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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에 똥칠하지 않다 죽을 권리 : 미래소년 코난과 에콜로지카1
아시다시피 ‘구대륙’ 유럽은 전쟁과 전쟁, 또 다시 전쟁으로 이어지는 역사를 가지고 있죠. 하지만 이 ‘문명의 시대’로 접어들면서 더 이상은 노골적으로 그 짓을 못하게 되자 ‘건전한 대리품’을 찾게 됐다는 겁니다. 그들의 핏속에는 이미 전쟁 유전자가 아로새겨졌고 그 유전자는 평상시에도 사납게 들끓기 일쑤니 대리품으로라도 살살 달래줘야 한다는 얘기죠. 하여 양키들 왈. 생각해보라구, 농구나 야구처럼 점수가 팍팍 터지는 것도 아닌데 뭐 때문에 저 따위를 좋아하겠어? 정답은 하나, 전쟁 대신인 거지!
구대륙의 오랜 역사에 열등감이 있는 미국인들은 저런 식의 비아냥거림으로 그 ‘오랜 역사’를 별 거 아닌 것으로 만들려고 하기도 한다네요. 그러면서 그 전쟁으로 이어지는 역사를, 이번에는 양키들 자신들이 이어갔구요.^^ 아무튼 전쟁은 그렇게 해서 20세기에도 끊이지 않고 일어났습니다. 생각해보면 20세기에 지구에서 전쟁의 포성이 단 한 순간이라도 멈췄던 적은 없는 듯해요. 그랬던 적이 있을까요? 다만, 우리가 살고 있는 이곳이 조용한 것일 뿐. 지금도 지구 어딘가에서는 전쟁이, 줄기차게 벌어지고 있죠.
그렇게 ‘끊임없이’ 전쟁을 하던 인류는 결국 어떤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냐면, 급기야 핵무기를 능가하는 ‘초자력’ 무기까지 사용하게 됩니다. 그 결과 지구의 축은 휘어지고 대륙들은 다 바다 속에 잠겨버려요. 흡사 폼페이 최후의 날처럼요. 그때, 약 스무 명 가량 되는 사람들이 로켓을 타고 우주로 탈출하다 어느 섬에 불시착을 합니다. 그들은 그 섬을 ‘홀로 남은 섬’이라 부르죠.
이란 영화 <그리고 삶은 계속된다>를 보면 대지진의 아수라장 속에서도 월드컵 경기를 보기 위해 아이들이 텔레비전 안테나를 세우는 장면이 나옵니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투하된 후 사람들이 앞으로 이 땅에는 풀 한 포기 나지 않을 거라고 절망하고 있었는데 쇠뜨기라는 풀이 어느 순간 그 폐허의 지층을 뚫고 고물고물 돋아났다고 하죠? 인간의 힘으로는 어떻게 해볼 수 없는 참혹의 한가운데서도 삶이란, 정말 징그럽게도 계속됩니다.
하지만 이렇게 볼 수도 있죠. 시몬느 베이유와 시몬느 드 보부아르는 동시대를 살았지만 서로 친하게 지내지는 못했습니다. 특히 베이유가 보부아르를 배척했는데, 유복한 유태계 가정에서 나고 자랐으나 ‘기독교 좌파’가 되어 아주 철저히 금욕적인 생활을 실천했던 베이유의 눈에 보부아르는 그저 ‘부르주아의 때깔을 벗어던지지 못한 관념론자’로만 다가왔던 겁니다. 그녀들이 대학생이었을 때 한번은 소르본느 안에서 중국의 기아문제로 토론이 벌어졌다고 해요. 그때 베이유는 기아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혁명이 일어나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에 대해 보부아르는 빵만으로는 ‘생의 의미’를 찾을 수 없다고, 사람들이 진정으로 원하는 건 바로 ‘생의 의미’라고 대응했죠. 그러자 벌써 자신의 출신배경을 과감히 벗어던지고 검은색 코트 한 벌로 내내 겨울을 나고 있던 베이유는 보부아르에게 그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당신은 한번도 굶어본 적이 없는 게 분명하군!
하여 그런 것도 삶이라 할 수 있을까. 그래도 어쨌든 이란과 히로시마, 나가사키 사람들은 ‘살아’ 갔습니다. ‘홀로 남은 섬’에서도 삶은 계속되어 아기가 태어났죠. 그 아기는 산소통 없이 10분 이상 잠수를 할 수 있고 발가락을 손가락처럼 쓸 수 있으며 커다란 상어도 두 손으로 거뜬히 들어올리는(무슨 육봉달 같네요ㅋㅋ) 괴력의 소년으로 자라납니다. 소년의 이름은 바로바로 코난.^^
그리고 삶은 계속되었기 때문에 당연히 죽음도 함께 했습니다. ‘홀로 남은 섬’에 불시착했던 사람들 가운데에는 그리하여 코난의 할아버지밖에 남지 않게 되었어요. 천지간에 단 두 사람, 코난과 코난의 할아버지만이 초자력 무기를 사용했던 ‘대변동’ 이후에 살아남은 사람이 된 것이죠. 그런데, 그렇게 알고 있었는데, 어느 날 해변에 어여쁜 소녀 한 명이 의식을 잃고 쓰러져 있는 게 아니겠습니까?
난데없는 소녀의 출현으로 코난과 할아버지는 이 천지간에 자신들 외에도 생존자들이 더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게다가 소녀는, 이름이 라나고 갈매기와 대화를 나눌 수 있으며 마음속으로 신뢰하는 사람들과는 텔레파시를 주고받을 수 있는 능력의 소유자인 그 소녀는 다른 생존자들이 ‘하이하버’라는 아름다운 섬에서 평화롭게 ‘모여’ 살고 있다는 얘기도 들려주죠. 하지만 곧이어 들이닥친 ‘인더스트리아’ 요원들 손에 라나는 납치되고 그들에 맞서던 코난의 할아버지도 목숨을 잃게 됩니다.
인더스트리아는 원래 ‘대변동’ 이전에 과학자들이 인간이 자연 없이도 살 수 있는지 실험하기 위해 만들어놓은 인공 섬이었어요. 거기에서는 인간의 창조물이 자연의 모든 것을 대체하도록 설계되어 있었습니다. 에너지만 있으면 숲과 나무, 햇빛과 물, 아기의 분홍빛 뺨을 간질이는 바람의 숨결까지 ‘실사’와 똑같이 ‘재현’시킬 수가 있는 거죠. 그런 인더스트리아도 ‘대변동’ 때 용케 침몰하지 않은 섬들 가운데 중에 끼어 있었는데, 문제는 ‘악당’이 그곳을 접수했다는 거였어요.
