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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된 역사를 인식하여야 현재와 미래가 있습니다.

-용- 조회수 : 216
작성일 : 2009-08-27 15:20:37
지난 8월18일 김대중대통령님의 서거 소식과 함께 명동에서 진행하뎐 언론악법 원천무효서명작업이 일시 중단되었고 10일만인 오늘에야 재개됩니다.
시간이 허락하시는 분들은 함께 해주셨으면 합니다.

그리고 아는 이야기인 줄은 모르겠으나 1970년대에 태어난 분들은 모르실 것 같아
1995년경 '광주민주항쟁' 실체에 대해 기자단들이 수년에 걸쳐 피해자들과 면담등을 통하여 조사, 분석한 자료가 오래 전에 광주일보에 실렸습니다.
20~30회에 걸쳐 재연재를 할 계획입니다.
영화를 보듯이 상상해가면서 읽으시기 바랍니다.

얼마 전 노무현대통령님 49재를 몇일 남겨 놓고 조계사에서 열린 '노무현대통령 추모를 위한 심포지움'에서 40대 초반이라는 지방에서 참석한 주부 한 분이 "저희는 역사를 안 배운 것 같습니다"라는 말에 약간의 충격을 받았습니다.

따라서 이 중늙은이가 여러분께 드리고 싶은 이야기는 '과거에 대한 확실한 인식없이는 현재와 미래는 헛 것입니다'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향후 1948년 발발된 제주 4.3 민중항쟁, 여순사건등을 제가 갖고 있는 지식과 자료를 중심으로 알려드리고 싶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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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제목: 5.18 광주학살 배경에서 부터 전, 노 재판 과정까지


제 1회 1979년 12월 M16소총과 탱크 몇대 /집권전야의 야비한 축배

1979년 12월, 그들은 그들이 저지르는 일이 역사를 이토록 뒤헝클어 놓는 일인지 깨달았을리 없었을 게다. M16소총과 탱크 몇 대만 있으면 손에 쥘 이른바 통치권을 놓고 그 무뢰한들에게 역사나 정의는 한낱 따분한 구호일 뿐이었음이 분명하다.

쿠데타로 18년의 세월을 절대 권력과 함께한 박정희소장을 선배로 모신 그들에게 79년 겨울의 한국은 그들 식의 우국충정을 자극했는지 모른다. 그러나 허수아비 대통령 뒤에서 집권전야의 야비한 축배를 들던 그들도 광주라는 도시가 그들 손에 이토록 많은 피를 묻게 할 줄은 몰랐으리라.

80년 광주에서의 시민학살. 그것은 한국 민주주의의 원죄였다. 그리고 그 원죄는 어처구니없게도 코흘리개가 성인이 되는 동안의 세월동안 속죄되지 않았다.

수 백명의 양심가가 악랄한 박해를 받고, 수 천명의 지식인이 위선을 강요 당하고, 수 만명의 대학생이 투옥되었으며, 수 십만명의 광주시민들이 한을 품고 사는 동안 한국사회는 이 죄악을 망각하는 노력을 해왔다. 그리하여 광주학살의 최고책임자 전두환 전대통령이 백담사라는 명산 고찰에 현대판 유배를 가게 되었을 때 그것이 마치 光州학살에 빚 갚음하는 셈이 되는 양 떠들었고, 엄동에 산사에서 지내는 그를 동정하는 자도 있었다. 80년 光州를 풀지 않고선 한국의 민주주의는 있을 수 없다.

光州를 원칙대로 처리하고 나야 비로소 이 땅에 민주주의가 실천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光州의 해법엔 고통이 따를 수 밖에 없다. 그 고통을 두려워해 光州를 망각하려 애썼던 지난 16년은 그래서 본말이 맞지 않고, 오류가 모범을 얕보며, 스승이 제자에 답하지 못하고 아버지가 아들에게 명령하지 못했다.

