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주 월요일인 19일은 여수, 그리고 20일은 순천에서 여순사건이 일어난지 61주년되는 날입니다.
지금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이명박정부의 뿌리라고 할수 있는 이승만정권이 정권체제 유지를 위해
얼마나 많은 국민을 학살했는지(국제적으로 일부에서는 동족을 무더기로 학살한 캄보디아 크메르주즈의 폴 포트와 이승만을 비교하기도 합니다) 다시 한번 되돌아 보기 위해 또 국가 폭력에 의해 돌아가신 분들을 추모하기 위해 일부는 전에 올렸던 글이지만 다시 한번 생각을 갖는다는 의미에서 올려 봅니다.
아무쪼록 과거를 덮을 수 없습니다.
많은 젊으신 분들께서 부디 기억해 주십시요.
조금 길더라도 공부를 한다는 의미에서 끝까지 읽어 주시기 바랍니다.
(국내상황)
해방 후 우리는 우리 손으로 자주 독립국가를 세우기 위해 건국준비위원회(건준)을 설립하였고 미국과 소련은 자기 국익에 맞는 정부수립을 위해 충돌하였고, 국내에서도 1946년 6월 모스코바 삼상회의의 결과인 신탁통치를 반대하는 입장에서 단독정부를 수립하자는 이승만에 맞서 일제와 싸웠던 임시정부를 계승하자는 한독당 김구, 좌익으로는 온건 좌파인 여운형, 온건 우파인 김규식, 해방후 강력한 대중정당인 남노당 박헌영등이 단독정부수립에 반대하였다.
이때에 친일파들도 반탁을 부르짖으며 애국자 행세를 했다.
각 지방에서는 인민 치안대등 를 만들어 친일 세력제거 및 자치 치안대를 만들고
한편 1945년 9월 8일 조선총독부에 태극기가 아닌 성조기를 꽂은 미군은 미군정만이 유일한 정부임을 강조하면서 치안유지, 행정공백을 메꾸기 위해 친일파를 대거 등용하였다.
(제주상황)
2차대전 막바지인 1945년 3월, 일본은 인구20만인 제주도에 일본군 7만명이 주둔하며 동굴등을 이용 요새화시키면서 최후 항전을 준비한다.
해방후 제주도에서도 항일운동가가 주축으로 건준(후 인민위원회로 개칭)이 설립되어 친일세력을 배제하고 좌우 가릴 것 없이 합류하여 자치적으로 야간학교운영, 치안유지, 농사법 교육등을 실시하였다. 미군은 11월 9일 제주에 상륙하여 이때까지 미군정과도 협력이 원만하였다.
제주 4.3민중항쟁
1947년 3월1일 삼일절 기념식후 2,3만명이 가두시위를 벌이는 과정에서 구경나온 6살 먹은 아이가 기마순경의 말발굽에 깔리고 도망간 순경을 쫓아 경찰서를 향한 군중에게 발포를 하여 6명이 살해된다.
제주도에서는 이를 항의하기 위해 관공서를 포함한 제주전체 파업이 있었고 사건을 조사한 군정에서는 민심수습보다는 남로당이 선동했다는 주장으로 좌익척결에 주력했다.
1947년 3월14일 경무부장인 조병옥(현 자유선진당 국회의원 조순형 -2003년 10월31일 노무현은 제주도에 내려가 1948년 4.3 민중항쟁시 많은 제주도민을 학살한 것에 대해 과거의 정부 폭력의 잘못을 사죄하였고 그 중심에는 조순형의 아비 조병옥이 있었음 그리고 늠은 노무현대통령 탄핵을 발의하였음-)을 제주로 파견하여 숱한 사람을 체포 고문 끝에 구체적 근거 제시도 없이 제주도민의 90%를 좌익으로 몰아 세웠다.
-제주도를 붉은섬이라고 별칭-
신임 도지사가 발령되면서 서북청년회(일제 시 이북에서 남하한 이북의 각 도별 청년단체들의 통합체로 결성된 우익의 선봉에 서서 좌익세력을 쳐부수는 전위 행동부대로서의 역할을 주도했음. 주로 예수를 믿고 일본 쪽에 붙어 땅이나 착취하며 지주 노릇을 하였던 부류는 해방 후 김일성의 정부가 들어서자 남하한다. 이때 서북청년회를 만들었던 사람이 금란교회 김홍도 목사의 아버지다)가 행정부서등 관공서를 장악하였고 소위 빨갱이 색출이 시작되었다.
가로 3m*3.6m크기의 유치장에 한번에 35명을 유치했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니 얼마나 무수한 주민들을 체포하여 고문을 가했는지 짐작이 가는 대목이다.
과정에서 중학생을 포함한 3명이 경찰의 구타 고문으로 숨졌는데 중학교 2년생은 거꾸로 매달린채 곤봉에 맞아 숨졌고 그중 한사람은 긴 머리카락이 천장에 매달린 채 고문을 받다가 사망했다.
민심은 이미 미군정이나 경찰에게서 멀어져 갔고 이때를 틈타 남로당이 개입을 하기 시작하여 4.3 제주민중봉기가 시작된 것이다.