겉으로 보면 그 섬을 이끌어가는 건 최고 운영위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살아남은 몇 명의 과학자들로, 순전히 인공 에너지와 인공 식량을 생산할 수 있는 ‘능력’ 때문에 그 지위를 부여받았죠. 하지만 그들은 바지사장들일 뿐 실질적으로 그 섬을 지배하는 건 레프카라는 행정국장이었어요. 레프카의 지배 아래 사람들은 강제노역에 시달리면서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당하는, 수용소의 포로와 다름없는 생활을 하고 있었죠. 말하자면 인더스트리아는 제레미 벤덤이 최소의 비용으로 죄수들을 감시할 수 있는 감옥 형태로 구상했었고 미셸 푸코가 그 개념을 확장시켜 근대 권력이 대중을 감시하고 그럼으로써 통제하는 방식으로 언급했던 파놉티콘 그 자체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라나를 납치해간 것도 레프카의 소행이었어요. 라나의 할아버지가 살아남은 과학자들 중에서도 유일하게 태양에너지를 ‘부활’시킬 수 있는 사람인데, 인더스트리아에서 탈출하다가 실종돼버린 것이었습니다. 라나가 할아버지와 텔레파시를 주고받을 수 있기 때문에 라나를 납치하면 라나 할아버지의 소재를 찾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 거죠.
그리하여 코난의 ‘오딧세이’이가 시작됩니다. 할아버지 장례를 치른 후 코난은 라나를 구하기 위해, ‘사람은 함께 모여 살아야 한다’는 할아버지의 유지를 받들기 위해 ‘홀로 남은 섬’을 떠나 인더스트리아로 향하죠.
저는 작년에 <미래소년 코난>을 다시 볼 기회가 있었는데요, 와... 정말 아름답고 신나고 유쾌하고 감동적인, 지금 봐도 하나도 촌스럽지 않은 ‘명작’이었어요. 제가 자란 곳에서는 TV채널이 딱 한 개밖에 나오지 않았었어요.ㅋㅋ 그래서 죽으나 사나 KBS밖에 볼 수 없었는데(방송 통폐합 이후에는 KBS1만), 지금도 잊히지 않는 게 초딩 5학년 땐가 6학년 때 <소년 중앙>인지 <새소년>인지 하는 잡지를 보는데 독자의견란에 그런 의견이 실려 있더라구요. 지난주에 방영된 <호랑이 선생님>에서 누구 엄마가 겨울인데도 집안에서 반팔 옷을 입고 있었다, 에너지 절약 차원에서도 그렇고 연탄도 못 때는 집 아이들을 생각해서도 그렇고 어린이드라마 속 인물이 한겨울에 반팔 옷을 입고 나온 건 많은 문제가 있다고 생각된다...ㅎㅎㅎ
그거 읽고 나서 어찌나 더더욱 <호랑이 선생님>이 보고 싶던지.^^ 또 방학 때마다 나눠주는 <탐구생활>에는 ‘문제를 풀 땐 교육방송을 참고하세요’라고 씌어 있는데, 그 또한 교육방송이 나와줘야 말이죠.--; 하지만 <미래소년 코난>이나 <플란다스의 개>, <개구쟁이 스머프>는 KBS에서 해줬기 때문에 난시청지역에서 자란 시골아이도 코난과 라나와 포비 등과 함께 울고 웃으며 시대가 공유한 유년의 추억에서 소외되지 않을 수가 있었죠. 바로 그러한 것이 공기업이란 게 필요한 까닭이고, 공기업이 비효율적인 투자도 할 수밖에 없는 내력이며, 따라서 왕왕 ‘적자’를 낼 수밖에 없기도 한 사연이기도 하죠.
그런데 재밌는 건 이게 ‘맑고 투명한’ 시절에 보던 거랑 ‘탁하고 의뭉한’ 시절에 보는 거랑은 많이 다르다는 겁니다. 작년에 <미래소년 코난>을 보는데 자꾸 그 안에서 브룩 쉴즈가 주연했던 <푸른 산호초>가 어른거리더라구요.--; <푸른 산호초> 아시죠? 케이블에서도 몇 번 해주던데. 남태평양 어드메에 있는 외딴섬에 좌초되어 단 둘만 남게 된 남자아이, 여자아이가 점점 자라면서 ‘자연의 힘’에 눈뜨게 되고 그 ‘자연의 힘’에 이끌려 물속에서, 모래밭에서, 동굴 속에서 자꾸자꾸 ‘합방’하게 되더라는 얘기.--; 십대의 브룩 쉴즈가 정말 ‘미친 미모’를 뽐냈던 영화. 내용도 별 거 없고 배우들의 연기도 볼 거 없지만 ‘미친 시절’의 브룩 쉴즈를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황홀해지는 영화.
시간은 그 비가역적 성질 때문에 잔인한 법이죠. 한번 흘러간 시간은 되돌아오질 않습니다. 사랑하는 사람도, 즐거웠던 시간도, 참담한 실수를 해서 되돌리고 싶은 순간도 일단 한번 삼켰다 하면 그걸로 끝이죠. 최근 너무 거대해져버린 (마치 너무 예뻐서 누군가 말단 비대증이라는 저주를 내린 것 마냥--;) 브룩 쉴즈를 보다 보니 걍, 문득, 시간이 가져다 준 아찔한 괴리감이 참 강하게 다가왔다는 건데, 근데 무슨 얘기를 하다가...-_-
하지만 시간이 30년 가까이 흘러도 여전히 똘망똘망하고 장난기 많고 씩씩한 소년 그대로인 코난은 인더스트리아로 가서 라나를 무사히 구해내더군요. 라나의 할아버지와도 만나서 태양에너지도 부활시키구요. 그래서 침몰 위기에 있는 인더스트리아 사람들까지 한꺼번에 다 구출해 하이하버섬으로 데려가죠. 그 와중에 레프카는 지구를 지배할 수 있는 우주비행기를 탈취해 달아나지만 코난이 누굽니까? 총알도 절대 맞지 않구요(만화를 다시 보니까 총알이 막 빗발치는데도 절대로 맞지 않더라구요..,ㅋㅋ), 바다 속에서도 육지에서처럼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는 양서류적 아이죠. 애마부인이 찬이슬 내리는 새벽에 얇다시한 슬립 하나 걸친 채로 말을 몰고 막 달려도 절대로 감기에 걸리지 않는 것과 비슷하다고나 할까요?--; 해서 코난은 레프카까지 물리쳐서 지구를 지킵니다.^^ 그 과정이 정말 너무너무 재미있고 아름다웠어요.
