸다는.

서원의 제사 공간을 흔히 대성전이라 부릅니다.

대성전은 대성지성문선왕(大成至聖文宣王),즉 공자의 덕을 추모하는 묘우(廟宇).

서원의 중심 건물로 공자는 文宣王으로 불리죠.

 

15년은 된듯.당시 관악산 등반은 늘 과천향교에서 출발하는데

언젠가 향교 안을 들어가 보고는 좀 충격을 먹었어요.

추앙,사대만 박제되어 있던 그 모습!

당시 그림은 이랬어요.

중심 건물 대성전에는 공자를 중심으로 성현들의 위폐가 모셔져있었죠.

공자는 중앙에 정위(正位)해 있고.

앞으로 탁자가 놓여있는데,

위엔 공자의 제자인 안회와 자사,공자 손자인 증자,그리고 맹자의 위폐가 있더군요.

그리고 벽면 따라 왼쪽 부터 중국의 대유(大儒) 위패들을 빙둘러섰고.

그 끄트머리에 조선 18현이 꽁무니를 잇고 있더라는.

이이,이황 등등이 중국 대유들 맨 꽁무니에 줄서서 있었던 것.

'조선은 소중화'라며 자위하던 18현이라는 면면은 이렇다는.

최치원,설총,안향,정몽,정여창,김굉필,이언적,조광조,김인후,이황,이이,성혼,조헌,김장생,송시열,김집,박세채,송준길.

 

당대 서원의 패악질은 이루 말할수 없었습니다.

예를 들어 볼까요?

'화양묵패(華陽墨牌)'는 송시열을 모시는 화양서원서 발행하는 서원의 징표.

화양서원은 명나라 황제 희종,신종을 제사지내던 만동묘와 함께 속리산 화양계곡에 있어요.

 

/화양서원은 일년 내내 전국에서 선비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성역이 되었다.

양반,유생들은 대부분이 서원의 재산으로 무위도식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크고 작은 감투가 이곳에서 배정되었다.

특권을 빙자하여 사당을 보수한다거나 제수를 마련한다는

이유로 지방관서나 고을 백성을 공갈 협박하고 금품을 강탈했다.
권력이 집중되고 특권이 행사되면서 백성들이 자진하여 서원의 노비가 되어 군역을 기피하였다.

심지어 죄를 지은 자들이 이곳에 피신하여 패거리를 형성하기도 하고,

화양서원이 자의로 발행하는 '화양묵패(華陽墨牌)'는 누구도 그 통첩을 어길 수 없었다.

화양묵패는 유생들이 모여앉아 제멋대로 남의 재산을 평가하고 고지서를 발송하는 것이다.

묵패를 받으면 관인이건 백성이건 또는 양반이건 논밭이라도 팔아서 바쳐야 했다.

만일 불응하게 되면 지체없이 서원으로 잡혀가서 공갈 협박을 당하게 되고,사사로이 형벌을 받기도 하였다.

이른바 화양묵패는 약탈을 전제로 한 협박장이나 다를 바 없었다./

〈한국의 서원>,대원사

 

흥선대원군도 초야시절 이곳에 들렀다가 문지기한테 봉변을 당했답니다.

이같은 패악질은 다른 서원에서도 크게 다를 바가 없었죠.

퇴계 이황 사후 둘째 아들이 지닌 노비 수만 수백명,전답이야 이루말할수 없고.

물론 그 물적 기반이 도산사당,서원이였을 터.

서원은 지방 수령도 어쩔수 없는 지역사회의 최고 권력으로 당쟁의 물적 기반.

대원군이 전국의 서원을 정리한 이유도 이같은 현실 때문.

대원군의 서원 정리는 시대적 적폐청산임에 분명합니다.

대원군의 위업은 이거 하나만으로도 충분.

중종~철종 시기 전국에 417개 서원이 생겼죠.

이중 40%가 영남에,특히 경북 북부지방에 집중.

지금도 경북북부 지역이 추로지향(鄒魯之鄕),즉 공맹의 고향이라며 자부심을 지닌 이유죠.

소수서원은 매년 초기 10여명에서 나중에는 30여명이 입학.

그동안 거쳐가 유생만도 4천여명에 이른답니다.




서사 9....단종 복위운동 거점 순흥 금성단.

 

금성단(錦城壇)은 소수서원 맞은편에 있어요

보통 시간에 쫏기다 보니 놓치기 쉽죠.

금성단은 바로 단종복위를 도모하다가 순절한 이들의 제사단.