1948.4.3부터 1954.9.21 한라산 금족지역이 해제될 때까지 남로당 무장대와 군경토벌대 사이에서 영문도 모르고 희생된 제주도민만 30,000~35,000명이라고 하니 지극히 공노할 일이 아니겠는가?
4월3일, 계속되는 경찰과 서북청년회의 탄압에 저항하는 주민 및 무장대는 ‘탄압이면 항쟁이다’, ‘조국의 통일독립과 완전한 민족 해방‘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경찰서및 서청회를 습격하기 시작한다.
유격대 100명, 자위대200명, 특경대20명으로 시작된 일제식 장총27정, 권총, 3정, 수류탄 25발, 연막탄 7발외 죽창으로 무장한 산중 무장대는 전 기간을 통해 500명을 넘지 않았고 토벌대는 ‘무장대가 팔로군출신이다. 북한괴뢰군이다. 전국에서 모인 백정이다’라는 설을 퍼트리며 강경진압을 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미군정은 봉기의 원인은 무시하고 미군함으로 해안을 봉쇄한 채 강경진압에 혈안이 되었고 오히려 유혈사태를 막기 위해 가족을 무장대에게 인질로 잡히게 하면서 까지 한 경비대 9연대장 김익렬과의 김달삼 무장대장과의 협상으로 3일간 평화가 오는 듯 했으나 조병옥의 지시로 경찰의 비호 아래 우익청년단이 제주도 오라리 민가에 불을 질렀고 미군정은 경찰이 주장하는 무장대의 소행이라는 주장을 수용하면서 미군정이 화재현장을 공중 촬영한 무성영화를 조작해 선전용으로 사용하여 강경진압을 합리화 시킨다.
미군은 경찰에서 경비대로 넘기면서 강경작전이 시작된다.
왜냐하면 5.10 남한만의 단독선거 전에 진압을 끝내야 하기 때문이다.
1948년 5월5일 미군정책임자, 조병옥, 며칠 전 유혈사태를 막기 위해 평화협정을 이끌어 냈던 경비대 김익렬연대장등이 회의를 하는 가운데 조병옥은 ‘계획된 공산폭동’이라고 미군정 주장대로 강경진압을 원했고 김익렬연대장은 입산자들이 늘어가는 것은 경찰의 실책이라는 주장으로 무장대와 주민을 분리시키자는 의견을 내놓고 회의 중 몸싸움까지 벌렸다.
결국 김익렬연대장은 다음날 해임되었고 ‘피의 진압’이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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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거를 보이콧하기 위해 무장대는 주민들을 5월10일 선거전에 입산시켰고 선거당일에는 우익청년, 경찰가족, 선거관리위원등 극소수사람만이 마을을 지켰고 주민들은 선거가 끝나고 한산하였다.
제주뿐 아니라 전국에서도 5.10 선거를 앞두고 경찰과 제주외의 각 지역 무장대와의 혈전으로 경찰 50여명과 무장대 110여명이 사망했다.
미군정은 제주도 선거를 무효화하고 김익렬중령 후임으로 온 박진경 9연대장에게 강경진압을 명하여 40여일간 4,000여명을 체포, 부임 한달 반 만에 대령으로 진급한다.
그는 진급축하연을 마치고 집에서 잠을 자던 중 ‘양민학살을 막고 성스러운 경비대건설을 주장’하는 부하 문상길중위에 의해 암살된다.
대령진급 축하연 후 부하에게 암살을 당한 박진경 후임으로 부임한 9연대장 송요찬소령(1918~1980 일본지원군출신. 4.3민중항쟁 진압군 책임자. 4.19 민주혁명시 서울계엄사령관)은 1948년 10월 제주도 해안선 5Km 밖에 있는 주민은 무조건 폭도로 간주 총살하겠다는 포고령을 내리고 산간에 있는 마을을 불사르고 초토화 작전에 돌입한다.
여기서 여순반란사건이 일어난다.
1948년 10월19일 제주도로의 출동을 명령받은 여수 주둔 14연대는 동족상잔을 반대한다며
지창수상사가 주축이 되어 봉기를 일으킨다.
민중들의 경찰에 대한 반감, 식량 배급제를 비롯한 경제적 불만 등이 팽배한 때에 남로당도 14연대와 합세하여 경찰, 친일세력, 우익세력과의 싸움이 시작된다.
경찰서와 관공서를 장악하고 여수·순천을 순식간에 휩쓴 뒤 곧바로 광양·곡성·구례·벌교·고흥 등 전라남도 동부 5개 지방을 장악해 나갔다
그러나 사전에 치밀한 준비없이 발생한 사건이므로 미군 지휘하에 8일만에 진압이 되며 이승만은 이 사건을 계기로 각계각층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국가보안법 제정, 정치적 반대세력에 대한 무제한적인 탄압을 제도화시켰으며 대대적인 숙군을 단행, 좌익계와 광복군계를 포함한 모든 반(反)이승만 성향의 군인을 제거했다.
