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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제목 : 5.18 광주학살 배경에서 부터 전, 노 재판과정까지(2)
제 5회 鄭昇和총장 강제연행 / 군주도권 장악 전씨 일당 하극상
1979년 12월12일 오후7시 20분 서울 용산구 한남동 鄭昇和 육군참모총장 겸 계엄사령관 부관실에서 한발의 총성이 울렸다.
탕! 첫 총성이 울리고 난 수 초 후, 잇따라 콩 볶는 듯한 총격음이 칠흑같이 어두운 서울의 겨울밤 하늘을 찢었다. 그 시간, 盧載鉉국방부장관은 퇴근해 공관에서 식사중이었다.
갑작스런 총성에 그는 베란다로 나가 총장공관 쪽을 내려다 보았다.
총알이 핑핑 날아가는 소리에 놀란 그는 영문도 모른 채 사복차림으로 가족들과 함께 무작정 단국대 철조망을 넘어 피신했다.
한국 현대사를 음모와 반역, 하극상과 학살의 질곡으로 몰아넣은 12.12 는 이렇게 시작됐다.
이날 오후 7시가 채 되기전, 일제 도요타 수퍼살롱, 지프, 마이크로 버스 등 몇대의 차량들이 서빙고 분실의 정문을 미끄러지듯 빠져 나갔다.
합수부 수사1국 수사관 申東基준위가 모은 슈퍼살롱에는 보안사 인사처장 許三守 대령, 육본범죄수사단장 禹慶允대령, 韓吉成소령(서빙고 분실장), 합수부 수 사3계장 金大均소령, 수사관 朴元澈 준위가 타고 있었다.
육본 헌병감실 기획과장 成煥玉 대령, 육본 헌병대 李鍾敏중령, 합수부 수사관 李章錫. 梁一 根. 金德秀 준위는 지프에 타고 있었다.
7시 5분께, 합수부 요원들이 총장공관 앞 해병대 초소를 지날 즈음, 鄭총장은 처가에 가기 위해 외출복으로 갈아입고 2층 거실에서 텔레비젼 뉴스를 보고 있었다.
총장부관 李在千 소령, 경호대장 金仁善 대위는 현관에 나와 許三守 대령과 禹慶允 대령을 마중했다. 중요한 보고를 하겠다던 權正達정보처장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許. 禹 두사람을 접견실로 들여보낸 李소령과 金대위는 뭔가 심상치 않는 일이 벌어지고 있구나하는 생각에 접견실쪽으로 가려했지만 합수부 요 원 3명이 앞을 막아 어깨를 밀며 몸싸움을 벌였다. 그 순간 1층 접견실에선 許대령이 鄭총장에게 연행하겠다는 무례한 말을 막 내뱉은 참이었다.
총장님께서 金載圭로부터 많은 돈을 받았으니 진술을 녹음해야겠습니다 녹음준비가 된 곳까지 동행하자는 요구였다.
"이놈들, 누가 그 따위 지시를 하던가. 내가 계엄사령관인데 대통령 이외에 그런 지시를 할 사람이 없는데 대통령이 그런 지시를 해?" "그렇습니다" 禹. 許대령이 대답했다.
"만약 그렇다면 대통령이 직접 전화라도 있을텐데 내가 직접 확인하기 전에는 이런 조사에 응할 수 없어. 부관! 총리공관이나 장관에게 전화를 대!" 호출소리에 부관 李소령이 접견실로 뛰어 들었다.
鄭총장의 양쪽 겨드 랑이를 許와 禹가 끼고 있었다.
李소령은 다시 부관실로 뛰어 들어 전화기 쪽으로 갔다.
수화기를 들자 수사관중 한명이 호주머니 속 권총을 꺼 내 李소령의 등을 쐈다.
李소령은 훗일 12.12사건 수사를 맡은 서울지검에서 당시 피격상황을 이렇게 진술했다.
“최초 저를 쏘는 총성이 먼저 들렸고, 이어 계속 땅땅땅 하며 연속 총성이 들렸는데 처음 총성이 난후 복부에 통증과 중압감이 와서 제가 맨 처음 총격을 당한 것으로 확신합니다.” 혹자는 ‘한국 현대사의 물줄기를 바꿨다 할 이 같은 한남동의 총성없이 합수부 별동대가 鄭총장을 연행하고 崔대통령의 결재가 있었다면, 5.18학살과 全斗煥의 집권도 없을 수 있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軍내 全斗煥그룹의 움직임은 이미 鄭총장 연행 며칠 전부터 돌아오지 않을 다리를 건너고 있었다.
1995년 12월 21일, 12.12 군사반란 사건의 재수사를 맡은 이종찬 특별수사본부장(서울지검 3차장)은 全斗煥. 盧泰愚 두 전직대통령을 군사반란 혐의로 기소하면서 12.12의 핵심행위인 鄭총장 연행은 사건 발생 5일 전인 79년 12월 7일 全.盧씨가 함께 결정했음이 드러났다고 밝혔다.
