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서울에 일이 있던 어느 날 K를 만난 적 있다. 특별한 용건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K학교 근처에서 일이 있었고 기말이라고 2주째 집에 오지 않은 아이 얼굴도 보고
점심이라도 사줄까 해서 불러냈었다.
‘앞으로 무슨 일을 하게 될지, 자기가 뭘 좋아하는지 모르겠다.’
‘아무래도 난 게으른 것 같다. 뭘 해도 막 좋은 게 없다.’
‘내 고민과 불안의 제일 큰 문제는 게으름 인거 같다.’며 나름 진지해진 K를 봤다.
기특하기도 안쓰럽기도 한 K의 고민 앞에서 내가 해줄 말은 별로 없었다.
그저 들어주는 것 말곤.
30여분 속풀이하고 일어나려는 K에게
“게으름이 문제라면 생활 습관을 바꿔 봐. 사소한 습관을 열과 성을 다해 바꿔 봐”
“바꾸기 힘든 것에 도전했다 좌절, 실망하지 말고 좀 만만하고 사소한.”
“그러면 성취감도 있고 그 사소한 습관이 나머지 너의 생활을 바꿔 줄 거야. 삶이 바뀌는 거지”
“사소한 습관? 어떤 거!”라고 묻기에
“예를 들면 매일 정해진 시간에 일어나기, 수업 없다고 다시 잠들면 소용없고”
“열과 성을 다하라는 건 그 사소한 습관에 나머지를 맞춰 가는 거야.”
“아침 밥 꼭 먹기, 이런 것도 좋은데. 이걸 목표로 한다면, 우선 아침 배식시간에 일어나야 하고 아침 정말 열심히 먹어야 하고 그리고 나면 또 뭔가를 해야 하는 거지. 그래서 열과 성을 다한다면 나머지 핵심 습관까지 바뀐다는 거야.”
“무엇이든 괜찮아, 10분 먼저 일어나기, 정해진 시간에 산책하기, 알람이 울리면 강시처럼 그냥 일어나기. 커피 안 먹기 이런 것도 좋아. 열과 성을 다해 사소한 거에 목숨 걸어 봐. 작은 균열내기!!!”
이거 좋네 하는 표정으로, “아침 먹기!”라며 눈을 반짝거리는 K에게,
“딸, 너무 고민하고 불안해하지 마. 다 잘 될 거야.”
“쿵푸 팬더라는 만화 영화가 있는데 아주 철학적인 대사가 나와. ‘Yesterday is history, Tomorrow is a mystery. But today is a gift. That's why it's called the present.’ 라는. 어떤 블러그에서 이 대사를 인용한 글을 읽고 다운 받아서 봤는데 너도 한 번 봐봐. 쿵푸 배우려는 곰이 자신에게 실망하고 포기하려는 장면에서 나오거든. 미래를 준비하고 계획하지 말라는 얘기가 아니라 지난 것에 얽매이고 오지 않은 미래 때문에 불안과 실망으로 현재를 보내지 말라는 얘기야. 선물처럼 너에게 주어진 현재가 미래를 바꾸기도 하고 과거를 다시 해석해주기도 하니까. 현재에 집중하기.” 라는 말을 마지막으로 우린 헤어졌다. K는 학교로, 나는…….
텃밭에 청갓이 군데 군데 났다. 따로 씨 뿌린 것 아니니 작년 씨앗이 떨어져 자란듯하다. 5월 청갓을 뽑았다. 물김치를 담았다. 역시 텃밭서 잘라온 두메부추와 함께. 청갓이라 자색이 빛이 돌지 않은 게 흠이지만 시원한 국물과 갓 특유의 매운 맛이 올라오는 깔끔함이 좋다. 만사 귀찮고 더운 날은 국수 휘리릭 삶아 청갓물김치에 말아 후루룩~~~ 얼음 한주먹 넣어도 좋고.
* 간편 청갓 물김치
다시마 물에 소금과 맛간장으로 조금 짭짤하게 국물을 만들어 다진마늘 갈은 양파같은 양념을 합니다. 잘 씻어 물기 뺀 청갓과 두메부추에 부어 줍니다. 대추는 조금 큼직하게 져며 넣었습니다. 갓은 절인게 아니기에 실온상태에서 하루 이틀 놔두는 동안 수시로 뒤집어 주어야 합니다.
