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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의 눈물, 감자를 먹을 수 없는 이유
사실 결혼하고 제사 때 내려간 건 작년이 처음이고요;;;;
제주도는 옛날부터 워낙 척박하고 못살던 고장이라서 제삿상도 조촐하고
의외로 제사문화가 합리적인 면이 있더라구요. 합제를 하는 경우도 많고
명절과 제사도 자녀들이 아이낳고 나이가 들면 맏이가 몰아서 하지 않고 나눠서 하는 등...
(맏이라서 이거 진짜 맘에 들었음 ㅋ)
제가 제주도와 처음으로 인연을 맺은 건...
대학 새내기 시절 3월말 즈음 이었어요.
요즘은 대학가에서도 드문 풍경이지만,
인터넷이 활성화되지 않았고, PC 통신이나 겨우 하던 때이니
학생들이 학내 소식과 또 세상의 소식을 알 수 있었던 것 순전히 대자보였지요.
역시 삐삐로 연락을 주고 받던 시기이니
과나 동아리 모임에 조금 늦게 가게 된 하이에나들은, 교문 앞 대자보 판에 적힌 메모를 보고서
맥주에 쏘야나 막걸리에 떡볶이 냄새를 맡을 수 있었죠.
(** 동아리 새내기, ** 주점으로 오기바람, 일행 없을시, 주인 이모님께 문의바람. -> 이런 식 ^^)
해가 질무렵, 그 날따라 수업이 늦게 끝났는지, 숙제를 한다고 그랬는지 혼자서 헐레벌떡
교문을 나서며 자보판을 확인하는데 그 옆에 오늘은 아주 생경한 싯구가 붙어있는 거였어요.
'감자'에 대한 시가 있길래 신기하다 싶어 눈으로 훑다가
저는 자리에 주저앉았습니다. 나도 모르게.
제주 사람들은 인육을 거름삼아 자란 주먹감자를 더 이상 먹지 못한다...
는 내용이었던 걸로 기억해요. 제주 향우회 학생들이 붙인 대자보였죠.
고등학교 때 지구과학 선생님께서는 유독 현대사 이야기를 즐겨 들려주셨는데, 그 때 얼핏 들은
4.3이 스쳐갔습니다.
세상에 대한 어설픈 관심이 구체적인 관심과 실천(을 했다기 보다는 해야겠다고 생각하는 정도 ^^;;)으로
이어진 건 순전히 이 시 때문이었고요.
제주와의 인연이 남긴 또 다른 성과(인지 업보인지는 더 살아봐야 알겠지만)는...
겨울 영하 1도에도 춥다고 집에서 파카를 떨쳐입는 따스한 남쪽나라 제주 출신 동방생 정도?
따스한 남쪽이어도 서릿발 날리게 추웠을 이맘 때,
동방생의 할아버지는 자식 셋과 부인에게 얼른 피신하라는 말을 남기고
부인은 아직 어린 꼬마 셋을 데리고 초가집, 보잘 것 없는 세간을 몽땅 버리고
한라산을 넘어서 흙발로 제주시로 오게 되지요.
이제 막 십대가 된 큰 딸은 그래도 의젓하게 무서움에 떠는 동생들을 애써 달랬을 것이고,
막내 아들은 도대체 무슨 일이 난건지 어리둥절, 제주시에 와 태어나서 처음으로 자동차도
보았을 겁니다. 애들을 줄줄이 끌고 제주시에 거의 당도하니
한라산 너머엔.. 세상이 망해 밤낮이 바뀌어 한 밤 중에도 괴이한 태양이 빛나듯
붉은 빛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구요.
붉은 달.
그 때 세 아이의 엄마는 제 나이 정도였고.
산너머 붉은 달과 함께한 아이의 아빠는 제 나이보다도 조금 어린 패기 만만한 청년이었고...
동방생이 주워들은 말에 따르면,
평범한 농부였던 남편이 언젠가부터 며칠씩 집에 안 들어오기도 하고,
또 낯선 이들이 집에 다녀가기도 하고,
비슷한 또래의 청년들과 몰려다니기도 하고,
그러더니 어린 시절 한라산 중산간에서 소몰고 말모는 소치기(소태우리), 말치기(말태루이) 소녀가,
17살에 시집와, 시집과 식구들이 너무 낯설어 바로 다음날 시집이 한달음에 친정으로 도망쳤다가
친정 아버지에게 꾸중을 듣던 나의 시할머님.
그 애기 엄마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붉은 달'을 보게 되지요.
지금도 시할머님은 당시 남편이 '정확히' 무슨 일을 했는지,
시쳇말로 사건을 주도한 남로당 계열 빨치산 지도부였는지
그저 서북청년단과 정부의 무자비한 탄압에 저항하는 양심적인 동네 청년이었는지
딱부러지게 말씀하신 바는 없다고 합니다. 정말 모르시는 것 같기도 하구요.
