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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은 시인 "만인보" 중 9개 입니다. 저는 좋네요

조회수 : 901
작성일 : 2010-10-07 16:50:23
봉태

나하고 초등학교 일이등 다투었지
부자집 아들이라
옷이 좋았지
항상 단추 다섯 빛났지
도시락에 삶은 달걀 환하게 들어 있었지
흰쌀밥에 보리 뿌려졌지
그러나 누구한테 손톱발톱만치도 뽐낸 적 없지ㅣ
너희 논 옆에 우리 논 하나 있다
너하고 나도
의좋게 지내자고 굳은 떡 주며 말했지
그런 봉태
수복 직후 아버지 죽은 뒤
동네사람에게 끌려가서
할미산 굴 속에서 죽었지
유엔군 흑인 총 맞아 죽었지
그 달밤에
그 캄캄한 굴 속에서 죽었지
봉태야
나는 너 하나 살려낼 수 없었다
네 열일곱 살은 내 열일곱 살이었는데



아베 교장

아베 쓰도무 교장
뚱그런 안경에 고초당초같이 매서운 사람입니다
구두 껍데기 오려낸
슬리퍼 딱딱 소리내어 복도를 걸어오면
각 교실마다 쥐죽어버리는 사람입니다
2학년 때 수신시간에
장차 너희들 뭐가 될래 물었습니다
아이들은 대일본제국 육군 대장이 되겠습니다
해군대장이 되겠습니다
야마모또 이소로꾸 각하가 되겠습니다
간호부가 되겠습니다
비행기공장 직공이 되어
비행기 만들어
미영귀축을 이기겠습니다 할 때
아베 교장 나더러 대답해보라 했습니다
나는 벌떡 일어나서
천황폐하가 되겠습니다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청천벽력이 떨어졌습니다
너는 만세일계 천황폐하를
황공하옵게도 모독했다 네놈은 당장 퇴학이다
이 말에 나는 주저앉아 버렸습니다
그러나 담임선생이 빌고
아버지가 새 옷 갈아입고 가서 빌고 빌어서
간신히 퇴학은 면한 대신
몇 달 동안 학교 실습지 썩은 보릿단 헤쳐
쓸 만한 보리 가려내는 벌을 받았습니다
날마다 나는 썩은 냄새 속에 갇혀 있었습니다
땡볕 아래서나 빗속에서나 나는 거기서
이 세상에서 내가 혼자임을 깨달았습니다
그 석 달 벌 마친 뒤 수신시간에
아베 교장은 이긴다 이긴다 이긴다고 말했습니다
대일본제국이 이겨
장차 너희들 반도인은 만주와 중국 가서
높고 높은 벼슬 한다고 말했습니다
B-29가 나타났습니다. 그 은빛 4발비행기가 왔습니다
교장은 큰소리로 말했습니다
저것이 귀축이다 저것이 적이라고 겁도 없이 말했습니다
그러나 아베 교장의 어깨에는 힘이 없었습니다
큰소리가 적어지며 끝내는 혼자의 넋두리였습니다.
그 뒤 8.15가 왔습니다. 그는 울며 떠났습니다.









호박꽃


그동안 시인 33년 동안
나는 아름다움을 규정해왔다
그때마다 나는 서슴지 않고
이것은 아름다움이다
이것은 아름다움의 반역이다라고 규정해왔다
몇 개의 미학에 열중했다
그러나 아름다움이란
바로 그 미학 속에 있지 않았다
불을 끄지 않은 채
나는 잠들었다

아 내 지난날에 대한 공포여
나는 오늘부터
결코 아름다움을 규정하지 않을 것이다
규정하다니
규정하다니

아름다움을 어떻게 규정한단 말인가
긴 장마 때문에
호박 넝쿨에 호박꽃이 피지 않았다
장마 뒤
너무나 늦게 호박꽃이 피어
그 안에 벌이 들어가 떨고 있고
그 밖에서 내가 떨고 있었다

아 삶으로 가득찬 호박꽃이여 아름다움이여






외할머니


소 눈
멀뚱멀뚱한 눈
외할머니 눈

나에게 가장 거룩한 사람은 외할머니이외다

햇풀 뜯다가 말고
서 있는 소

아 그 사람은 끝끝내 나의 외할머니가 아니외다
이 세상 평화외다

죽어서 무덤도 없는




병옥이


두메 촌놈으로 태어나면
대여섯 살에 벌써
노는 놈 없다
산같이 쌓인 일에 아버지 따라 일꾼 되어야 한다
가을 오면
우렁 잡아오라는 어머니 말 듣고
논으로 달려가
드넓은 논바닥
우렁 뒤지는 한나절 좋다 참 좋다
그놈의 일구더기 떠나서 좋다
병옥이
우렁 잘 잡는 병옥이
양잿물 잘못 먹고 죽어버렸다
동네 아이들 병옥이 무덤 아무도 몰랐다
아이들 죽어야 무덤도 없다 제사도 없다 또 낳는다