검찰에 따르면 이날 정기외박을 나온 盧9사단장은 보안사령관실로 全斗煥을 방문, 朴正熙대통령 시해사건수사팀으로부터 수사보고를 받은 뒤 대책을 논의한 끝에 鄭총장 연행를 전격 결정하고 12월12일로 날짜까지 잡았다는 것이다.
全.盧는 아울러 여러 장성들을 이 계획에 끌어들인다는 방침에 따라 황영시 1군단장, 유학성 국방부 군사차관보등 10여명에 대한 포섭에 들어갔다.
全씨는 또 사건 당일 오전 許三守보안사 인사처장등 체포조에게 대통령의 재가가 없더라도 정총장을 데려오라고 직접지시 했다.
이에 따라 체포조는 이날 오후 7시10분쯤 총장공관에 도착, 연행에 들어갔고 全斗煥은 불과 30분전인 오후 6시43분께야 崔대통령의 재가를 요청했다는 것이다.
검찰수사 결과대로라면, 朴正熙 유고이후 형식상 유지돼온 崔대통령-盧 국방장관-鄭총장-全斗煥합수본부장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명령체계가 12.12 로 인해 일순간에 全斗煥 1인 권력형태로 집중화 됐다는 얘기가 된다.
여기서 이 부분에 대한 검찰의 전두환 노태우씨에 대한 공소장을 들춰보자. ...피고인 全斗煥이 계엄업무 수행과정에서 10.26사건과 관련하여 직무유기혐의로 구속된 이재전 대통령경호실 차장의 석방, 청와대에서 발견된 금원의 처리... 등을 둘러싸고 鄭昇和총장과 작은 의견대립으로 마찰을 빚어 오던 중, 11월 중순경 단행된 군인사에서 비정규 육사출신들이 군요직에 배치되고 정규육사 출신의 피고인 등이 중심이 된 소위 하나회소속 장교들 이 배제되자 자신들의 자신들의 군내 입지에 위기의식을 가지게 되고 12월 초순경 군 일각에 피고인 全斗煥이 잦은 월권 행위와 군지휘체계 문란행위 등으로 곧 실권이 없는 한직으로 인사조치 될 것이라는 소문이 나도는 가운데 ..
鄭昇和총장이 국방부 장관 盧載鉉에게 피고인 全斗煥의 인사조치를 건의한 것으로 알려지자...鄭昇和총장이 10.26사건 당시 朴대통령 시해 현장 부근인 중앙정보부 궁정동 안가의 본관식당에 있다가 金載圭와 육군본부로 동행한 사실로 인한 일부 군인들 사이에
鄭昇和 총장이 위 사건에 연루되어 있을지 모른다는 의혹이 제기되고 있음을 기화로 鄭昇和총장을 金載圭 와 관련 혐의에 대해 조사한다는 명목으로 강제연행하여 그 지휘권을 박탈 하는 한편, 군의 정식지휘계통이 이를 저지할 경우 무장병력을 동원하여 제압함으로써 군의 주도권을 장악하기로 결정하고 12.7. 경 국군보안사령부에서 서로 만나 鄭昇和총장의 연행.조사 문제를 논의한 끝에 그 연행일을 12.12로 결정하고...
제 6회 張泰玩. 鄭炳宙. 金晋基를 격리하라
張世東 수경사30경비단장, 金振永 수경사33경비단장의 안내로
12월 12일 오후6시30분. 합수본부장이 계엄업무로 수고가 많은 수도권지휘관을 초청, 저녁을 대접키로 했다는 연락을 받고 鄭炳宙특전사령관, 張泰玩 수경사령관, 金晋基육본헌병감이 차례로 연희동의 한 요정에 도착했다.
같은 시간 兪學聖 국방부 군수차관보, 黃永時 1군 단장, 車圭憲 수도군 단장, 盧泰愚 9사단장, 朴俊炳 20사단장, 白雲澤71방위사단장, 朴熙道 1공수여단장, 崔世昌 3공수여단장 등 신군부 핵심들은 계획대로 許和平 보안사령관 비서실장, 張世東 수경사30경비단장, 金振永 수경사33경비단장의 안내로 경복궁 내 수경사 30경비단장실에 집결했다.
全斗煥은 이미 趙洪 수경사 헌병단장에게 밀명을 하달했었다.
H아워까지 장태완, 정병주, 김진기를 붙잡아둬라 거사를 앞두고 자신들의 편이 아닌 육본 직할부대의 핵심지휘관들을 미리 격리할 계획이었던 것이다.
崔圭夏대통령으로부터 鄭총장 연행 재가를 받는데 실패한 全斗煥은 鄭東鎬대통령 경호실장 직무대리와 高明昇경호실작전담당관에게 삼청동 총리공 관의 출입통제를 지시하고는 밤 9시쯤 경복궁으로 돌아왔다.
연희동 요정에서 全斗煥을 기다리며 마신 술이 2-3순배 정도 돌 무렵인 오후 7시35분쯤 閔마담이 金晋基준장에게 육본헌병감실로부터 전화가 왔다고 전했다. 전화를 받고난 金헌병감이 황급히 방으로 들어왔다.
