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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동자 속의 불안

프리댄서 조회수 : 1,269
작성일 : 2009-08-17 02:47:17
도쿄대 전공투가 대학 건물을 점거하고 있던 1968년 5월. 도쿄대 교양학부 900번 강의실로 유명인 한 명이 찾아왔습니다. 검도와 보디 빌딩으로 몸을 단련해 ‘육체의 확장’을 꾀한 사내. 그 덕분에 단단한 살집과 굉장한 ‘갑바’를 갖춰 작가라기보다는 얼핏 야쿠자 조직원처럼 보이기도 하는 그는, 천황의 신격화와 일본의 재무장을 주장함으로써 그 강의실을 빼곡히 메우고 있는 학생들과는 이념적으로 정반대의 지점에 서 있는 것으로 유명한 사람이었죠.  

바로 미시마 유키오. 그가 좌파 중에서도 ‘급진적 성향’의 학생들로 이루어진 전공투의 ‘해방구’ 속으로 혼자 뚜벅뚜벅 걸어 들어왔던 겁니다. 전공투 학생들의 초청으로. 그들과 기꺼이 토론을 하기 위해. 그리고는 다음과 같이, 교양학부 900번 강의실을 가득 메우고 있는 학생들에게 인사를 건넵니다. (저기서 미시마 유키오는 ‘전공투’를 ‘전학련’이라 지칭하고 있음)

이렇게 나를 단상에 세우는 것이 반동적이라는 의견이 있었다구요? 뭐 반동이 반동적인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기에 여기 섰습니다. (웃음) 저는 남자가 한번 문을 나서면 7명의 적을 만난다고 들어왔습니다. 오늘은 도저히 7명 정도가 아닐 것 같아서 엄청난 기개를 갖고 왔습니다.

며칠 전, 4월 28일에 저는 여기저기 죽 둘러봤습니다. 그날 오전에 제군들이 말하는 체제 쪽 사람과 만나서 잠시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그렇게 잘난 사람은 아닌데, 체제 쪽에서 보자면 잘난 사람인 이 사람이 말하기를, “참 큰일입니다. 저렇게 미친놈들이 난리를 쳐대니 말입니다. 뭐 정말 병진(원 단어가 ‘등록 불가’ 단어라서 이렇게 고쳤습니다-_-) 같은 짓이죠.”라고 하더군요. 저는 참 싫었습니다. 이건 제군들에게 아부하는 게 아닙니다. 저는 제군들이 미쳤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이렇게 왔습니다. “어쨌든 말이 이곳에서 아직 유효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겠죠.” 시험 삼아 와보자 하는 마음을 갖고 있는 셈입니다.

그런데 그때 저는 정부 당국자의 얼굴을 보고 문득 깨닫게 된 것이 있었습니다. 4월 28일 오전 중에 그들의 눈동자 속에는 전혀 불안이 없었습니다. 그것에 대해서는 저도 대단히 탄복했습니다만, 만약 제가 전학련이었다면 어떻게 느꼈을까요? 저는 모리악이 쓴 <테레즈 데케루>라는 소설을 자주 떠올리곤 합니다. 이 소설에는 남편을 독살하려는 테레즈라는 여자 이야기가 나옵니다. 왜 남편을 독살하려 했는가? 사랑하지 않아서? 확실하게 말할 수는 없습니다. 미워해서? 그것도 확실하지 않습니다. 테레즈는 “왜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남편을 독살하고 싶었다”, 그리고 마지막에 “남편의 눈동자 속에서 불안을 보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나는 ‘이거야말로’라고 생각했습니다. 제군들도 여하튼 일본의 권력 구조, 체제의 눈 속에서 불안을 보고 싶었음에 틀림없습니다. 사실 저도 보고 싶습니다. 여러분과는 다른 방향에서. 저는 안심하면서 살고 있는 사람들이 싫기 때문에, 사실 이곳에서 이런 안전한 상황의 토론회에 참여하는 것은 별로입니다. (웃음)

(......) 여하튼 나는 최근에도 어떤 자민당 정치가로부터 폭력 반대 결의라는 것을 개최하니까 서명해달라는 부탁을 받았습니다. (웃음) 나는 태어나서 한 번도 폭력에 반대해본 적이 없기 때문에 서명할 수 없다고 대답했습니다. (......) 이러한 분위기는 현재 일본 전국에 만연해 있습니다. “이데올로기 같은 건 어때도 좋잖아? 원칙이나 논리 같은 건 어때도 좋잖아? 어쨌든 질서가 중요해, 우리들이 살아가는 이 사회의 당면 질서가 중요해, 그걸 위해 경찰이 있는 거잖아? 경찰은 당면 질서를 유지하기만 하면 되고, 당면 질서가 유지되기만 하면 자민당과 공산당이 손을 잡아도 상관없어”라고 말입니다. 지금 입구에 저를 지칭하는 ‘근대 고릴라’ 그림이 있었는데, 말 그대로 저는 원시적 인간이니까 원칙 없이 그 따위 일이 벌어지면 기분 더럽습니다. 자민당은 더 반동적이었으면 좋겠고 공산당은 더 폭력적이면 좋겠는데, 양쪽 다 주저주저하고 있습니다. (웃음) 이런 점이 나를 가장 짜증나게 합니다.

(......) 오늘 여기 오기 전에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너하고는 접점이 있을 거야’라고 그가 말했습니다. 어떤 식으로 접점이 있냐 하면, 전학련이 사상을 통해서 육체로부터 폭력에 이르기까지를 논리적으로 연결시켜내는 것은 너도 인정하지 않느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당신 말대로’라고 대답했습니다. 그 접점에 대해 너하고 뭔가 이야기할 건더기가 있을 거라고 해서 나는 여기에 온 것입니다.

(......) 지식인의 탄식이란 (말라르메처럼) ‘모든 책을 읽었다’는 곳에서 나와야 합니다. 하지만 일본에는 탄식하지 않는 지식인이 너무나 많습니다. 모든 책을 읽지 않고 겨우 10권, 100권의 책을 읽었다고 안심합니다. 여기에도 안심해버린 눈이 있습니다. 나는 일본인의 안심해버린 눈 속에서 뭔가 불안을 읽어내려 합니다. 테레즈 데케루는 여자지만 남자에게도 그런 마음이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제군들과 나 사이에 어떤 공감이 있을까 하고 이야기하러 왔지만, 나는 결코 제군들의 지지자가 아닙니다. 제군들을 이해하고자 하는 욕망에 불타 여기에 온 것도 아닙니다. 그러므로 서로 상대를 이해하지 않는 것을 전제로 하고 오늘은 이야기로 한판 붙어보고 싶습니다. 서두가 길어졌는데 이 정도로....

(잠시 침묵)
미시마 - 여긴 재떨이가 없나? 담배 피우면 안 되나 보죠?
전공투 A - 아뇨, 바닥에 털면 됩니다.
미시마 - 아, 바닥에, 응......

극과 극이 만나면 어떻게 될지 참 궁금했는데, 물론 그 광경은 치열함으로 가득 차 있었지만, 그러면서도 시종 유쾌하고 우호적인 분위기를 잃지 않더라구요. 그 때문에  ‘나중에 보자. 나중에 봐야 돼. 지금은 안 돼~’ 하면서도 이 책, <미시마 유키오 대 동경대 전공투 1969-2000>을 손에서 놓지 못하고 있습니다.ㅠㅠ ‘세미나’^^로 단련된 전공투 학생들의 말발도 만만찮고 그에 대응하는 미시마 유키오의 말발은 더 만만찮고.^^

저는 원래 미시마 유키오한테 끌렸었는데-_- 이 책 읽다 보니 왜 끌렸는지를 좀 더 분명하게 알 것 같아요. (잘 생겨서... 하하) 그리고 한 가지 새롭게 알게 된 게 전공투 세대가 미시마 유키오를 ‘증오’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그를 미워하지도, 싫어하지도 않습니다. 전적으로 제 느낌이지만, 그리고 아직 책을 다 읽지 않은 상태에서의 소회지만, 토론회 당시에도 전공투 학생들은 미시마 유키오에게 매혹됐었고 미시마 또한 그랬던 것 같습니다. 특히 미시마는 ‘제군들을 이해하고자 하는 욕망에 불타 여기에 온’ 것이 아니라고 강변하지만, 이미 전공투 학생들을 이해하고 있었고 어떤 면에선 그들에게 강한 연민을 느끼고 있었던 게 아닐까.

그건 전공투 학생들도 마찬가지였구요. 그랬기 때문에 그로부터 30년이 흐른 뒤, 이 책의 기획을 위해 당시 전공투 학생들 중 일부가 한 자리에 모였을 때 그들에게서는 은연중에 미시마 유키오를 그리워하는 듯한 모습이 느껴지는 게 아닌지.... 그 중에서도 저질 코미디 쇼 같은 미시마의 죽음을, 다음과 같이 해석한 부분에서는 신선한 충격마저 느꼈습니다.

"30년 전 일본은 자위대의 베트남 파병을 당시 미국 닉슨 대통령으로부터 강력하게 요구받고 있었고, 일본 정부는 굴복 직전이었다. 한국은 이미 파병하고 있었다. 그는 목숨을 던져 저지하려 했던 것이라 여겨진다. ‘격檄’은 그것을 나타내고 있다. 만약 자위대를 파병했더라면 중국이 어떠한 태도로 나왔을까 상상이 된다. 일본은 마오쩌둥의 후방 교란 전술에 직면했을 것이다. 일본이라는 섬 위의 사람과 자연은 평화적일 때 비로소 아름답다. 그는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실제로 미시마 유키오가 저런 생각으로 죽었는지는 알 길이 없죠. 하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 새삼스럽게 든 생각은 성장과정, 아버지와의 관계, 스승이랄 수 있는 가와바타 야스나리와의 동성애 소문과 저 유명한 최후의 순간까지... 미시마 유키오라는 이름 위에 드리워져 있는 그림자들 가운데는 참 평범치 않은 것들이 많다는 것이었습니다.

참고로, 전에 인터넷에서 미시마 유키오 최후의 순간을 묘사한 글을 봤던 게 생각나 뒤져 봤답니다. 그랬더니, 있더군요. 근데 이걸 누가 쓴 건지, 어디에 나오는 건지는 모르겠습니다. 혹시 아시는 분이 계시면 알려주시길.... (헉, 막 불펌!) 아래 글에서 미시마 유키오가 할복한 뒤 그의 목을 치는 사람도 미시마와 동성연인 간이었다는 소문이 돌았었는데요, 그는 혹 마지막 순간에 미시마 유키오의 눈동자 속에서 ‘불안’을 봤는지. 그리고 미시마 유키오는 할복하기 전까지 일본이라는 나라의 눈동자 속에서 한 번도 불안을 보지 못한 건지, 하여 저 길을 갔던 것인지, 문득 궁금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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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시마 유키오는 1967년(소화 42)에 자위대에 체험 입대하여 유격훈련과 같은 강도 높은 훈련을 받았다. 그리고 오랜 기간 치밀하게 계획을 세우고 연습을 한 후에, 그에게 무조건 충성을 맹세한 네 명의 동료들과 함께 [다테노카이 : 방패의 모임]를 정식으로 결성했다.

1970년(소화 45) 11월 25일 미시마 유키오는 그를 따르던 동료들인 [다테노카이]의 회원들과 함께 동경 한복판에 있는 자위대 총감부에 들어가, 총감을 꽁꽁 묶어 인질로 잡고 자위대 병사들에게, 일본 헌법 9조의 개정, 민족정신, 군인의 이상, 시대의 퇴폐 등에 대해서 호소했지만, 자위대 병사들은 무관심과 야유 그리고 놀림의 말로 그의 호소에 반응했다. 그는 일본 자위대 병사들에 대해 실망의 말을 마지막으로 외치고, [천황 폐하 만세]를 삼창한 뒤 총감실로 돌아왔다.

