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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5.18 이전 6개월간 서울에서는?

-용- 조회수 : 430
작성일 : 2009-09-09 15:56:09
과거의 정학한 인식없이는 현재, 미래는 없다(Ⅳ)
1980년 5.18 이전 6개월간 서울에서는?

제 13회 崔圭夏정부는 과도정부
군부내에 全斗煥을 정점으로 한 새로운 힘의 중심이 형성

79년 10월 26일 朴正熙정권의 붕괴에도 불구하고 유신체제가 곧바로 막을 내린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군부 내에 全斗煥을 정점으로 한 새로운 힘의 중심이 형성되면서 崔圭夏정부는 과도정부로서의 역할조차 수행할 수 없을 만큼 유신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같은 해 11월 13일 해직교수협의회, 동아. 조선투위, 민주청년협의회, 자유실천문인협회, 민주청년협의회등 5개 단체는 나라의 민주화를 위하여 란 성명을 통해 유신체제의 조속한 청산과 민주회복, 새로운 민주헌법의 3개월내 제정 등을 주장하며 국민저항의 깃발을 올렸다.

15일 기독청년협의회(EYC)는 기독청년민주화선언을 발표, 유신잔재의 일소와 거국내각 구성, 종교. 언론. 학원자유의 보장 등을 요구했고, 같은 날 민주주의와 학원자유화를 위한 국전 대학생협의회 학생회 부활 준비위원회도 새 헌법제정과 해직교수 복직, 학원 자율활동 보장 등을 요구하는 성명을 냈다. 22일과 23일에는 같은 주장으로 서울대 관악캠퍼스와 서울농대에서 시위를 벌여 4명이 구속되고 6명이 수배됐다.

그리고 24일 오후. 재야 민주화세력들은 명동 YWCA 강당에서 결혼식을 위장해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에 의한 대통령 선출저지 국민대회를 개최했다.

홍성엽군과 윤정민양이 여러 어른들과 친지를 모시고 혼례를 올리게 됨을 알려 드립니다. 즐거운 자리에 함께 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1979년 11월24일(토) 오후 5시30분 YWCA1층 강당(명동성당 앞)

5백여명의 하객들은 축의금을 전달하고 신랑은 인사하기에 바빴으나, 잠시후 나타난 前국회의원 박종태씨는 주례사 대신 대회 인사말을 하기 시작 했다. 물론 신부는 나타나지도 않았을 때였다.

잔악한 자들이 유신체제를 고수하기 위해 마련한 비상계엄하에서 부득이 결혼식이라는 상황을 이용,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에 의한 대통령 보궐선거 저지를 위한 국민대회를 선언합니다

그러나 잠시 후 정보를 입수한 경찰이 대회장으로 난입했고 난투극 끝에 96명이 연행됐고, 가까스로 빠져 나간 참석자들은 유신철폐를 외치며 코스 모스백화점에서 무교동쪽으로 시위를 벌여 44명이 경찰에 잡혀갔다.

YWCA위장결혼식으로 불리는 이 사건은 일반인들에겐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재야 민주세력. 학생권에 끼친 여파는 컸다.

같은 달 26일 고려대 15개 서클의 학원민주화 선언발표, 28일 광주 신. 구교 및 재야 민주화운동 6개 단체의 민주화를 향하여 함께 나가자는 성명발표 및 계엄군과의 충돌, 30일 전남대생 2천여명 군의 중립 요구하며 시위, 12월 5일 전북대생 1천5백여명 유신잔당 퇴진요구 시위 등 학원가는 朴正熙 사망이후 관망태세에서 벗어나 민주화 투쟁의 불을 지피기 시작 했다.

드디어 80년 3월이 오자 대학가는 급속히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79년 11 월부터 학생회 부활을 논의해오던 전국의 대학생들은 방학기간을 이용 학생조직을 재건한다. 3월 28일 서울대가 총학생회를 출범시키고 4월초까지 전국의 주요 대학들이 학생회 구성을 완료했다.