직장에서, 가정에서 잘못을 캐고 따지는 이는 평화의 파괴자로 손가락질 당했고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식의 부조리를 고발하려는 자는 조화를 모르는 이단아로 낙인 찍혔다. 비열한 웃음속의 크고 작은 범죄가 저자거리로부터 국가수뇌부에까지 창궐하는 동안 좋은 게 좋은 것이란 금언이 젊은이의 처세훈으로 권장되었다.

그러던 우리가 光州로부터 15년이 지난 지난해 겨울, 全·盧 두 전직대통령을 투옥했다. 그리고 5.18특별법을 제정했고 검찰은 그들을 기소했다. 이것이 문민정부의 계획된 개혁 작업이건 집권후반부의 정국주도용 정략이건 간에 우리 모두는 바야흐로 역사청산이란 것을 경험하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우리는 역사청산에 관한한 완전 초보임을 자인해야 한다.

우리는 현대사에서 적지 않은 역사청산을 보아왔다. 2차대전패전국인 독일과 일본은 종전직후 뉘른베르그 재판과 동경재판을 통해 생존전범들을 과감히 투옥·처형했으며 1940년 독일에 국가의 3분의 2를 내준 프랑스 비시 정권의 페당 대통령은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금융인·노동자 심지어 창녀들 까지도 나치에 협력한 3만 여명이 삭발당하고 공민권을 제한 당했다.

우리의 사정은 어떤가. 해방 후 제헌의회가 제정한 대한민국법률 제3호 반 민족행위처벌법은 갖은 방해 끝에 1년도 못가 폐기되고 말았다. 반민법에 의해 설치된 반민특위는 거물 친일파 몇을 소환조사하는 것으로 끝났고 李承晩정권의 비협조와 일제 경찰 전력을 가진 당시 경찰들의 반발로 특위사무실이 습격당하는 수난 끝에 문을 닫고 말았다. 이때 지식인들은 통탄했으나 속수무책이었고 다수국민은 국부 이승만의 정책에 맹종했다.

4.19끝에 얻어낸 청산장치- 반민주행위자 공민권 제한법도 그렇다. 3.15부 정선거범들에 대한 장면정권의 관대한 처분에 항의, 4.19부상학생들이 국회에 난입 항의하면서 얻어낸 이 법은 소급입법시비에 입방아만 찧다가 5.16 쿠데타를 맞고 만다.

보통·비밀선거의 헌법원칙을 헌신짝 취급한 그들을 처벌하면서 이른바 선량들은 소급입법 불가의 헌법원칙을 내세워 시간을 탕진한 것이다. 30년전의 이 잘못은 5.18특별법에 의한 피고인들로부터 또 위헌심판청구를 받게 되면 일어날 수 있는 촌극이기도 하다. 헌법을 파괴한 쿠데타범을 처벌하면서 헌법준수의 원칙 때문에 고민하는 꼴인 것이다.

근대 시민사회 성립과정에서 별다른 고통 없이 2차 대전 종전과 함께 하루아침에 민주공화국으로 탈바꿈한 우리 사회는 과거청산에 미숙할 수 밖에 없는 운명이었는지 모른다. 그 앞 수세기를 사대문화의 전통에서 살아왔고 농본사회의 가부장적 질서 속에 사회를 지탱해 왔기 때문에 역사청산을 갈등 투성이의 보복극으로 여겼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이 같은 예를 아르헨티나에서 본다. 스페인의 오랜 식민지 아르헨티나가 독립을 얻은 건 아메리카 혁명식의 무장독립투쟁도, 간디식의 국민저항 운동도 아니었다. 그들은 1810년 나폴레옹이 스페인을 점령하자 식민종주국의 소멸로 느닷없이 독립을 맞았다. 결국 근대 시민사회 성립과정에서 잘못된 과거에 대한 정리 작업없이 독립을 맞은 아르헨티나에 찾아온 건 장장 2세기에 걸친 군부 쿠데타와 민선정부의 교대였다. 헝클어질 대로 헝클어진 현대사 속에 그들은 그 시원을 찾기도 어려운 독재치하 범죄들에 대한 더디고 더딘 청산작업을 지금에야 벌이고 있다.