총장공관에서 총소리가 들렸다는데... 張사령관은 즉각 총장공관에 전화를 걸었다. 나, 수경사령관이다. 부관 바꿔라 그러나 수화기에서는 응답대신 신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앰블런스 앰블런스... 차에서 기다리고 있던 千鍊宇대위(육사 28기)가 헐레벌떡 뛰어왔다. 사령관님, 부대상황실에서 무전이 왔는데 총장님 공관에서 총격전이 벌어졌답니다.
총장님의 생사와 누구 소행인지는 아직 파악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이럴때가 아니야. 빨리 부대로 돌아가자구 張사령관이 소리치고 뛰쳐나오자 鄭炳宙 특전사령관이 뒤쫓아 나왔다.
여보, 장장군 어떻게 된거야? 정선배, 오늘밤 무슨일이 있어도 나를 배신하지 않을 테지요? 무슨 소리야. 생명을 같이 합시다 필동부대를 향해 질주하는 차속에서 張사령관은 동승한 趙洪헌병대장에게 물었다.
자네는 무슨 일이라고 생각하나? 趙대령은 한참 머뭇거렸다.
글쎄요. 아무래도 북괴간첩 소행이 아니겠습니까 張사령관은 귀대하는 차 속에서 무전으로 긴급작전지시를 내렸다.
전 예하부대에 비상을 발령하고 모든 지휘관과 참모들은 상황실에 집결하라 이어 밤 10시께, 경복궁에서 부대로 복귀한 최세창 3공수여단장은 朴淙圭 중령에게 정병주특전사령관을 체포토록 지시한다. 朴은 이날 자정 특공중 대 병력 10명과 외곽 지원대 병력 38명을 동원, 특전사령부를 공격했다. 이 들은 수십발의 위협사격과 함께 건물 2층 사령관 부속실로 진입하려했다.
이때 사령관 집무실 안쪽에서 총알이 날아왔다. 박중령은 M16을 난사했다. 사령관 비서실장 金五郞소령이 배와 가슴에 총탄을 맞고 숨졌다. 鄭사령관 은 집무실 옆 거실의 문을 잠그고 권총을 쏘며 저항했다.
박중령의 부하들 이 M16으로 문고리를 쏴 부수었다. 정사령관은 왼쪽 팔에 총을 맞았다. 그는 부상을 입은 채 질질 끌려 나가 지프에 실렸다. 지프는 보안사 서빙고 분실로 달려갔다. 새벽 3시쯤이었다.
또 조홍 헌병단장의 명령을 받은 申允熙 부단장은 헌병단 병력을 동원해 13일 새벽 3시40분쯤 수경사령관실을 공격했다.
그는 헌병 10여명과 함께 복도에 서성거리고 있던 육본 수뇌부 장성 부관들을 무장해제 시킨 뒤 권총을 뽑아들고 사령관실로 뛰어들었다.
河小坤소장(육본작전참모부장)이 얼결에 허리께에 손을 가져가자 헌병의 M16이 발사됐다.
야, 이놈들이 나를 쏜다 하소장은 옆구리를 움켜쥐고 사령관실 옆 접결실로 쓰러질 듯 들어갔다.
張泰玩사령관이 접견실 밖으로 나왔다.
신중령과 헌병들이 장군들에게 M16을 겨누고 있었다.
야, 이놈들아 이게 도대체 무슨 짓이냐 신중령이 머리를 숙였다.
사령관님 죄송합니다 누구 명령인가. 부단장은 누구 명령을 받게 되어있나? 보안사령관님의 명령입니다.
이제부터 제가 사령관님을 모시겠습니다 이놈아, 전두환이한테나 가 그곳에서 대책을 논의하던 尹誠敏육군참모차장, 文洪求 합참본부장, 張泰玩 수경사령관도 보안사 서빙고 분실로 실려갔다.
새벽 4시30분께. 이와 함께 全斗煥은 12일 밤 11시 박희도 공수1여단장에게 국방부와 육본 을 점령하고 盧載鉉 국방장관을 연행해 오라고 지시한다.
13일 0시5분 1천5 백명의 공수1여단 병력은 개화초소-행주대교-능곡 왕거미초소-수색검문소 등에서 경계근무중이던 30사단, 수경사 헌병병력을 무력으로 제압하고 오전 1시35분쯤 삼각지 국방부 및 육본청사 앞에 도착했다.
국방부와 육본을 점령한 박희도는 오전 2시40분 국방부장관실에 난입해 김종환합창의장 등 장성 8명의 무장해제를 시킨 다음 국방부 청사를 수색한 끝에 오전3시50분께 지하1층 상황실 입구에서 盧載鉉장관을 발견, 보안사로 끌고 갔다.
이에 앞서, 이미 새벽 2시가 지나면서 서울 일원은 쿠데타군 병력이 완전 장악했다.20사단과 30사단 90연대가 태릉과 고려대에 비치됐다. 9사단 29연대와 제2기갑여단은 중앙청 일대에, 수경사 30.33경비단 헌병단은 경복궁에 배치됐다. 1공수여단은 국방부와 육본을 점령했고 3공수여단과 5공수여단은 장충단과 동국대에 출동했다.