대학가는 4월 들어 병영집체훈련 거부를 주요이슈로 유신잔재 철폐투쟁에 나섰다. 문무대 입영교육을 받게 된 성균관대생들이 맨 먼저 병영집체 훈련을 거부했고 뒤이어 서강대와 서울대가 이제도의 폐지를 결의했다.

군부정치의 연장선상에 서 있던 崔圭夏정부로선 학생들의 이 같은 투쟁을 정부에 대한 정면도전으로밖에 여길 수 없었고, 학생운동도 당연히 대정부 정치투쟁으로 전환하는 계기가 되었다. 따라서 학생운동권과 군부의 정면대결은 시시각각 다가오고 있었던 것이다. 4월 14일 신군부의 핵심 全斗煥은 중정부장 서리자리까지 차지해 군부와 행정부를 동시에 통제할 수 있는 권부의 핵심을 움켜잡았고 , 5월 들어 학생운동권은 야권의 분열을 보면서 자제해왔던 가두진출로 방향을 선회한다.

2일 서울대생 1만여명은 민주화 촉진대토론회를 갖고 격렬한 논쟁 끝에 병영집체훈련에 일단 응소하는 대신, 계엄해제 요구등 정치투쟁에 돌입했다. 3일에도 서울대생은 계엄해제를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고 6일 하루 동안 충남대. 전북대. 연세대 등이 시위를 하거나 성명서를 발표하는 등 계엄해제를 요구하는 대정부 정치투쟁이 전국의 대학가로 들불처럼 확산됐다.

결국 13일 연대생을 주축으로 한 서울시 6개대 2천5백여명의 학생들이 거리로 뛰쳐나갔다. 그리고 14일에는 이젠 둑이 터진 듯 서울시내 대학 생 7만여명이 교문을 박차고 광화문으로 향했다.

다음날인 15일 오후. 서울역엔 무려 35개대 10만여명의 대학생이 집결했다. 지방에서도 24개 대학 학생들이 가두시위를 벌였다. 그러나 이날 오후 3시가 넘으면서 군이 투입되고 있다는 제보가 학생 지도부에 전달되면서 상황은 돌변한다. 효창운동장과 잠실운동장 부근에 군인들을 실은 트럭 과 장갑차가 집결해 있다는 제보였다. 불안에 휩싸인 가운데 서울역 사수를 외친 학생들이 다수였으나, 학생지도부는 심야에 군부대와 충돌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이유로 시위중단을 결정하고 말았다. 이른바 서울역 회군이었다. (여기서 회군을 주장하는 자는 한나라당 심재철의원이다)

그리고 16일과 17일. 光州에서 전남대생이 주축이 돼 도청 앞에서 평화적인 횃불시위가 있었을 뿐 전국의 대학가는 다시 잠잠해졌다.

그러나 서울역회군이후 채 3일도 넘지 않은 운명의 5월 17일. 全斗煥을 주축으로 하는 신군부는 대반격을 시작했다.

제14회 1980년 5월15일 서울역앞 집회/金大中, 金鍾泌, 李厚洛씨 등을 체포


  계엄해제를 요구하는 대학생들의 시위는 1980년 5월15일 서울역앞 집회를 끝으로 수그러들었다. 군부집권음모를 감지한 전국47개대학 총학생회장들이 이날 밤 고려대에 모여 가두시위 중단과 정상수업결의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17일 전군지휘관회의는 거꾸로 학생소요 격화를 이유로 비상계엄 확대를 결의, 중무장한 병력이 국무회의장을 둘러싼 공포분위기 속에서 전격 통과시키도록 했다. 이날 합수부는 계엄사령관에게 金大中, 金鍾泌, 李厚洛씨 등을 체포, 조사계획을 알리고 밤10시를 기해 일제검거에 들어갔다. 이에 따라 2천6백여명이 체포됐고 金大中씨등 24명은 소위 金大中내란음모 사건 관련자로 군법회의에 회부됐고, 金泳三씨도 수경사헌병단에 의해 가택 연금됐다.