왕위를 찬탈한 세조(世祖)는 사육신 사건을 계기로 대규모의 숙청을 가하죠.

먼저 단종을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봉하여 영월로 청령포에 유폐시킵니다.

세종의 6번째 왕자인 아우 금성대군(錦城大君)은 이곳 순흥에 위리안치(圍籬安置).

금성대군은 순흥부사 이보흠을 비롯한 순흥 일대 유생,향리들과 모의 단종복위를 도모합니다.

그러나 관노의 밀고로 실패하고 피의 숙청이 인근 죽계천 일대에서 벌어졌죠.

이후 이들은 숙종 조에 복권되어 추모단을 조성.

중앙에 금성대군 위(位)를,우측에 이보흠 위를,왼쪽에 무명 위를 모셨네요.



금성단 뒤에 있는 7백년 된 은행나무가 당시 상황을 증언하고


고치령의 단종과 금성대군을 주신으로 모시는 산령각


당시 복귀도모 과정을 인문지리로 접근하면 이리.

바로 죽령과 더불어 당대 소백산 2대 고갯길이였던 고치령 얘기.

단종복위 거사자들은 '고치령' 넘어 영월에 있는 단종과 선을 대기 위해 순흥~영월을 오갔거든요.

그 실증이 고치령 정상에 금성대군 신위를 모신 산신당입니다.

 

고치령(古峙嶺,770m)은 영주시 단산면 좌석리,마락리~단양군 영춘면 의풍리를 동서로 연결해요.

국가 기간도로 죽령과 달리 장돌뱅이나 주민들이 넘나들던 일상의 고개죠.

한때는 죽령 다음으로 애용되던 길.

수많은 민초들이 삶을 위해 넘던 고개지만 한때는 역사의 고갯길이 되기도.

고치령은 단종과 금성대군등의 죽음을 지켜 본 증인.

고치령은 단종이 있던 강원도 영월과 금성대군이 있는 경상북도 순흥을 잇는 가장 가까운 길.

당시 영월에는 단종이,순흥에는 금성대군이 유배 되어 있었고

복위를 도모하던 그들은 고치령을 오고가며 연락을 주고받았다는.

복위운동을 준비하던 중 거사는 발각되어 이들 모두 죽계천서 죽음을 당합니다.

민초들은 그런 고치령에 산신각을 세우고 단종을 태백산의 산신으로,

금성대군을 소백산의 산신으로 모셨네요.

그 정신들이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는(사진). 

영월의 단종이 어느날 하얀 도포차림에 흰 말을 타고 고치령을 넘어가고 있었답니다.

'어디를 가시느냐' 고 여쭙는 백성들에게 단종은 '태백산에 간다'고 답했고.

전날밤 단종은 영월 동헌에서 삼촌 세조가 보낸 밀사에 의해 목졸라 숨졌고.

죽은 단종은 태백산 산신이 되어 고치령 넘어 태백산으로 가던 중 길목에 백성들을 만난 것이죠.

~~라는 얘기가 전합니다.

 

서사 10...'청다리,다리 밑에서 주워왔다고?'

 

누구나 그런 탄생 운명이었지만 '다리 밑에서 주워왔다'는 말의 진원지 '청다리'를 얘기 안할수가요.

 금성단 옆 죽계천을 가로지르는 다리를 '청다리'라고 부릅니다.

청다리 앞엔 1710년 숙종조에 세운 '제월교'라고 쓰여진 비석이 있은 것으로 보아 원 이름은 제월교.

霽月橋,,,비갠 후 달을 보는 것이니 운치있는 이름이네요.

청다리는 아이들을 놀릴 때 쓰는 '다리 밑에서 주워왔다'는 말의 진원지가 되는 곳.

소수서원에서 공부하던 유생들은 금지옥엽들.

그래서 보통 여종들이나 노비들이 딸려와 인근에 기거하며 원생들을 돌보았다는.

청춘들인데 어쩔 것인가,간혹 마을 처녀나 여종과 '사고' 치는 일이 잦았겠죠.

아이를 낳게 되면 밤중 몰래 청다리 밑에 버리게 했다가,

다음날 우연히 아이를 발견한 양 꾸며서 본가에 데려다가 키웠다나.

이는 신분을 넘는 성춘향 사랑이였다면 가능한 시나리오.

또 언제부턴지 소문이 퍼졌겠죠..

애를 갖지 못한 사람들이 청다리 앞에서 기다리기도 했답니다.

혈통 좋은 유생들의 아이들인지라.