여기서 남로당 고위층인 박정희도 무기징역선고를 받으나 군에 산재되어 있는 남로당 명단을 넘겨주고 일본군 출신 선배인 정일권, 백선엽, 이용문장군등의 협조하에 살아남는다.
제주도에서는 중산간마을에 거주하는 주민들을 강제로 해안가로 소개시키기 위한 방법으로 젖먹이와 80대 노인들까지 닥치는 대로 학살을 하였고 겁에 질린 주민들은 해안가로 가거나 일부는 입산을 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해안가로 소개 된 가족이라도 가족 중 한사람이 없으면 도피자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총살을 하였고, 서청출신의 경찰은 도망가는 동물을 잡듯이 발포하여 무수한 주민들을 학살하였다.
또 경찰은 일제 때 배운 고문 기술을 해방 후 동족에게 그대로 사용하였고 토벌대는 청년이 사라진 집안은 노인, 어린아이, 아녀자까지 무조건 총살을 하였다.
사례로
-도피자 가족 76명을 표선리 버들연못에서 총살,
-외도지서장의 월동 나무를 하자고 톱과 도끼를 지참하고 나오라는 권유로 은신처에서 나온 주민들을 주둔군이 집단 학살,
-하루라도 죽이지 않으면 밥맛이 없다라는 서청출신의 삼양지서장,
-매일 마약에 취해 있던 9연대 정보과장,
-1948년 12월부터 1949년 초까지 진압이 아니라 여자를 유린, 아이가 보는 앞에서 아버지어머니와 형을 총살,
-빌레못동굴에 은신해 있던 아이를 발을 잡고 바위에 머리를 쳐 죽였고
-북촌마을에는 토벌대 군인 두명이 죽자 동네에 들어가 전 가옥에 불을 지르고 군주둔지로 옮기라고 명령, 이에 순응한 주민 300여명을 학살하였고]
물론 제주 4.3민중봉기 발생 후 1954년 한라산 금족령이 해제 될 때까지 6년간 무장대에 희생된 동족을 학살한 경찰 140명, 군인 180명, 서북청년회, 대동청년단등 우익민간인 639명이 ‘국가유공자’로 사망했고, 벌레처럼 죽음을 당한 주민의 수는 전도민의 1/9인 30,~ 35,000명입니다.
후 국방장관까지 지냈던 유재흥 제주주둔 사령관 휘하에 함병선연대장도 폭도 지역에서 발견되는 주민들을 무차별 사살하는 가혹작전을 폈던 사람이다.
4.19이후 1960년 제주대학교 학생들과 도민들의 진상조사가 실시되었으나 박정희에 의해 감춰지고 그들이 오히려 곤혹을 치루었으며 1997년 김영삼정부 말에도 4.3을 알리기 위한 다큐제작자들이 관계기관에 의해 곤혹을 치루는 일이 있었습니다. 1998년 국민의 정부 때 본격적인 진상작업이 시작되었고 참여정부에 들어온 2003년 10월31일 노무현대통령의 공식적인 사과가 있었다고는 하나 뿌리 깊은 정부에 대한 불신은 몇 세대가 흘러야 되지 않나 생각됩니다.
여순사건
여순반란사건하면 북한과 남노당이 국가의 전복을 위해 일으킨 군인반란으로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그 당시 언론은 정부의 발표문대로 반란군이 얼마나 많은 양민을 잔인하게 학살했는지
또 국군은 얼마나 용맹스럽게 반란 진압에 나섰는지를 상세히 보도했다.
한국군의 용맹스런 작전으로 기억되는 여순사건 진압작전의 실체는 주로 일반 주민을 상대로 벌인 전투였다. 즉 건국 후 최초의 전투는 외부의 적을 대상으로 한 것이 아니라 자국국민을 대상으로 수행되었다.
좌익학살로 알려진 것이 한국군의 용맹스런 작전의 실체는 주민들을 대상으로 벌린 군경에 의한 대량학살이라는 것은 이제까지 많은 국민들은 모른다.
처벌받은 사람은 그들이 빨갱이였기 때문에가 아니고 처벌받은 후에 빨갱이로 만들어졌다.
이승만은 ‘빨갱이가 공산주의 국가를 만들기 위해 쳐들어 온다’, ‘빨갱이는 죽여야 한다’
‘불순분자 또는 좌익은 죽여도 좋다’라는 논리가 지금까지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밤 12시에 귀신이 나타난다는 학교괴담은 공동묘지에 학교가 설립된 게 아니고 학교가 즉결 처형장이었기 때문이다.
여순사건을 거치면서 공산주의는 양민을 학살하는 살인마, 비인간, 악마로 간주되었고 같은 하늘 아래에서는 살지 못하는 존재, 도덕적 윤리적으로 인간이하의 존재인 공산주의자는 빨갱이로 불리워졌다.
군경역사에서 국민을 상대로 한 노골적인 폭력은 지난 2003년 10월31일 노무현대통령이 제주 4.3민중항쟁시 국가 폭력에 의해 희생된 분들에 대한 사죄 이외에는 단 한 번도 제대로 반성되지 못하였다.