張泰玩수경사령관이 전화기를 붙들고 국방장관, 3군사령관 등과 통화를 하며 진압을 위해 백방으로 뛰어 봤으나, 요령부득이었다. 張泰玩자신의 휘하에서도 {하나회} 회원들은 그의 명령권밖에 있었고 철저한 사전준비와 월등한 병력을 동원한 합수부측은 이미 출동 순간 패권을 잡은 것과 다름없이 사기충천해 있었다.
육본과 합수부측의 군사력은 2대 8정도 됐을 겁니다... 육본측이 병력을 동원했더라도 요소 요소에 배치된 합수부측 병력이 막 으면 힘도 못썼을 것이라는 얘기다.
제 7회 패장들의 육성녹음 / 최규하대통령 정승화총장연행 사후재가
부대원에게 끌려갔던 盧載鉉국방장관은 신현확총리와 함께 총리공관으로 갈 수밖에 없었다. 13일 새벽 4시30분께. 崔圭夏대통령은 鄭昇和참모총장에 대한 연행을 사후재가 했다. 그리고 12.12는 막을 내렸다.
그러나 12.12 당시 쿠데타군에 맞서 끝까지 저항했던 張泰玩수경사령관의 분전은 세월이 흐르면서 국민들에게 알려져 역사 속에 뚜렷히 각인돼 있다. 12. 12 때 보안사가 육본수뇌부의 전화를 감청한 육성녹음이 후일 언론 (월간 朝鮮 95년 9월호)을 통해 전해져 당시 張장군의 고군분투. 나약한 육본지휘부. 하극상과 허위 보고등을 생생하게 전해주고 있다.
시간대별로 감청내용을 요약해 본다.
12.12 밤 8시 50분 尹誠敏 참모차장과 이건영 3군사령관의 첫 통화
尹: [총장님이 납치돼 갔다 이렇게 됐는데... 이제 약간 확인해보니까 {安家사건 때문에 한 번 조사할려고 한 것이 이렇게 됐다} 그런 얘깁 니다]
李: [그렇더라도 총장님이 어떻게...]
尹: [총장님이 어디가 있느냐 그러니까 보안사령관이 안전하게 보호하고 있다...]
李: [보안사령관이 그래요?]
尹: [예]
李: [그럼 그렇게 뭐할 필요는 없나요?]
12.13 오전2시 이건영 3군사령관과 尹誠敏 참모차장
尹: [...지금 모르죠, 우리들이야. 지금 하나의 쿠데타지요. 사령관님 의견은 어떻습니까?]
李: [글세, 지금이야 뭐라고 판단을 못하겠는데.... 그런데 병력을 전방에서 빼오는 것은 문제가 있어요...]
尹: [여기서도 찬반양론이 있습니다]
李: [그러니까 지금 1공수에서 와가지고 육군본부, 국방부에 갔단 말이지요]
尹: [예. 지금 점령된 것 같습니다]
李: [그럼 이걸 어떻게 해야 되나]
尹: [글세 말입니다]
李: [아! 이걸 어떻게 하지. 어떻게 되는 건가...]
이렇듯, 尹참모차장의 얘기는 합수부측의 병력동원이 명백히 쿠데타라고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쿠데타 반군을 진압해야할 육본지휘부의 나약함은 [이걸, 이떻게...]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듯하다.
12.12 밤 9시 40분
(이건영 3군사령관이 예하 수도군단참모장 김성환 준장에게 수경사 30경비단에 가 있던 차규헌 군단장의 행적을 묻는 상황)
李: [그런데 군단장이 왜 거기 가 있는가. 30단에...]
金: [....]
李: [지금 군단장이 30단에 가 있다며?]
金: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李: (車圭憲군단장의) 부관은 지금 어디어서 전화를 받나?]
金: [....]
李: [부관이 지금 참모장하고 전화를 통하는게 어디서 통하지?]
金: [확인해서 보고드리겠습니다]
李: [직접 전화통화하지 않았나?]
金: [예]
李: [그러면 지금 참모장이 그 상태를 잘 모르는가, 나한테 뭘 숨기고 있는가?]
12.12 오전1시 50분
(이건영 사령관이 김봉규 9사단 30연대장으로부터 부대출동 지시를 받았다는 보고를 받은 직후 구창회 참모장과의 통화내용)
李: [9사단 30연대가 어디 출동하는 모양인데 어디 출동시키는가?]
具: [연대 출동 안합니다]
李: [그런데 어디 출동한다고 그러는데 무슨 소리야?]
具: [연대가 말입니까]
李: [응]
具: [연대출동 안합니다]
李: [지금 9사단 30연대장이 삼송리까지 출동한다고 전화가 왔는데...]