앙드레 고르의 책 <에콜로지카>는 묘하게 <미래소년 코난>을 연상시키는 구석이 있었답니다. 왜냐하면 두 작품은 모두 ‘붕괴’를 염려하고 있고 그 ‘붕괴’의 본질이 사실상 거의 동일한 것이라 할 수 있으며 그 ‘붕괴’를 극복하는 방향에 있어서도 비슷한 생각을 드러내고 있는 것 같았기 때문이죠.
* 쓸데없는 얘기만 잔뜩 늘어놓다 보니 본론엔 아직 발을 담그지도 못했네요. 그래서 to be continued...--;
1. 침흘리며읽었습니다ㅋ
'09.11.15 11:28 PM (221.146.xxx.56)필력과 내공의 소스가 공영방송이었던 건가효?ㅎㅎ
2. 나나
'09.11.16 12:36 AM (125.178.xxx.140)저기 원글님.
이 글은 자게가 아니고, 줌인 아웃에 올려주심 더 가치있게 읽힐거 같습니다만...
자게는 페이지가 금새 넘어가버려서 많은 분들이 못 읽으까봐. 그럼 좋은글인데 아깝잖아요.3. 코비가
'09.11.16 1:14 AM (59.25.xxx.241)생각나는군요.
선장도...4. 님 짱
'09.11.16 1:33 AM (59.10.xxx.124)너무너무 재밌게, 순간순간 미소를 머금으며 읽었답니다. 어서 계속해주세요..ㅎㅎ
5. 프리댄서
'09.11.16 2:00 AM (218.235.xxx.134)다시 들어와 봤더니 이 시간에 안 주무시는 분들이 꽤 계신 듯하네요.^^ 새 글도 막 올라와 있고. (뭐 이렇게 말하는 저도 올빼미이긴 합니다만..^^;)
근데 저는 자게순이라서요. '가끔' 키톡에도 들어가 보는.--; 자게를 훑어보고 오지랖 넓게 댓글 다는 것만으로도 흑흑, 시간 왕 잡아먹혀요. 거기다 다른 게시판까지 들락거리면...ㅠㅠ 그래서인지, 줌인아웃을 비롯한 타 게시판은, 그러게요, 이용해볼 생각을 미처 못했었네요. 거기는 보니까 이미지와 음악도 올릴 수 있는 것 같던데...^^ 담에는 한번 고민해보겠습니다. 근데 여기 올려도 보실 분들을 다 보시는 것 같긴 해요.^^;;;
그리고 코난 친구는 '포비'라죠?^^ (선장은 디아스 선장ㅋㅋ) 갸가 먹성이 엄청 좋아요. 하이하버 섬에 가서는 돼지 키우는 걸 배우게 되는데, 처음 키우는 새끼돼지 이름이 '맛있어'ㅋㅋ 맛있어야, 너 왜 또 거기 가~~ 맛있어, 너 이리 오지 못해! 뭐 이러고 놀더라구요. 그래서 야생의 소년이 문명화되는 과정이 그려져 있다고도 볼 수 있는데, 미야자키 하야오가 생각하는 그 '문명'이란 하이하버 섬에서의 생활과 같다는 뜻인 것 같더군요.
참! 그러고 보니 키톡 순덕이엄마님께서 올리신 글을 보면 그 동네가 하이하버 섬과 아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곤 해요. 아, 최근에 올리신 포스트는 특히 더 좋았는데... 물론 안 읽으신 분들은 없으시겠지만 혹시나! 키톡에 안 들어가보시는 분들이 계실까 하여 그 글을 링크해봅니다. (허락도 없이 막 마음대로..--;) http://www.82cook.com/zb41/zboard.php?id=kit&page=1&sn1=&divpage=7&sn=on&ss=o...
그리고 이왕에 브룩 쉴즈 얘기를 했으니 좀더 해보자면요, 브룩 쉴즈가 어려서도 키가 크긴 했었죠. 그래서 중학생 때 본 <스크린>에는 그런 기사가 실려 있더라구요. 그녀가 출연했던 <엔들리스 러브>에는 베드신 장면이 있었는데 남자 주인공보다 키가 커서 둘이 포개져-_- 있을 때 브룩 쉴즈 발이 남자 배우 발보다 아래로 삐죽이 비어져 나왔었대요. 그래서 프레임 안에 담을 때 그 모습을 감추느라 카메라맨이 애를 먹었대나 어쨌대나.--;6. 코비
'09.11.16 2:33 AM (59.25.xxx.241)아! 넘사스러버서....
포비지..다이스...
정말 글 잘 읽었습니다.7. 예전에
'09.11.16 6:54 AM (69.120.xxx.21)티비에서 보던 코난이 생각나네요~ 항상 좋은글 감사합니다~
8. 프리댄서
'09.11.16 7:02 AM (218.235.xxx.134)앗. 맞아요, 선장은 '디아스'가 아니가 '다이스'.ㅋㅋ
참고로, <미래소년 코난>의 등장인물들 http://bestanime.co.kr/newAniData/aniInfo.php?subPageType=character&idx=99&vi...
저기서 오로의 여동생 테라가 포비를 좋아하는데, 넘 웃기더라구요.
