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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산 하나를 넘어야 합니다.

굽이굽이 조회수 : 590
작성일 : 2010-02-17 15:06:26
이번주 저희 아이 어린이집 졸업 발표회가 있습니다.
아이가 주중에는 시댁에서 살고 금요일부터 일요일 저녁까지 저희집에서 사는 두집살림을 일년육개월 정도 했네요.
애가 워낙 할머니 할아버지 삼촌을 좋아해서 분가하고 조부모님과 통화라도 할라치면 할머니네서 살고 싶다고 울며불며 보채고 제가 워낙 바쁜 일이 생겨서 아이만 시댁에서 살게 됐습니다.
저희 내외보다 할머니랑 애착관계가 더 좋은 아들이 시부모님과 삼촌이 말만하면 다 들어주니 정서적으로 좋은 점도 많고 한편으론 버릇이 엉망이라 속이 탈 때도 많았네요.

요번에 초등학교 입학하면서 드디어 저희 집으로 아들이 돌아옵니다.
이것도 작년 중반까진 절대 할머니네서 초중고 다 다니겠다고 억지를 쓰던 아들 녀석이 가을부터 조금씩 엄마아빠랑 살고 싶다고 생각을 바꿔서 어렵지 않게 가능해진겁니다.
시어머니(아이 할머니)가 애랑 학교 이야기만 나오면 할머니네서 초중고 다 다니고 대학교만 서울대로 가라고 쇄뇌를 시켜놔서 애도 당연히 그래야 한다고 생각한 거겠지요.  
참내... 서울대가 옆집 강아지 이름도 아니고 할머니랑 잘도 대학까지 계획을 짜놓았더군요.
아이가 엄마 아빠도 엄청 좋아하지만 원래부터 시댁과 살면서 나고 자란 녀석이라 조손간 애정이 차고 넘칩니다.
그런 아들이 드디어 어린이집을 졸업하게 된거죠.
그러니 시어머니가 여기저기 엄청 손주가 잘하는걸 자랑하고 싶으신가봐요.

작년 학예발표때도 어머니 친구분들이 다섯이나 오셔서 자릴 빛내 주셨는데 올핸 친구분들 일곱에 어머니 다니시는 교회 권사님들까지 부르시겠답니다.
재작년 어린이집 운동회 때도 친구분들 죄 부르셨답니다.
작년엔 마침 저희 남편 회사 가족행사와 겹쳐서 운동회 참석을 못하게 되었는데 ‘어머니가 회사 행사를 빠지더라도 운동회를 해라.  교육상도 그렇고 애 추억도 없게 그런델 안가면 되느냐.’ 하시는 걸 남편과 아이 둘 다 회사 행사에 가겠다고 해서 대충 넘어갔답니다.
저는 가족행사를 동네 이벤트화 시키는게 너무 싫어요.
그래서 남편에게 올핸 친구분들 모시지 마시라 말씀 좀 드려보라니 이번이 마지막이고 엄마가 애를 키우니 한번만 더 참아라 해서 친구분들까진 그냥 편하게 대접해 드리려고 했어요.

그런데 어머니가 오늘 교회 권사님들 몇 분 더 불러도 되겠느냐고 전활 하셨네요.
솔직히 경제적으로 좀 부담된다고 했더니 어머니 친구 중 한분이 오기 싫은 듯 해보여서 기분이 좀 상했고 그래서 전에 살던 동에 아줌마네 내외더러도 오라고 하셨답니다.
너는 내 마음 몰라서 그렇지 나는 사람들이 많이 와서 봤으면 좋겠다고 그까짓 삼겹살 1인분이 몇 푼이나 한다고 그러느냐.  그 사람들이 오면 빈손으로 오냐. 하물며 공책 돈 만원어치라도 다 사들고 온다. 그 사람들이 우리 아이를 이뻐해서 오고 싶을 텐데 사람 사는 정이 그런게 아니다 하십니다.
권사님들 한 대여섯 오시겠죠.