이제 光州日報는 한국 현대사의 원죄- 80년 光州의 현장에 있던 신문으로서 시대의 전환점에서 그 비극의 역사를 다시 쓰고자 한다. 지난 89년 5.18 항쟁사를 맨 처음 연재, 5.18재조명의 바탕을 마련한데 이어 그 이후 밝혀진 새로운 사실 등을 보완해 정리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 연재물은 79년 朴正熙대통령의 피살직후부터 신군부의 내란, 그리고 혼돈의 80년 봄, 비극의 5.18과 함께 특히 全·盧씨의 기소를 통해 새로 드러난 가해자 측의 진실을 정리해 나갈 계획이다.

이 연재에 동참하는 기자일동은 80년 光州시민학살 직후 재갈물린 언론으로 침묵했던 과거에 대한 죄의식을 먼저 고백하며 객관성과 정확성 있는 기술로 우리들의 역사를 바로 세워 후세에 남기고자 한다. 죽음으로 역사를 지킨 5월 희생자들의 명복을 빌며 삼가 역사 앞에 옷깃을 여민다.

제 2회 10.26운명의 밤 궁정동거사 新軍部등장 빌미/판결문 공개않은채 김재규 전격처형

1980년 5월 17일 비상계엄 전국 확대와 5.18 광주항쟁 발발로 남한 전체가 혼란의 소용돌이에 휘말려있던 나날들, 그 와중에 5월 24일 서울 서대문구 현저동 서대문구치소 내 교수형장에는 내란목적살인 등의 죄명으로 5월 20일 대법원에서 형이 확정된 김재규(金載圭) 前 중앙정보부장(54)과 박선호(朴善浩)중정의전과장(46),·박기주(朴基柱)중정경비원(32),유성옥(柳成玉)중정운전원(37),김태원(金泰元)중정경비원(33)등 5명에 대한 교수형이 집행됐다.

오전 7시 두 명의 교도관에 의해 팔을 낀 채 포승을 앞으로 묶은 손에 염주를 든 金載圭는 교수대 앞에 앉아 집행관으로부터 마지막으로 남길 말은 없는가라는 질문을 받고
‘이 나라에 이제부터 민주화가 올 것이다. 나는 내 생명과 유신체제를 바꾸었다.
훗날 사가들은 나를 다시 재판할 것이다. 부모님을 뵙지 못해 마음이 아프다‘는
유언을 남겼다.
이어 자루로 얼굴이 덮이는 순간 金은 염주를 쥔 손을 꽉 움켜쥐었다.
발판이 내려진 후 金은 이내 절명했고 교도의는 사망이 확인된 金을 검은색 목조관에 입관시켰다.
흰색저고리에 적힌 수번은 101번. 이어 30분 간격으로 나머지 4명의 형이 집행됐다.
金등의 처형은 계엄하의 언론에 일절 보도되지 않았다.
구치소측은 사형을 집행하면서 수인들의 가족에 조차 알리지 않았으며 집행 후 시신을 가져가라고 연락했다.
당시 보안사는 金의 가족들에게 조용한 장례식을 치르라고 압력을 가했으며 이에 따라 金의 장례는 수도통합병원 영안실에서 훈련중 사망한 일반 사병들처럼 조용히 3일장으로 끝났다.

경기도 수원시 판교인터체인지 부근 남한산성 공원묘지에 金의 시신이 운구될 때는 헌병 1개 소대가 따라 붙었다.

보안사의 요구로 가족들은 무덤에 묘비를 세우지 못했다.

보안사가 대법원의 형 확정 4일 후에 전격 金에 대한 사형을 집행한 것은 당시 서서히 일기 시작한 金에 대한 구명운동을 의식했다는 분석이 유력하다.

80년 4월 LA 교민회등 해외단체들은 金載圭구명운동을 시작했으며 일부 대학대자보는 金을 '의사'로 표현하고 있었다.

역사는 구조적 필연과 돌발적 우연의 복합체다.