얼굴 표정에서부터 '못된 애' 포스를 풍기지만 넘넘 귀엽고... 그 '못된 애' 같이 생긴 얼굴을 막 꼬집어주고 싶었음. ㅎㅎ 또 말을 굉장히 잘 타죠. 꼭 흉노족 새끼 여전사 같음.^^ 머리는 라나처럼 항상 양갈래로 묶고 있는데, 앙증맞은 리본으로 묶고 있어요. 그런 애가 포비한테 뿅 가는 거 보고 혼자 막 낄낄거렸었답니다.^^
아... 이렇게 재밌는 만화 만들어준 미야자키 하야오 아저씨한테 경의를!9. ㅎㅎㅎ
'09.11.16 10:09 AM (222.107.xxx.148)예전에 일산신도시 부근을 지나가면
'인더스트리아'처럼 보인다고 생각했던적이...ㅎㅎ
정말 열심히 봤었지만
늘 끝부분은 기억이 안나네요
다시 보고 싶어요10. 얼씨구
'09.11.16 10:15 AM (116.122.xxx.142)코난은 제게 하나의 이미지를 강렬하게 남겼죠 ㅎㅎ
발가락의 힘!!!!!!!!!!!!!!!!11. 하늘을 날자
'09.11.16 10:26 AM (121.65.xxx.253)글을 썼다 하면 정리되지 않은 생각만 자꾸 나열하게 되는 것 같아서 당분간 책만 열심히 읽고 글은 쓰지 않으리라 결심했는데, 댄서님 글을 보니 너무 댓글이 달고 싶어져서 어쩔 수 없이 댓글을 쓰게 되네요. 음냐.
일본 만화는 정말 대단한 것 같아요. 미야자키 하야오는 말할 것도 없고, <공각기동대>의 이시이 마모루도, 저 유명한 <불새>와 <아톰>의 데즈카 오사무도 그렇고, 정말 대단한 만화들... @..@ 우리의 <공포의 외인구단>, <타짜>, <오! 한강> 등도 물론 시대를 대표하는 훌륭한 만화지만, 위 만화들에 비하면 좀 부족한 감이... ㅠ.ㅠ
제가 최근 <비노바 바베, 간디를 만나다>를 읽고 있답니다. 알라딘 중고샵에 매물로 나온 것이 있기에 잽싸게 구입을 했지요. 휴우. '영성', '생명'이란 말은 김지하 시인께서 80년대부터 줄기차게 하시던 말인데, 그 뿌리를 간디와 비노바 바베에서 찾을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함석헌 선생님에게서도 찾을 수 있겠구요.
비노바 바베의 '사티아그라하'와 '사르보다야'에 관해서 읽었습니다.
적대자를 사랑하라. 그가 나를 미워하면, 더욱 그를 사랑하라. 모든 사람의 내면에는 신(神)이 깃들어 있으니 적대자의 마음 속에도 선함이 있을 터, 그 마음 안에서 선함을 찾아내고 찾아낸 선함에 기초해서 그와 대화하라. 그런데도 적대자가 마음을 열지 않고 여전히 나를 미워하면, 필시 그것은 내가 그의 선함을 제대로 찾아내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니, 다시 그의 선함을 찾아내 보라. 그리하여 더욱 그를 사랑하라. 찾아내려고 찾아내려고 노력해도 잘 발견하지 못하겠거든, 반성하고 수행하라. 그 반성과 수행의 방법으로는 단식도 나쁘지 않다. 다만, 단식은 절대로 상대방인 적대자에 대한 '강요'가 되어서는 안된다. 자해공갈단과는 다른 것이다! 오로지 단식은 자기반성, 그것일 뿐이다.
적대자를 마음을 다해 사랑하는 것, 이것이 바로 사티아그라하, 즉, 우리가 진리를 움켜잡을 수 있는 방법이며, 사르보다야, 즉, 모든 이들의 깨달음을 추구하며, '신의 도시'를 '세속의 도시' 속으로 가져올 수 있는 방법이다.
그리고 그의 '자본(資本)'에 관한 생각도 읽었습니다.
자본이란 회전할수록 축적되는 것이어선 안된다. 내가 누군가에게 돈을 빌려주었는데, 그가 그 돈을 유용하게 잘 썼자면, 즉, 내가 그 돈을 쓴 것보다 훨씬 가치있게 그 돈을 썼다면, 나는 그로부터 돈을 돌려받을 때 빌려준 액수 보다 오히려 적게 돌려받아야 한다. 그 돈이 나에게 반드시 필요치는 않았기 때문에 내가 그 돈을 그에게 빌려줄 수 있었고, 그는 그 돈을 나보다 훨씬 가치있게 썼으니 나는 필요도 없는 돈을 굳이 내 집 창고에 보관하고 있었던 셈 아닌가. 그러니 반성하라. 그리고 돈을 조금만 돌려 받아라.
자본이란 회전할수록 축적되는 것이어선 안되며, 오히려 회전할수록 감소하는 것이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토지헌납운동(부단 야즈나)의 정신인 것이다.
우리가 이렇게 살 수 있을까요? <에콜로지카>는 처음 들어보는 책입니다만, 그 제목에서 '환경'과 관련된 책이리라고 짐작이 됩니다. '생명'과도 관련이 되리라 짐작이 되고요. 구체적인 책 내용은 전혀 예상이 안되지만, 그냥 <비노바 바베, 간디를 만나다>가 떠올라 주절주절 해봤습니다. 비노바 바베가 말하는 대로 사회를 재구성하면, 그것은 진정 '혁명'일 것입니다. 역시 인도의 '걸어다니는 성인'이라는 말이 조금도 부족하지 않은 사람이더군요. 그냥 책 한 권만으로도 그렇게 느껴집니다.
일찍이 김지하 시인은 1984년에 <민중문학의 형식문제>라는 강연을 하시면서 '활동하는 무(無)'라는 주제어를 강조하신 바가 있지요. 간디는 자신의 모든 수행이 목표하는 바가 결국 자신이 영점화되는 것, 즉, 먼지같은 존재로 되는 것이라고 밝힌 바 있습니다. 그렇게 자신의 존재 자체를 지워나갈 때 비로소 자신은 어느 곳에나 존재하는 신(神)의 도구로 쓰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하면서요. 김지하 시인의 '활동하는 무'라는 말씀도 간디의 수행을 염두에 두면, 이해할 만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마찬가지로 박원순 변호사님의 아름다운 재단이나 박노해 시인의 나눔문화-'촛불소녀' 캐릭터로 유명한- 운동도 위와 같은 비노바 바베의 생각-'자본은 회전할수록 축적되어서는 안되며, 오히려 감소하여야 한다'-을 염두에 두면, 이해할 만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렇게 이해하면, 박원순 변호사님이나 박노해 시인의 활동이 오히려 가장 급진적인 운동이 아닌가 하는 생각조차 듭니다. 그 운동은, 단순히 부자들의 기부를 돕고 부자들이 자신의 이미지를 관리할 수 있는 기회를 주며, 그리하여 결국 부자들에게 면죄부를 주는 것에 불과한 것이라고 쉽게 폄하해버릴 것이 아니고, 오히려 자본주의-혹은 인간의 '탐욕'-을 넘어설 수 있는 가장 유력한 대안으로 볼 수도 있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듭니다.