 

청다리엔 또다른 얘기가요

60년대 초만하더라도 청다리는 나무다리.

저녁에 건널 때는 머리에 동백꽃을 꼿고 소꼬리를 잡고 건너야 했답니다.

귀신이 붉은 동백꽃에 해꼬지 못할 것이고,서로들 소꼬리를 잡고 건너야 안전했던 것.

귀신은 당연 단종 복위 사건으로 죽은 죽계천 원혼들이나 유아방치 원혼들일 터.

  또 있어요!

청다리엔 살아있는 부모에게는 효도지만 죽은 부모에게는 불효인 이야기.

/죽계천의 남쪽 마을에는 아들을 하나 둔 과부가 있었다.
죽계천 북쪽에는 짚신을 삼아서 파는 짚신장수 홀애비가 살고 있었고.

이 짚신장수는 순흥 시장에 짚신을 팔러왔다가 과부와 눈이 맞았다.

밤중이면 과부는 님 보러 죽계천의 물을 건넜다.
추운 겨울에 발을 적져가며 건넌다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었다.

이를 보다 못한 아들이 어머니를 위해서 돌다리를 놓아드렸다.

돌다리도 어두운 겨울밤에 건너기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마침 순흥 고을로 중앙에서 높은 분이 내려온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아들은 그날 앞에 나아가 어머니의 일을 고하고 '다리를 놓아달라'는 청을 넣었다.

청을 넣어서 놓은 다리이기에 청(請)다리가 되었다./

  소수서원,금성단,청다리는 걸어 10분 내에 있는 한묶음.

청다리 바로 아래 영주 선비마을이 문을 열었으니 새로울 것이 없고.

부석사 가는 길엔 반드시 청다리를 건너야.



시선을 거두고 부석사 창건주를 모시는 조사당(祖師堂)으로 향합니다.



삼층석탑이 있는 동쪽 둔덕에 서면 자연스럽게 뒷 산길이 조사당으로 유도합니다.

부석사의 개창조 의상을 모신 조사당(祖師堂)으로 가는 길.

조사당은 창건주 의상과 역대 고승의 영정을 모시는 곳.

조사 신앙이란 그 사찰의 창건 스님이나 고승을 모시는 선종에서 유래한 전통.

신라 하대,그러니까 의상이 죽고 1백여년 후에 들어온 선종 영향을 받은 것.


딱다구리 집.

 

굴착의 대가 답게 집도 나무동굴이네요.

짹짹짹~~ 새끼 새들의 어미를 찾는 소리.

인기척이 일자 구멍 옆에 있던 어미새는 금방 앞 나무로 날아가고.

새끼를 위치가 드러나지 않도록.

벗어나 뒤돌아보니 어느새 새끼 옆으로 다가와 있네요.


祖師堂........(2012년 늦가을)

 

900년 전 건축물.

부석사를 연 의상대사를 기리는 곳이겠죠.

오솔길을 지그재그로 5분여 걷다보면 오솔길 옆으로 작은 축대들이 보여요.

 먼저 조사당 추녀가 빼꼼이 방문자를 맞죠.

드러나는 건축부재에서 강인함이 먼저 느껴지는 곳.

나무잎들 사이로 처마와 암키와가 만들어낸 미감이 여간 산뜻한게 아니죠.



축대를 돌아 들어서니 측면이 먼저 반기죠.

측면의 사람 인(人)자 모양을 한 맞배지붕의 드러난 목재들이 단아합니다.

사용 부재를 그대로 드러낸 입체감이 미소짓게 하죠.



정면 3칸,측면 1칸 주심포 양식.

시기적으론 비슷하나 건축 구조가 무량수전보다 간결.

앞면 가운데 칸은 출입문이고 좌우로는 빛을 받기 위한 광창(光窓)을 설치.

고(古) 건축의 표본이라 국보로 지정.

조사당은 작지만,부처님 상주처 이상으로 귀하게 다뤘네요.

바닥은 부처나 임금의 상주처에나 까는 전돌(구은 벽돌)을 깔았죠.

네 벽에는 천상을 지키는 사천왕상,보살상을 그려넣었고.

여기서 우린 당대 의상대사의 시대적 파워를 읽을 수 있네요.

(무량수전 바닥에 깔린 녹유전돌은 유물각에 일부가 남아있습니다)

 

조사당 벽화(국보)는 사찰 벽화 중 최고 오랜 역사를 지녔어요.

현재 벽화는 벽채로 떼어내 유물각에 보존되어있고.