총감실로 돌아온 미시마 유키오는 상의의 단추를 풀어 상반신이 벌거숭이가 된 채 무릎을 꿇고, 몇 번이고 반복하여 연습한 대로 정좌를 앉았다. 그리고 단도를 쥐어 그 칼을 왼쪽 옆구리에 대었다. 그는 마지막으로 [천황 폐하 만세]를 세 번 의식적으로 외치고 크게 숨을 들이마신 뒤 "얏" 하는 큰소리와 함께 단도로 왼쪽 배를 푹 찔렀다. 단도를 쥔 양손으로 배꼽 밑을 밀며 오른쪽 겨드랑이 쪽으로 칼을 밀어 나갔다. 모든 것이 부서져 나가는 듯한 고통을 느끼며 배를 절개해 나가는 순간, 미시마 유키오의 목을 자르기 위해 일본도를 번쩍 쳐들고 있던 모리타가 칼을 힘껏 내리쳤다.

그러나 첫 번째 내려친 칼날은 모리타의 손의 떨림에 의해, 아직 살아 숨쉬며 배가 갈라지고 내장이 터져 고통스러워하는 미시마 유키오의 어깨에 깊은 상처만 냈을 뿐이었다. 모리타가 내려친 두 번째 칼날도 아직 살아 있는 미시마 유키오의 육체에 깊은 상처만 냈을 뿐이었다. 모리타가 내려친 세 번째 칼날이 간신히 미시마 유키오의 목을 몸통에서 떼어놓았다. 미시마 유키오의 잘려진 머리와 몸통의 격렬한 떨림이 멈춘 순간, 이번에는 모리타가 상의를 벗고 정좌하고 앉았다. 피투성이의 단도를 움켜지고 그가 순식간에 배를 가르자, 고가는 한칼에 그의 목을 내려친다. 남은 사람들이 막 잘려진 두 개의 머리를 줍고, 두 개의 몸통 옆에 서서 피비린내 나는 악취 속에서 눈물을 흘리며 죽은 사람들의 명복을 빌며 서 있었던 것이다.

그는 왜 배를 가르며 몸통에서 머리가 잘려 나가는 할복 자살의 방법을 택했을까? 연습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모리타가 내려친 한칼에 매끄럽게 몸이 몸통에서 떨어져 나가지 못했을 때의 미시마 유키오의 고통은 어떠했을까? 미시마 유키오의 할복자살은 일본 국내 뿐만 아니라 전세계에 공포와 놀라움을 불러일으킨 사건으로 받아들여졌다. 어느 평론가는 [현대 일본 작가의 직업적인 고독과 고도로 폐쇄된 개인성을, 미시마 유키오는 집단적인 현실 속에서 극복하려고 했다 ]라고, 또 다른 평론가는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나 명문 대학을 졸업하고 엘리트 코스를 달린 그의 눈에는, 동시대에 허우적거리며 사는 일본인들의 하는 짓이 너무나 시시해 보였기 때문에, 그런 속물들과 웃고 시시덕거리는 것이 무의미해 보였기 때문]이라는 논(論)도 있지만, 미시마 유키오가 생전에 말해 왔던 [일본 사람 이외는 할복 자살을 이해할 수 없다]라고 한 말이 왠지 지금도 항상 가까이에서 메아리치고 있는 듯하다.

아마 후세의 일본 근대문학을 논하는 평론가들은 그의 [의지적인 죽음]에 대해 나름대로 정연한 논리(論理)를 바탕으로 글을 쓰겠지만, 미시마 유키오에 대한 평론이 나오면 나올수록, 그는 일본 근대 문학사에서 더욱 광채를 내며 뚜렷한 한줄기 빛으로 영원히 반짝거릴 것으로 확신한다.
IP : 218.235.xxx.134
30 개의 댓글이 있습니다.
  • 1. 뱁새
    '09.8.17 9:10 AM (203.247.xxx.172)

    네 이웃을 사랑하라, 프라하의 소녀시대 사 놓고 아직 시작 못했는뎅;;;

    난생 처음 들어보는 얘기입니다;;;
    육체의 확장에 솔깃ㅋ했다가 마지막은 ㄷㄷㄷ

  • 2. phua
    '09.8.17 10:13 AM (114.201.xxx.143)

    조금 있음 외출을 해야 해서 우선 댓글부터 쓰고
    돌아 와서 자.. 세.. 히, 그리고 정신을 똑바로 챙기면서
    읽을께용^^~~

  • 3. faye
    '09.8.17 10:21 AM (216.183.xxx.48)

    자결문화에 대해 일본의 봉건성을 논하지 않을 수 없는데요. 동양3국중 가장 봉건화된 나라가 일본입니다. 우리는 일찌기 중앙집권(조선)을 이룩했구요. 일본은 메이지 시대에 가서야 실제적인 중앙집권이 됩니다만, 아직까지 그 봉건적 잔제가 많이 남아있습니다. 봉건문화의 사무라이들이 '죽음이 어쩌고...'하지만, 사무라이들은 계약된 사냥개일 뿐입니다. 죽음의 대의라는게 결국 봉건영주나 봉건영주의 자손을 위한 것인데, 여기에 국가나, 신민(백성)들은 개입의 여지가 없죠. 진정 대의를 아는 사람이 그렇게 자살을 할리 만무하구요...... 수첩공주를 위해 목숨을 바쳐 충성을 다하는 사람을 우리가 존경해야 하는가, 아닌가 생각하면 간단한 문제입니다.
    수많은 국민들의 땀과 피를 먹고, 결국 일본이 지금 요모양 밖에 되지 못한거를 살펴봐야 합니다.

  • 4. 프리댄서
    '09.8.17 10:31 AM (218.235.xxx.134)

    저도 미시마 유키오와 전공투가 만나서 토론을 했다는 건, 어떻게 하다가, 얼마 전에야 알게 됐어요. 그거 알고, 더군다나 그 토론이 책으로 묶여서 나왔다는 걸 알고는 굉장히 놀랐답니다. @.@ 책 표지 사진의 포스도 예사롭지가 않구요. http://www.aladdin.co.kr/shop/wproduct.aspx?isbn=8955592132 그리고 '육체의 확장'은 미시마가 전공투A 학생이 던진 이런 질문에 답하다가 나온 거예요.^^

    전공투A : 미시마 유키오 씨는 문학가, 소설가이면서 왜 그 세계에 머무르지 않고 현실 속의 자기 육체라는 문제를 제기합니까? 현실에서는 주간지 따위에 사진을 게재하거나(미시마 유키오는 누드 사진집도 냈었죠...)영화를 찍고 있습니다만, 그런 짓을 하는 감각의 원점은 도대체 무엇인가를 묻고 싶습니다.

    미시마 : (....) 소설가는 삼라만상과 연관을 가져야만 한다, 다재다능은 아니지만 인간성의 모든 것에 관심이 있을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뭔가를 이해하고 접촉하는 방법이 있지 않을까, 이것이 내가 육체에 의문을 가진 동기입니다. 정신은 육체 밖으로 인간이 나올 수 없다는 사실을 한 번이라도 자각한 일이 있을까, 이것은 내가 항상 생각해온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들은 자기 육체 밖으로 1밀리미터도 나오지 못하니까요. 이런 불합리한 일이 또 있을까? 우리 육체 밖으로 나오는 것은, 하품이라든가 기침이라든가 침이라든가 배설물이라든가, 몸에 필요 없게 된 것뿐입니다. 그리고 나 자신의 존재는 자기 육체의 피부 밖으로 단 1밀리미터라도 자아를 확장할 수 없습니다. 그렇게 꽉 막힌 육체 속에서 정신의 자아만이 무한하게, 이상하게 암세포처럼 증식하여 퍼져갑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말하는 문학가는 육체를 무시한 정신의 증식 작용에 평생을 걸고, 마치 자기가 정신에 의해 세계를 포괄하고 지배하고 있는 듯한 착각에 빠져 있습니다. 도대체 왜일까? 나는 어떻게든 육체의 확장을 꾀하려고 마음먹었습니다. 그렇게 해본 결과, 육체란 어떤 의미에서 정신과 비교하여 아주 보수적이라는 사실, 그리고 정신이란 얼마든지 첨예하고 진보적이 될 수 있는 반며ㄴ 육체란 단련시키면 시킬수록 동물적인 자기 보존 본능에 의해 움직인다는 사실, 이것이 육체에 대한 흥미로운 발견이었습니다. 육체란 그렇게 존재 자체 이외와는 관계를 맺지

  • 5. 프리댄서
    '09.8.17 11:12 AM (218.235.xxx.134)

    앗, 뱁새님께 답글을 쓰는 사이에...^^
    faye님. 음, 그렇군요. 본인들을 위한 죽음이라기보다는 주군을 위한 죽음. 다시 말해 '강요된 수치심'....

    그런데 <미시마 유키오 대 동경대 전공투>가 발간된 이유, 또한 30년이라는 시간이 흐른 뒤에 당시의 전공투세대가 다시 한 자리에 모인 이유는 '전공투가 (이후 일본을 보수화시킴으로써) 일본을 망쳤다'는 주장에 대해 반박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저는 이 책 전에 아랍으로 날아갔던 적군파 두목 시게노부 후사코가 쓴 <사과나무 아래서 너를 낳으려 했다>와 72년에 일어난 연합적군의 동료 린치살해 사건을 다룬 오에 겐자부로의 <하마에게 물리다>를 읽었는데(애가 없으니까 상대적으로 시간이 좀 되잖아요-_-;;;), 그 책들을 읽으면서, 특히 오에 겐자부로의 책을 읽으면서는 전공투 세대의 저 주장에 많이 동감이 됐었습니다. 좌파학생들 중에서도 급진적 성향의 학생들이 68년에 결성했던 전공투, 그보다 더 급진적인 학생들이 무장투쟁으로 나아가야 한다며 69년에 결성한 적군파, 이후 71년에 적군파 내의 두 당파가 연합하여 결성된 연합적군. 이들의 과격한 투쟁이 과연 일본사회를 망친 주범일까, 아니 그에 앞서 일본사회는 정말로 망쳐진 것일까, 설령 망쳐진 게 사실이라 하더라도 일본사회가 그나마 이 정도의 균형을 유지하는 데는 전공투와 적군파의 투쟁에서 비롯되는 어떤 방부제의 효과가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지금도 극우세력의 역사교과서 왜곡에 맞서 싸우고 일본 수상과 관료들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비판하고, 일본이 침략한 국가들에 대한 진정어린 사과와 적합한 보상을 해야 한다고, 그래서 아시아 국가들과 평화롭게 공존해야 한다는 외침을 외치고 있는 사람들은 이제는 늙어버린 전공투 세대와 알게 모르게 그 정신을 계승한 사람들이 아닌가... 그리고 일본이 비교적 안정된 복지시스템을 갖추게 된 것도 저 이상주의적 열망에 불타올랐던 전공투 세대의 노력 덕분이 아니었을까(그들 중 관료로 진출한 사람들이 시스템이 그렇게 되도록 노력했기 때문에...)

    하여 전공투와 적군파의 투쟁에 대해 그간 우리는 너무 보수세력의 해석에만, 그 틀에만 의지해왔던 건 아닌가 하는 의문이 슬쩍 들었답니다. 아, 오에 겐자부로는 처음 읽었는데 좋더만요. 이번 역사교과서 왜곡 때도 '이런 식으로는 새로운 인간을 양성할 수 없다'는 글을 발표하여 극우 쪽의 대안 역사교과서의 문제점을 조목조목 비판했다더군요.^^ 연합적군의 동료 살해 사건은 너무나 처참하고 끔찍한 일이었지만 그것을 딛고 희망을 발견하려고 애쓰는 오에 겐자부로의 시도가 참 감동적이었습니다.^^ 댓글이 좀 횡설수설이 되어 버렸네요.^^

  • 6. 하늘을 날자
    '09.8.17 2:55 PM (121.65.xxx.253)

    오! 재밌겠는데요. <미시마 유키오 대 동경대 전공투>. 말씀하신 대로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절판이더군요. 좀 읽어보려 했건만. ㅠ.ㅠ 에휴...