여순사건 진압에서 보여준 이승만정권의 민간인 학살은 한국전쟁직후 발생한 학살의 전주곡이고 1980년 광주민중학쟁의 유혈사태로 재발되었다.
진실이 규명이 안 된 이유는 지금까지도 반공체제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정권이 반세기이상을 지배했기 때문이다.
지금 뉴라이트계열의 학자들은 예전으로 돌아가 자랑스런 건국신화를 만들기 위해 역사를 독점하여 현대사를 재서술하려 하고 있다.
대구항쟁, 제주43항쟁, 여순사건은 해방후 한국전쟁까지 발생한 3대투쟁이다.
이승만정부는 처음에 김구세력이 여순사건의 배후라고 지목했다가 나중에는 북한과 연계되었다고 발표하였다.
14연대 봉기군이 여순를 점령 후에는 우익세력에 대한 학살이 진행되었지만 진압군이 여순을 점령한 후에는 이보다 훨씬 많은 민간인이 학살당하였다.
여순사건은 이승만 반공체제를 굳건히하는 밑걸음이다.
언론, 문인, 종교인들도 권력에 사주로 좌익세력의 도덕적 파탄과 비인간성을 질타하였으며
계엄법과 국가보안법은 군대와 경찰력의 사용을 합법화해 주었고 수많은 사상범 양산으로 전국형무소는 보안법위반사범으로 가득찼다.
전남과 제주도는 같은 행정구역이었고 제주도승격은 1946년 8월1일이었고 전남사람들은 제주도민도 같은 지역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미군정이 총독기구의 존재를 유지하고 일제하의 관리와 경찰들을 유임에 저항한 그들은
단독선거 남한단독정부수립을 거부하고 봉기한 제주도민의 봉기를 진압하러 제주도의 파병될수 없다고 생각하였다.
즉 동족상잔 결사반대 미군의 퇴진, 14연대내 대부분의 병사들은 대한민국의 국방군은 침공하는 외국군대와 싸우는 것이 본래의 사명이지 동족의 농민과 청년, 부녀자에게 총을 쏘고 죽이기 위해 국방군에 들어 온 것이 아니다라는 의식을 가진 대부분의 병사는 친일경찰에 대한 감정, 제주파병반대하기 위한 군중심리가 작용했다.
그 당시 군의 성격
(장교)
국방경비대 1, 2기 장교등은 일본군, 만주군등에서 경력을 쌓았던 일본군 출신들이고
3기 4기는 사병과 민간인 출신으로 반일 감정이 있는 반이승만 성향으로 구성,
5기는 일본군출신과 기독교, 2/3이상이 북한출신이다.
(사병)
해방후 치안대, 사회운동활동 경험자들의 입대로 친일파 경찰을 중심으로 구성된 경찰과는 성격을 달리했다
사회운동으로 수배받던 사람들도 인맥을 통해 각 지역에서 군에 입대했고
현실은 경찰의 보조조직으로 장비나 인력면에서 경찰에 뒤졌다.
경찰은 미군이 사용하던 화력을 갖추었으나 군인인 경비대는 경찰의 모자에 다는 귀단추로 쓰이는 무궁화를 계급장으로 달 정도로 열악했고 경찰관에게 심한 열등감을 가졌다.
미군은 1947년 말 미소공동위원회가 실패하고 미소의 대립이 격화되자 남북분단정권 수립이 확실해지자 정수수립을 위한 치안확보 남한내 폭동을 진압하기 위하여 경비대를 경찰의 숫자보다 늘리고 활용
경찰은 경비대가 좌익의 근거이고 반공사상이 투철치 못한 집단이라 여기고 경비대는 경찰을 친일 집단이라 생각 자주 충돌하였다.
경찰은 경비대가 좌익의 근거지가 되고 반공사상이 투철치 않은 집단이라 여겼고 경비대는 경찰이 일제시대때 인민을 괴롭히던 친일집단이라 생각했기 때문에 전국 모든 지역에서 군경충돌이 일주일에 한번 꼴로 발생하였다.
경비대간부는 일본군이나 관동군출신으로 군 우위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고 경비대 사병은 일제주구로 활동했던 경찰이 자신보다 높은 대우를 받으며 자신들을 멸시하는 데 분노를 느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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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순사건의 진실
여순사건은 군내부에서 발생하였고 지방좌익세력이 가담함으로서 신생 이승만 정부를 놀라게 했다. 하지만 이 봉기는 이승만정부와 미군이 대응 못할 만큼 치밀하게 계획되거나 뚜렷한 목적이 있는 봉기는 아니었다. 여수에서 일어난 봉기는 1948년 10월 19일 제주 4.3 민중봉기를 진압하기 위해 파견되는 것을 반대하여 여수 주둔 14연대 지창수상사 및 소수의 군인이 봉기한 사건이다.
14연대 인사담당 선임하사관 지창수는 파병보름전부터 이미 제주도 파병을 알고 있었다.
그 당시 많은 군인 및 국민들은 미군정의 곡물 매입정책에서 가난한 소작농에게 폭력을 휘두르며 양곡을 뺏은 친일경찰세력과의 수많은 다툼 등으로 인한 친일파척결, 남한만의 단독선거 반대의 분위기었다.