#2
계절학기 때문에 기숙사에 있겠다는 K가, 초여름 더위 치곤 꽤 더웠던 지난 금요일 기말고사 끝났다며 3주 만에 집에 왔다. 외식했다. 30도가 넘었던 더위 탓인지 식당서 나오는데 비가 쏟아지기 시작한다. 우산도 없고 소나기 인 듯해서 파라솔 있는 야외 테이블에 앉아 기다리기로 했다. H씨와 K는 생각 없다기에 나만 진한 커피 한 잔 뽑아 왔더니, 무슨 이야기 끝인지 K가 쇼펜하우어 얘길 한다. “작년에 강의 들을 때 정말 천재도 이런 천재가 없다고 생각했어. 존재하는 게 고통이래. 이래서 고통이고 저래서 사는 게 고통이고 이유를 드는데 그 이유가 다 공감되는 거야.” 라며 감탄을 하고. H씨는 자신이 들었다는 철학사 강의 내용을 보태며, 후드득 파라솔로 떨어지는 빗소리 속에 수다 삼매경에 빠져 있다.
“아빠는 어때?” 하는 물음에,
“맞아, 하지만 존재만으로 고통이겠어? 집착하니까 고통일 거야.”라고 짧게 대답하고 말았다. “아마도 당시 ‘신성에서 벗어나는 과정’으로 이해해야 하고 존재하는 게 고통이라고 존재자체를 부정하는 게 아닐 걸…….” 따위의 말을 보태고 싶었으나 잘 모르기도 하고 H씨가 얘기 했을지도 몰라 그만 두었다.
*막걸리와 부추전
다들 아시기도 하지만 혹 모르시는 분도 계시니 부침개 반죽하는 요령 하나.
1)먼저 재료와 밀가루를 골고루 섞어줍니다. 적당한 크기로 자른 부추와 고추를 넣고 소금간도 하고 역시 적당량의 밀가루와 잘 섞어줍니다.
2) 역시 적당량의 물을 붓습니다. 잘 저어줍니다. 반죽이 묽으면 이상태에서 밀가루를 더 넣어도 덩어리가 뭉치지 않습니다.
3) 바삭한 부쳐진 부침개에 막걸리 한 잔 맛나게 먹습니다.
#3
일요일, 습하고 덥고 흐린 날.
어디 쾌적하고 시원한데 가자는 말에, “1번 교보문고나 도서관에 간다? 2번 차타고 어디든 간다?”라고 고르라 했더니 H씨와 K 의견분분한 끝에 광교산 어느 골짜기 앉았었다. 역시 화제는 K의 고민과 미래에 대한 불안. 두어 시간 얘기 끝에 H씨 K에게 묻는다.
“근데 넌 봉사활동 같은 거 안 할 거야?”
“몰라, 딱히 하고 싶은 것도 없고 시간이나 조건이 마땅한 것도 없어, 나중에 하지 뭐”라는 K대답에. “요즘은 그런 것도 스펙으로 필요하다고 하던데…….”라며 염려하자. “뭔 상관이야. 필요하면 그 때 하면 되지. 휴학하고 하면 돼.”라고 살짝 짜증을 낸다. “대학의 좋은 점이 그거잖아. 필요하면 졸업안하면 돼. 전엔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해야 하고 시간은 없고 왜 필요한지도 모르면서 짜증만 냈는데 이젠 알았어. 그냥 필요하면 필요할 때 하면 된다는 거.”라고 대답하는 K에게 H씨 “그래, 맞다. 네가 알아서 하면 돼.”라고 마무리 지었다.
<K를 위해 등심도 구었던 밥상>
<물김치 담갔던 청갓과 두메부추 거내 깨만 솔솔 뿌려 무침처럼>
요즘 20대 초반의 불안과 고민을 엿볼 수 있는 장면들이었다.
이제는 스스로 제 삶을 고민하는 것 같아 대견하게 보이기도 했다.
딸, 뭔가 갈피를 잡을 수 없을 때, 어수선한 상황일 때, 네가 뭘 원하는지 조차 알 수 없을 때, 길을 잃었다고 생각 될 때 작고 사소한 것에 집중해 보렴. 열과 성을 다해 그 작고 사소한 것에 집중해보렴 그러면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길이 열리고 상황이 정리되고 너의 자리가 생기는 걸 겪을 수 있을 거다.
오늘도 행복하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