    댓글을 더 길게 달고 싶은데, 나중에 다시 와서 댓글을 달던가 아니면 새로 글을 쓰던가 해야겠네요. 아웅. 시간이 부족한 이 상황이 안타까워라... ㅠ.ㅠ

  • 7. 항상 감사^^
    '09.8.17 4:39 PM (125.149.xxx.249)

    '그들의 눈에서 불안을 보고 싶었다'
    MB 정권의 소시민인 많은 사람들의 바람이죠.
    하지만 그들의 눈에서 불안을 볼 수 없었다 ㅠ.ㅠ
    슬픈 현실입니다.

    댄서님 덕분에 이름만 알고 있던 일본 작가에 대해 새로운 사실들을 알고 갑니다.
    <프라하의 소녀시대>랑 <네 이웃을 사랑하라> 잘 읽었구요 (전에 부침개글에서 '댄서님~'을 외쳤던 애엄마에요 ㅎㅎ), 전에 추천하셨던 미셸 우엘벡의 <소립자>도 읽고 있어요. 그때 사놓기만 하고 읽진 못했었는데, 신랑이 어느 틈에 다 읽고 극찬을 하더라구요 ㅎㅎ 그래서 읽기 시작했는데, 아직 2부 초반에서 맴돌다 보니 뭐 그닥...^^;;

    한동안 자게 중독이었다가 끊었는데요, 댄서님 글 보러 가끔 들러요^^;; 계속 좋은 자극들 부탁드릴께요~ 글구 혹시나 인터넷 서식지를 옮기게 되심 꼭 알려주세요~^^

  • 8. 프리댄서
    '09.8.17 10:49 PM (218.235.xxx.134)

    이왕 말을 꺼낸 김에 (아아, 예전에 씨네21에서 <홧김에>, <내친 김에>, <이왕 한 김에>라는 에로영화 시리즈가 있다는 기사를 읽은 적 있는데...) 미시마 유키오에 대해 잠깐만.

    우선 미시마 유키오는 고위관료 집안 출신이었어요. 원래는 그럭저럭한 집안인데 아마 할아버지가 ‘출세’하면서 그때부터 집안이 확, 일어났던 모양이에요. 그리고 그 뒤를 이어 미시마의 아버지가 고위직으로 진출하면서 일종의 ‘신흥 명문가’로 자리 잡아간 것 같습니다. 할아버지와 아버지 모두 동경제대 법학부 출신. 덕분에 미시마 유키오는 왕족과 귀족 자제들이 다니는 가쿠슈인(學習院)에서 수학할 수 있었는데 가쿠슈인 초, 중 과정을 거쳐 가쿠슈인 고등과를 수석 졸업했습니다.

    그리고는 “문학 대신 독일법이나 공부해!”라고 ‘강요’하는 아버지의 뜻을 좇아 그 역시 동경제대 법학부에 입학하죠. (저 아버지가 한 말을 예전엔 별 생각없이 넘겼었는데 하늘을 날자님 덕분에 그가 왜 ‘독일법’ 운운했는지를 알게 됐네요^^) 또한 대학 졸업 직후 고등문관시험에 합격해 대장성에 취직했습니다. 그의 집안으로 볼 때 3대째 고위관료가 배출된 것이죠. (지금은 없어진 대장성이라는 조직은 국가 예산의 기획 및 관리, 재정과 금융정책을 총괄하는 울트라슈퍼급 대형기관이었습니다. 그 권한도 아주 막강했죠. ‘성 중의 성’이라 불릴 정도로. 따라서 그곳에서 근무하는 관료들도 ‘관료 중의 관료’로 통했고 그 때문에 엘리트 중의 엘리트가 모일 수밖에 없었답니다.)

    암튼 미시마 유키오 집안은 그렇듯, 겉으로 보면 매우 부유한 명문가였어요. 가족들이 살았던 집도 그 당시 일본에서는 보기 힘든 ‘유럽풍 대저택’이었다고 하네요. (그래서 일반인들이 집 구경을 하러 오곤 했다는군요. ㅎㅎ) 그런 저택에서 거주하는 가족들 또한 유럽의 귀족 같은 교양을 갖추고 있었다고 하구요. (고위관료를 지낸 할아버지뿐만 아니라 평범한 주부였던 할머니도 그 시대에 독일어와 프랑스어를 할 줄 알았다고 합니다)... 그러니 겉으로만 보면 완벽한 귀족 집안 그 자체인 셈이었죠.

    하지만! 그 이면을 들여다볼작시면, 미시마의 할머니는 우아하고 교양있는 부르주아 여성이었지만 신경쇠약을 앓고 있었고 손자에 대한 집착이 심했습니다. 그래서 미시마가 12살 때까지 1층 자기 방에서 손자를 끼고 살았다고 하네요. (미시마의 부모는 2층에서 생활) 마치 ‘손자가 아니라 자기 아들’인 것처럼. 손자를 끼고 살면서 할머니는 어린 미시마에게 사무라이 전설을 비롯한 일본의 전통 설화나 전설들을 숱하게 들려줬답니다. 명민하고 감수성 예민한 손자는 그 이야기들을 스펀지처럼 흡수했구요. (김소월도 그런 경우였죠. 아버지는 미쳐버리고 어머니는 그런 아버지 뒷바라지와 양반집 맏며느리의 역할을 수행하느라 아들을 제대로 돌보지 못하자 숙모가 소월을 측은하게 여겨서 돌봐줬는데, 옛이야기를 아주 실감나게 들려주곤 했었다네요. 어린 소월은 그 이야기를 양식처럼 섭취했고...^^)

    즉, 사무라이 전설이나 ‘일본 고유의 정신’, 현실을 ‘초극’한 어떤 이데아의 세계가 미시마 유키오에게는 아주 익숙한 것이었다는 말이죠. 암튼 그렇게 지내다 13살부터는 부모님의 양육 아래로 들어갔는데, 문제는 또 그의 아버지가 히틀러와 나치즘을 추종하는 파시스트였다는 거였어요. 그래서 아들이 십대 때 글을 쓴다는 걸 알고는 “나약하게 문학은 무슨 문학!”이라고 하면서 그 원고들을 찢어버리기 일쑤였다는군요. 엄마는 그런 아버지한테서 아들을 보호하기에 급급했고.--;

    대학에 들어간 뒤에도 미시마는, 낮에는 법학 강의를 듣고 밤에는 글을 쓰곤 했는데, 글을 쓸 때는 아버지한테 들키지 않도록 엄마가 최선을 다해 감춰줬다고 합니다. 재밌는 건 미시마의 엄마 또한 아들에 대한 집착이 굉장히 심했다는 거예요. 남편이 너무 강한 캐릭터여서일까, 맏아들을 아들이 아니라 마치 연인처럼, 남편처럼 생각했답니다. 미시마가 30대 때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중매로 결혼을 한 뒤에도 아들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지 못해 며느리와 상당히 심각한 심각한 고부갈등을 겪었다고 하는군요. ㅎㅎ

    미시마 유키오라는 필명도 글 쓰는 걸 아버지한테 들키기 않기 위해 사용하기 시작했다고 하네요. 암튼 그렇게 대학생활을 하던 미시마 유키오에게 충격적인 상황이 펼쳐졌습니다. 그가 만 20세이던 해, 일본이 패전한 거죠. 원문보다 서문이 더 뛰어난 책, 장 그르니에의 <섬> 서문에서 카뮈가 그랬었죠. “알제에서 내가 이 책을 처음으로 읽었을 때 나는 스무 살이었다. 내가 이 책에서 받은 충격, 이 책이 내게, 그리고 나의 많은 친구들에게 끼친 영향에 대해서 오직 지드의 <지상의 양식>이 한 세대에 끼친 충격 이외에는 비견할 만한 것이 없을 것이다. (.....) 적어도 생애에 한 번은 저 열광에 찬 복종의 마음을 경험할 수 있다는 것은 아닌 게 아니라 행운이라 할 수 있다. (......) 한 인간이 삶을 살아가는 동안에 얻는 위대한 계시란 매우 드문 것이어서 기껏해야 한두 번일 수 있다. 그러나 그 계시는 행운처럼 삶의 모습을 바꾸어 놓는다. 살려는 열정, 알려는 열정에 복받치는 사람들에게 이 책은 한 페이지 한 페이지를 넘길 때만다 그와 비슷한 계시를 제공하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카뮈가 말한 ‘스무 살에 받은 충격’과는 다르지만, 어쨌든 인생에서 뇌세포 활동이 가장 폭발적으로 일어나고 감수성은 면도날처럼 언제든 가슴에 상처를 낼 준비를 하고 있는 스무 살에 패전이나 5월 광주 같은 ‘사건’들을 체험한다는 건 한 사람의 인생에서 평범한 일은 아닐 겁니다. 더구나 미시마 유키오는 패전 직전에 징집영장을 받았는데 마침 감기 기운이 있는 걸 결핵이라고 뻥쳐서 면제를 받았어요. 그게 나중에 그가 자위대 일일 체험에 응하고, ‘방패의 모임’이라는 사병조직을 결성하는 데 어떤 큰 영향을 미치지 않았을까....

    미시마 유키오는 법학도답게 자위대의 존속이 위헌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어요. 일본이 패전하자 맥아더를 사령관으로 하는 미군정이 들어와 일본의 사회질서를 ‘서양식(미국식) 근대질서’로 재편하여 미국의 손아래 두고, 그를 통해 일본이 공산화되는 걸 막으려 했는데, 그 과정에서 히로히토 왕과 맥아더가 빅딜을 했다는 설이 있습니다. 맥아더가 일본인들의 반발을 잠재우면서 일을 추진하기 위해서는 ‘천황’의 이름을 등에 업는 게 좋았고, 히로히토 왕으로서는 맥아더와 짝짜꿍을 잘하면 전범으로 기소되는 걸 피할 수가 있었죠. 하여 히로히토는 맥아더의 제안을 받아들여 ‘천황은 신이 아니라 인간이다. 이제부터 나는 인간임을 선언한다’고 했고 (그래야 맥아더로서는 연합군 진영에 일본 천황을 전범으로 기소하진 않아도 그 권위에 흠집을 냄으로써 천황제에 모욕을 가했다는 인상을 줄 수가 있으니까...) 일본 영토를 영구히 미군기지로 내주되 일본에서 분쟁이 발생하면 미국이 개입할 책음은 없다는, 일본으로서는 상당히 불평등한 ‘미일안보조약’을 체결하는 데 ‘개입’했습니다. 일본은 육해군의 군대를 일체 보유할 수 없고 국가 간 분쟁이 발생했을 때도 무력을 사용할 수 없다는, '한 마디로 일본에게 군대 안 돼, 전쟁 참여도 안돼’를 골자로 하는 ‘헌법 9조 (그런 까닭에 ‘평화헌법’으로 불림)’도 수용했죠. 그 대가로 히로히토는, 전쟁은 도조 히데키를 비롯한 군부 각료가 벌인 짓이지 나하고는 상관없는 일이다, 는 논리로 전범으로 몰리는 것을 면할 수 있었구요.

    그런데 한국전쟁을 계기로 일본은 재무장의 길에 조심스럽게 발을 들여놓게 됩니다. 다급해진 미국측의 요구도 있었구요. 그래서 탄생한 게 자위대죠. (군대를 보유할 수 없기 때문에 국내의 안전을 지키는 데만 복무한다는 뜻의 ‘자위대’ 명칭을 사용하게 된 것임) 지금도 보면 알겠지만 자위대는 무늬만 ‘자위대’고 실상은 군대입니다. 출범 때도 마찬가지였죠. 미시마 유키오는 그 자신 법학도였던 데다 조부와 부친도 법학도였기 때문에, 즉 사건에 대한 논리적 해석을 중시하는 분위기가 몸에 배어 있었기 때문에 극우로 치달았으면서도 자위대의 존속이 위헌이라는 사실에 눈을 감지 않았습니다. 하여 그는 어떤 주장을 하게 되냐면, 자위대를 존속시키려면 헌법을 개정해야 하는데(9조 평화헌법의 개정) 그건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현재도 평화헌법의 개정을 놓고 일본사회 내 보수와 진보가 충돌하는 실정임. 평화헌법을 지키려는 사람들이 ‘9조 모임’을 만들었는데 오에 겐자부로도 거기에 속해있죠...), 따라서 자위대의 반을 UN군으로 편입시키고 나머지 반을 사병화하자... 그럼 나라에서 운영하는 군대는 없지만 실질적인 군대는 존재하게 되는 것이 아니냐... 그런 뜻에서 그는 자신의 추종자들과 함께 사병조직인 ‘방패의 모임’을 만들었던 겁니다. 그리고 할복할 때 헌법 개정도 요구했어요...