1979년 10월 26일 오후 7시. 서울시 종로구 궁정동 50. 중앙정보부 식당에서 발생한 김재규의 박정희대 통령 총격살해 사건은 5.16이후 20년 독재가 빚은 국가모순·권력내부갈등 의 필연이자 金載圭라는 역사 실행자의 행위가 빚은 우연의 결과였다.

1979년 10월 26일 대통령 朴正熙는 충청도 삽교(揷橋)호 준공식 행사를 마치고 오후에 宮井동 중정식당에 도착했다.

十長生 8폭 병풍이 둘러쳐진 요정식 식당에는 중정부장 金載圭, 비서실장 金桂元, 경호실장 車智澈, 여가수 沈守峰, 한양대생 申才順등 6명이 참석했다.

朴正熙대통령은 오후 7시 TV뉴스를 시청하다 金泳三당시 新民黨총재 관련 보도가 나오자 기분 나쁜 듯 TV를 끄고 이내 沈씨가 노래를 시작하는 주흥이 벌어졌다.

도중 金부장이 자리를 뜨고 약 20분후 돌아와 갑자기 車실장에게 ‘짜식 너는 너무 건방져’ 라는 말과 함께 독일제 32구경 7연발 권총을 1발 발사했다.

총알은 車의 손바닥을 관통했고 놀란 車는 방에 딸린 화장실로 도피했다.

(이상 沈守峯회고록 '사랑밖에 난 몰라'문예당刊. 당시 金載圭가 金桂元에게 형님, 나는 한다면 합니다라고 한 발언, 車에게 이 버러지 같은 놈 이라고 한 발언등은 사실과 다르다고 봄이 옳음) 이어 金은 朴대통령의 흉부를 향해 권총을 1발 발사했고 또 재 사격을 시도했으나 권총의 격발이 되지 않아 방 밖으로 나갔다.

金은 수 분후 38구경 5연발 리벌버 권총을 구해 돌아왔고 화장실에서 나온 車실장이 탁자를 밀어 붙이며 저항했다.

그러나 金은 탁자를 관통해 車에게 재차 사격, 車는 흉부에 총탄을 맞고 뒤로 쓰러졌다.

이어 金은 沈양의 팔에 안긴 朴正熙대통령의 머리를 겨냥, 제 2탄을 발사했다.

金載圭가 朴대통령에게 확인사살을 하고 방을 뛰쳐나간 시각은 10월 26일 오후 7시 43분이었다.

이때 방밖에서는 金의 발사음을 신호로 朴善浩가 응접실 대기중이었던 경호처장 鄭仁炯, 부처장 安載松을 사살했고 朴興柱(중정부장 수행비서관·육군대령)·李基柱·柳成玉등은 주방에서 대기 중이던 경호실 특수차량계장 金容太경호관 金鏞燮을 사살한 후 경호관 朴相範(93년 金泳三대통령 경호실장을 맡게 됨)에게 중상을 입혔다.

金泰元은 직후 M16소총으로 安載松, 鄭仁炯, 車智澈, 金鏞燮에게 각각 확인사살을 했다.

총격이 끝난 후 김재규는 이미 약속을 해 현장의 다른 방에 기다리고 있던 鄭昇和육참총장을 승용차에 태워 육본 벙커로 갔다.

이때 시각이 밤 10시 25분. 金으로부터 朴대통령이 사망했다는 사실만을 전달받은 鄭총장은 1군과 3군 에 비상태세를 발령하고 수도권 지휘부대장을 불러 들였다.

이후 金載圭는 군지휘관과 국방장관, 金奎元비서실장등이 모인 밤 11시 20분께 참석자 전원에게 '대통령유고'를 알리고 보안유지를 당부했다.

金은 이어 金桂元비서실장에게 우선 계엄을 선포하고 혁명위원회로 간판을 바꾸어 군사혁명으로 유도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상 보안사 합수부 발표) 그러나 金桂元은 鄭총장에게 金이 대통령 살해범이라는 사실을 귀띔했고 鄭 총장은 밤 11시30분 金에 대한 체포계획을 수립했다.

헌병감과 보안사 수사관이 金을 무장해제했고 곧 보안사로 압송했다.