현 조사당은 무량수전과 같이 공민왕의 국사였던 진각국사가 우왕 (1377)때 중건.

이후 조선 성종(1490) 때 다시 고쳤고. 

이렇게 조사를 부처의 위치까지 격상시켰으니

조사당 건립은 9세기 말 선종의 유입 이후일 것으로 추측.

그러고 보니 선종의 구산선문(九山禪門) 개창조 중 세명이 젊은 시절 부석사를 거쳤네요.

동리산문을 연 곡성 태안사의 혜철(785~861)은 7년을,

성주산파 보령 성주사의 무염(800~888)도 여러해 머물다 당나라로 유학을 떠났고.

희양산파 문경 봉암사 도헌(824~882)은 7세에 출가해 17세에 계를 받을 때 까지 부석사에서 공부했다는.


흉물 선비화 보호 철창



그런데 현재 조사당 정면을 보노라면 황당한 풍경에 고개가 절로 돌아가요.

의상이 꽂은 지팡이에서 이파리가 돋았다는 선비화 한 그루를 보호한답시고 쇠창살을 쳐놓았거든요.

이 단아안 고 건물 정면에 21세기 쇠창살이라니...

선비화 연령은 아무리 높게 봐도 수십년으로 20세기 언젠가 사찰에서 심어놓았겠죠.

쇠창살 안엔 지전,동전이 여기저기.

15세기에도 선비화는 있었는지,

퇴계는 詩 '부석사 비선화'를 지었고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조사당 선비화를 언급했다는..


서산시 개심사 선비화.  

선비화란 걸 이번 봄 서산 개심사에서 처음 알았다는.

골담초라고도 하더군요.


측면에서 보면.

900년 전 건축로 고건축 편년을 세우는데 기준이 됩니다.

흉칙한 쇠창살 보이시죠?

선비화 심어놓고 신심을 자극하는 21세기 종교적 상술.




조사당에서 언덕배기를 돌아 서쪽 1백여미터 거리에

나한상을 모셔놓은 단하각,그리고 응진전,자인당이 있어요.

전각 안에는 인근 폐사지서 가져온 불상들이 있어 한번 볼만하죠.

그러나 이보단 마당 앞으로 펼쳐지는 풍광이 장쾌해요

멀리 소백연봉이,아래로는 소백산 지능선들이 겹겹이 구비칩니다.

   

&&&.....


마구령(894m)

 

이젠 부석사를 떠나야할 시간.

소백 능선 너머 남한강변 온달산성을 가려합니다.

신라와 고구려가 영토 확장 전초기지로 쌓았던 그 곳.

그 온달산성이 소백산 국망봉 너머에 있습니다.

그럼 온달산성에 이르는 방법은??

풍기로 다시 나가 옛죽령을 넘거나,

죽령 아래 중앙고속도로를 터널로 타거나,

중앙선 철도를 타거나,

모두 단양으로 이동 후 522 지방도로 타고 남한강을 거슬러 올라야합니다.


그러나 더 가까운 길이 하나 있어요....마구령(894m)

부석사 진입 직전의 935번 지방도로를 타고 조심조심 고갯길을 넘는 것.

임도를 포장한 비좁은 1차선이라 트럭이나 버스는 불가능.

마구령(894m)은 소백산 등줄기 중 가장 동쪽에 위치합니다.

영주시 부석면 남대리~임곡리를 이어주죠.

백두대간 상에 위치해 수많은 대간 종주자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는 곳이기도.

요즘엔 자전거 동호회원들의 라이딩 코스로 대인기라 보니

 마구령 정상에 서면 종주꾼과 라이더들이 서로들 교차하는 것을 볼수있어요.

마구령을 넘은 935번 지방도로는 남대리 삼거리를 지나고,

남대천을 끼고 더 가다보면 남한강 변 충북 영춘(온달산성)까지 이어지죠.


고치령(古峙嶺,770m)

 

죽령과 마구령이 대표적이지만 소백산에는 여러 큰 고갯길이 있어요.

서쪽에서 동쪽으로 죽령~늦은맥이재~마당치~고치령~마구령~배틀재가 이어지죠.

1) 죽령은 단양~풍기를 남북으로,

2)늦은맥이재는 영주시 단산면 좌석리에서 단양군 가곡면 보발리로 넘어가는 고개.

높은 봉우리 사이에서 다소 나지막한 고개라고 해서 불러진.

그러나 실제로는 1,046m로 마구령 등 보다 가장 높은 곳에 위치.