    아, 또 쓸데없이 길어졌네요.--; 어쨌든 대학 졸업 후 미시마는 대장성에 취직했고, 대장성에 취직하고 나서도 낮에는 관료생활, 밤에는 소설쓰기 생활을 병행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쓴 소설이 어느 정도 인정을 받자 미시마는 과감하게(!) 대장성을 사직하고 전업작가의 길로 들어섰죠. 취직한 지 1년도 채 안 되었을 때의 일입니다.

    음... 미시마 유키오가 근대 고릴라로, 극우 광대로 치닫다가 종국에는, 참 황당하기 짝이 없는 방식으로 죽음을 선택한 데에는 저 위에서 기술한 요소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는 어떤 면에선 정말로 이 세상이 시시했을 것도 같아요. 대단한 집안에서 태어나 (물론 어릴 때부터 20대까지 허약한 몸 때문에 고생하기는 했지만) 그 자신 특출한 재능과 머리를 가지고 있었구요, 슈베르트처럼 죽고 나서야 인정받았던 게 아니라 살아생전에, 그것도 이십 대 중반 어린 나이였을 때부터 특출한 재능과 머리를 인정받았죠. 얼마나 따분했을까.... 그가 일본도를 양손에 잡고 ‘합, 합!’ 소리를 내며 공기를 가르고 보디 빌딩으로 점차 늘어가는 근육량을 확인했던 심정의 기원을, 저는 개인적으로 저 따분함에서 찾을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유치하면서도 그 자신에게는 장엄한 이벤트였던 죽음의 의식은 따분함에서 궁극적으로 해방되기 위한, 그렇기 때문에 본질적으는 진지하달 수밖에 없는, 그의 문학적, 정치적 활동의 총화라고 할 수 있겠구요....

    * 앗, '항상 감사^^'님. 제가 오히려 감사하죠. 좋게 봐주셔서...^^;;;;
    잉잉.. <소립자>가 그렇다니까요. 거기에 빨려드는 사람은 엄청 빨려들고 별로인 사람은 정말 별로라고 하고...ㅠㅠ
    그래도 남편 분께서 좋게 읽으셨다니 다행입니다. ㅎㅎ

  • 9. 프리댄서
    '09.8.18 7:28 AM (218.235.xxx.134)

    그러고 보니 미시마 유키오 집안이, 도쿄대 전공투가 ‘자기부정론’을 주창하게 된 훌륭한 근거가 되네요. 일단 도쿄대 전공투의 대학건물 점거 투쟁은 68년 1월에 일어난 의학부 수련의들의 파업에서 출발했습니다. 당시 수련의들은 엄격한 위계질서 속에서 무급으로 일했는데, 그들은 그 부당한 제도의 개혁을 요구하며 파업을 벌였던 것이죠. 의학부의 학부 학생들이 동맹파업을 벌였구요. 그러자 학교는 제도를 개선하기는커녕 (주동자라는 이유로) 학생 12명을 징계합니다.

    그 조치에 도쿄대 학생 전체가 격분을 하며 법학부를 제외한 전 학부가 동맹파업에 들어가죠. 그 과정에서 전공투(전학공투회의 全学共闘会議)가 결성됐고, 학생들은 전공투를 중심으로 하여, 아까몽(赤門)과 더불어 도쿄대의 상징인 야스다 강당을 점거합니다. (미시마 유키오와의 토론회는 저때 열렸음) 그때 도쿄대 전공투 의장이 도쿄대 학생들은 자기부정을 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칩니다. 이른바 전공투의 내용적 상징이랄 수 있는 ‘자기부정론’의 공식적인 표명이었죠. 군국주의 일본을 디자인한 것도 도쿄대 출신이요, 사회의 기득권을 차지한 채 일본사회의 가장 많은 부조리를 창출해내는 것도 도쿄대 출신이라는 사실. (바로 미시아의 할아버지, 아버지가 그랬죠...)

    또한 재학생들도, 학창시절에는 사회의 근본적인 모순에 눈뜨고 그것의 해소에 몸 바치리라 다짐을 하지만 졸업을 하면 별다른 저항없이 기득권층으로 편입되는 현실. 그렇기 때문에 근본적인 변혁 혹은 혁명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도쿄대생들이 먼저 잠재적 기득권자라는 울타리를 깨부수는, 존재론적인 파열을 겪어야 한다는 것. 그리고 (미시마 할아버지와 아버지 같은) 제국의 관료 양성소에 불과한 도쿄대는 해체되어야 한다는 것.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도쿄대 전공투’가 중심적으로 주장한 것이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전공투의 야스다 강당 점거는 기동대가 투입되는 바람에 금세 무위로 끝이 나죠. 그렇다고 전공투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전공투는 68년 7월에 다시 학교 건물들을 점거한 채 ‘도쿄대 해체, 입시 중지’를 요구하며 국가와 온갖 부조리한 사회질서의 미니어처인 학교 당국과 싸웁니다. 자신들이 점거한 ‘공간’ 주변으로는 바리케이드를 둘러침으로써 전공투는 그 공간을 기존의 시간이 요만큼도 개입하지 않는 신생의 공간, 즉 해방구로 만듭니다. 그 해방구는 점점 한 지점, 도쿄대의 상징인 야스다 강당으로 응축되죠. 야스다 강당 점거는 해를 넘깁니다. 그리고 69년 1월 18일, 학교측의 요청으로 도쿄대에 입성한 경찰 기동대가 대대적인 진압작전을 펼치는데, 진압작전은 이틀에 걸쳐 진행돼서 다음날 1월 19일에 완료됐어요. 그때 야스당 강당은 불에 타버리구요....

    1969년에 고3이었던 무라카미 류가 자신의 고3시절을 경쾌하게 더듬어나간 소설 <69 Sixty Nine>에서 그렇게 말한 바가 있습니다. "1969년. 이 해 도쿄대학은 입시를 중지했다. 비틀스는 화이트 앨범, 옐로 서브마린, 아일 비 로드를 발표했고, 롤링스톤스는 최고의 싱글 홍키 통키 우먼을 히트시켰고, 히피라 불리는 머리카락이 긴 사람들이 사랑과 평화를 부르짖고 있었다. 파리에서는 드골이 정권에서 물러났다. 베트남 전쟁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었다. 이때부터 여학생들은 생리대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1969년은 그런 해였다."

    저 소설 속에서 '도쿄 대학은 입시를 중지했다'라는 구절이 등장한 까닭이 바로 전공투의 야스당 강당 점거투쟁 때문에 실제로 도쿄대가 69년 입시를 못 치렀기 때문이죠. 암튼 도쿄대와 니혼대(학내 비리 문제를 계기로 도쿄대와 비슷한 시기에 전공투가 결성됨)에서 출발한 전공투는 이후 일본 내 각 대학으로 퍼져갔는데, 저기서 더 급진적인 성향, 다시 말해 총을 들고 혁명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학생들이 모여 결성한 것이 '적군파'입니다. 69년에 결성된 적군파는 70년에 비행기 요도호를 납치해 북한으로 향하죠. 적군파 내부에는 크게 먼저 일본혁명을 성공시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섹트와 ‘세계동시혁명’을 통해 일본의 혁명을 가져와야 한다고 주장하는 섹트가 존재했습니다. 요도호 납치는 후자에서 감행한 것이었는데, 그들은 세계동시혁명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군사훈련을 할 수 있는 국제적인 근거지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죠. (이른바 ‘국제근거지론’) 하여 그들은 북한이 그 근거지 중 하나가 될 수 있다고 봤던 겁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북한이 요도호를 납치해온 적군파를 그다지 환영하질 않았어요.--; 그래서 눈을 돌린 게 아랍. 그 중에서도 해방전쟁을 수행하고 있는 팔레스타인과 연대해야 한다고 생각하여 시게노부 후사코를 비롯한 19명의 적군파 전사들이 레바논의 베이루트로 날아갔습니다. 당시 팔레스타인인들은 ‘국가’가 없었기 때문에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O)’와 ‘팔레스타인 해방 인민전선(PFLP)’ 등이 모두 레바논에 둥지를 틀고 있었고 팔레스타인 난민들도 레바논에 거주하고 있었기 때문이죠. 시게노부 후사코는 레바논의 한 과수원 사과나무 아래서 동지들과 정말 소중한 피크닉을 할 때, 사과꽃 향기 만발한 그곳에서 동지들에게 임신사실을 알리고 아이를 낳기로 결심했다고 합니다.

    암튼 (어쩌다 이야기가 레바논까지 흘러갔는데-_-;;) 그때 도쿄대 전공투가 주창한 자기부정론은 이후 저 처참한 연합적군의 동료살해로까지 이어집니다. 겨울산에서 경찰에 쫓기는 가운데 매일 저녁 ‘총괄’이라는 이름의 자아비판 의식을 행하던 연합적군 대원들이 자아비판의 결과 혁명전사로서의 마인드, 자질이 부족하다고 판명난 동료를 때려서 죽이고, 내쫓아서 얼려 죽이고, 칼로 찔러서 죽인 사건이었죠. (그렇게 해서 모두 14명의 동료를 살해했음) 죽은 사람 가운데는 임산부도 있었구요. 흔히 그 연합적군 사건을 계기로 일본 사람들이 전공투, 적군파, 학생운동이라면 진저리를 치게 되어 학생운동이 급격하게 몰락하고 일본사회가 빠르게 보수화됐다고 평가됩니다.

    연합적군 사건을 접하게 되면 누구나 ‘미친 시키들’이라는 말을 내뱉게 되죠. 그 실상을 읽는 것만으로도 숨이 턱턱 막혀요. 하지만 그들이 보여준 지독한 자기부정, 그 극단적인 윤리의식 속에는 마냥 혐오할 수만은 없는, 그저 ‘이 미친 변태들!’이라고 일갈해버릴 수만은 없는 어떤 처연함 같은 것이 깃들어 있었습니다. 아주 쉽게는, 어느 영화감독 말마따나, 속세의 어른들에게 ‘학교 졸업만 하면 안전한 출세길이 보장되는 학생들이 그 추운 겨울날, 산을 오르내리며 총을 들어야만 했던 까닭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하는 의문을 가지게 했구요... 또 어떤 이들에게는 묘한 죄의식과 공범의식 등을 심어주기도 했죠. 물론 그보다 더 광범위하게는 환멸을 안겨주었지만.

    오에 겐자부로의 소설 <하마에게 물리다>는 그 연합적군 동료살해 사건 때 살아남은 한 청년의 생존기를, 작가 자신의 경험담과 맞물리면서 그려나간 작품입니다. 그 속에서 오에 겐자부로는 연합적군의 그 미친 짓거리를, 미친 짓거리로만 치부하지 않고 진지하게 그 짓거리가 지니고 있는 의미를 탐색합니다. 거기에는 어떤 처연함이 깃들어 있다고. 또한 동료에게 살해당한 대원들의 죽음이 과연 개죽음인가, 에 대해서도 오에 겐자부로는 조심스럽게 그렇지 않다고 대답합니다. 뭔가 의미가 있다고. 그리고 그 현장에서 살아남은 청년이 우간다 국립공원에서 하마와 만나고 그 하마에게 물리고, 그렇게 성인 남성의 어깨를 물 만큼 튼튼한 생명력으로 움직이면서 물살과 수초들을 헤치는 하마에게서 희망을 발견하게 하죠. (술술 읽히는 작품은 아니었지만...)