(물론 남로당과 진압군이 대치하는 과정에서 빨치산이 민가에 내려와 막무가내로 먹을 것을 요구한 일도 있었고,
과격 청년들을 훈계하다 맞아 죽은 평범한 사람들도 있었지요)
무슨 시대극에나 나올 법한 이야기처럼
아이 엄마의 남편은 4.3의 희생자이고, 한 동생은 경찰 간부, 또 한 동생은 당시 인텔리 사회주의자...
또 이런 비슷한 사연이 마을마다 주렁주렁.
제가 시집와서 가장 신기했던 게 큰댁 명절 차례상엔 어찌나 젯밥들이 많이 올려져 있는지...
그 분들의 생김새, 성격은 다 달랐지만 모두들 붉은 달 속에서 산화하셨던 분이지요.
그런데 허름한 시골집 안방, 젯상 뒤에 병풍은 왜 '반야심경' 이었을까요.
시아버지 말씀으로는 알뜰한 큰어머니가 그게 젤 싸서 사신거라고도 하시지만 ^^;;;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
제게는 산 속에서 극악한 시대의 수레바퀴 밖의 길을 가신 영혼과 아주 잘 어울리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잠시 들었습니다.
그런데, 할머님은 그 날의 기억과 살아왔던 이야기를 늘 특유의 입담과 사라져가는 제주 사투리로 풀어주셨는데, 연세가 워낙 많으셔서 극도로 쇠약해지셨지요. 한 번 말씀을 시작하시면 지칠 줄 모르셨는데,
그렇게 기운없으신 모습은 처음 이었습니다.
건강이 쇠약해지신 것도 맘이 아팠고,
외람되지만 않다면 돌아가시 전에 꼭 제주 방언과 이야기를 채록해야지 막연하게 생각해왔는데
이제 1년 전의 그 당당하고 맛깔나는 이야기 정도나 들을 수 있을까 걱정이 화르륵 몰려오더군요.
재미없는 에피소드나 경험 하나하나도 맛깔난 비유와 감성으로 듣고만 있어도 재미났지요.
이제야 할머님의 방언을 70% 정도쯤은 알아듣게 되었는데
그 이야기를 듣게 되지 못할 수도 있다니요. 할아버지가 자세하게 어떤 분이셨는지 옛날에 살던
마을에 살아계시는 모모 어르신이 아실 거라는데, 그 분은 또 언제 갑자기 다른 세상으로 가실지 알 수 없고.
참여정부 들어서서 제주4·3특별법 제정(2000년), 진상조사보고서 발간(2003년)과
고노무현 대통령의 사과(2003년)등 4.3 제주 민주 항쟁 역사 바로잡기는 큰 성과를 냈었지요.
그런데 진실을 전하는 이야기가 사라지는 시대에,
하늘로 햇볕을 가리는 자들은 죽지도 않고 설쳐대더군요.
MB 정부 들어서 '4.3 특별법 위헌 소송, 4.3 희생자 결정 무효 소송'등을 파렴치하게 냈는데
6건의 소송 가운데 지난달 희생자 결정 무효 확인 소송과 4·3특별법 위헌소송 등 3건이 잇따라 기각,,
각하되었다고 합니다. 소송 주동자인 이선교 목사는 4.3 폭도로, 4.3 공원을 '폭도공원'이라고 했다지요.
내일 쯤이면 시어머니께서 제사에 쓸 고사리를 물에 불리시고,
제주 중산간에서 많이 재배되는 말린 '초기 버섯' (표고)으로 전만들 준비를 하시겠지요.
청상과부게 된 시할머님은 그 때부터 고생길, 막내 아들인 저의 시아버지는 국민학교 시절
단 한번도 도시락을 싸간 적이 없다고 합니다. 점심시간이 되면 '이재수의 난'으로 유명한 관덕정으로 와
우물물로 배를 채우고, 하릴없이 마당을 돌고 또 돌았다고...
초기 버섯전은 제사와 명절마다 상에 오르는데, 시할머님은 아들이 군대에 있을 시절, 딸들이 다 시집을 간 뒤, 혼자서 먹고 사시느라 중산간 버섯 농장에서 묵묵히 버섯을 따셨다고 합니다.
이번 제사에는 어떻게 해서라도 내려가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사라져가는 이야기 앞에서, 그나마 4형제 중 할머니의 이야기를 듣는 걸 가장 즐겼던
(성정이 온화하신 시어머님도 큰아들이 툭하면 할머니 방에 들어앉아서 잘 안 나오니,
그 때마다 '숙제 다 했냐, 공부해라' 잔소리를 하셨다더군요 ^^)
동방생을 통해서나마 할머니의 이야기를, 우리의 이야기를 이어가야겠다는 생각도 깊어집니다.
링크한 기사는 오늘자 한겨레 '4·3 흔들기 잇단 소송…지하 원혼들 ‘피눈물’ 입니다.
1. 깍뚜기
'10.12.13 7:33 PM (122.46.xxx.130)2. 태배기
'10.12.13 8:03 PM (118.43.xxx.247)좋은글 잘읽었습니다,깍두기님.
4.3항쟁에 희생되신 넋들도 편하지가 않을것같네요.정권이 바뀌면서..