3)마당치를 넘으면 조계종과 더불어 2대 종단 천태종의 총본산 구인사와 온달산성에 이르고,

5)배틀재는 소백산 동북 사면과 영월 마대산 사이를 넘는 고갯길로 영춘면 의풍리와 동대리를 잇고.

6)고치령(古峙嶺,770m)은 영주시 단산면 좌석리~마락리~단양군 영춘면 의풍리를 동서로 잇는.

권력들의 기간도로 죽령과 달리 장돌뱅이나 주민들이 넘나들던 일상의 고개죠.

한때는 죽령 다음으로 마구령 보다 더 애용되던 길.

민초들이 삶을 위해 넘던 고개지만 한때는 '역사의 고갯길'이였다는.

고치령은 단종과 금성대군등의 죽음을 지켜 본 산증인으로

단종이 있던 영월과 금성대군의 순흥을 잇는 가장 가까운 길.

당시 영월에는 단종이,순흥에는 금성대군이 유배되어 있었죠.

단종 복위운동 세력들은 고치령을 오고가며 연락을 주고받았다는.

그러나 거사는 발각되어 이들 모두 죽음을 당했고.

민초들은 그런 고치령에 산신각을 세우고 단종을 태백산의 산신으로,

금성대군을 소백산의 산신으로 대대로 모셨습니다.

 

그런데 마구령을 넘으면 백성들의 수탈없는 세상에 대한 염원 담긴 지명들이 있어요.

'命生洞'....未死里' 등등

마구령(馬駒嶺)을 넘으면 남대리 삼거리가 나오고 '주막거리'로 불리는 옛마을이 나와요.

옛날 보부상들이 '말을 타고 넘나드는 길'이라서 마구령이라.

온달산성과 지척이라 말과 군사들이 넘었다해서 마군령(馬軍嶺)으로 불렸다는 얘기도 있구요.

충북 단양이나 강원도 영월 쪽에서 온 장사꾼들은

저녁 늦게 남대리에 도착해 주막에서 하루를 묵고 다음날 일찍 고개를 넘었겠죠.
소나 말을 끌고 온 사람도 많았기에 주막에는 마구간도 딸려 있었으니 '마굿간'에서 왔을지도.

인문지리적 관점에서 관심을 끄는데 이곳 삼거리가 삼도(三道)의 분기점이라는 것.

우회전하면 경북 봉화요,

좌회전하면 충북 영춘군 의풍리요,

산을 넘으면 강원 영월군 와석리가 됩니다.

그래서 주막거리 앞산을 삼도봉이라고 부르죠.

삼도봉(三道峰)이 몇 있어요.

충북 영동,경북 김천,전북 무주를 가르는 민주지산에도,

전남,전북,경남을 가르는 지리산 반야봉 아래도 삼도봉이 있습니다.

그리고 삼거리서 충북 단양군 영춘으로 난 935번 도로를 택하면 영춘군 의풍리가 나와요.

의풍리에서 동쪽으로 임도(林道)따라 영월군 김삿갓면 와석리 노루목까지는 걸어 1시간으로 지척.

바로 이 노루목에서 김삿갓(1807~1863)이 자랐고 신혼을 보냈네요.

그는 차남을 얻은 후 노루목을 넘어 30년 유량길을 떠났고,

죽어서는 그 차남 등에 업혀 노루목을 넘어와 묻혔다는.

 

김삿갓 선대가 멸족의 위기를 피해 파주에서 들어왔듯 일대는 십승지로 여기던 곳.

명종 때 남사고가 지은 '남격암 산수십승 보길지지'(南格菴山水十勝保吉之地)에도 이곳을 10승지로 지목했네요.

求人種於兩白!!

'사람은 소백과 태백 사이에서 구하라'

난세를 피해 이곳 양백지간에 들어왔겠죠.

기묘사화 때 노루목 바로 옆 어래산(御來山,1063미터) 미사리 계곡으로 조광조 후손들이 흘러 들어왔어요.

그래서 조촌(趙村)이라는 마을을 생겼죠.

조촌서 미사리 계곡을 따라 더 오르면 명생동(命生洞)이 나옵니다.

命生洞....목숨을 부지할 수 있는 곳.

미사리 계곡의 미사리는 '未死里'.

'죽지않는 마을' 이니 이곳에 정착한 이유를 알만하네요.

 

난 지금 마음으로만 마구령을 넘고있어요.

풍기역으로 유턴해 ktx를 타고 단양으로,그리고 단양서 택시를 탑니다.

온달산성 향해~~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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