근데 전 돈 만원어치 선물 사들고 오시는거 손익 따져서 싫고 좋은게 아닙니다.
그냥 저랑 상관도 없는 사람들이 제 아이 행사에 와서 축하하고 평가하고 저는 대접하는 꼬라지가 사뭇 우습고 한심합니다.
그 사람들이 뭐가 좋아서 남의 자식 재롱잔치에 서너시간씩 있고 싶겠냐구요.
어머니가 구역장님인가 뭔가 인데다 누가 어머니한테 조금만 잘하면 그 사람은 정말 인정도 많고 사람 사는 도리도 안다고 두고두고 여기 저기 칭송을 하십니다.
그 칭송이면엔 친한데도 안온 사람은 많이 깍이는거 아니까 귀찮아도 오라면 오시겠죠.
어머니 친구분들 분위기가 대체적으로 몰려다니며 노는 걸 좋아하십니다.
어머니 친구분 중 한집 며느리는 시집오고 시어머니 친구들까지 초대해서 집들이 할 정도로 행사를 만드는 분위기라면 알만하지요.
저희 어머닌 워낙 효부셔서 시할머니 살아계실 때 수시로 시할머니 친구분들 초대해서 식사 대접해드렸었다고 저한테 딱지가 앉도록 말씀하셨어요.
얼마나 어른들 공경을 잘했으면 아직도 예전 살던 동네가면 어머니 칭송이 자자하다고 당신께서 백번은 말씀하십디다.
전 눈으로 본적도 없고 봤던들 그렇게 살 수 있는 형편이나 성격이 못됩니다.

이따 저녁때 시어머니랑 통화해서 권사님들 초대만은 싫다고 확실하게 말씀드려야 하는데  한참 시달릴 생각하니 눈앞이 깜깜하네요.

저희 어머니가 애 키워주시는 동안 생활비 넉넉하겐 아니라도 보조해 드렸구요 앞으로도 애 키우는 동안 드린 정도는 아니라도 생활비 드릴 생각입니다.  
결혼하자마자 같이 산 이유가 시댁에 빚이 많아서 그 빚 갚기 위해서였습니다.
제 계 타는 날짜 맞춰서  돈 땡겨다 쓰시는 생활 저희 어머니 오년 넘게 하셨습니다.  
분가까지 가는데 걸린 사연들 적자면 눈물이 바다를 이룰 정도라 생략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편이나 제 성격상 시댁하고 등지고 싶지 않아서 좋으면 좋은 대로 싫으면 싫은 대로 소리도 내가며 맞춰도 가며 삽니다.
그러니 혹시라도 애 키워줄 때만 좋다하고 그 정도도 못하느냐는 태클 걸지 말아주세요.
IP : 112.187.xxx.114
2 개의 댓글이 있습니다.
  • 1. 에고
    '10.2.17 5:36 PM (115.178.xxx.253)

    그런분들도 계시는군요...
    남의집 손자 운동회까지...ㅠ.ㅠ 아이들은 아무리 할머니, 할아버지를 좋아해도
    커가면서는 엄마, 아빠를 찾습니다. 이제 초등생이니 앞으로는 엄마아빠 위주가 될거에요..
    학교 다니기 시작하면 아무래도 덜할테니 마지막으로 한번 해주시고,
    초등학교 행사에는 할머니, 할아버지만 오시도록 못박으세요..
    아이가 싫어하게 될거구요..

    원글님 그만큼 하신것도 훌륭합니다.

  • 2. ...
    '10.2.18 12:03 AM (114.205.xxx.94)

    태클이라니요, 읽고있는데 원글님이 생략한 기막힌 사연들이 얼마나 많으실지 제 가슴이 다 먹먹합니다.
    보통 성격 아니신 시어머니시군요. 원글님이 참고 사신 세월만큼 앞으로는 날개 펴고 사시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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