金載圭에 대한 처형으로 10.26사건의 완전한 진상은 현대사의 미결로 남게됐다.

다만 여기서 한가닥 의혹을 벗기는 일은 당시 5월 20일 작성되었던 대법원 전원합의체 재판부의 판결문을 공개하는 일이다.

이 판결문은 관례대로라면 법원공보와 대법원 판례집에 수록되어 하급법원의 지침으로 활 용된다.

그러나 80년 5월 이후 어디에도 金載圭등 사건에 대한 판결문은 없다.

더욱이 전원합의체 재판부에서 金의 사형에 반대의견을 냈던 5명의 대법관 들은 동년 8월 8일 일괄사표를 내고 법복을 벗었으며 상당기간 변호사 개업도 못했다. 밝혀야 할 진실은 이렇게 쌓여있는 것이다.

제 3회 쿠데타는 필연이었나 金載圭체포직후 하나회 음모 꿈틀/ 박정희 독재 '軍우월주의' 배태

현역육군대령이던 朴興柱피고인을 제외한 金載圭내란목적살인사건 피고인들은 계엄 보통군법회의·고등군법회의·대법원의 3심절차를 거쳐 처형되었다.
金載圭는 이 일련의 공판과정에서 계엄사합수부가 주장한 박대통령의 총애를 잃고 지위가 불안해진 나머지 대통령을 시해하고 권력을 찬탈하려 했다는 범행동기를 일관되게 부정했다.

金은 부마사태등을 보고 유신체제의 한계를 느꼈으며 박대통령을 제거하면 모든 국민으로부터 지지를 받을 줄 알았다고 진술했다.

범행동기에 대한 그의 ‘소신'은 1979년 12월8일 오전 서울 삼각지 육군본부 군사법원 대법 정에서 열린 이사건 보통군법회의 2회 공판 때부터 일관되게 계속된다.

그러나 사건직후 육본 벙커에서 무장 해제되고 너무나 간단하게 ‘대통령 시해범'으로 구금되어 버린 그의 행적을 놓고 과연, 10.26이 김이 주장하는 민주회복 거사였는지 아니면 엉성한 집권 쿠데타였는지는 의문으로 남는다.

12월8일의 제2회 공판에서 金載圭가 피고인 신분으로 처음 내뱉은 진술은 모조리 `혁명'타령이었다.

검찰관이 鄭昇和 육참총장을 궁정동에 대기시킨 이유를 묻자 그는 그날은 제가 혁명하기로 결심했기 때문에...라고 답했고 참모총장과 혁명초부터 접촉하기 위해서... 그날오후 준정식당에 도착해서 혁명준비에 들어갔습니다... 라는 식이었다.

이에 군재 법무사는 피고인은 자주 혁명 혁명하는데 사실만을 진술하라고 제지했다.

김은 또 12월15일 7회 공판에서는 이렇게 진술했다.

‘저는 10.26혁명이 없었다면 이 나라에는 현재까지도 자유민주주의는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최대통령께서 권한 대행때 국민 앞에 공약했습니다. 국회에서는 이미 긴급조치 9호를 해제되었고요. 이런 일련의 행위가 10.26 혁명없이 이루어 질수 있었겠는가를 생각할때 혁명의 목적은 완전히 달성되었고 그렇기 때문에 저는 죽어도 아무여한이 없습니다.
저는 죽어서는 자유민주주의를 회복시키기 위한 투사로서 영웅으로서 평가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 앞으로 해야할 혁명과업이 많습니다.... 제 지금 기분이 전쟁에서는 승리를 한 장군이 우연한 기회에 적의 포로가 된 기분입니다. 저는 혁명을 완성시켜놓고 심판을 받고 있습니다.‘

金의 朴대통령살해를 민주회복을 위한 거사로 보려는 시각은 1심 선고 직후 제출된 김제형.이돈명.강신옥등 변호인단의 항소이유서에도 강조되고 있다.