具: [연대 출동 안합니다]
직속상관인 사단장이 직접 전화를 걸어 확인하는데도 이미 全斗煥측에선 부하들은 하나같이 허위보고로 일관하고 있다. 후일 張泰玩장군은 12.12의 원인과 당시 반란군을 진압하지 못했던 이유를 우선 여기서부터 찾고 있다( 월간 新東亞 93년 7월호)
[무엇보다도 군에 있어서는 안 될 사조직 문제를 들어야 합니다....특히 당시 수경사 특전사 3군사령부 및 그 예하 부대의 지휘계통은 하나회원과 보안사요원들이 컴퓨터 바이러스처럼 명령계통을 완전 마비시켰습니다. 따라서 진압기능은 마비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12.12 밤 10시 16분 張泰玩수경사령관과 이건영 3군사령관 통화
(張泰玩수경사령관이 30사단에 모여있던 유학성, 차규헌, 황영시중장 등 합수부측의 회유를 단호하게 거절하고 무력 진압 의사를 강력하게 밝히고 있다)
張:[{兪장군님 남의 부대에 와서 왜 이럽니까} 제가 이상해서 물으니까 {에이 張장군 거 알면서 왜 그래 이리와} {이리 오기는 어딜와. 당신 왜 그래요? 왜 남의 부대에 한밤중에 와서 무슨 지*하고 있어. 쏴 죽 인다} 이렇게 했더니 황영시 장군한테 전화를 바꿔요. 황영시 장군이 있다가 {장태완이 너 왜 그래, 알만한 사람이... 나하고 다 통할수 있는 처지인데 왜 그래? 너 이리와} {아니 왜 이라십니까, 왜 그 우리 좋은 총장님을 어쩌자고 납치해가고 왜 이라요. 정말 그러면 내 죽여} 했더니 {차규헌이도 와 있고 다 와있는데 마 이리와} 해놓고 바로 출동준비를 갖추고 있는데 말입니다]
12.13 오전2시 張泰玩수경사령관과 이건영 3군 사령관
張: [...그러면 전쟁을 하기 위해서도 한 2개 사단정도를 여기 갖다 놓는게 어떻습니까?]
李: [사단을 가져오는 것은 안돼. 전방이 더 문제가 있고 그렇게 됐을 때 뭐예요, 쌍방이 굉장히 문제가 생겨. 그러니까 그쪽하고 아무 연락도 안되나. 전해 무슨 얘기도 안되나?]
張: [(풀 죽은 목소리로) 안 되지요. 예. 그저...군사령관님께서 잘 한 번 판단해 주십시오. 참모차장 바꿔드리겠습니다]
그러나 李사령관은 盧국방장관의 직접명령이 없다는 이유로 끝까지 병력 출동을 하지 못했다. 대신 그는 같은날 오전 盧장관이 부른다는 金容烋국방차관의 전화를 받고 장관실로 갔다가 쿠데타군에 연행된다.
제 8회 노재현과 장태완 노재현- 사태수습 팽개진채 도피, 장태완-
쿠데타저지 고군분투
보안사의 감청테이프 기록에서 드러나듯 12.12 당일밤 남한의 군수뇌부는 일대 아수라장이 되어있었다. 치밀한 집권계획에 따라 최소의 병력으로 최대의 성과를 거둬가는 신군부 쿠데타세력과, 보안사령관이 직속상관인 육군참모총장을 무력으로 강제 연행하는 하극상을 빤히 보고도 신속한 대응을 하지 못해 우왕좌왕하는 육본측은 서로 극명한 대조를 보이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삼군의 지휘권을 손에 쥔 채 진압군 출동명령 한번 내려 보지 못하고 운명의 12일 밤을 겁에 질린 채 보내버린 盧載鉉국방장관과, 소수 정치군인들의 쿠데타를 몸으로 막으며 필사의 노력을 벌인 張泰玩수경사령관 두사람을 보게 된다.
역사가 사회경제적 구조와 시대사상의 운행에 따라 전개되는 것이긴 하 지만 역사의 주체는 인간이다. 그래서 역사에는 특히 시대를 가르고 국운이 좌우되는 사건의 현장에는 그곳에 서있는 인간의 행동양식이 역사를 결정하게 된다.
국방장관 盧載鉉의 소심하고 우유부단한 대처에 다만 12.12진압실태의 책임을 물을 수 없다. 그러나 그가 사태발생 직후 정 위치에서 정상적인 사태수습에 나섰던들 全斗煥등의 국가 집어삼키기는 이처럼 쉽게 성공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
먼저 12월12일 오후 한남동 국방부장관공관에서 인근 육군참모총장공관의 요란한 총성을 들으면서 취한 盧장관의 행동부터가 사태를 꼬이게 한 다.(이하 94년 3월 11일 盧씨 검찰 진술기록 참조)
盧장관은 12일 밤 9시 공관에서 쉬고있다가 인근 육군참모총장공관쪽에서 나는 총소리를 듣고 베란다에 나가 정황을 살핀다. 이어 그는 당직부관이 몸을 피하시는 게 좋겠다고 하자 처와 아들 그리고 가정부를 데리고 장관공관을 나와 단국대 철조망을 헤치고 단국대 체육관에 피신한다. 그는 그때의 판단을 이렇게 전한다.