    아웅, 자기부정론과 연합적군 사태에 대해 더 떠들어보고 싶지만 그건 다음에, 기회가 되면..-_-;;; (관심 갖는 사람도 없을 것 같고ㅠㅠㅠ) 근데 60년 말부터 70년대에 걸쳐 세계적으로 제일 ‘악명’을 떨친 적군파가 일본, 독일, 이탈리아(붉은여단)에서 출현했다는 사실...

    미시마 유키오에 대한 댓글 쓰고 나서 문득 그의 집안이 자기부정론과 연결된다는 생각에, 일찍 눈도 떠지고 해서 걍 혼자 변태처럼 떠들어봤어요. 오늘도 더울 것 같네요.--;

  • 10. 애엄마
    '09.8.18 8:44 AM (125.149.xxx.9)

    우와....
    정말 댄서님 대단하세요~!!!
    이런 장문의 글들을 일필휘지로 쓰시는 건가요?? (혹시 주변에는 온갖 참고문헌들이?? ㅎㅎ)
    그냥 단편적으로 알고 있던 사실의 배경과 의미 등등 이렇게 엮어 주시니 독자 입장에서 넘 좋을 뿐이에요. (전에 동경대 구경 갔을 때 '음, 여기가 야스다 강당이었군' 하면서 기념 사진 찍고 왔던 제 행태가 유치하게만 느껴지는군요 ㅎㅎ)

    미시마 유키오는 가와바타 야스나리에게 관심을 갖게 되면서 이름이랑 <금각사> 저자, 극우주의자라는 사실만을 알고 있던 작가였는데, 그의 배경을 알게 되어 흥미롭네요. 언제 시간되면 <금각사> 읽어봐야 겠어요. 작품은 작가의 배경과 무관하게 탐미적이고 예술적이라던데...

    그나저나 저 자기부정론에 관심있어요~!! 연합적군 사태에 대해서는 댄서님 글읽고 처음 알았지만, 예전에 학교 다닐 때 자기부정론에 대해서 좀 들어봤어요 (제가 S대 다니는 바람에 저런 얘기하는 선배도 주변에 좀 있고 그랬답니다). 그때도 그 취지는 많이들 공감을 했지만, 결국 졸업하고 나면 대부분 기득권 층에 편입되어 편하게 살아가고 있는 현실...ㅜ.ㅜ

    항상 댄서님이 댓글도 정성스럽게 달아주셔서 그거 확인하러 왔다가 장문의 댓글들 읽고 아침부터 업!돼서 가요~ 글구 아직 저는 소립자에 대해서 이러쿵 평가 안했어요^^;; 초반부 읽고 있어서... 남편이 20세기의 여러 사상과 현상들을 자연스럽게 정리하고 생각해볼 수 있는 소설이라며 끝까지 꼭 읽어보라고 하네요 ㅎㅎ

    (근데 댄서님 혹시 글쓰는 분이세요? 저 원래 넷상에선 댓글도 잘 안달고 그러는데, 완전 작가님 팬이 콩닥콩닥 팬질하는 기분이에요 ㅋㅋ)

  • 11. faye
    '09.8.18 9:49 AM (216.183.xxx.128)

    잘 읽었습니다. 덕분에 적군파의 자세한 내용을 알게된것 같네요. 일왕과 미국과의 밀약은 댓글내용이 거의 맞는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것이 아직까지 일본의 족쇄입니다. 그래서 일본우익들이 신나게 떠들어봐야 별볼일 없는것입니다. 님의 글을 보니, 고종석의 생각과 닮았다는 느낌이 듭니다. (저만 그런가?^^)....... 평화가 중요하긴한데요.
    만약 동북아시아에서 전쟁이 일어나면, 일본에 가장 먼저 핵탄이 떨어질텐데요. 그것을 알고있는 일본 우익들의 마음이 어떨까 한번 상상해보세요. 그럴리는 전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나, 별관심 없는 사람들이 '평화'를 외치는 것을 일본 우익들이 어떻게 바라볼까 하는것도 상상해보면 일본 우익들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이해하지 않을까 합니다. 장문의 본글과 댓글 잘 읽었습니다.

  • 12. 하늘을 날자
    '09.8.18 10:27 AM (121.65.xxx.253)

    헉!!! 이 장문의 댓글들!!! @..@ 장문인데도 쉽게 술술 읽히네요. @..@ 역시 댄서님 너무 대단하세요~~~!!! (2)

    항상 좋은 글 너무나 감사합니다.^^ 원문과 댓글, 특히 댓글 내용에 압도되어서 더이상 뭐라고 댓글을 달 수가 없네용.;;; (입만 쩍 벌리고 있음.)

    아참, 그리고 혹시나 인터넷 서식지를 옮기게 되심 꼭 알려주세요.^^ (2) 꼭 졸졸 뒤따라 다니렵니다~~~;;;

  • 13. 프리댄서
    '09.8.18 10:32 PM (218.235.xxx.134)

    아고, 저도 뭔 정력으로 저렇게 긴 댓글을 썼는지 모르겠네요.--;
    (대단하긴 뭐가 대단하나요. 걍 여기저기서 주워들은 걸 읊은 것뿐인데....-_-;)
    근데 김대중 전 대통령께서 서거하셨군요. 저는 그 소식을 저녁이 다 돼서야 알았다는....ㅠㅠ
    밖에서 볼 일 보면서도 모르고 있었네요. 어떻게 모를 수 있는지.-_-;
    일단 술 한 잔 하고 내일 다시 답글 달겠습니다.

  • 14. 가원
    '09.8.19 2:22 PM (125.128.xxx.1)

    DJ 서거하셨다는 소식에 마음이 너무 울적해서 82 놀러왔다가, 프리댄서님 글 읽고 있습니다.
    노짱때는 아부지 돌아가신 것보다 힘들었고, 어제 DJ서거하셨다는 소식은 할아부지가 떠나신 것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이젠 나도 어른이 되야지, 언제까지 어른들 품에 있을 것인가.
    그 분들 고생 너무나도 많으셨으니 이제 훌훌 떠나셔도 그 분들은 지금 현실에 계신 것보단 훨씬 더 좋으실 거야.
    이렇게 되뇌이고 하는데 가슴이 휑하고, 우울한 것이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가 않네요.

    제 스무 살 되던 7월에 저한테는 친엄마와도 같았던, 친할머니가 세상을 떠나시고, 그 해 9월에는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셨어요.
    그리하여 세상만사 다 싫다고, 대학 때려치고(;) 머리 밀고(;) 속세를 떠난 적이 일년 간 있었답니다;;; (물론 일년 쯤 견디다가 뛰쳐나왔지만요;;)

    암튼, 그리하여, 명상, 참선, 화두, 깨달음 이런 곳 여기저기 기웃거리고,
    관련 책들도 쪼매 읽어 본 결과, 제 중얼거림은........ 물론 천박하고 일천합니다ㅠ_ㅠ

    깨달음은 여러 방편이 있을 수 있는데,
    극단적 자기부정으로 보이는 모든 것들을,
    현실의 모든 거짓된 허상을 죽여 없애서(극단적 부정)으로 세상사 모든 것들을 통찰 할 수 있는 깨달음을 얻을 수도 있을 수도 있다고 하더라구요.
    (그 길이 너무 극단적이고 힘들어서 이루는 사람이 극히 드물다고 들었습니다만;)


    프리댄서님 글 읽다 보니 미시마 유키오. 이 사람이 추구한 바는 무엇이었을지 그의 궁극적 삶의 목표는 무엇이었을지 궁금하기도 하고, 전공투와 대척점의 극한임에도 미움받지 않고 서로가 서로를 설득하고, 설득당하고, 오히려 그를 그리워하는 사람도 있다는 데서, 정녕 극이면 통하는가? 싶기도 하고,... 여러모로 호기심은 납니다만은;
    걍 이렇게 멀리서 소식 듣고 싶지, 가까이 하고 싶진 않네요^^;;
    (미시마 유키오 역시, 살아있다고 해도 저랑 절대 만나 줄리도 없겠지만요..푸핫;)

    (.............일본이라서 그런가 봐요;;; 제게 일본이란 그런 거리낌을 갖게 합니다. 매혹적이고, 대단히 영악하고, 계획적이고, 외교적(?)이고 겉으로 보여지는 잘 꾸민 연극적인 이미지, 랄까요?(뭔 소리다냐;)

    근데, 너무나 협소한 미시적인 시각을 갖고 있어서 자기반성이라던가, 나가 아닌 우리라던가, 모두가 더불어 사는 사회라던가, 쾌락을 추구하는 디테일은 대단히 정교한데, 형이상학적인 철학은 거들 떠 보지도 않는 느낌이예요. 모방은 대단히 뛰어난데 말입니다. 에휴.....말하면 할수록 꼬여서, 제가 쇼비니즘의 신봉자가 되는 기분입니다ㅠㅠㅠㅠ)

    프리댄서님이 말씀하신 전공투 세대에 대해서는 유럽사 공부하면서 프랑스 68혁명과 더불어서 쪼매 배웠어요^^;
    일본에서도 이런 일이 생기다니, 무지 놀랐구요. 일본은 자기들 엄청 자랑하는 것 중 하나가 만세일계 아닙니까..^^

    우리가 생각하면, 폭군이 정치하면 당연히 갈아 엎어야지! 못살겠다! 갈아보자!(푸핫;)
    이게 당연한 건데, 일본은 만세일계, 길고 긴 세월 이어가다 보면, 폭군이 나타나도 할 수 없지. 참아보자. 폭군도 세월 지나면 죽는다.
    내가 먼저 죽으면, 다음 세대는 좀 더 나은 넘(;)이 나타날수도 있겠지. 이러면서 주구장창 기다린답니다(-0-;;;) 그걸 자랑스럽게 생각하구요.
    딴 나라 놈들은 다 오랑캐야(?) 거긴 감히!!! 하늘의 천자를 지들 맘에 안 들면 갈아 없어버린다며? 쯧쯧쯧. 말세야 말세.
    암, 우리 일본의 만세일계의 전통을 과연 아시아의 누가 따를손가. 우리는 아시아가 아니라 유럽의 일원이라니깐.
    만세일계.
    1789 프랑스 대혁명, 시민 혁명, 역사적 의의, 민주주의는 피를 먹고 자란다.
    이런 가치관에서 바라보면 헉. 이 뭥미. 싶기도 한데^^;

    제 일천하고 초딩스러운 관점으로 바라보면, 일본에 나타난 그나마 깨끗한 양심이랄까, 오염되지 않은 지성이,
    전공투가 추구했던 신념과 어느정도는 일치하는 바로 행동하는 양심, 풀뿌리 시민운동이 아닐까 싶어요.
    로베스 피에르가 공포정치로 프랑스 전체를 공포에 떨게 했지만,
    로베스 피에르가 처음 어린 나이에 자신의 목숨을 걸고 지지했던 신념만은 아름답지 않았나..
    이루어지지 않은 신념은 가치가 없는 건가,
    초개처럼 흩어져 버린 이상따위는, 배고픈 소크라테스보단 배부른 돼지가 훨 낫지, 이러면서 비웃을 수 밖에 하찮은 것인가..
    아무리 스스로에게 되물어도 제가 어려서 그런지;;;;
    그런 이루어지지 않아도 추구했던 신념과
    바위에 계란치기라도 불의에 초연히 일어서서 목숨 따위야 나붓이 날리는 절개와 이상 의지 덕분에
    그나마 지금 이 세계가 훨씬 풍요로워 졌다고 답변 할 수 밖에 없습니다.