항소이유서는 3선 개헌과 부마사태등을 접한 金載圭가 박의 제거를 결심하는 과정을 상술하고 범행직후의 엉성한 태도가 집권 쿠데타와는 너무 거리가 먼 것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더욱이 이 항소이유서에는 1심재판 과정중 재판진행절차를 놓고 변호인단과 검찰과의 사이에 격론이 벌어질때 재판장 뒤쪽 문으로 수많은 쪽지가 전해진 사실, 그리고 김의 악화된 건강에도 불구 1심재판이 무리하게 강행된 사실등을 지적하고 있다.

당시 이미 12.12를 통해 실권을 장악한 신군부가 김의 처형을 위해 군법회의에 실권을 행사한 흔적이다.

10.26에 대한 金載圭의 의견은 80년 1월24일 고등군법회의 최후진술에서 마지막으로 피력된다.

金은 여기서 유신체제의 모순과 억압.부마항쟁의 전투확산가능성을 짧게 적은 뒤 민주화의 과정에서 희생은 불가피한 것이고 많은 사람의 희생보다는 한사람을 희생시킬 수 밖에 없다고 밝히고 있다.

또 군사법정에 대해서는 피고인 신분답지 않게 군인여러분의 보는 눈은 지극히 국한되어 있다. ...
재판이 잘못되고 민주주의를 천연하면 혼란이 온다.
혼란이 와서 나라가 위태하면 金載圭가 그렇게 만들었다고 할것인가?... 나는 10.26사태에 처음이며 끝이다.

오직 나의 책임인 것이다. 법리의 차원을 떠나서 역사적 관점에서 심판하라 역사에 있어서 가정법은 무의미하다.

그러나 朴대통령과 車지철을 살해한 金이 이후 냉정을 되찾고 김계원 비서실장과 정승화 육참총장에게 상황을 설명한 후 일정기간 그가 주장하는 혁명의 중심에 있었다면
*계엄 선포 *긴급조치해제 *비상내각구성 *대미연락유지(대북경계관련) *계엄해제 *개헌
*총선 *대선등의 역사전개가 가능하지 않았을까. 서울의 봄은 화창하고 80년 5월 광주는 구악청산과 민주주의 개막으로 환희에 차있지 않았을까. 그러나 金載圭는 10월26일 밤11시30분 육본 벙커2에 도착해있던 김계원이 노재현 국방장관 정승화 총장에게 대통령 살해범은 金載圭 라고 밀고한 후 27일 새벽 0시40분 체포되고 만다.

체포를 명령한 자는 정승화, 체포 작전을 수립한 자는 전두환 보안사령관, 행동대장은 헌병감, 행동대원은 보안사 요원2명이었다.

박대통령에 2발의 권총을 발사한 시각이 26일 밤7시40분, 이른바 거사는 6시간 만에 헝클어진 채 끝나버리고 만다.

金載圭의 거사 성공에 가정법을 적용해보는 일은 그러나 서울의 봄 쪽으로만 답이 나오는 건 아니다.

10.26직후 수일간의 혼돈이 어떻게 전개되었 건 간에 20년 박정희 군사독재가 진행되는 동안 남한의 군대, 특히 육군에 뿌리깊게 심어진 군 우월 주의적 문화는 `서울의 봄'을 살육의 봄으로 뒤 바꾸어 놓았을 가능성이 높다.

즉 70년대 제3세계권에 만연한 군사쿠데 타가 박이후의 남한이라고 발생하지 않았을 확률은 그리 높지 않다.

그리고 그 주역들은 5.16이후 독버섯처럼 세력을 키워오던 육사출신 하나회 멤버들이었을 가능성이 절대적이다. 과연 그들은 그해 12월에 터무니없는 일을 저지른다.

제 4회 새정권[합수부]하나회·보안사 인맥 집권선봉대/ 全斗煥정권찬탈 발판

10.26은 독재자 박정희의 최후이면서도 암울한 유신치하에서 민주인사들이 목숨을 걸고 갈망했던 민주화의 시작은 결코 아니었다.

거인 박정희의 죽음 말고는 5.16이후 국가통치의 골격을 이루던 군부 중심의 권력체제는 그대로 이어졌다.