(검찰조서)
<문> 그당시 총장공관에서는 어떤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고 생각하였 나요
<답> 金載圭지지세력이나 북한등의 보수세력이 총장공관을 습격한 것으로 생각하였으며 그렇다면 장관인 나도 위험하다고 생각하여 우선 피했던 것입니다.
盧장관은 이후 국방부 합참상황실에서 사태를 묻는 전화를 했으나 당시까지 아무런 사태파악이 안 돼 있는 걸 알고 합참 작전국장 李炅律소장(당시 당직)에게 차를 가지고 나를 데리러 오라고 지시했다. 국방부장관으로서 국방부에 나가봐야겠다고 판단했다는 것이다.
그는 약 1시간후 호위헌병과 함께 도착한 李소장의 차에 가족과 함께 탄후 국방부로 가려다가 우선 가족들을 안전한 곳에 대피시켜야겠다고 생각하고 여의도 李소장의 집으로 가 가족을 맡긴다. 30여분을 또 소모한다. 盧장관은 차안에서 金容烋국방차관과 통화를 해 지금 곧 국방부로 가겠다고 한뒤 생각을 바꿔 육본 B2벙커로 향한다. 필요한 조치를 취하기엔 육본이 더 좋다는 판단에서다. 육본에 도착한 盧장관은 金鍾煥합참의장. 柳炳賢연합사부사령관. 文洪球합참본부장등이 대기중이었다. 여기서 그는 비로소 全장군등이 鄭총장을 서빙고분실로 강제 연행했다는 보고를 받는다. 밤 10시에 가까운 시각이다.
제대로라면 이단계에서 국무총리와 대통령에게 보고를 하고 한미연합사와 공조, 全장군측의 불법연행을 원상 복귀할 [진압작전]에 착수해야 한다.
그러나 盧장군은 겁을 집어먹은 듯한 행동을 보인다. 즉 그때 1공수여단 이 육본을 점령하가위해 출동중이라는 보고를 받은 盧장관은 육본에 실병력이 없다는데 불안을 느낀 나머지 수경사로 옮겨가자는 건의를 수용하고 육본을 빠져 나간다.
盧장관은 육본을 나와 정상보고체계를 밟는걸 빠뜨채 다시 용산 美8군 사령부로 간다. 전방상황을 묻기 위해서였다. 사령관 위컴과 대사 글라이스틴은 그때 이미 8군사령관실에 대기중이며 사태를 예의 관찰하고 있었다.
북한의 동향에는 이상이 없다는 말을 듣자 盧장관은 비로소 대통령에게 전화를 한다. 밤 10시 전후다. 대통령은 빨리 총리 공관으로 와서 사태를 보고하라
(당시 崔대통령은 총리공관에 있었음)고 했으나 盧장관은 곧 가겠다고 답하고 또 엉뚱한 행동을 한다. 즉 1군사령관과 3군사령관에게 전화를 해 나의 육성 명령없이는 병력을 움직이지 말라고 지시, 진압군의 발을 묶어 버린 것이다.
군의 동요나 혼란을 막자고 한 행동이었으나 결국 이 전화는 신군부만이 탱크를 몰고 질주하는 무법천지의 밤을 보장하는 셈이 되고 만다.
盧장관은 이어 全斗煥과 통화하는데 빨리 이곳(美8군)으로 와서 사태를 보고하라고 지시했으나 全이 들을 리 없다. 全은 그곳은 미군부대인데 어떻게 가겠는냐며 억지를 부리다가 그렇다면 국방부로 오라는 盧장관의 지시를 받는다.
밤 11시의 일이다.
그러나 이때까지 全斗煥등은 이미 鄭昇和총장 연행 재가를 받기위한 서류를 들고 밤 10시30분께 총리공관으로 가 崔圭夏대통령에게 결재를 강요하고 있었다. 美8군에서 盧장관과 통화하던 崔대통령은 全斗煥 兪學聖 車圭憲 黃永時 白雲澤 朴熙道등 6명의 장성들에 둘러싸인채 전화를 받고있는 터였다.
盧장관은 국방부에 도착해 총리공관에 있던 全斗煥과 전화연결이 되자 너 빨리 오라고 했는데 왜 오지 않는거야라고 꾸짖었으나 全은 수화기를 兪學聖에게 건넸고 兪는 장관님, 저희들한테 좀 오십시오라며 되레 장관을 불러 들이려했다.
다시 盧장관의 검찰진술. 이후 시간이 계속 흘러 장관의 도리로서 대통령께 보고를 드려야 되겠다는 생각에 부관에게 차를 준비시키고 총리공관으로 가려고 했습니다. 막 장관실을 나서는데 현관에서 총소리가 들렸습니 다
盧장관은 장관의 신병을 수중에 넣은 신군부측 병력이 국방부를 덮치자 지하 상황실로 몸을 숨겼다가 새벽 3시께 신군부측에 발각돼 보안사로 [모셔]진다.