    미시마 유키오 이야기와 전혀 관련 없는 이 잡설들은 뭔지..ㅠ_ㅠ;;;; (프리댄서님 훌륭한 글에, 이런 헛소리라니... 죄송합니다ㅠㅠ)

    아무튼;; 그 대단한 지성과 권위와, 재능을 갖고 있으면서도 인생을 본인 스스로의 만족만 추구한 바가 아니었나?
    그게 옳다 그르다를 떠나서;;;
    (깨달음을 추구하는 방편에 모든것 싸그리 없애버리는 방편도 있다는 데, 이 비욱한 제가 잘 알지도 못하는 타인의 스스로의 삶의 만족을 추구하는 바에 대해, 가타부타 말이라도 덧붙이는 건건 가당찮죠^^;;;)
    그래도.. 왠지 안타깝습니다. 그 대단한 재능과 지성으로 미약하고 어린 나약한 시대의 아픔들을, 감싸 안을 순 없었던 건지... 일본의 군국주의가 추구하는 궁극점과 그로 인해 파생되는 문제점들을 그가 모를리가 없었겠죠. 그 모순에 도덕적 철학적 기치를 드높일 순 없었던 것인지. 일본의 이익 그 자체를 뛰넘을 수 있는 초월을 보여줄 수 있었다면 정말 존경했을 텐데.. 안타깝다. 싶습니다^^;;;

    요즘, 세상을 사는 방식은 여러가지가 있지만,
    타인에게 감동을 주는 삶이란 얼마나 고귀한 것인가, 자문합니다.

    아무도 모르는 타인이 그가 떠남을 아무런 조건없이 슬퍼하고 가슴 아파하는 것.

    그것만큼 귀중하고 소중한 것은 없는 거구나.

    어차피 사람이 태어나고 죽음을 피할 수 없는데,
    현재, 자신만은 천년만년 영원히 살 것처럼 착각하고 있으나,
    죽어서는 가져갈 그 아무런 것도 없고,
    본인이 살아온 삶 그 자체만을 남기고 가는 것을.



    프리댄서님 멋진 글에 헛소리만 잔뜩 남겨 놓고 갑니다ㅠ_ㅠ;;;;


    DJ 선생님 떠나셨단 말에 왜 이렇게 울컥울컥하는지,
    밀집모자와 지팡이란 만화만 보고도 눈물이 왈칵,
    이희호여사와 권양숙여사님 사진에 눈물이 왈칵.


    그래도 프리댄서님 같은 분들과 같이 마음속에 촛불을 들고,
    늘 같은 자리에 계실 것임을 알기에 그나마 위로를 받습니다....


    프리댄서님 건강하시고, 자주 글 남겨 주세요ㅠㅠ

  • 15. 프리댄서
    '09.8.19 5:13 PM (218.235.xxx.134)

    아, 가원님. 반가워요! 공부는 잘 되시는지요? 모쪼록 열심히 하셔서 좋은 결과 있기 바래요. 승진하면 ‘연봉’이 올라가잖아요.^^;;;

    음.... 근데 스무 살 때 그런 일이 있었군요. 머리까지 ‘미시고’....^^ 가원님 얘기를 들으니 문득 김지하 얘기가 떠오르네요. 김지하 시인이 스무 살 때 땅끝마을을 찾았다고 합니다. 4.19도 실패로 끝이 났고 이유를 알 수 없는 젊은날의 우울도 깊어갔고... 하여 생을 끝내기 위해 해남을 찾았었대요. 하지만 결국 혁명이 실패한 것처럼 자살에도 실패한 채 다시 서울로 돌아왔죠. 그리고는 20여 년 후, 84년에 다시 해남으로 내려갔어요. 80년 출소 후 몸도 아팠고 정신적으로도 힘들어서 요양 차, 가족 모두가. 그때 김지하 시인은 한창 술을 퍼먹어서 ‘아내 입에서 / 알콜중독이란 말이 나왔다 / 시인한다 / 친구 입에서 / 알콜중독이란 말이 나왔다 / 시인한다 / 후배 입에서 / 알콜중독이란 말이 나왔다 / 시인한다...’ 뭐 그런 상황이었는데 해남 내려가서 술을 끊기로 했답니다. 그렇게 술을 입에 대지 않고 지내다가 어느 날,

    ‘두 달을 간신히 넘기고 / 술 끊기 석 달째로 막 접어든 / 아침 산책길 / 찌그러진 구멍가게 유리문에 붙어 / 너덜대는 서투른 먹글씨 하나 / ‘막걸리 팜이다’ // 파계! / 초봄 옅푸른 저 하늘빛에 또 파계!’ (‘그 소, 애린 9’) 했대요.

    언젠가, 뭐 별 일도 아니었겠지만 제가 좀 힘들다고 느꼈을 때였는지, 저 시를 읽다가 핑~ 하고 눈물이 돌았었어요. ㅎㅎ 어쨌든 가원님께서 그때 파계를 하셨으니 이렇게 82에서 뵙게 됐네요?^^; 그리고는 단단하게 여물어간 가원님 모습을 보시며 할머니와 아버님께서 안심하셨고, 흐뭇해하시지 않았을까.... 미셸 우엘벡의 소설 <플랫폼>은 그렇게 시작된답니다. ‘아버지는 일 년 전에 죽었다. 부모의 죽음을 맞아야 비로소 진짜 어른이 된다는 말을 나는 믿지 않는다. 왜냐하면 진짜 어른이 되는 법이란 절대 없으니까.’ 나이 마흔에도 여전히 방황하는 날나리일 뿐인 저 역시 그렇게 생각한답니다. 진짜 어른이 된다는 게 가능할까? 그리고 꼭 어른이 되어야 하는 걸까? 암튼 시험 잘 보셔야 해요!

    (전공투 얘긴 다음 댓글에서 함 이어서 써볼게요....)

  • 16. 프리댄서
    '09.8.19 6:50 PM (218.235.xxx.134)

    저는 전공투가 자기부정론을 주창하게 된 것이 권력에 대한 공포가 그만큼 적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달리 말하자면 그만큼 권력이 덜 폭압적이었달까요? 도쿄대 전공투의 야스다 강당 점검 투쟁은 일본사회를 되게 시끄럽게 만들었는데요, 그들이 그렇게까지 하면서 주장했던 게 고/작 ‘도쿄대 해체, 입시 중지’였죠. 물론 그들은 베트남전 반대, (베트남전에서 알 수 있듯이 제3세계 민중들의 해방염원을 무력으로 짓밟으면서 자신들의 이익만 추구하는) 미일제국주의 타파를 기치로 내세우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때 그들의 주된 슬로건은 분명 대학해체였어요. 정말 우리가 보기엔 한가한 소리라고도 할 수 있는 것이죠.

    그들이 그렇게 ‘한가한’ 주장을 하게 된 것이, 그러니까 우리처럼 권력이 폭압적이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50년대부터 활발하게 전개된 일본 학생운동을 대략적으로 훑어보면, 거기에는 우리와 같은 ‘고문, 의문사, 녹화사업’ 등등이 없습니다. 물론 60년대 ‘미일안보조약 개정 반대투쟁’ 과정에서 도쿄대생 한 명이 경찰의 군화에 짓밟혀 숨진 일도 있기는 있었죠. 하지만 우리처럼 누군가가 쥐도 새도 모르게 끌려가 사라진다든가 고문으로 신체와 정신이 모두 망가지는 경우는 없었죠. 적군파 가족이라고 해서 (사람들이 찾아와 욕을 하고 돌을 던질망정) 권력이 공개적으로 연좌제를 적용하지도 않았습니다.

    (참고로, 보통 ‘안보투쟁’이라고 불리는 미일안보조약 개정 반대투쟁은, 말 그대로 안보조약이 개정되는 걸 반대했다가 이후 국회에 상정되자 국회 비준 저지 투쟁으로 번진 투쟁입니다. 안보조약 개정은 일본에 불평등했던 안보조약의 내용을 상호 평등한 내용으로 개정하자는 것이 핵심이었는데, 일본이 그냥 미군에 기지만 내주는 것이 아니라 대등한 입장에서 공동 방위를 하자는 것이 골자라고 할 수 있었죠. 그런데 그렇게 개정될 경우, 미국이 공격을 받으면 일본도 같이 방어를 해줘야 하는 의무가 발생하게 됩니다. 더구나 당시는 미-소가 대립하던 냉전시대였고 마침 공교롭게도 그 무렵에 미군 정찰기가 소련 영공에서 정찰활동을 하다가 적발되어 격추된 사건이 벌어졌더랬죠. 즉 저대로 안보조약이 개정될 경우, 미국과 소련이 한 판 붙으면 일본은 조약 내용에 따라 미국 편을 들어 전쟁에 참여해야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것은 헌법 9조를 정면으로 위반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일본을 또다시 전쟁의 위험 속으로 빠트릴 가능성이 있는 것이었죠. 1960년대 일본은 우리의 80년대처럼 '학생운동의 시대’라고 할 수 있을 만큼 학생운동이 뜨겁게 터져나온 시기였는데 그 서막이 안보투쟁이었고 피날레가 도쿄대 전공투의 야스다 강당 점거투쟁이었어요. 한 마디로 일본의 60년대는 안보투쟁으로 시작되어 전공투 투쟁으로 끝이 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죠.)

    아마 그래서 전공투의 투쟁이 자기부정이라는 관념의 극단으로 내달렸던 건 아닌가 하는 생각입니다. 그렇다고 일본의 권력이 깨끗한 건 당근 아니었죠. 60년대에 미일안보조약 개정 반대투쟁이 거세게 일어난 데에는, 그것을 추진한 주체가 당시 수상인 키시 노부스케였고, 그 수상이 A급 전범이라는 사실도 크게 작용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는 해도 그들이 전두환처럼 자국민을 총칼로 죽인 적도 없었고 박정희처럼 초법적인 권한을 행사하면서 국민을 억압하고 반대파를 납치, 고문, 암살했던 적도 없었죠. ‘다만’ 군국주의 세력의 잔재들일 뿐.

    내 혈관 속을 흐르는 더러운 피는 부정의 대상이지 타도의 대상으로 상정되지는 못합니다. 혹 그 더러운 피가 폭압적인 모습의 아버지로 나타나면 그 아버지를 타도하기 위해 떨쳐일어서기는 하겠지만, 일본은 그 경우까지는 아니었다는 말이죠. 조선에 물려준 그 무시무시한 고문의 전통은, 군국주의 시절에도 사회주의자와 불령선인(+기타 다른 민족)들만 향했지 평범한 자국민들을 향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전공투는 우리처럼 ‘목숨 걸고’ 정권타도에 나서는 대신 ‘목숨 걸고’ 더러운 피를 부정하는 것에 집중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여기, 다카하시 겐이치로의 소설 <존 레논 대 화성인>이 있습니다. 그 소설은 이렇게 시잡됩니다.

    1970년. 도쿄 구치소에서 유행한 것은 수음이었다.
    유행했다, 유행했다, 나도 했다.
    1971년, 도쿄 구치소에서 유행한 것은 소설쓰기였다.
    유행했다, 유행했다, 누구나 소설쓰기에 열중했다. 물론 나도 그랬다.
    그리고 1972년.
    독방 수감자들 사이에 열병처럼 야구가 퍼지기 시작했다.
    나는 운동우리 안의 가상의 마운드 위에 서서, 언젠가 구원투수로 등판하게 될 때를 대비해 몸 풀기 피칭을 계속했다.
    내 왼쪽 옆에서는 <어깨 쪽으로 들어오는 왼손투수의 변화구>를 못 치는 왼손타자가 가상의 야구배트를 열심히 휘둘렀다.
    “어깨 쪽으로 들어오는 왼손투수의 변화구를 치는 것이 내 평생의 테마야.”

    다카하시 겐이치로는 69학번으로 대학에 입학하자마자 학생운동에 몸을 담았던 사람이에요. 전공투를 거쳐 적군파 쪽에도 잠깐 속해 있었지 않았나 짐작되는데요(전적으로 제 짐작), 그는 격렬했던 학생운동과 또한 그것이 격렬하게 저물어가는 모습을 보면서 극심한 실어증에 시달리기도 했었답니다. 실어증에 시달리면서 (대학생 때부터) 10년 가까이 육체노동에 종사하다 30대 때 소설가로 데뷔한 사람이죠. 우리 식으로 말하면 주로 전공투 세대의 ‘후일담 소설’을 썼구요.. 암튼 저 소설을 읽으면서 80년대 한국에서 학생운동을 하다가 감옥에 간 사람이 저런 소설을 쓸 수가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에 비해 뭔가 철없는 듯한 저 분위기. 물론 그들에게도 상처는 있습니다. <존 레논 대 화성인> 끝에 붙어있는 일본인 평론가가 쓴 발문에 그런 게 나와 있어서, 길지만 함 옮겨 봅니다.-_-

    1970년, 우리는 스무 살이었다. 그리고 당시의 그 또래들이 대부분 그랬듯이 우리는 둘 다 (각기 다른 장소에서였지만) <과격파> 학생이었다. / 우리가 <과격파>로 불린 것은, 우리라는 존재가 위험한 존재였기 때문이 아니다(실제로 <과격파> 운동은 일본의 외교정책에도 경제전략에도 거의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않았다). 우리가 <과격파>로 불린 것은 우리라는 존재가 우리 자신에게 위험했기 때문이다.