다만 힘의 중심이 박정희대통령 살해사건을 수사하는 계엄사 합동수사본부로 옮겨 간 것 말고는 달라진 게 없었다.

서울의 봄은 사실 봄이 아니었고, 광주학살이라는 비극의 싹은 이미 이때부터 잉태하기 시작했다.

10.26 그날 밤, 보안사령관이던 전두환소장은 김재규가 대통령을 살해한지 3시간여만인 밤 11시께 한남동 육군본부의 지하지휘소에 있었다.

사건현장에 있던 사람들을 제외하곤 현역 장성으로선 대통령 유고라는 긴박한 상황을 가장 먼저 인지한 인물이었다.

친동생인 전경환당시 청와대 경호계장이 권력핵심부의 이상 기미를 급전해 왔던 덕분이었다.

전두환을 17년간 수행했던 손삼수전비서관(44)의 증언 (월간조선 96년 1 월). 그날은 연희동에서 서빙고분실로 가던 중이었습니다.

전사령관 내외분께서 사과 몇 짝을 싣고 서빙고 분실에서 수고하는 직원들을 격려하러 갔어 요... 크라운 호텔을 지날 즈음 무전기에서 연락이 왔어요. 보안사령부로 전화를 해달라는 것입니다.

차를 세우고 전화를 해보니 전경환청와대 경호계장으로부터 급한 전화가 왔다.

국방장관과 육참총장이 육본벙커로 들어갔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전두환은 서빙고 분실에 도착하자 마자 보안사 상황실로 연락해 전방상황 을 체크하라고 지시, 전혀 이상이 없다는 보고를 받자 다시 청와대 경호실로 전화를 건다.

그러나 기다리라고 한 뒤 5분이 지나도 연락이 없고 전경환과도 통화가 되지 않았다.

이 순간 `청와대에 무슨 일이 생겼다'고 중얼거리시더군요.  손비서관의 증언은 계속된다.

이후 전두환은 육본 지하벙커로 곧바로 가서 군 수뇌부와 앉 아있는 김재규를 본 뒤 슬쩍 빠져 나온다.

박대통령과 관계되는 무슨 일이 벌어졌다'고 판단하신 것입니다.

뒤따라 나온 변규수 육본보안 부대장에게 경호병력을 붙여줄 수 있느냐고 요청했으나 지금 당장은 어렵다고 하자 `내가 이곳을 빠져 나간 사실을 비밀로 해주시오'라고 당부하고 전속력으로 보안사령부로 돌아갔습니다" 그 시점에서 박대통령의 살해 사실은 보안사령부에 체크된다.

`김계원비서실장 이 누군가를 업고 와 국군서울지방병원의 대통령 전용병실에 눕혔다'는 위 병의 보고가 보안사 당직사령이던 이상연 감찰실장(후일 안기부장 역임)을 통해"궁정동 안가에서 박대통령이 피격됐다"는 사실이 확인된 것이다.

이에 김재규를 의심한 전두환은 곧바로 대공수사관 7~8명을 무장시켜 김재규와 국무위원들이 모여있는 국방부 장관실로 직행했다.

김계원으로부터 김재규가 살해범이라는 사실을 전해들은 정승화육참총장은 국방장관 옆방으 로 전두환을 불러 사실을 알린 뒤 체포를 명령했고, 김재규는 79년 10월27 일 새벽 0시 20분께 국방부에서 김진기헌병감, 보안사 오일낭중령(대통령경호처장 역임)에게 붙잡혀 무장 해제됐다.

체포된 김재규는 보안사 요원들에 의해 곧바로 세종로분실을 거쳐 서빙고분실로 압송된다.

정치군인 전두환이 운명의 밤 10.26에 이처럼 기민하게 움직이지 않았다 면, 역사의 수레바퀴는 또 어떤 알지 못할 궤적을 그렸을까. 그러나 10.26이후 대통령시해사건 합동수사본부장 전두환을 권력의 핵심부에 등장시킨 단초는 이미 박정희 유고 전에 마련돼 있었다.