여기서 작년의 촛불집회를 다시 떠올려봅니다. 작년 촛불집회에서 저에게 가장 인상적이었던 장면은 신부님들의 시국미사와 스님들의 108배였습니다. 특히, 스님들의 108배를 아프리카 방송을 통해서 보면서, 일순간 제가 정화(精化)되는 느낌마저 들었었습니다. '적대자를 사랑하라. 그가 나를 계속 적대한다면, 그를 더욱 사랑하라. 그럼에도 그가 계속 나를 적대한다면, 그를 더더욱 사랑하라. 그리고 내 안의 악함을 반성하고 수행하라.' 이렇게 생각할 때 적대자와의 '싸움'이란 애당초 성립할 수가 없고, '어둠이 빛을 이겨본 적이 없다.'는 말씀을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요. 어둠과 빛은 애당초 싸움 자체가 성립할 수가 없으니까요.
작년 촛불집회를 말할 때 지도부가 없는 집회였다고 흔히들 말하는데, 저는 반대합니다. 저는 종교단체야말로 지도부였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신부님들과 스님들. 작년 촛불집회는 '제헌의 요구'-'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와 '이원적 민주주의의 일단계 전진 즉, 민주주의의 심화'로 바라볼 수도 있겠고, '반신자유주의와 반세계화, 특히 반미의 필요성에 대한 각성'으로 바라볼 수도 있겠습니다만, 저에게 가장 크게 다가왔던 부분은 역시나 '영성'이었습니다. 특히, 내 안의 탐욕에 대한 집단적 반성. 그 점이 김지하 시인을 들뜨게 했던 것이 아닌가 합니다. 그래서 작년 촛불집회 중간에 김지하 시인은 <프레시안>에 '촛불을 생각한다'라는 연재칼럼을 쓰게 되신 것이 아닐지요.
작년 촛불집회는 97년 외환위기 이후 심화된 어떤 위기-저는 그것이 '도덕적 용기가 사라지고, 탐욕이 전면에 등장하게 된 우리의 정신적 위기'라고 생각합니다-의 반영이며, 그 위기를 극복하고자 하는 중요한 시도가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단순히 미국산 쇠고기의 수입에 반대하는 것이 아님은 물론이고, 현 정부에 대한 분노만으로는 전혀 해결되지 않는, 그런 보다 근본적인 문제제기를 하고자 했던 것. 물론 그 문제제기가 무엇이었는지는 보다 침착하게 탐구해봐야 하겠습니다만.
아... 너무 댓글이 길어졌네요. 점점 댓글이 산으로 간다는 생각이 드네요. 아...
아무튼, 환경문제는 역시나 '영성', 우리 안의 탐욕에 대한 집단적 반성을 가장 근본에 놓고 생각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 점을 얘기해 보려다가 그만 이렇게 길어져 버렸네요. 제도도 중요하고 통치형태, 경제질서 뭐 그런 것들도 물론 중요합니다만, 어찌 보면, 그런 것들은 결국 부차적인 것이 아닐런지... 하는 생각이 요즘 들어서요.
물론 이렇게 생각하다가도 당장 애 키우는 데 들어가는 돈을 생각하면, 각종 장난감들이 애들에게 그리고 저에게 가져다 주는 편익을 생각하면, 음냐. 갑자기 눈이 벌겋게 되고, 눈에 .가 새겨지는 건 사실이고, '내 안의 탐욕을 어찌 버리겠는가. 그냥 안고 살아가야지.'하는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이지요. 게다가 <우리의 소박한 꿈을 응원해 줘>의 이랜드 노동자들을 생각하면, 현 대통령을 생각하면, 도대체 어떻게 적대자를 사랑하란 말인가 하는 생각이 드는것도 사실이고요. 아우~~~~~
이놈의 '나불나불'은 정말 약도 없고... ㅠ.ㅠ 에고. 댄서님 글을 오랜만에 보고 너무 반가운 나머지 이렇게 주절주절 댄 것으로 좋게 봐주셨으면 좋겠네요. 에고... ㅠ.ㅠ12. phua
'09.11.16 10:54 AM (218.52.xxx.109)ㅎㅎㅎㅎ
공영방송 외에는 방송이 없는 곳에서 우..리..의 댄서님이
사셨다는 것이 왜 이리 신기한지...
솔직히 코난이 나오기 전까지의 글은 글로서만 읽었다는 것(뭔지 몰라서..)..
고백합니당^^13. 어쩜~
'09.11.16 12:04 PM (121.124.xxx.45)이렇게 글이
술술 넘어가는지...
마치
고구마 먹고 목막힐 때 동치미 국물 넘어가듯
시원합니다.^^
재미있게 잘 읽었어요.14. ㅎ
'09.11.16 12:12 PM (210.181.xxx.6)ㅎㅎ
난시청지역에 사셨군요.^^
저는 그 호랑이 선생님에서 겨울에 집안에서 반팔입는 거 보고
정말 깜짝 놀랬습니당.(겨울에 반팔입는 걸 그 드라마에서 처음 봤거든요. 저는^^)
난시청지역은 아니지만, 연탄이 연료였던 시골 단독주택에서 살아서
낭비고 뭐고 그런건 생각도 못했구요.
겨울에 반팔?그게 가능이나 한건가?이렇게 생각했어요.
당시 저는 겨울이면 집안에서도 내복과 스웨터 양말까지 중무장하고
아랫목 이불한조각에 온가족이 파묻혀서 서로 이불잡아당기기 하며
지냈거든요.^^ 글의 배경 얘기에도 공유할 수 있는 추억이 있네요.~15. 갑자기
'09.11.16 2:57 PM (116.127.xxx.27)포비의 원작 이름이 지무시 인가봐요! 우리나라에서만 포비로 바꿨던 걸까요?