故노무현 대통령께선 정부차원에서 제주도민들에게 사과도 하셨고 재임기간중
어느해인가는 추모식때 직접 참석도 하셨었는데요.
역사를 제대로 알고 본질을 인식하시는 분이 이정부엔 과연 있기나 한 건지 모르겠습니다.
깍두기님,제주도 며느님 답게..머찌십니다.
글도 잘쓰시네요^^3. 땀
'10.12.13 9:15 PM (175.200.xxx.119)잘 읽었습니다.
제주도출신인 저보다 더 제주의 역사와 아픔에 대해 관심갖고 계신듯하여 고맙고 부끄럽네요.
아픈 얘기지만 글을 참 맛있게 쓰셨어요. 82쿡 게시판의 글들이 점점 싫어지다가도 깍뚜기님 같은 분들이 꾸준히 글을 올려주셔서 날마다 기웃거리네요 ㅎ
바빠서 뉴스 못 읽은날에 일단 82쿡자유게시판 한번 스윽 보고나면 이슈가 대략 보이고요.
종종 제주도 얘기 들려주세요~4. 그마음
'10.12.13 9:25 PM (175.119.xxx.22)저도 알 것 같아요
제주도에서 살게 될때 관광지라는 사실에 마냥 좋았었는데
제주에 살면서 제주도민들 얼마나 한이 많으실까? 하는 생각 많이 했어요
몽고족에 100년동안 지배 당해서 곳곳에 몽고항쟁했던 유적이 남아있고
일제 시대에는 일본의 총받이 역할로 섬 곳곳이 일본이 파헤친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고
일본에 벗어난지 얼마 안되서 또 4.3사건 일어나고....
또 6.25전쟁때 4.3사건 일으킨 주동자들 모두 육지로 보내 유골함만 돌아왔다는 소리 듣고
말로 다 쓰기에는 너무 참혹한 사건이 너무 많습니다
그래도 4.3공원등 설립하면서 일반인들이 4.3에 대해 알게 되고
참회도 하고 그럴까 같던데 이건 또 왜 거꾸로 가는 정치랍니까?5. 깍뚜기
'10.12.13 11:31 PM (122.46.xxx.130)와~ 제주도에 사시거나 관계자(?)분들 댓글 감사합니다...
서울내기로 뒤늦게 제주 출신 새로운 가족을 만나게 되면서
관심이 더 많이 가더라구요. 여전히 제가 감히 다 알 수 없는
그분들의 현실에 고개가 숙여집니다...
이 정부는 참 이것저것 안 건드리는 것이 없지요.
에휴6. 한가한
'10.12.14 12:04 AM (180.228.xxx.30)현기영님의 순이삼촌에 비슷한 얘기가 나오지요..
대학때 4.3추모제를 열려고 하다가 연행되고 난리도 아니었는데
벌써 20년이 넘은 얘기네요..
지금은 육지에 나와살지만 늘 제주가 그립네요..
부모님의 계셔서 자주 가는 편이긴 하지만 그래도 그립네요..7. caelo
'10.12.14 3:16 AM (119.67.xxx.32)제주 4.3사건은.. 말그대로 활자화된 하나의 사건에 불과했었습니다.
태어나 30년을 서울에서 10년을 지금 이곳에서 살고 있으니..
제주 출신의 사람과 만나는 것 자체가 신기한...나름 서울촌뜨기였으니까요..
이렇게 직접적인 실화를 접하고나니.. 그나마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손주며느리의 화법에도..
가슴이 아파오네요..
그나마 그분들의 상처를 보듬는 분위기에는 늦게라도 다행이다 싶었는데..
지금의 사태는.. 아..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분노해야하는지..
말그대로 답이 안나오옵니다.
사회의 이런면을 확인할때마다 실은 마음이 차갑게 굳어버리는 듯해서 외면하고 싶은 심정입니다.
우리는 왜 아직 여기일까요....?8. 쟈크라깡
'10.12.14 11:36 PM (119.192.xxx.218)요 몇 주동안 근현대사를 간략하게 배웠습니다.
학교에서는 가르쳐주지 않았기에 모르고
몰라서 답답했던 가까운 우리 역사.
헌데 알고보니 더 답답했습니다.
아.아 제주 감자여9. 린덴
'10.12.15 11:57 AM (222.112.xxx.243)대학 들어가서 가장 큰 충격을 줬던 집회가 4.3 집회였어요.
내용보다도 그것이 처음 본 가장 큰 집회였고 고등학교 때 몰랐던 사실이라서요.
그래서 첫 소개팅에서 만난 제주도 출신 남학생한테 4.3에 대해 물어봤더니
그 할아버지의 6형제가 4.3 때 모조리 다 죽었다고 하더군요.
할아버지, 할머니들의 이야기, 그 기억들이 무심한 시간의 망각 속으로 사라져가는 게 안타깝지요.
저도 할머니들 이야기만이라도 채록해두고 싶었는데 결혼하고 이리저리 옮겨다니고
애들 낳고 키우는 사이에 모두 돌아가셨어요. 깍뚜기님이라도 기록해두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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