盧장관은 여기서 거수경례를 붙이는 全斗煥에게 왜 오라는데 오지 않았느냐고 묻자 全옆에 있는 黃永時는 모두 국가를 위한 일입니다라고 일축 한다. 盧장관은 여기서 全이 내미는 서류에 결재를 하고 이어 全과 함께 총리공관으로 가 대통령의 재가를 받아내는데 들러리를 선다.
盧장관은 全의 서류에 결재를 한데 대해 검찰진술에서 지금 결재를 하더라도 그 동안 의 행동이 정당화될 수 없다고 생각하여 결재를 했다고 진술하고있다. 이것이 79년 남한의 국방부장관이 취한 행동과 판단이다.
12일 밤 또 한사람의 인물은 신군부 쿠데타의 사면초가 속에서 울먹이는 목소리로 국가의 안녕을 위해 몸부림친다. 바로 張泰玩수경사령관이다. 특전사령관, 수경사령관, 육본헌병감 등 주요지휘관을 따로 따돌리기 위한 신군부의 각본(연재6회)에 속아 12일 오후 연희동의 한 요정에 나와있던 장은 술이 2-3순배 돌 무렵 좌석에 있던 金晋基헌병감이 부관으로부터 鄭총장의 연행사실을 보고받자 이를 전해 듣고 혹시 쿠데타라도?라는 혼잣말과 함께 즉시 귀대한다.
차안에서 수경사 전병력에 비상을 발령한 그는 부대도착 즉시 이건영 3군사령관과 연락 을 하며 사태를 파악한다. 이 내용은 보안사의 감청기록에 생생히 나타나 그 의 고군분투를 입증해주고 있다.
그러나 그도 13일 새벽 3시40분 헌병 병력을 동원한 신군부측의 수경사 기습에서 체포되고 만다.
제 9회 쿠데타저지 필사의 몸부림 / 야산서 숨진채 발견 타살의혹
역사는 악인에 대한 단죄와 함께 의인에 대한 평가를 제공한다.
긴박했던 79년 12월12일 밤 또 한사람의 의인이 신군부의 쿠테타를 저지하려다 실패하고 체포된다. 바로 공수특전사령관 정병주 소장이다.
더욱이 정사령관은 12.12이후 강제예편당하고 10년의 세월을 회한 속에 보내다가 지난 89년 3월4일 목맨시체로 발견돼 아직껏 타살여부가 의문에 쌓여있다.
정사령관도 장태완 수경사령관과 마찬가지로 10일 오후 전두환의 초청을 받고 연희동 요정에 불려나와 술을 마시고 있다가 급거 귀대한다. 그는 육본핵심세력 빼돌리기를 위해 사전에 마련되었던 연희동 그 술자리를 뒤숭숭한 세상, 정보를 많이 갖고 있는 전두환 보안사령 관을 만나 세상이야기 좀 듣자고 참석했었다고 후일 술회했다.
그러나 정승화 참모총장의 연행소식에 후다닥 귀대한 그는 예하 전 여단에 여단장 정위치 및 부대 출동대기 지시를 내린다. 이때가 오후 8시쯤. 정사령관은 이어 전화로 사태파악에 나선 결과, 수경사 30경비단에 거사주모세력들이 모여 있는 걸 확인했고 그들로부터 이쪽으로 오라는 회유를 받기도 했다.
정사령관은 또 예하 3공수 여단의 최세창 여단장으로 부터 직접 설득을 당하기도 한다. 최는 정사령관이 요정에서 돌아온 시각 자신도 30경비단에서 돌아와 정승화 총장의 연행사실과 그 불가피성을 보고하면서 정사령관에게 신군부 쿠데타 세력에 가담한 자신의 결정을 정당화했다.
최는 특히 정사령관의 여단장 시절 작전과장으로 재직, 직속 사령관으로 모셔온 사이인 만큼 두사람의 이날 밤 대화는 군인으로서의 사명과 소신이 엇갈리는 비장한 것이었다.
정사령관은 이때 이미 예하 병력중 박희도의 1여단, 최세창의 3여단, 장기오의 5여단이 신군부와 손잡은 것을 알고 윤흥기 준장의 9여단을 출동시킨다.
정승화 총장이 연행되고 없는 상황에서 선임 지휘관인 윤성민 참모차장으로 부터 1개여단을 착출해 수경사에 배속하라는 지시를 받았기 때문이다. 이때가 13일 새벽 1시30분. 쿠테타를 저지해보려는 마지막 몸부림인 셈이다.
그러나 9공수 출동명령을 내린 30분후의 정사령관은 몇시간 전 헤어진 최세창 3공수여단장이 보낸 특공대에 의해 체포되고 만다. 최준장이 보낸 38명의 특공대는 박종규라는 대령이 지휘했는데 특전사 2층의 정사령관 집무실을 포위하고 M16을 난사했다.
특공대는 잠긴 문을 부수고 쇄도하면서 정사령관의 부관 김오랑소령을 향해 M16을 난사해 사살했다. 정사령관도 권총을 쏘며 저항했으나 왼팔에 총을 맞고 체포되고 만 것이다.