    잘 생각해보면 납득이 간다.
    (......) <과격파>인 우리는 <정치활동의 아마추어>였다. (....) 우리는 <혁명>적 정치행동을 실천한다는 것이 아무리 위험한 일이라 할지라도, 그 위험으로부터 어떻게 자신을 지켜야 하는지에 대해 거의 아는 바가 없었으며,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런 상태에서 느닷없이 <현장>에 뛰어든 것이다. // 어떻게 그런 무모한 짓을 할 수 있었을까? 지금도 설명할 수가 없다. (.....) <과격파>의 정치참여는 우리에게는 자신의 정의감이나 윤리성을 검증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우리는 그것을 “당신은 어느 쪽 버튼을 누르겠습니까? ‘사랑과 혁명’이라는 버튼, 아니면 ‘끝이 없는 일상’이라는 버튼?”과 같은 정형적인 질문에 대해, “물론 ‘사랑과 혁명’이지!”라고 ‘정답을 맞춤’으로써 클라이맥스를 맞는 ‘선택의 드라마’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다.

    엄청난 착각이었다.
    우리는 ‘사랑과 혁명 버튼’을 누를 작정이었으나, 자신의 처형 집행허가서에 서명하고 만 것이다. / 왜냐하면 <과격파>의 정치활동이란 대부분의 경우 생면부지의 사람으로부터 폭력을 당해도 아무런 불평도 할 수 없는 입장을 자처하는 것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 우리는 (태평하게) 논리적이고 합리적이며, 윤리적으로 고결한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도 체포당하거나 부상당하거나 테러를 당하거나 할 확률이 낮을 거라고 기대했었다(그 정도는 <역사의 심판능력>을 믿어도 좋은 것이 아닐까, 하고)

    엄청난 착각이었다.
    폭력은 무작위로, 비논리적으로, 무원칙적으로, 우리를 공격했다. (....) 리얼하고 구체적인 폭력의, 그야말로 무구하다고 할 수 있을 정도의 사악함에 우리는 경악하고 말았다. / <과격파>에게 가해진 폭력(그것은 동시에 <과격파>가 행사한 폭력이기도 하다)은 논리적이지도 윤리적이지도 정치적이지도 않았으며, 단지 무구할 정도로 <폭력적>이었다. 내려치는 두랄루민 방패나 쏘아대는 최루탄, 내던지는 화염병, 내리꽂는 쇠파이프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심정이나 사상과는 관계없이 리얼하게 인간의 뼈를 부러뜨리고, 살갗을 태우고, 안구를 찌그러뜨리고, 머리통을 박살냈다.

    동시대의 다른 젊은이들보다 약간 더 성급하고, 사회적 사명감이 약간 더 강했던 젊은이들이 경솔한 선택으로 인해 아무런 준비도 없이 느닷없이 <거의 무구할 정도로 사악한 것>과 얼굴을 마주하게 된 것이다. (....) 그 시기에 나는 친한 친구를 둘 잃었다. 둘 다 <과격파> 동지에게 살해당했다. 무참한 죽음이었다. / 내가 참을 수 없는 것은 그들은 살해당하고 나는 살아남은 것에 대해 어떤 <필연성>을 발견할 수 없다는 데 있다. 그 당시의 나는 살해당한 그들과 비슷한 정도로 성급하고, 사려가 부족했으며, 경계심이 없었다. 그들이 살해당하고, 내가 살해당하지 않은 것은 단지 <우연>에 불과하다. / 나는 한 번도 체포당하지 않았으며, 부상도 입지 않았고, 적대적인 당파로부터 테러도 당하지 않았다. 그것은 내가 판단력이 뛰어났기 때문도 아니며, 신체능력이 훌륭했기 때문도 아니며, 다른 당파 사람들로부터 존경받았기 때문도 아니다. 그저 <우연>일 뿐이다.

    70년 6월에 총리 관저 앞에서 연좌데모를 하고 있을 때, <전원검거> 명령이 내려져 기동대가 학생들의 머리 위에 두랄루민 방패를 내려치기 시작한 적이 있다. 주위에서 비명이 일었지만, 나는 주저앉아 양옆에 있는 학생과 팔짱을 끼고 있어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방패가 내 머리를 치려고 내려오는 순간, 오른쪽 옆에 있던 학생이 몸부림을 치며 갑자기 일어서는 바람에, 그는 내 머리 위로 가해질 예정이던 방패의 일격을 후두부에 받고 기절했다. 그가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나로서는 알 수가 없다. 의식을 잃은 그 학생을 들쳐 메고 구급차에 태운 후에 나는 다메이케 쪽으로 도망쳤다. 부상당한 사람이 내가 아니라 그였던 것은 <악의로 가득 찬 우연>에 불과하다. 하지만 그는 그때 입은 장애를 그 후 평생 짊어진 채 살아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 나는 울적해진다.

    (....) 폭력 자체보다 더욱더 <폭력적>인 것은 폭력이 어떻게 그 대상을 선별하는지 그 기준을 정작 피해를 입은 당사자가 알 수 없다는 점에 있다. / 폭력이 우리에게 상처는 입히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그것은 고작 인간의 신체에 손상을 입힐 뿐이다. 만일 폭력이 합리성에 근거해 행사된다면, 우리는 그것을 예방하고 피할 수 있으며, 필요하면 냉정하게 견뎌낼 수도 있다. / 하지만 <폭력적>인 것은 그렇지가 않다. 그것은 <사악한 것>이다. 거기에는 <합리성>이라곤 전혀 없다. <사악한 것>이 어떤 식으로 행동할지, 우리로서는 사전에 예측도 불가능하며 사후에 합리화도 불가능하다. 그 점이 우리를 무척 혼란스럽게 하는 것이다. / 신체적인 외상은 시간과 함께 치유되지만, <폭력적인 것=사악한 것>이 우리에게 입힌 상처, ‘세상에는 조리(條理)가 있을 거야’라는 소박한 믿음을 배반당했을 때 생긴 흉터는 저절로 치유되지 않는다.....

    다카하시 겐이치로와 같은 학번의 평론가가 쓴 발문인데, 여전히 우리에 비해 뭔가 어린 듯한 저 분위기! (왔다 갔다 하면서 쓰다 보니까 집중하기가 좀 그렇네요. 그래서 일단 여기까지...--; 김대중 전 대통령 관련 기사 중에 아래와 같은 게 있더군요. 전공투의 자기부정론과 관련해서도 뭔가 생각을 하게 만드는 사진입니다.)

    한 평 감옥 안에 있는 사형수 김대중
    http://photo.media.daum.net/photogallery/politics/0908_DJ/view.html?photoid=4...

  • 17. 프리댄서
    '09.8.19 7:05 PM (218.235.xxx.134)

    아, 그리고 faye님. ㅎㅎ 고종석과 닮았다면 저로선 영광이라고 해야 할까요? 어쨌든 좋아하는 사람이라서...^^ 또 말씀하신 대로, 아닌 게 아니라, 일본 헌법에 따라 원칙적으로 군대를 보유하지 못하면 그런 우려가 생길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근데 지금 평화헌법 개정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논란은 '자위대 자체도 없애버리자'... 이런 차원이 아니지 않을까요?^^ 일본 극우세력이 품고 있는 욕망은 군사대국화, 그리하여 자위대 규모도 키우고, 필요하면 국제분쟁에도 팍팍 전투병을 파병하여 국제적으로 일본의 입김을 강화시키는 걸로 보입니다. 또한 북하이 미사일을 쏘아대면 자기네도 미사일을 쏘아댈 수도 있겠죠. 그것이 초래할 결과를 우려하여 일본 내 진보세력들이 평화헌법 개정을 반대하고 있는 듯합니다. 잘은 모르겠지만요.^^;;

    애엄마님. 어떤 내신 9등급 학생이 그렇게 물었다죠? 서울대 가고 싶습니다! 서울대 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그러자 한 현인이 대답하길, 지하철 2호선 타고 서울대입구역에서 내린 다음 3번 출구로 나가서 몇 번 버스를 타거라...^^ 한번 이렇게 웃고요, 이 슬픔은 잘 갈무리해서 필요할 때 불길이 활활 타오르게 하는 연료로 쓸 수 있도록 해야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 18. 하늘을 날자
    '09.8.24 11:01 AM (121.65.xxx.253)

    좋은 댓글들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제가 그동안 학술논문들이 인터넷상으로도 검색된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어요. 워낙 컴맹이라서...;;; http://www.dbpia.co.kr 이라는 사이트에서 학술논문들을 검색해서 구매하면, 볼 수 있더군요. 헐. 이런 걸 왜 이제서야 안건지...ㅠ.ㅠ 아무튼 덕분에 이현조, <구유고 내전에서의 집단살해범죄자에 대한 기소 및 형벌집행 - 구유고 국제형사재판소(ICTY)의 활동을 중심으로 - > <- 이 논문을 구매해서 출력한 후 짬짬이 읽어보고 있습니다. 이현조라는 분의 <현대국제법강의>라는 책도 샀어요. 헐. 부끄러운 얘기지만, 여태까지 국제법은 공부해본 적이 없었어요. 노동법이나 민법 정도나 깔짝깔짝 공부했지 국제법은 왠지... 뭐랄까... 굉장히 세련된 느낌이 난다고 할까... 뭔가 투박한 느낌이 나는 노동법에 비하면... 좀 멀게 느껴져서... 이게 다 제 그릇된 그리고 한심한 편견 탓이죠, 뭐.;;;

    여기에서 구체적인 재판진행현황도 알 수 있다고 하는데, 제가 영어를 잘 못하는 탓에... 이건 뭐... ㅠ.ㅠ 역시 멀게만 느껴지는군요... 에휴... 진짜 이젠 영어공부 열심히 해야할 듯... ㅠ.ㅠ
    http://www.icty.org/action/cases/4

    요즘 남북관계에 계속 관심을 가지다 보니 6. 25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지게 되었어요. 뭐, 당연한 귀결이려나요? 그러다 10년 전쯤에 서울대 법학연구소 주최로 <6. 25의 법적 조명>이란 학술대회를 개최한 사실을 떠올리고 그 때 대회장에서 받았던 자료집을 다시 들춰봤어요. 당시 학술대회에서 한인섭 선생님의 발표를 무척 흥미롭게 들었던 기억이 나네요. 암튼 전시 행정법, 전쟁법에 관한 논문들도 다시 읽어보니 꽤 흥미롭더군요. 요즘 '전쟁법' 내지는 전쟁을 다루는 국제법에도 관심을 가지고 있던 차에, 마침 프리댄서님께서 언급하신 구유고 내전이 다시 떠올라 결국 위 논문을 읽게 되었네요.