즉 일본 잔재청산과 민주적 개혁이 좌절된 것에 대한 폭발로 14연대 하사관 세력이 독자적으로 일으킨 봉기였고 북한정권이나 남로당 중앙은 물론이고 전남도당이나 여순 지역당에서도 알지 못했다.
그럼에도 14연대 봉기는 빠르게 번져나가 하루만에 여수와 순천이 봉기군 수중에 들어갔다.
14연대 병력 중 2/5정도인 1,200명정도가 여수시내로 진입하여 새벽 1시경 여수경찰서에 도착한다. 방어하던 경찰, 헌병대는 많은 사상자를 내며 무너지고 대치중이던 100여명의 경찰은 도망치거나 전투 중에 죽는다.
20일 오전3시 여수경찰서를 점령하고 400여명은 여수에 잔류하여 현지주민들과 치안을 담당하기로 하고 약 800여명이 오전 8시22분 발 기차 5량을 타고 약 40Km 북에 위치한 순천에 오전 9시 30경에 도착한다.
순천에 도착한 봉기군은 여수봉기 소식을 듣고 새벽에 방어진을 구축한 경찰들과 접전을 벌여 100여명의 경찰을 사살한다.
기차를 타지 못한 봉기군은 자동차 또는 도보로 걸어오면서 22일까지 근처에 있는 경찰서 및 여러 경찰지서를 습격하여 무너뜨린다. 이때에 많은 경찰관들이 도망을 치거나 사상자를 낸다.
더욱 더 놀라운 사태는 봉기를 주도한 14연대 하사관이 소수에 불과하고 봉기를 일으킨 다음에는 어떻게 진행할지도 뚜렷히 정해진 바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지방좌익세력과 민중이 대거 동참했다는 사실이었다.
광주에서 진압군으로 파견된 군인들은 같은 군인들과 싸움을 할 수 없다고 봉기군에 합류한다.
봉기기간 다른 부대가 합류한 것은 5차례나 있었다. 한솥밥을 먹던 동료에게 총을 쏠 수 없다는 생각으로 오히려 봉기군과 합류한 진압군들도 상당수 있었다. 이는 14연대 봉기세력이 동족을 죽이러 가는 제주도파병명령을 받아드릴 수 없으며 친일파와 경찰을 타도하자는 호소가 군인과 민중을 움직였다. 분단정권과 경찰에 대한 불만은 14연대 일반사병과 지역민들이 봉기에 참가하는 중요한 이유가 되었다
이러한 요인 때문에 봉기는 몇 일만에 광양, 구례, 보성, 벌교 등 전남 동부지역으로 빠르게 번져 나갔다.
봉기군이 점령한 여수와 순천에서는 지방좌익세력과 청년, 학생들이 대거 참가하여 광범위한 대중봉기로 발전하였다. 남로당을 비롯한 대중단체들은 지하활동을 끝내고 공개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남로당원들은 인민위원회를 건설하여 식량배급과 친일파, 민족반역자, 반동세력 처단 등의 기초 행정을 시작하였다. 학생들은 총을 잡고 봉기군을 원조했으며 여학생들과 여성조직원들은 봉기군에게 밥을 해주는 등의 방식으로 봉기군을 도왔다. 직장에서는 종업원 자치위원회가 조직되어 공장을 접수하였다.
인민위원회가 통치한 8일 동안 여수와 3일간의 순천은 봉기군의 물리력으로 성벽을 쌓은 해방구였다. 여수와 순천에서 만들어진 인민위원회는 해방직후 등장한 지방인민위원회의 전통을 계승했다. 남북에 분단정권이 이미 세워진 상태에서 발생한 여순 대중봉기는 대한민국의 법령을 인정치 않고 분단정권을 완전히 부정했다. 봉기 대중에게 이승만 정권은 친일파, 모리간상배들이 추진한 단독 정부였고 은행 예금은 인민의 고혈을 빨아 모은 것이었다.
경찰과 우익 세력에 대한 신속한 처단은 해방 후 일어난 대구 항쟁이나 제주 4.3항쟁과도 구별되는 것이었다. 봉기군 점령지역에서 벌어졌던 우익 인사에 대한 처단은 해방 후 사회적 과제가 해결되지 못한 분노의 폭발이었다.
여수나 순천은 해방 후 인민위원회 활동이 활발했던 곳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여순사건단시의 인민위원회는 급속히 재건되어 친일파와 반동세력의 처형에 나섰다. 경찰은 사복을 입고 도망치거나 붙잡혀 참혹하게 살해당하고 여수의 유명한 자본가였던 김영준과 우익청년단장등도 죽음을 당했다.
여순 봉기는 결국 전남 동부지역에 고립된 투쟁으로 끝났다. 여수. 순천에서는 며칠간의 인민 행정이 가능했으나 나머지 지역은 한 차례 휩쓸고 간 바람이거나 봉기군과 진압군의 반복되는 점령과 재점령의 순환으로 끝났다. 봉기초기에 나타났던 군인들의 봉기군 합류도 시일이 지나면서 점점 줄어들었다.
