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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와 투표 -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이젠 아기엄마 조회수 : 297
작성일 : 2010-05-28 22:22:37
2002년 대선이었죠.
정몽준이 노무현과 단일화를 해놓고는 투표일 몇 시간 전에 지지를 철회하던 밤.
정몽준 같은 놈과 단일화 한 것도 싫었지만 그래도 그 놈이 지푸라기라면 쓴 입으로라도 잡고 싶었는데
결정적인 순간에 배신을 해버려 황당하고 기막혔던 때가 생각납니다.
아마 그때 아득한 절망감을 느꼈던 분들 많으실 거에요.
다음날 투표일이었죠.
아버지랑 시골에 계신 할머니를 뵈러 출발했습니다.
네, 할머니의 표라도 빌리고픈 마음이었으니까요.

참고로 저희 할머니 역대 그 어떤 투표에도 참여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때도 이미 일흔이 넘으신 연세셨고
무엇보다 관에서 하는 일에 도장을 찍는 일은 그 분 입장에서 막연하고 커다란 두려움 같은 게 있으셨죠.
그동안은 그닥 투표를 강요하거나 비난한 적 없었는데
그날만큼은 평생 투표용지 구경도 못해봤던 할머니의 표라도 얹어가고 싶던 날이었죠.

할머니께 내려가던 차 안에서 아버지와 함께 이런저런 작전을 짜보기도 했습니다.
결론은 거짓말이나 협박은 하지 말되, 노무현을 찍어야 아들도 손녀도 잘 될 거라는 믿음을 드리자...

"엥이, 난 안 간다."
결연한 말씀에 거듭된 부탁.
단순히 투표 행위만을 부탁하는 것이 아닌 특정 후보를 부탁하는 것이기에
진심을 다해 부탁드리면서도 기호랑 기표 방법이랑 친절히 알려드렸죠.
한참만에 할머니는 "에구 늬 소원이라문..."하시며 자리에서 일어나셨고
가까운 투표소까지 모셔다 드렸죠.
투표소였던 학교 건물로 드어가시는 할머니께 "2번, 노무현이에요"
거듭 강조하여 말씀드렸죠.

그날 저녁,
할머니를 모시고 서울에 왔어요.
간만에 식구들 모두 모이니 함께 저녁잡숫고 내일 내려가시라 했죠.
개표 방송이 있었죠.
출구 조사가 발표되면서 엄기영 앵커에 살짝 미소를 보았던 건 아전인수식 해석일지 몰라도
어쨌거나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흥겨운 밤이었지요.
정몽준의 배신으로 인한 지옥의 경험이 드라마보다 더 통쾌한 대역전승으로 바뀌어가고 있었어요.
맥주도 나오고 소주도 나오고 집안이 점점 잔치분위기가 되어갔어요.

"이제 그럼 노무현이가 대통령이 된 거냐?"
어쩐 일인지 초저녁 잠이 많으신 할머니께서 늦게까지 함께 개표 방송을 보고 계셨어요.
"예, 어머니, 그렇게 될 것 같습니다."
"응, 그래~"하시던 할머니, 얼굴이 환해지시며 말씀하십니다.
"그렇담 다행이구나. 난 내가 잘못 찍어서 이회창이 될까봐 노심초사했는데..."

그렇게 알려드리고 강조했건만
기표소에 들어가신 할머니는 생애 처음 행사하는 투표 행위 앞에서 눈 앞이 하얘지신 겁니다.
갑자기 겁이 나고 손이 덜덜 떨려서 무언가를 빨리 해치우고 나가야겠다는 생각만 드신 게지요.
그래서 얼른 1번을 찍고 나오셨답니다. ㅠ.ㅜ

나오고나니 아들이랑 손녀가 했던 이야기들이 떠오르면서
내가 저것들을 돕지를 못했구나 속으로만 걱정하시면서 개표 방송을 보고 계셨던 거에요.
차마 저희한테는 말도 못 하시고 말이죠. ^^

할머니의 실수로 2표나 날아간 셈이 되었지만
아버지와 제가 지지했던 사람은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재임 기간 내내, 참으로도 많이 시달리는 불쌍한 대통령이었지요.

어느날 할머니가 아버지께 물으셨대요.
"할머니들 모임에서 죄다 노무현이 욕을 하더라. 사람들이 그렇게 막 대통령을 욕해도 되는 거냐? 나는 듣고만 있어도 겁이 나더라."
아버지는 이렇게 대답하셨대요.
"어머니, 노무현이 잘못한 것도 있는데요.
그래도 한가지 잘 한 것은요, 누구든지 대통령을 욕해도 잡혀가지 않고 마음껏 자기 얘기를 할 수 있는 세상을 만든 거에요."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나랏님을 욕하누."
"나랏님도 욕할 수 있을만큼 우리나라가 좋은 나라가 된 거에요."

그 대통령이 고향 마을에 내려갔다가 안타깝게 목숨을 내놓았을 때,
할머니 역시 텔레비젼을 보시며 엄청 안타까워하셨어요.
이번엔 할머니를 설득하기가 힘들 것 같아요.
투표가 너무 복잡해서 설명해드리기도 힘들고
무엇보다도 그때 그 실수 때문에 자존심 강한 노인네가 아마 결코 투표장에 가지 않으실 거에요.


제가 갑자기 그 일이 떠올라 글을 쓰는 이유는요.....
이번 선거 역시 그때 그 선거만큼이나 한 표 한 표가 엄청 중요한 선거가 될 것이기 때문이에요.
지금의 절박함이 그때의 절박함보다 결코 작지 않으니까요.
아는 사람 다 전화돌리고
교육의원 명단 들고 있으면서 주소 맞춰서 이름 불러주며
그렇게 한 표 한 표 만들어야지요.
돈이 하는 선거, 조직이 하는 선거가 아무리 기승을 부리고
무지한 사람들 겨냥한 각종 색깔들과 거짓말이 판을 쳐도
돈도 안 받고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진심을 다해 이 나라를 걱정하고 공부하며 지지후보를 결정한,
건강한 시민들이 있으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자구요.

결과에 대해서 앞서서 걱정하거나
아우를 수 있는 우리편한테까지 욕하거나 그러지 말고
그냥 묵묵히
선거에 관심도 없거나 잘못된 얄팍한 정보에 휘둘리던 주위 사람부터
하나하나 챙겨가면 될 거에요.
우리, 그렇게 하자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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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우리 할머니만 이번엔 봐드리자고요... ^^;  
IP : 221.148.xxx.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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