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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상식의 시대 / 딴지펌

하얀반달 조회수 : 360
작성일 : 2011-01-14 17:49:37


-몰상식의 시대-



시대는 단 한 번도 나를 비켜가지 않았다. 봉하에 갔을 때, 이 문구가 쓰인 곳 앞에서 한참을 서 있었다. 이렇게 쓰고 보니 꽤나 거창한 말 같지만 세상 누구도 시대가 비켜가지는 않는다.

  

겨울에는 장미 값이 비싸다. 농장에서 비닐하우스 안에 난방을 해야 하기 때문에 기온이 떨어질수록 생산원가가 높아진다. 그렇게 재배된 장미는 꽃가게의 냉장고에서 보관 되고 꽃 냉장고의 온도는 10℃에서 11℃ 사이로 유지된다. 흔히 말하는 온실 속의 꽃은 죽는 순간까지 겨울을 모르는 셈이다. 같은 이름으로 불린다고 해도 종자에 따라 겨울을 모르고 사는 장미가 있고, 추운 겨울을 넘기지 못하고 얼어 죽는 장미도 있다.

  

내 부모님은 선량하고 부지런하다. 그리고 가난하다. 가난한 집의 장남으로 사는 건 자신의 나이를 살지 못한다는 뜻이다. 나는 어려서부터 애늙은이라는 소리를 들었고 세상이 공평하지 않다는 걸 일찌감치 알았다. 그런데, 세상이 불공평하고 뱁새가 황새를 따라가면 가랑이가 찢어진다는 걸 알면서도 헛꿈을 꾼 적이 있다.

  

가난한 학생이 공부하기 좋은 나라에 대해 듣는다. 외국어 공부를 시작하고 돈을 모은다. 그렇게 모은 돈이 딱 천만원 만 되면 미련 없이 뜨자고 결심한다. 그런 어느 날, 가족들은 도움을 필요로 하고 아직 천만원이 되지 못한 월급들은 조금씩 사라져간다. 그깟 유학 따위가 아니어도 잘 살 수 있다고 다짐하며 꿈을 접는 날 혼자 소주를 마신다. 팔자가 그렇다면 새삼 아플 것도 없다고 생각하지만 술에 취해서 누우면 눈물이 난다. 그리고 얼마 후, 친구가 아버지의 신용카드로 이천만원이 넘는 차를 계약하는 걸 본다.

  

하루키가 충고했다. 자기 자신을 동정하지 말라고. 그건 비열한 자나 하는 짓이라고. 자신을 동정하는 게 비열한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누구도 관심 없는 꿈을 못 잊어서 소주를 마시는 게 비참하다는 건 알았다.

  

어느 대학교의 비정규직 청소부들과 학생회에 대한 기사를 봤다. 누군가의 아내이고, 어머니인 그녀들이 정규직 노동자가 되고 계속 일 할 수 있기를 바란 건 터무니없이 큰 꿈인지도 모르겠다.

  

나중에 서울대에 입학할 것이고, 아니면 연, 고대라도 갈 거라고 믿는 게 초딩들의 착각이라면, 졸업 후엔 적어도 연봉 삼천만원 이상의 정규직 근로자가 될 거라고 믿는 건 대딩들의 착각이다. 그들이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하지 못할 바에는 자기 자신이라도 이롭게 하기를 빈다. 그렇게 살다 인생이 꼬이고, 운명이 변덕스럽고, 세상이 나에게만 지-랄맞게 구는 것처럼 느껴지더라도 너무 실망하지 않기를, 역시 빈다. 삶은 원래 불공평하고 사람은 타인의 고통에 관대하다. 시대는 누구도 절대로 비켜가지 않는다.

  

사람에 따라 자기가 사는 시대를 다르게 느끼겠지만 누군가 나에게 이 시대를 정의해 보라고 한다면, 나는 지금을 몰상식의 시대라고 하겠다. 내가 보는 몰상식이 다른 사람에겐 상식일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그것이 정치인들의 책임은 아니라고 믿는다. 대통령이 인류로 바뀌고 집권당이 우리나라의 정당으로 바뀐다고 해도, 그것만으로 세상이 공정해지고 약한 자의 권리가 보호 받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거라는 뜻이다.

  

‘부모의 가난이 부끄럽다’고 할 때 쓰인 것과 ‘불의를 보고 참을 수밖에 없었던 내가 부끄럽다’에 쓰인 부끄러움은 다른 부끄러움이다. 앞의 것을 위신에 관한 문제라고 한다면 뒤의 것은 양심의 문제이고, 어느 것을 더 부끄러워할 것인지는 각자의 선택이다. 피에르 신부님은 말했다. 세 사람이 있는데 가장 힘센 자가 가장 힘없는 자를 착취하려 할 때 나머지 한 사람이 ‘네가 나를 죽이지 않고서는 이 힘없는 자를 아프게 하지 못할 것이다.’ 라고 말할 때 하늘나라는 이미 이곳에 있다.





http://www.ddanzi.com/board/55148.html
IP : 58.235.xxx.68
2 개의 댓글이 있습니다.
  • 1. 하얀반달
    '11.1.14 5:49 PM (58.235.xxx.68)

    http://www.ddanzi.com/board/55148.html

  • 2. asd
    '11.1.14 7:10 PM (222.101.xxx.12)

    가슴을 찌르는 말이군요
    우리는 점점 극단적으로 자신만을 이롭게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합니다
    몇년전만 해도 사회전반적인 분위기가 이 지경까지는 아니었는데..
    패배감이 드는저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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