16. 프리댄서
'09.11.17 1:34 AM (218.235.xxx.134)하늘을 날자님. 이런 ‘나불나불’은 자꾸 나불나불(?)하셔도 된다니까요. 그렇잖아도 전에 말씀하신 적이 있으셔서 <비노바 바베, 간디를 만나다>를 읽어보려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동네 도서관에 있더라구요. 댓글 보니 가까운 시일 내에 꼭 읽어봐야겠네요.^^
근데 <에콜로지카>는 ‘영성’의 발현, 다시 말해 우리들의 내부혁명(?)을 다루고 있는 책이 아니랍니다. 글쎄, 점점 탐욕스러움을 그악스럽게 드러내며 붕괴를 향해 치달아가는 현 자본주의 체제를 반성적으로 돌아본다는 점에서는 통할 수도 있겠네요. 하지만 <에콜로지카>는 ‘개인의 내부혁명’, 그것에 기초한 대안활동을 제시한다기보다는 (제가 <비노바 바베, 간디를 만나다>를 안 읽어본 터라, 대~충 그렇게 이해를 했네요--;)현 시스템을 비판적으로 돌아보고 그 시스템이 나아가야 할 바를 진지하게 탐구하고 있는 책이죠.
앙드레 고르가 <에콜로지카>에서 강조하고 있는 바는 ‘주체’의 실종입니다. 언젠가 하늘을 날자님께서 <사랑은 지독한, 그러나 너무나 정상적인 혼란> 독후감에서도 쓰신 적이 있는 우리는 대체 왜 이렇게 살아가는가, 이것은 ‘나’의 의지에 따른 바인가 아니면 누군가의 거대한 기획에 타율적으로 따라간 결과인가, ‘나’는 대체 무엇인가, 순수한 ‘나’라는 게 있기나 한 것인가... 하는 고민과 일맥상통하는 점이 있죠.
앙드레 고르는 그에 대해 분명하게 대답합니다. ‘나’는 없어졌다고. 주체는 타자화되었다구요. 그런데 그것의 원인을 미시적인 가지들(푸코 식으로 말하자면 자잘한 파놉티콘들) 속에서 따져보는 게 아니라 거시적으로 통찰합니다. 우리가 자본주의를 내재화했기 때문이라고. 아니, 내재화하도록 떠밀렸기 때문이라고 진단하고 있죠.
그렇게 우리로 하여금 자본주의를 내재화하도록 하여 ‘주체의 타자화’를 가져온 과정을 생산수단, 생산성, 이윤 등의 변화를 통해 고찰한답니다. 결과적으로만 말하자면, 비물질 즉 ‘자본’이 절대적으로 지배하는 단계로 이행을 한 현 자본주의 체제에서는 기업의 ‘가치’(생산설비와 노동자의 생산성 따위가 아니라 부동산 보유현황 및 향후 오름세 전망, 성장 가능성, 창출 가능한 미래의 이윤 등 온통 눈에 보이지 않는 비물질로 이루어진)가 중요해졌기 때문에 기업은 그 ‘가치’를 높이는 데 방해되는 온갖 제도와 법률, 사회적 관습 등등으로부터의 해방을 목소리 높여 주장하게 됐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그토록 목을 매는 ‘성장’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자본의 명령에 따라 기업들이 ‘가치’라는 것을 높이는 활동에 다름 아니라는 거죠. 그런데 ‘가치’ 안에 포함되는 이윤은 (생산과정의 전산화 등등의 이유로 해서 적은 노동량을 투여하고도 많은 생산량에 도달할 수 있기 때문에) 높은 생산성에 기초하고 있다는 것. 즉, 이미 자본주의는 산업경제 단계에서 과잉생산을 해야만 이윤을 남길 수 있는 체제를 구축했다는 것. 하기 때문에 ‘성장’이란 달리 말하면 죽도록 과잉생산을 해야만 이윤을 남길 수 있는 체제의 가속화라는 사실을, 앙드레 고르는 지적합니다. 당연히 그것은 노동자의 영역이 점점 축소되는 것을 의미하구요, 따라서 ‘성장’을 하면 할수록 노동의 소외는 심해지고 ‘일자리’는 항구적인 불안에 시달릴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파헤치죠.
그 불안으로 말미암아 ‘일자리’는 다른 모든 사회적 가치들을 압도하게 되었고, 일자리가 다른 모든 사회적 가치들을 압도하게 됨으로써 성장은 우리가 마땅히 지향해야 할 바라는 당위를 한 겹 더 두르게 됐습니다. 하지만 그 ‘일자리’는 것이 과연 어떤 것인가. 노동자들의 영역이 축소되면서 일자리는 점점 더 비생산적인 것(배달업처럼 다른 이의 노동에 따른 이윤에 기초하는 2차 노동적인 것)으로 변질되고 불연속적인 것이 되고 말죠. 어떤 생생한 열정이 스며들지 못한 것, 존엄이 사라진 것, 한마디로 타율적 노동만이 존재하여 노동 그 자체가 목적이 되어버리는 것. 그래서 앙드레 고르는 이렇게까지 단언한답니다. 일자리는 사라지고 있는 종(種)이라고.
그런데 문제는 생산수단의 ‘현대화’가 노동자들이 노동의 도구를 점유할 수 없는 상황으로 몰아갔다는 거죠. 노동자들이 점점 자신들의 권리를 주장하기가 어려워지는 환경으로 변모된 겁니다. 거기다 노동자들은 ‘물질적’ 성장을 이루던 시절에 ‘소비’라는 형식을 통해 자신들의 노동이 소외되고 있다는 사실을 망각해감으로써 스멀스멀 체제내화해갔습니다. (이 측면을 ‘탐욕의 전면적 부상’이라 부를 수 있을까요?) 그런 요인들이 노동자들로 하여금 비물질이 요구하는 성장에 순응하도록 만들었고 ‘일자리 신화’에 눈이 멀게 만들었다는 거죠. 현재 노동조합들의 활동 제1수칙이 ‘일자리 창출에 기여하고 경제성장에 앞장서겠다’는 것이 된 현실에서 알 수 있듯이요.