서울의 봄날을 누비며 민주회복의 부르짖던 학생. 민주인사측의 반대편에선 이미 신군부측이 79년 12월12일 鄭昇和육군참모총장을 연행하면서 부터 집권 시나리오를 차근차근 진행되고 있었다.

일지형식을 빌어 요약하자면, 80년 2월 全斗煥보안사령관은 보안사내에 정보처를 복원해 對民정보 수집활동을 본격화했고, 3월 중순에는 보안서 정보처가 언론 통제를 위한 K-공작계획을 수립했다.

4월14일 마침내 全斗煥은 중앙정보부장서리를 겸임해 보안사와 함께 양 대정보기구를 장악하는 권부의 막강 실세로 자리 잡았다. 그리고 全斗煥은 5월초 權正達 보안사 정보처장에게 시국수습방안을 마련하도록 지시하고 李鶴捧 보안사 대공처장에게 정치인. 재야인사. 부정축재자 등에 대한 조치방안을 검토하도록 지시했다.

5월 4일 서울시 종로구 소격동 소재 보안사 안가에서 權正達. 盧泰愚. 兪學聖. 黃永時. 李鶴捧. 車奎憲. 許和平. 許三守. 鄭鎬溶 등 8명은 비상계엄의 전국 확대, 비상기구 설치(국보위), 국회봉쇄 등을 뼈대로 하는 시국수습방안을 통해 군이 전면에 나서 정국을 장악한다는 집권시나리오를 확정하고 실행을 결정했다.

全斗煥은 이어 5월12일 이 같은 내용의 시국수습방안을 보고 받고 14일에 육본에 소요진압본부를 설치하고 전국에 소요사태 진압 부태 투입준비를 지시했다. 16일 李鶴捧은 전국 보안부대 대공과장 회의를 소집 해 5월17일 24시를 기해 비상계엄이 전국에 확대되니 학생시위 주동자와 배후조정자를 일제 검거하라고 지시했다.

철저히 권력 장악을 위한 준비를 마친 全斗煥은 16일 밤 申鉉碻총리와 李熺性계엄사령관, 周永福국방장관, 김종환내무장관등과 함께 청와대에 들어가 심야대책회의를 가졌다. 이 자리에서 申鉉碻총리는 崔圭夏대통령에게 국내 상황을 보고했고, 全斗煥. 李熺性. 周永福 등은 비상계엄확대의 필요성을 주장하는 한편, 다음날 오전에 전군지휘관회의가 열릴 것이라고 보고했다.

17일 全斗煥은 보안사 집권 시나리오팀인 權正達정보처장, 李鶴捧 대공처장, 許和平비서실장, 許三守 인사처장 등을 모아 전군지휘관회의의 결의사항를 숙지시키고 시국수습방안 추진을 위한 구체적 계획을 수립했다.

비상계엄확대 조치에 따른 집단적인 저항을 봉쇄하기 위해 전문대학 이상의 학교에 휴교령을 내리고 학생회 간부들을 예비 검속한다. 정치권 3金씨를 각각 상이한 명분으로 제거할 수 있도록 그들의 과거행적에 대한 자료를 준비하고 연행병력을 대기시킨다. 국회가 열려 계엄해제 결의를 하지 못 하도록 군 병력으로 국회의사당을 봉쇄한다. 혁명위원회 역할을 수행할 국가 보위비상대책위원회를 준비하고 알맞은 인물을 선정해 둔다. 검열 거부를 한 언론인들을 모두 제거하고 계엄 확대조치를 옹호할 수 있도록 중진 언론인들을 포섭한다.

말이 시국수습방안이지 사실상 쿠데타 음모였다. 마침내 17일 오전 11시 국방부에서 전군주요지휘관회의가 열렸다. 이에 앞서 오전10시 李熺性계엄사령관이 군 수뇌부들을 만나 시국수습방안이 안건임을 알리고 통과. 결의시키자고 제안했다. 유병현대장이 정치적으로 민감 한 문제는 군 회의에 다루기 어렵다고 반대의견을 냈으나 묵살됐다.