진압군과의 첫 교전은 광주로 가는 길목인 순천 북방 12Km떨어진 학구리에서 막강한 화력을 가진 진압군에게 첫 패배를 당하고 동쪽인 광양, 벌교, 구례 ,조성, 낙안, 서쪽인 보성으로 도주하는데 그 쪽은 봉기군이 들어오기도 전에 이미 지방 좌익세력과 주민에 의해 경찰서가 피습되었고 경찰들은 피살 또는 도주했기 때문에 봉기군의 진입이 수월했던 곳이다.
각 지역마다 차이가 있지만 봉기군은 순천은 23일, 여수군은 27일까지 점령되었다.
각 지역에서 짧게는 3일, 길게는 일주일간 봉기군이 점령했지만 진압군의 공격으로 대부분의 봉기의 확산 가능성을 타진하던 봉기군은 진압군이 포위를 좁혀오자 백운산과 지리산 등의 산악지대로 주력을 이동시켰다.
그사이 봉기군과 주민, 좌익세력은 인민위원회가 주체가 되어 친일세력, 경찰이나, 우익을 처벌하는데 국한되었지만 진압군이 들어 온 후에는 부역자, 좌익세력을 비롯한 반미, 반이승만 세력을 계엄이라는 구실로 학살하기 시작한다.
여수인민위원회에서는 봉기군이 들어온 날 인 20일 12시 경찰관 50명, 우익인사 20명을 검거했는데 이들을 일일이 심문 조사하여 대부분을 석방하였으나 몰지각한 과격분자들에 의해 경찰복장을 한 경찰관이 살해되는 일이 발생하기도 하였다.
미군 수뇌부와 이승만 정권은 봉기가 왜 빠르게 진압되지 않느냐고 반란군 토벌전투사령부를 채근했고 38선 경계 병력을 제외한 대부분의 남한 군대가 투입된 진압작전은 일주일 만에 여수를 점령할 수 있었다. 진압군의 대응이 처음부터 일사분란한 것은 아니었다. 공식적인 지휘체계도 흔들려 진압작전을 주도했던 인물들의 편의에 따라 번경되기도 했고 초기에는 봉기군에 합류하거나 부대원이 이탈하는 등의 혼란을 겪었다. 하지만 시일이 지나면서 잔업군은 점차 대오를 정비할 수 있었다. 진압작전을 주도했던 것은 미 임시 군사고문단원과 만주군 출신의 장교들이었다. 광복군출신의 송호성은 진압작전을 총괄하는 지위에 있었지만 실제로 진압작전은 만주에서 빨치산을 토별 경력이 있었던 김백일, 백산엽등이 주도 했다.
미군은 임시군사고문단원으로 하여금 작전과 군수, 인사를 통제하면서 진압작전을 주도 했다. 제임스하우스만 등의 미 임시군사고문단원들은 작전계획을 짜고 물자를 배급하고 전투결과를 점검했다. 작전상황은 임시고문단장에게 직접 보고 되었다. 미군의 도움이 없었다면 빠른 시일 내에 진압하지 못했을 것이다. 순천북방에서 벌어진 학구전투는 진압군이 자신감을 갖게 되는 최초의 승리였다. 진압군은 순천을 공격했으나 초기에는 봉기군저항에 직면하여 쉽게 공략하지는 못했다. 봉기군도 진압군의 강력한 화력 앞에 더 이상 저항을 할 수 없음을 깨닫고 야음을 이용해 순천으로부터 퇴각하였다. 이후 진압군은 비교적 손쉽게 순천을 점령할 수 있었다.
여수에서도 상황은 비슷했다. 10월24일부터 시작된 진압군의 공격은 치밀한 작전계획을 갖고 진행되지 못하였기 때문에 봉기군과 지방좌익세력에게 격퇴되었다. 하지만 여수를 방어 하던 봉기군과 지방좌익세력도 더 이상 여수를 방위할 수 없어 후퇴하였다. 여수에 대한 초기진압작전이 실패하자 진압군은 기계화 부대와 해안 경비대 그리고 연락용 비행기까지 동원하여 초토화 진압작전에 나섰다. 그러나 여수작전에서 진압군이 맞서 싸운 대상은 봉기군이 아니라 시민과 학생들이었다. 진압군의 온갖 화력을 동원한 육, 해, 공군의 초토화 작전의 결과로 봉기의 진원지였던 여수 시내 중심가는 전소되었다.
여수와 순천 지역민들이 희생된 것은 전투에서가 아니라 진압작전이 끝난 시점부터였다. 순천과 여수를 점령한 진압군과 경찰들은 우익청년 단원들과 지방 우익세력의 도움을 받아 협력자 색출에 나섰다. 변명과 이유를 따지지 않은 채 협력자 색출이 실시되었고 우익세력의 '손가락 총'에 지목되기만 되면 혐의자들은 즉석에서 참수, 사형되거나 군법회의에 넘겨졌다.