그래서 우리는 현재 자기 자신을 상품으로 내파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는 게 앙드레 고르의 생각입니다. 자본주의를 내재화한 타자들로 존재하고 있다고. 그것의 극복을 위해(탈성장으로 자본주의 붕괴 위기에서 탈출하기 위해) 앙드레 고르는 ‘생태주의’를 주창하죠. 이것이 아주아주 거칠게 요약한 <에콜로지카>의 내용이랍니다.^^ (어차피 다음편에서 쓸 건데, 여기서 또 ‘나불나불’댔네요. 흐흐)
사실 이 책을 읽기 전까지 저는 생태주의에 대해 잘 모르고 있는 데다가 오해까지 하고 있었어요.--; 물론 <에콜로지카>에서도 생태주의의 구체적인 내용은 잘 드러나 있지 않습니다. 큰 방향만 제시하고 있달까요? 하지만 그저 단순하게 환경을 중요시하는 ‘대안 생활주의’로만 이해를 했던 생태주의가 사실은 매우 정치한 현실인식에 기반해 탄생한 사상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답니다. 그리고 어쩌면 현 시스템의 ‘가장 현실적인’ 대안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구요. 흠.. 앙드레 고르가 이전에 발표했다는 <프롤레타리아여 안녕>까지 봐야 좀더 잘 이해를 하게 될지도 모르겠어요. 거기서 앙드레 고르는 더 이상 노동자가 사회변혁의 주체가 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통찰했다고 하더군요. 그러면서 가장 선구적으로 최저임금제 도입 등을 주장했다던데... 그 책이 <에콜로지카>를 출간한 생각의나무에서 머지않아 나올 거랍니다.^^
어쩌면 김지하 시인이나 촛불집회 모두 ‘주체’의 문제와 연결되어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제 생각에 김지하 시인이 촛불집회에 열광했던 건 ‘새로운 주체’들이 출현했다고 봤기 때문인 것 같아요. 기존의 도그마에 사로잡히지 않은, 그것으로부터 전적으로 자유로운 세력들이 어느 날 문득 나타나더니 신선한 방식으로 현실에 저항을 했다는 거죠. 얼마 전에 김지하 시인이 또 ‘헛소리’를 했다고 해서 진중권이 조갑제, 김동길과 한데 묶어서 김지하를 비판했던데 저는 그건 아니라고 봐요. 그들과 서있는 지점이 전적으로 다르니까요. 김지하 시인이 율려니 후천개벽이니 하면서 알아듣지 못할 소리를 자꾸 지껄이는 것도, ‘동아시아 문화권’을 통합한 어떤 운동형태를 제안하는 것도 기존의 도그마가 더 이상 세상을 바꿀 수 없다고 봤기 때문이죠. 기존의 ‘운동권’을 싫어하는 것도 그래서이지 싶습니다.ㅋㅋ그래도 아우, 노인네... 사람들 가슴에 상처를 그렇게 팍팍 줄 필요는 없는데..
촛불집회의 지도부 문제는 우리가 정말 진지하게 고민해봐야 한다고 생각해요. 개별적이고 산발적으로 집회에 참가하는 사람들을 하나로 묶어서 거대한 함성을 들려줄 필요는 있겠죠. 하지만 작년 촛불집회에 참가하면서 내내 느꼈던 건데 ‘광우병 대책회의’가 주도한 집회형식은 그들은 하나로 묶기에 적절한 형식이 아니었습니다. 다른 걸 다 떠나서 그 집회는 재미가 없어요. 아... 정말 재미가 없더라구요.^^ 예전 탄핵 사태 때 박성준 선생도 비슷한 지적을 했던 적이 있어요. 탄핵 반대 집회에 자발적으로 참여한 시민들을 운동권이 주도하는 집회로 규합하는 건 재고해봐야 한다... 촛불집회를 거치면서는 저는 그 말에 전적으로 동의했습니다. 촛불들의 발랄함을 억눌렀던 그 획일성을 한번 돌아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해, 촛불집회에 꼭 지도부가 있어야 할 필요가 있을까... 노통 빈소에 강희남 목사 자결을 알리는 플래카드가 나붙은 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진보연대 같은 단체의 참여는 또 어떻게? 아직 생각이 정리되지 않았지만 촛불집회 역시 저한테는 ‘주체’의 문제를 되새기게 만드는 것 같아요.
그리고 자율적 주체로 존재하기 위해 물론 내 안의 탐욕을 억누르는 것도 필요하지만 그것이 주가 되면, 그게 바로 함석헌 선생, 간디, 비노바 바베처럼 살아간다는 뜻이 되지 않을까 합니다. 간디의 물레에 동의하는 것과 그것을 따라하는 것은 다르죠. 일단 저는 그렇게 살 자신이 없고 꼭 그렇게 살아야 자율적 주체로 존재할 수 있다고도 생각하지 않아요. 케17. 프리댄서
'09.11.17 2:02 AM (218.235.xxx.134)'ㅎㅎㅎ'님. 제가 호수공원 근처에 살았더랬습니다.^^ 그쪽 아파트에서도 살았었고 오피스텔에도 잠깐 머물렀었죠. 일산에서도 특히 거기, 호수공원 주위가 더더욱 인더스트리아 같은 느낌을 주는 듯해요. 사법연수원부터 킨텍스 조금 못 미치는 곳까지 주르륵 생겨난 주상복합 아파트와 오피스텔들이 참 현대적이죠. 정말 그쪽은 인더스트리아 같다니까요.ㅋㅋ 호수공원에서 자전거도 타고 '파워워킹'도 하고 그랬는데.
근데 참 거시기한 것이, 공원에 가보면 '유유히 거니는 사람'들이 별로 없어요. 데이트 나온 연인들이나 오랜만이 나들이 나온 가족들이면 모를까. 혹은 '노래하는 분수대' 공연이나 무슨 행사가 있으면 모를까. 그 외에는 다 경보에 파워워킹에 조깅에 마라톤... 바빠요, 암튼 바쁩니다. 거기에서도 뭔가 정신없이 핑핑 돌아가는 느낌이 들죠. 오히려 유유히 거니는 사람들이 운동하는 사람들한테 방해물로 여겨지곤 하고. 흠.. 그러고 보니 저도 '간만에' 운동할 때를 제외하곤 유유히 거닐기 위해 호수공원에 갔던 적은 거의(?) 없는 것 같네요. 그 근처에서 몇 년을 살았는데도...^^
그리고 저는 난시청지역이라도 읍내에서 자랐어유. ㅋㅋ
옛날에 연탄 때는 방은 아랫목 장판지가 꺼멓게 눌어있곤 했었죠.^^ 그쪽에만 지글지글 끓어서. 아랫목에 담요 깔아놓고, 외출했다 돌아오면 부리나케 그 담요 속으로 손 집어 넣어서 손을 해동(?)시켰던 생각도 나고 그러네요.^^
'어쩜~'님.