이때 정사령관의 명령을 받고 서울로 출동중이던 9공수는 3-4차례 대기명령을 받고 이후 회군명령을 받고 만다.
막강 전투력을 자랑하는 수도경비사령부와 최정예 병력을 지휘하는 공수특전사령부등 육본의 양대세력이 신군부의 치밀한 각본에 의해 모두 무력화되고 만다.
피를 흘린 채 지프에 실려 보안사 서울분실로 끌려갔던 정사령관은 과다출혈로 이내 병원에 옮겨져 2차례 수술을 받고 겨우 목숨을 건져 80년 3월 퇴원한다. 이미 80년 1월 20일자로 예편된 신분이었다.
그랬던 그가 89년 3월 4일 경기도 양주군 장흥면 울대리 송추유원지 부근 야산 참나무가지에 주황색 나일론 끈으로 목 맨채 시체로 발견됐다.
이 동네 장마루상회 주인 최현구씨(당시 33세)가 발견해 신고된 정 씨의 사체는 높이 2m의 나뭇가지에 매달려 있었고 얼굴만 새까맣게 부패되어 있었으며 주변엔 소주병 3개와 1회용 컵등이 있었다.
정씨의 손목에 있던 반자동 세이코시계는 19일.수요일.11시45분으로 멈춰있어 이대로라면 정씨 사망시각은 4개월 보름전인 88년 10월 19일로 추정되었다. 유류품은 현금 4만원등 특별한 것은 없고 유서는 발견되지 않았다.
사체발견 즉시 정씨의 사인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어 부검이 실시됐다. 3월6일 서울지검 의정부지청 윤형모검사의 지휘로 국과수 법의학 과장 서재관박사가 집도한 부검에서는 목 오른쪽에 색흔(졸린 자국)이 있고 사반이 하지와 하부장기에 몰려있는데다 외상이나 외부충격흔적이 없어 일단 의사에 의한 자살로 추정된다고 결론지었다.
또 얼굴 부패상태와 하체수포상태, 겨울철 날씨등을 고려할때 3-4개월전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고 덧붙였다. 정씨는 이미 88년 10월 16일께 명동성당을 다녀온 뒤 집에서 쉬다가 밤 8시께 집을 나간 상태였다.
남겨진 정황대로라면 12.12이후 계속 우울한 생활을 해오던 정씨가 당뇨등 신병의 악화. 빚보증을 잘못해 녹번동 자택이 근저당(6억10만 원)된데 대한 고민등을 이유로 가출해 경기도 야산에서 소주를 마시고 자살을 한 것이 된다.
그러나 유족들은 몇가지 의문을 제시하며 검은 세력에 의해 타살된후 자살로 위장되었을 가능성을 주장하고 있다.
첫째, 그는 83년 영세를 받은 후(세례명 요아킴) 독실한 천주교 신자생활을 해 온 만큼 자살을 죄악시하는 천주교의 교리를 어길리가 없다는 것이다.
둘째, 당뇨로 고생하고 있긴 했으나 산책을 하고 대중탕을 애용하는등 건강에 각별히 신경을 써온 만큼 삶에 대한 애착이 컸다는 점이다.
셋째, 평소 사소한 일도 기록을 남기는 성품으로 보아 유서 한 장 없이 살할 사 람이 아니란 점이다. 또 빚보증문제도 집이 근저당만 설정되었을뿐 직접 생활에 변화가 온 건 아니란 점도 들고 있다.
이같은 의문은 특히 95년 개혁조치와 함께 세인들의 재평가를 받은 장태완 전 수경사령관 이 TV에 출연, 정씨의 사인에 의문을 제기하면서 같은 군인으로서 정씨는 결코 자살할 인간이 아니다고 주장하면서 또다시 관심을 불러 모았다.
쿠데타의 와중에서 육본수뇌부 전체가 그러했듯 정사령관도 효과적 진압에 나서지는 못했다. 그러나 신군부의 회유에 굴하지 않고 진압군 출동명령을 내린 행동은 아수라장이던 12.12의 와중에서 그나마 군의 사명을 다한 충성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정씨는 강제 예편후 특히 부관 김오랑소령의 죽음과 그 충격으로 시력까지 잃은 미망인에 대해 가슴 아파해 온 것으로 알려졌다. 정씨는 쿠데타 세력들이 과거 군 선배에게 던져주는 관직이나 공사사장직 따위를 일절 거절하고 쪼들리는 생활을 하면서도 장성은 군복을 벗은 후에도 명예를 중시해야 하는데 취직을 하면 그 순간 명예를 더럽히게 된다고 말하기도 했다.
정씨는 특히 12.12에 대한 단죄를 상상하기 어렵던 87년 11월 기자 회견에서 12.12는 하극상이라고 단정하고 지휘책임을 다 못한 책임에 대해 뼈를 깎는 반성을 해왔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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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된 역사를 인식하여야 현재와 미래가 있습니다(Ⅱ)
-용- 조회수 : 187
작성일 : 2009-08-28 13:44:18
IP : 218.39.xxx.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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