진압군과 경찰은 자신들의 진압작전 실패를 만회하기 위하여공산주의자들의 잔혹성에 대한
보복을 위해 다른 한편으로는 반란의 근거지가 응당 치러야 할 대가로 비무장 민간인 학살을 자행하였다. 법도 제정되지 않은 상태에서 내려진 계엄은 적으로 간주되는 봉기지역의 민간인을 자의적으로 처형할 수 있게 한 ‘살인 면허장’이었다. 그 결과 봉기군이 들어왔을 대 보다 민간인 희생자가 몇 배나 더 발생 하였다.
여순사건은 비교적 단시간 내에 진압되었고 남한정권을 흔들만한 계기도 되지 못하였다.
미군이 남한에 진주하고 있는 상황에서 반도 남쪽 해안도시에서 시작된 군인들의 동기는 전국적으로 확산되기 어려웠다.
여순사건이 지나가는 사건만으로 끝나지 않고 한국현대사에 깊은 유산을 남길 수 있었던 것은 이를 계기로 이승만 반공체제가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여순사건의 역사적 의미와 유산
여순 사건은 지금으로부터 61년 전에 발생된 과거의 일이다. 과거지사는 세월에 씻겨 흘러가지만 여순사건은 잊을 수 없는 기억으로 남았다. 어떤 이에게는 여순사건은 학살의 아픔으로 남아 잊어버리고 싶지만 잊어지지 않는 기억으로 남았고, 어떤 이에게는 대공전선의 찬란한 경험으로 활용되었다. 망각과 기억을 오가는 사이에 여순사건의 실상은 충분히 규명 되지 않고 무겁게 가라앉은 채 신화화 되었다.
여순사건은 현재 진행형이다. 국민에게 폭력을 행사하여 죽음으로 내 몬 가해자들은 지금까지도 자신의 과오를 인정치 않고 오히려 ‘빨갱이’를 토벌한 전과로 여긴다는 점에서 현재 진행형이다. 죽은 자의 영혼을 위로할 길을 찾아나서는 여순사건 피해자 유족들이 아직도 존재하고 있다는 점에서 여순사건은 아직도 진행형이다. 여순사건을 이념적 잣대로만 재단하고 ‘적’과 ‘아’를 가르는 정치논란 속에 이 사건을 위치시키려는 시도가 계속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에서 현재 진행형이다.
또한 반공주의의 유산들이 아직 숨 쉬고 있다는 점에서 여순사건은 한국사회가 앞으로 극복해야 할 과제를 지시한다. 국가기구에 의한 폭력사용을 일방적으로 정당화하며 그 의외의 폭력을 불법으로 간주하고 시민저항을 국민 된 도리들 다 못하는 것으로 사고한다면 물리적 국가 기구에 의한 국가 폭력은 재발할 수밖에 없다. 국가를 받들어야하는 최고의 존재로 사고하는 국가물신주의가 극복되지 않는 한 국민을 단지 국가에 봉사하는 존재로 생각하는 사고가 극복되지 않는 한 한국의 민주주의는 더 이상 진전될 수 없다. 이런 점에서 여순 사건이 남겨놓은 반공주의 유산을 극복하는 것은 앞으로의 과제이다.
여순사건이 갖은 역사적의미를 검토하는 것은 해방 후부터 최근에 이르는 장기적인 관점에서 여순사건을 위치시킨 것이다. 이는 또한 여순사건을 구조적이고 사회적인 맥락에 위치시킨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는 빨갱이라는 존재를 탄생시키고 대한민국을 반공사회로 형성한 결정적인 계기였다는 점을 다시 한 번 정리하고 마지막으로 여순사건의 역사적 경험을 비추어 볼 때 현재 우리에게 남겨진 숙제가 무엇인지를 확인하겠다.
(1) 이승만 정권은 여순사건을 ‘공산주의자들의 반란’으로 규정했다.
이승만 정권은 여순사건을 소련-북한-남한의 공산주의자들의 합작품으로 파악했다.
여순사건에서 지역 좌익 인물들은 인민위원회를 구성하여 인민행정을 펼치는 등의 활동을 전개하였지만 지역민들의 봉기 참여에서 나타나듯 여순사건 확대에는 이승만정부의 실정과 분단정권수립에 대한 비판, 경찰의 탄압, 경제적 어려움,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고 있었다. 따라서 여순 사건은 단지 공산주의자들만의 난동은 아니었다.
봉기=반란의 국면이 끝나자 이승만 정부에 의한 민간인 대량 학살=반공 공세 국면이 시작되었다.
여순사건에서 분출된 폭력에 희생된 피해주체들도 다양했다.
특히 여순사건에서 좌익에 의한 살상행위가 많이 언급되지만 실상은 여순사건에서 죽음을 당한 민간인중 봉기군(좌익)에 의해 죽음을 당한 경우보다 군경 진압군에 의해 죽음을 당한 수가 훨씬 더 수적으로 많다. 그러나 지금까지는 정치적의도로 공산주의자들의 무자비한 살상행위로만 서술되어 왔다.