'고구마 먹고 목막힐 때 동치미 국물 넘어가듯'이라는 비유, 정말 최상의 칭찬이십니다.^^ 아... 아닌 게 아니라 시원한 동치미 국물에 고구마 먹고 싶네요. 근데 고구마는 있지만 동치미가 없다는..ㅠㅠ 경빈마마님께서 키톡에 올리신 '동치미 담글 때'라는 글을 보니, 어렸을 때 연탄가스 마신 적이 있으시다 그러시더라구요. 저도 있어요.ㅋㅋ
그날, 초딩 4학년 땐가 그랬는데, 왜 제가 부모님과 한방에서 잤는지는 모르겠어요. 오빠, 언니들이 학교며 직장 때문에 제가 어렸을 때부터 집을 떠나 있던 터라 저는 아주 어렸을 때부터 '내방'이 있었고 거기에서 잤었거든요. 근데 그날은 일이 생기려고 그랬는지 몰라도 엄마, 아버지랑 같이 잔 거예요. 근데 아침에 머리가 깨질 듯이 아프더라구요. 그래서 잠에서 깬 다음 엄마한테 머리 아프다고 하니까, 엄마가 갑자기 무릎을 치시며 나무관세음보살, 나무관세음보살을 거듭 되뇌시는 거예요. 그러면서 김치국물을 갖고 와서 얼른 마시라고 하시더라구요.
제일 먼저 엄마가 머리 아파서 일어났었고 그 다음엔 아버지. 그리고 곧바로 나. 그 숨가쁘게 이어진 기상 릴레이의 원인이 '깨질 듯이 아픈 머리'였기 때문에 연탄가스가 방에 들어왔다는 걸 아시고는 김치국물을 마시게 했던 거죠. 큰일 날 뻔했었는데 하늘이 도왔다고.^^ 그렇게 허술한 집도 아니었는데 그랬었네요, 그때....18. 프리댄서
'09.11.17 6:25 AM (218.235.xxx.134)또다시 자작댓글을 달아봅니다.--; 오늘도 뻑적지근하게 추우려나 봐요. 어제 겨울코트 입고 외출했는데도 어깨를 자꾸 옹송거리게 되더만..^^ 어제 바람이 참 맵싸하더라구요. 겨울바람 하면 최서해의 <홍염> 서두가 떠오른답니다. 캬, 그 생생한 묘사... 다행히 포털에서 '최서해 홍염'을 쳤더니 친절하신 분들께서 전문을 올려놓으신 것들이 있어서 슬쩍.^^
"겨울은 이 가난한---백두산 서북편 서간도 한귀퉁이에 있는 이 가난한 촌락 빼허[白河]에도 찾아들었다. 겨울이 찾아들면 조그만 강을 앞에 끼고 큰 산을 등진 빼허는 쓸쓸히 눈 속에 묻히어서 차디찬 좁은 하늘을 치어다보게 된다.
눈보라는 북국의 특색이다. 빼허의 겨울에도 그러한 특색이 있다. 이것이 빼허의 생령들을 괴롭게 하는 것이다.
오늘도 눈보라가 친다.
북극의 얼음 세계나 거쳐오는 듯한 차디찬 바람이 우하고 몰려오는 때면 산봉우리와 엉성한 가지 끝에 쌓였던 눈들이 한꺼번에 휘날려서 이 좁은 산골은 뿌연 눈안개 속에 들게 된다. 어떤 때는 강골바람에 빙판에 덮였던 눈이 산봉우리로 불리게 된다. 이렇게 교대적으로 산봉우리의 눈이 들로 내리고 빙판의 눈이 산봉우리로 올리달려서 서로 엇바뀌는 때면 그런대로 관계치 않으나, 하뉘[天風]와 강바람이 한꺼번에 불어서 강으로부터 올리다른 눈과 봉우리로부터 내리다른 눈이 서로 부딪치고 어울어지게 되면 눈보라와 바람 소리에 빼허의 좁은 골짜기는 터질 듯한 동요를 받는다."
저런 작가를 몇 십 년 동안이나 금지했었다니... 어쨌든 혹시나 이 댓글을 읽으시는 분들이 계시면 옷 두툼하게 입으시고 감기 조심하세요~~~ (이러면 꼭 끝에 '판피린 에스'를 붙여줘야 할 것 같음.--;)
그리고 하늘을 날자님. 저번에 <세계의 비참> 글 올리신 거에 댓글을 써서 등록 버튼을 눌렀더니 그새 '삭제된 글입니다'라는 메시지가 뜨더군요. 흐흐. 그거 잘 읽었구요, 링크해주신 대담도 잘 봤어요.^^ <에콜로지카>의 문제의식이 그 대담과 <세계의 비참> 문제의식과 궤를 같이 하는 듯싶어요. 암튼 아기들이 감기에 걸리지 않고 무럭무럭 잘 커서 자기들끼리 재미나게 놀 날을 기원해드리겠습니다.^^; 저 위에 제가 링크한 순덕이네가 그렇게 자맨데, 순덕이엄마님 말씀이 '자기들끼리' 죽고 못살면서 잘 논다 하시더라구요.^^
'갑자기'님. 아까아까 댓글 달면서 제가 깜빡했는데, 맞아요, 원본에서 포비의 이름이 '지무시(혹은 짐시)'더라구요. 제가 작년에 일어판 원본으로 봤거든요. (물론 자막 있는 거...^^) 그러니까 아마도 우리나라에서만 포비로 통하는 거 같아요. <미래소년 코난>이 미국소설을 원작으로 한다고 알고 있어요. 그러니 다른 외국에서도 지무시라 하겠죠? 근데 저는 포비라는 이름이 더 포비한테 잘 어울리다는 생각이 들어요. 하지만 문득 궁금하긴 하네요. 만화를 수입하면서 어째서 포비 이름만 바꿨는지, 그리고 그 이름을 그렇게 잘 지었는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