43명의 지휘관들이 참석, 약 4시간 동안 계속된 회의에서 안종훈 육군군수사령관이 비상계엄전국확대에 대한 반대의견을 냈으나 대세는 신군부쪽으로 이미 결론이 나 있는 상태였다.

周永福국방장관이 비상계엄 전국확대 의견을 묻자 鄭鎬溶특전사령관은 사회안정을 위하여 군이 적극 나서는 것이 필요하다고 강력 주장했고 盧泰愚. 黃永時 등이 이에 적극 동조했다.

이에 周永福은 비상계엄 전국확대를 전군 지휘관들의 의견으로 대통령에게 건의키로 결론을 내리고 참석자들로 부터 백지에 연 서명을 받아 周永福. 李熺性 등은 오후5시10분쯤 崔대통령을 찾아가 비상계엄 전국 확대를 건의하면서 일부에서는 비상기구 설치와 국회 해산문제도 거론됐다고 보고하자 崔대통령은 오후7시께 계엄확대방안에 대해서만 국무회의에서 논의해볼 것을 지시했다.

그리고 밤 8시 41분. 중앙청에서 개최된 제42회 임시국무회의 周永福은 비상계엄 전국확대 선포안의 제안 설명을 하고 반대 토론없이 8분만에 의결했다. 盧泰愚의 수경사 30단 소속 무장병력 3백여명과 장갑차 4대가 중앙청 외곽에 배치돼 있었고, 현관과 국무회의장에 이르는 계단과 복도 등 중앙청 내부는 수경사 헌병단 무장병력 2백50여명이 약 1-2미터 간격으로 배치되 고개하나 까딱할 수 없는 삼엄한 분위기에서 였다.

또 참석국무위원들이 외부와 연락할 수 없도록 중앙청 내 전화인입 2천4백40회선과 구내배송선 일체를 절단하고 중앙청 내 근무 공무원들을 5층에 있는 방으로 모두 몰아넣은 후 18일 오전 7시까지 외부에 나가지 못하도록 하는 치밀한 작전을 전개, 정보의 유출을 막았다.

결국 周永福은 대통령의 재가를 받아 24:00를 기해 비상계엄 선포지역을 전국 일원으로 변경했다. 집권시나리오 작성(시국수습방안)-전군지휘관회의-비상국무회의-대통령 재가 등 일련의 권력 찬탈 시나리오는 이렇듯 요식행위를 모두 갖추면서 예정한 대로 짜 맞춘 듯 진행됐다.

그러나 신군부가 대통령의 재가를 마냥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국무회의가 계엄확대안을 의결하기 수시간전인 오후6시께 이미 합수부요원들은 경찰병력을 이끌고 전국 대학생 대표들이 모여 대책을 논의하고 있던 이화여대를 급습, 다수의 학생대표들을 체포했고 충정부대 역시 초저녁부터 작전을 개시, 전국 주요대학으로의 진입을 시작했다.

전두환의 쿠데타군은 벌써 충정이라는 철모를 쓰고 光州를 향한 트럭에 올라타 있었다

IP : 218.39.xxx.153
1 개의 댓글이 있습니다.
  • 1. ***
    '09.9.9 5:12 PM (210.91.xxx.186)

    저는 5.18당시 종각 쪽에서 근무중이었는데요...
    20대초반... 사무실에서 일을 하는데.... 그때 데모 무쟈게 많이 했거든요?
    학생들이 전두환 물러나라...하고 구호를 외치면서 데모를 하는데.... 도대체 전두환이가 누구야? 했던 기억이....
    그때 최루탄이 총천연색이었어요... 최루탄 한번 쏘면 종각근처 골목골목으로 학생들 썰물 빠지듯 도망가고... 아직도 기억이 생생하네요... 버스가 못 다녀서 종로에서 아현동까지 걸어서... 또 아무 버스나 타고 아문데서나 갈아타서 몇번을 갈아타고 간신히 집에 온 기억....
    광주쪽에는 전화가 끊기고 소식두절.... 지금 와서 생각하니....완전히 역사의 현장에 있었던 느낌이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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