선제리 아낙네들

먹밤중 한밤중 새터 중뜸 개들이 시끌짝하게 짖어댄다
이 개 짖으니 저 개도 짖어
들 건너 갈뫼 개까지 더달아 짖어댄다
이런 개 짖는 소리 사이로
언뜻언뜻 까 여 다 여 따위 말끝이 들린다
밤 기러기 드높게 날며
추운 땅으로 떨어뜨리는 소리하고 남이 아니ㅣ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의좋은 그 소리하고 남이 아니다
콩밭 김치거리
아쉬울 때 마늘 한 접 이고 가서
군산 묵은 장 가서 팔고 오는 선제리 아낙네들
팔다 못해 파장떨이로 넘기고 오는 아낙네들
시오릿길 한밤중이니
십리길 더 가야지
빈 광주리야 가볍지만
빈 배 요기도 못하고 오죽이나 가벼울까
그래도 이 고생 혼자 하는 게 아니라
못난 백성
못난 아낙네 끼리끼리 나누는 고생이라
얼마나 의좋은 한 세상이더냐
그들의 말소리에 익숙한지
어느새 개 짖는 소리 뜸해지고
밤은 내가 밤이다 하고 말하려는 듯 어둠이 눈을 멀뚱거린다





딸그마니네


갈뫼 딸그마니네집
딸 셋 낳고
덕순이
복순이
길순이 셋 낳고
이번에도 숯덩이만 달린 딸이라
이놈 이름은 딸그마니가 되었구나
딸만 낳는 년 내쫓아야 한다고
산후 조리도 못한 마누라 머리 끄덩이 휘어잡고 나가다가
삭은 울바자 다 쓰러뜨리고 나서야
엉엉엉 우는구나 장관이구나
그러나 딸그마니네 집 고차장맛 하나
어찌 그리 기막히게 단지
남원 순창에서도 고추장 담는 법 배우러 온다지
그 집 앞뜰살뜰 장독대
고추장독 뚜껑에
늦가을 하늘 채우던 고추잠자리
그 중의 두서너 마리 따로 와서 앉아 있네
그 집 고추장은 고추잠자리하고
딸그마니 어머니하고 함께 담는다고
동네 아낙들 물 길러 와서 입맛 다시며 주고받네
그러던 어느 날 뒤안 대밭으로 순철이 어머니 몰래 들어가
그 집 고추장 한 대접 떠가나다
목물하는 그 집 딸 덕순이 육덕에 탄복하여
아이고 순철아 너 동네장가로 덕순이 데려다 살아라
세상에는 그런 년 흐벅진 년 처음 보았구나





재숙이

시암안집 처녀 재숙이
찰찰 넘치는 물동이 이고 가며
먼데 바라보기도 한다
첫가을 백리가 탁 트였구나
내년에는
우리 동네 떠날 재숙이
온통 부푼 재숙이
달 진 뒤의 어둠 같은 재숙이





김신묵


아흔여섯 살 김신묵은
내가 죽으면 박수치며 보내달라 하고 죽었다
장례식날
그의 관이 나갈 때
박수를 쳤다
그 누구도 박수치지 않는 자 없다
산에다 묻어버리고 내려올 때
그의 말이 들렸다
박수치며 내려가라고
그래서 하나둘 박수를 쳤다

동두천 의정부 사이의 길이 양키 없이 빛났다.

* 김신묵여사는 고 문익환 목사의 어머니입니다.
IP : 199.201.xxx.204
7 개의 댓글이 있습니다.
  • 1. 수상기원2
    '10.10.7 4:55 PM (61.253.xxx.58)

    좋은 시 올려주셔서 감사해요~

  • 2. ..
    '10.10.7 4:57 PM (121.128.xxx.1)

    너무 좋네요 ㅠㅠ

  • 3. 와....
    '10.10.7 5:02 PM (203.247.xxx.210)

    잘 봤습니다...

  • 4. ..
    '10.10.7 5:06 PM (116.127.xxx.112)

    한국어의 아름다움을 간만에 느끼네요. 시를 평소에 즐기지 않아서...
    가끔 읽으면 참 좋은데.
    이분 시는 나이가 좀 있을때 더 와닿는 시인것 같아요..

  • 5. 좋네요^^
    '10.10.7 5:11 PM (220.121.xxx.148)

    와........

  • 6. 간만에
    '10.10.7 5:27 PM (221.150.xxx.154)

    즐거운 자게 였습니다.
    감사합니다.

  • 7. ...
    '10.10.7 5:47 PM (118.32.xxx.49)

    만인보.
    정말 걸작이죠^^

    이 느낌이 번역으로 전해 질까요? 그게 좀 힘들지..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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