이승만정부는 여순사건을 반란이라는 용어로 사용하여 정부를 전복하려는 행위, 공산주의자는 비인간적 존재, 악마로 규정하여 친일파 처단, 친일경찰의 척결이 주가 된 민중봉기의 정당성을 박탈하려는 의도를 갖고 있다.
(2)‘살인마’, 전멸시켜야하는 타자로서 규정된 ‘빨갱이’의 탄생
여순사건에 대한 이승만정부의 좌익, 공산주의자를 단순한 적이 아닌 양민을 학살하는 도살자, 악마의 이미지를 씌워 반민족적인 공산주의자는 빨갱이=살인마=악마 즉 비도덕적인 존재, 인간이하의 존재로 간주한 것이다. 따라서 같은 민족이 아니라 같은 하늘아래에서는 살수 없는 짐승으로 여겼다.
빨갱이란 단지 공산주의자를 지칭하는 게 아니라 도덕적으로 파탄 난 비인간적 존재, 짐승만도 못한 존재, 죽음 당하더라도 마땅한 존재, 누구라도 죽일 수 있는 국민과 민족을 배신한 존재이므로 죽더라도 항변을 하지 못한 존재로 만들어 버렸다.
빨갱이를 만드는 일에는 군대, 경찰같은 국가 기구뿐 아니라 언론인, 문인, 종교인은 여순사건을 모르는 일반 대중에게 좌익의 비인간성을 널리 알림으로 반공이라는 국민통합의 공감대를 만들었다.
(3)대한민국은 ‘반공국민’이어야 한다.
여순사건 이후 한국사회에서 ‘공산주의자’라는 적을 만들고 그것을 인식하는 과정은 대한민국국민은 어떤 국민이어야 하는가를 결정하였다.
반공은 ‘대한민국국민’이 되는 기본자격요건이었다.
이런 이유로 전 국민은 통제와 감시의 대상이었다.
북한에 다섯 집마다 주민생활 전반에 걸친 감시·간섭·통제와 세뇌 교육을 위한 오호담당제가 있었듯이 그 당시 이승만 정권때도 각 동네별로 드나드는 사람들을 통제하기 위해 파출소에 신고를 하는 제도가 있었다.
따라서 서울 딸집을 갔던 친정집 부모들도 신고를 해야 하는 때가 있었다.
(4)반공국민은 국가 폭력과 대중억압을 통해 만들어졌다.
여순사건에서 배제와 제거의 대상은 공산주의자에 한정한 것이 아니라 반이승만 정치성향의 정치인, 일반대중 더 나아가 전혀 정치 이데올르기와 관련 없는 사람들까지 포함하였다.
정부진압군에게 죽음을 당한 사람은 공산주의자가 아니었다. 또 여순사건에서 군경에게 학살을 당한사람은 “공산주의자라서 죽음을 당한 것이 아니라 죽은 다음 공산주의자가 되었다.”
(5)여순사건을 계기로 한국사회는 반공체제로 만들어졌다.
이승만정부는 국가폭력기구를 대대적으로 정비하였다.
군대를 숙군하고 경찰인력을 증원하여 국민의 사회생활 속으로 파고 들어왔으며 교육계에도 학생, 교사가 축출되었으며, 학도호국단이 만들어졌으며 일상 생활속에서도 반공이란 단어는 무의식중에 우리의 속으로 파고 들었다.
또 국가 보안법과 게엄법을 만들어 국가 폭력기관인 군경, 사법부는 반공을 앞세워 국민을 탄압하는 기관으로 자리를 잡았다.
(6)여순사건이 남겨 놓은 미해결의 숙제들
1948년 7월에 제정된 대한민국헌법 제2조는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라고 천명하였다.
그러나 지금도 마찬가지이지만 정부의 대응방식은 모든 권력은 권력자에게 있으며 권력을 가진 자가 모든 일을 결정할 수 있다.
저항의 권리는 완전히 부정되었고 여수, 순천시민들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진압군에 의한 죽음이었다.
국가는 개인의 생명권보다 상위의 가치였고 국민은 국가에 봉사하는 존재, 희생의 존재로 자리매김했다. 61년전에 일어났던 여순사건이 던졌던 문제는 지금도 온전히 극복되지 못하였다. 우리사회가 여순사건에서 배우고 반성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난 정권, 그리고 이명박정부의 주권에 의해 제약되었다
개편이전의 자유게시판으로 열람만 가능합니다.
아직도 여순반란, 광주사태라고 말하는 분이 계십니까?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용- 조회수 : 386
작성일 : 2009-10-16 16:54:33
IP : 218.39.xxx.93
2 개의 댓글이 있습니다.
1. 네..
'09.10.16 11:11 PM (59.0.xxx.133)잊지 않겠습니다.
이번에 여순사건 희생자 위령비 세우는데 '학살'이란 표현에 대한 반대가 있어
아예 아무 문구도 넣지 않고 ...... 이런 말줄임표만 넣었다고 하더군요..
아직도 이런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2. 더구나
'09.10.16 11:54 PM (220.80.xxx.23)역사가 역류하는 시절을 살고 있어 착찹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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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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