김이 체포.압송되는 순간, 국방부의 심야 비상국무회의에선 최규하국무총리를 대통령권한대행으로 인준하고 27일 새벽 4시를 기해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했고, 계엄사령관에 정승화육군참모총장, 계엄사 합동수사본부장에 전두환보안사령관이 임명됐다.

이어 발표된 계엄포고령 제5호는 검찰.군검찰.중앙정보부.경찰.헌병.보안사 등 국내 모든 정보수사기 관의 업무를 조정.감독하기 위해 계엄사 내에 합동수사본부를 설치.운용한다 "고 명시했다.

김재규사건 수사만을 위한 합수부라기보단 무소불위의 거대권력이 탄생한 것이다.

정규육사 출신 장교단의 리더로서 합동수사본부장으로 앉은 전두환이 수사권과 함께 보안사.정보부.경찰.헌병의 정보채널을 장악함으로써 대통령유고상황에서 아주 중요한 카드를 한손에 쥐게 된 순간이었다.

이처럼 보안사가 비상계엄하에서 모든 권한을 쥘 수 있게 한 것은 박정희 생전 국가 비상사태 발생시 보안사가 자동적으로 국내의 모든 수사.정보기관을 흡수하는 합동수사본부 역할을 할 수 있도록 한 대통령령을 근거로 한 것이다.

육군본부의 비상사태 조치계획인 충무계획의 합수본부를 둘 수 있다는 단 한 줄의 근거에 기초한 것이었다.

79년 여름 합수부의 조직을 기안토록 법무참모(소령)에게 지시했던 전두환은 이미 10.26이전 부마항쟁이 터지자 부산에 내려가 합동수사단(단장.권정달부산보안부대장)을 설치해 실험을 해 본 터였다.

10월27일새벽 전두환은 보안사로 오석근 검찰총장, 윤익균 정보1부장, 전재덕 2차장, 손달용 치안본부장 등 수사기관장들을 불러 합동수사본부 첫회의를 열었다.

전두환은 이 자리에서 대통령의 서거를 설명하고 살해범은 김재규라고 말한 뒤 일사천리로 후속조치를 밟아 나간다(김충식 저 `남산의 부장들II'). 힘이 쏠린 합수부에 권력지향형 군인 전두환이 본부장을 맡으면서 80년 광주의 비극은 싹트기 시작한다.

감독관실.본부분실.기획조정실등 3실, 안전처.정보처.총무처 등 3처, 1수사단으로 중앙조직이 구성돼 있던 합수부의 곳곳에는 하나회와 보안사 인맥이 여기저기에 박혀 권력찬탈의 선봉에 서게 된다.

보안사령관 비서실장 허화평대령, 인사처장 허삼수대령, 수사과장 리학봉 중령등이 포진해 있었다.

여기에 비호세력으로 김진영수경사 33경비단장, 장 세동30단장 등이 합세해 10.26부터 12.12까지 권력공백기간동안 전두환의 집권을 준비한다.

이들 친위 5인방에 힘입어 12.12로 사실상 정권을 찬탈한 전두환은 광주 학살로 쿠데타를 완성하게 된다.
IP : 210.95.xxx.4
3 개의 댓글이 있습니다.
  • 1. 사랑이여
    '09.8.27 3:39 PM (210.111.xxx.130)

    응원합니다. 계속 연재를 부탁드립니다.
    역사....
    그 치열한 현대사를 알아야 미래가 보입니다.
    감사합니다.

  • 2. 버섯
    '09.8.27 6:44 PM (110.13.xxx.203)

    맞습니다...
    역사를 바로 알아야지요..
    따라서 미디어악법 반드시 막아야 합니다...
    더 이상 친일파들이 맘대로 해석한 역사를 아이들에게 가르칠 수 없습니다...

  • 3. -용-
    '09.8.28 12:58 PM (218.39.xxx.153)

    '사랑이여'님? 그리고 '버섯'님 ?
    댓글 감사합니다.
    많은 분들이 읽으셔서 해방후 지금까지 무엇이 잘못되어 '배부른 돼지'가 많을까
    생각하는 기회가 되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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