    국제법은 정말 문외한이라 떠듬떠듬 읽고 있는데요. 다 읽으면, 위 논문 독후감 써볼게요. 프리댄서님께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네요.^^;; 쫌만 기다려 주세용...;;;

    아, 그리고 대본은요. 프리댄서님 말씀 듣고 '막장'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 보게 되었답니다. 그래서 막장 요소를 넣으려고요.^^ 검사 A가 짝사랑하는 여주인공 말이에요. 그 여주인공은 검사 A보다 여덞 살 (아니면 열두 살) 연상인데, 대학 가정관리학과 졸업 후 바로 결혼해서 애 둘을 키우다 다시 법과대학에 입학하여 사법시험을 준비하게 되고, 합격하는 여자로 설정할까 해요. 비정규직 여성노동자들의 억울한 삶을 외면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그들의 편에 서는 그런 여자. 그렇지만 가정에도 소홀함이 없는 그런 여자. 여러 면에서 시어머니와 남편의 지원을 받은 여자. 뭐, 이쯤되면 벌써 눈치채셨을 수도 있겠지만요. 제가 그리고 싶은 주인공은 바로 '이태영 변호사의 현대적 버젼'입니다. 아무튼, 그런 여자 주인공과 검사 A이니 뭐 처음부터 여러 모로 실패가 예정된 짝사랑이죠, 뭐. 검사 A야 여자 주인공에게 첫눈에 반하게 되고, 그 이후에도 계속 그 여자만을 사랑하게 되지만, 결코 '불륜'에는 이르지 않는. 그런 사랑.

    사실 전부터 존 스튜어트 밀과 테일러 부인의 사랑에 관해서 한 번 글을 써보고 싶다...고 생각했었는데요. 막장이라면 막장일 수도 있고, '미친 사랑'이라면 미친 사랑일 수도 있는 그런 사랑에 관해서 한 번 다뤄보고 싶었어요. 이번에 한 번 써보려고요. ㅋ

    음냐. 이태영 변호사를 모델로 해놓고 이런 '미친 사랑'을 들먹이다니 혹시라도 고인의 명예에 누가 되면 어쩌나 정말 걱정이 되는군요.

    다음에 대본에 관해서, 남북관계에 관해서 더 나불나불 해볼게요.^^;; '슬픔을 잘 갈무리해서 필요할 때 불길이 활활 타오르게 하는 연료로 쓸 수 있도록 해야겠다'는 말씀. 저도 가슴에 새기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19. 프리댄서
    '09.8.25 3:14 AM (218.235.xxx.134)

    전에 말씀하신 국제형사재판소 권오권 재판관이 이번에 대법관 후보로 오르신 분 맞죠? 헐. 살다 보니 대법관 후보로 오른 사람 이름 때문에 신문 기사를 클릭하게 될 줄이야....^^ 더불어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

    음... 구 유고 내전은, 그 진상은 잘 모르지만, 암튼 이런 문제의식을 던져주는 것도 같애요. 제가 <프라하의 소녀시대>를 읽고 나서 보스니아 사태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이 요네하라 마리가 보스니아 사태를 두고 ‘관용이 빚은 참극’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보스니아 무슬림에 대해서는 ‘그 자체로 민족이 돼버리는 상황’이라고 말했기 때문이었답니다. 발칸 사람들에게 종교의 자유를 인정해준 이슬람권의 관용이 오늘날 보스니아 비극을 불러왔다는 역설. 또한 보스니아 무슬림이 그 자체로 하나의 민족으로 규정돼버리는 상황이라는 건 무슨 말인가. 그 자세한 내용이 궁금해서 뭐 자료와 책을 뒤적이다가 하, 어떻게 여기까지...^^;;;

    그러니까 15세기인가에 발칸 반도가 오스만 투르크 제국에 점령당했는데, 당시 점령자인 오스만 제국 사람들은 기독교도인 발칸 주민들에게 강제 개종을 시도하지 않았다고 해요. 상대편의 신앙의 자유를 인정해주는 것, 그게 이슬람 정신인가 그렇답니다. 실제로 코란에도 그렇게 나와 있다고 하네요? (저는 코란을 안 읽어봐서 모르겠지만요...) 그리하여 그때 이슬람교도로 개종한 사람은 일부밖에 없었는데, 그들이 바로 오늘날 ‘푸른 눈에 금발을 한 무슬림 - 보스니아 사람들’인 것이죠. (불가리아 쪽에도 소수의 그런 이슬람교도들이 있다고 하구요)

    다시 말해 이슬람권이 보여준 그 ‘관용’ 덕분에 발칸 주민 대부분이 기독교도(로마 가톨릭+정교회)로 남아 있을 수 있었고, 발칸은 다양한 문화와 종교, 언어가 모자이크를 이루며 ‘공존’하는 지역이 될 수 있었다는 말이죠. 그 상태 그대로 발전했다면 우리가 지향해야 할 ‘오래된 미래’로 기능했을. 보스니아 비극은 바로 그 모자이크가 깨지면서 발생한 거죠. 그 모자이크가 깨지는 순간 ‘슬라브 민족’이라는 이름으로 유고 연방을 구성하고 있던 구성원들이 모자이크 안의 자잘한 조각들로 분화되고, 그렇게 분화된 자잘한 조각들은 ‘별개의 민족’들로, 강제적으로 규정되기 시작한 겁니다. 그래서 보스니아 무슬림이라는 사실이 그 자체로 민족이 돼버리는 현상이 발생한 거죠.

    문제는, 중요한 것은, 그렇다면 모자이크가 깨지지 않도록 하는 것인데 그와 관련해 한편으로는 고종석 같은 주장이 대두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유럽통신>에서 고종석은 코소보 사태 후 발칸지역을 돌아보면서 그런 주장을 하죠. 인류가 종교와 언어 때문에 이토록 서로를 미워하고 참혹하게 죽여야 한다면 그 종교와 언어라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하여 (종교 문제는 하도 복잡한 거니까 당장에 해결할 수는 없으니 우선) 언어를 하나로 통일해버리는 게 낫지 않을까. 인류 전체가 민족어 대신 영어를 사용하는 것으로? 그런가 하면 저 같은 사람은 그 모자이크를 언제든 깨트릴 수 있는 야수의 등장을, 소심하게 경계합니다. 다른 덴 모르겠고 내가 살고 있는 한국에서요. 음... 이 문젠 얘기하다 보면 개신교 얘기도 나오고... 뭐 그러면서 길어질 것 같으므로 걍 넘어가구요.--;

    지금 또 막 생각난 것이, <네 이웃을 사랑하라> 읽고 나서 예전에 에밀 쿠스트리차 감독이 <언더그라운드> 영화 찍고 나서 ‘분리주의자’라는 비난을 받고 은퇴선언까지 했던 것 같은데... 그건 뭐였지? 하는 의문이 생기더라구요. 그래서 인터넷에서 찾아보니 세르비아 출신의 에밀 쿠스트리차 감독이 그 영화를 칸에 출품했다가 프랑스 내 진보적 지식인들로부터 영화를 통해 ‘세르비아가 주도하는 유고 연방의 분리에 찬성하고, 세르비아의 만행을 합리화시키고 있다’는 비판을 받은 거더군요. 그 영화가 나온 게 95년이니까... 와, 세월이 진짜 빠르기도 하지, 벌써 10년도 더 지난 일이네요.ㅠㅠ 그때는 저 비판의 내용을 막연하게만 이해했었는데 흠, 이젠 이러저러한 배경에서 저런 비판이 나왔겠구나, 하는 생각이 드네요. 하하. 근데 그때 에밀 쿠스트리차를 앞장서서 비판했던 사람이 베르나르 앙리 레비예요.^^ <머리 속의 악마>를 쓴. 베르나르 앙리 레비가 서른이 되기 전에 발표해서 프랑스를 들쑤셔놨던 처녀작 <인간의 얼굴을 한 야만> 서문 제목이 ‘나는 곧 서른 살이 된다’인데, 그거 읽으면서 ‘나는 곧 마흔 살이 되는데 어쩌라고?’ 했었다는. ㅎㅎㅎ 저 서문 첫 문장이 그렇게 시작된답니다. “나는 파시즘과 스탈린주의 사이에서 태어난 사생아다.” 베르나르 앙리 레비는 그러한 유산(혹은 업보)가 적군파 같은 테러리스트를 낳았다고 <머리 속의 악마>에서 말하고 있죠.

    아고.. 뭐 두서가 없네요.^^
    흠, 근데 하늘을 날자님 은근히 엉뚱한 면이 있으신 것 같아요.^^ 검사A의 러브스토리가 또 총각과 연상의 유부녀 간의 사랑으로 발전하나요? 아아, 막장 운운은 농담으로 했던 건데.^^; 음.. 최완규라는 드라마 작가가 있는데요(아실 수도...), 그 양반이 처음으로 썼던 미니시리즈 대본이 <종합병원>이었어요. 이재룡, 신은경, 전도연, 김지수 등이 나왔고 저 작품으로 신은경이 (당시 오렌지족을 조금 생산적으로 발전시킨) X세대 표상으로 부각됐었죠. 그때 경향신문이 X세대를 겨냥한 섹션 ‘매거진X’를 발행하면서 신은경을 광고모델로 내세웠던 것도 생각나에요.--; 그리고 주인공 이재룡이 친구 무덤을 찾아가서 김남주 시인의 ‘무덤 앞에서’를 변형한 시를 속으로 암송했던 것도 기억나요. ‘상원아 내가 왔다 남주가 왔다/ 상윤이도 같이 왔다 나와 나란히 두 손 모으고 / 네 앞에 내 무덤 앞에 서 있다 / 왜 이제 왔느냐고? 그래 그렇게 됐다 / 한 십년 나도 너처럼 무덤처럼 캄캄한 곳에 있다 왔다...’ 그때 그거 보다가 막 감동하고 그랬었는데...^^

    암튼 그 분인 그 후 <허준>, <올인>, <주몽> 등을 히트시키면서 최고대우를 받는 드라마작가가 됐습니다. (아예 미국식 그룹작가 시스템을 추구하는 ‘드라마작가 회사(?)’도 차렸다고 하더군요.) 근데 어느 인터뷰에선가 그러더라구요. ‘시청자들은 주인공들의 러브스토리에 대한 기대가 아주 높다, 그런데 난 그 부분이 아주 약하다, 미치겠다 그런 내용만 쓰려고 하면... ’ 하지만 어쨌든 그런 부분도 잘(?) 썼기에 시청자들이 허준과 예진아씨, 이병헌과 송혜교, 주몽과 소서노의 로맨스에 열광하면서 그 드라마들을 더욱 재밌게 봤죠. 고로, TV드라마에서 주인공들의 로맨스는 아주 중요하구요, 그것도 좀 낯간지러운 상황과 대사들이 들어가줘야 하구요 (“내 안에 너 있다”, “아프냐? 나도 아프다”, “사랑은 돌아오는 거야~~”, “애기야, 가자” 등등), 극본을 진행시키면서 그 부분에 대한 확신(?)이 없으실 땐 여기 게시판에다 좀 자문을 구해보시는 건 어떨지. 그럼 드라마대본인 만큼 이렇게 해라, 저런 게 더 나아 보인다... 의견들을 잘 말씀해주실 것 같은데. ㅎㅎㅎ 시놉시스만 보면 괜찮은 것 같으면서도, 아아 정녕 저 검사A의 로맨스는 어디로 어떻게 흘러가려고 저러는 것이냐... 하는 생각도 살짝 드네요.^^;;; 예전에 고현정이 9살 연하의 천정명이랑 <여우야, 뭐 하니?>를 찍긴 했는데, 잠시 그림을 좀 그려보자구요. 현빈=검사A, 이태영 변호사를 모델로 하는 여자 변호사=이영애? 김혜수? 고소영? 고현정? 전도연? 암튼 건투를 빌어요. ㅎㅎ

  • 20. 프리댄서
    '09.8.25 3:29 AM (218.235.xxx.134)

    저 위에서 <홧김에>, <내친 김에>, <이왕 한 김에> 시리즈를 언급했는데요, 어쨌든 내친 김에--;.

    인터넷에서 일본 전공투에 대한 걸 찾다가 와카마츠 코지라는 영화감독을 알게 됐어요. jasmin님 흉내를 내서 ‘한 분이라도’ 관심있는 분이 계실까봐, 링크합니다.

    일본 로망 포르노의 거장 와카마츠 코지의 <가자, 가자 두 번째 처녀>
    내용과 사진이 '쬐끔', 아주 쬐끔

  • 21. 프리댄서
    '09.8.25 3:33 AM (218.235.xxx.134)

    와카마츠 코지 감독이 '로망 포르노' 장르의 영화를 찍은 이유가 당시에 그냥 막 화가 나서, 또 그냥 막 사람들을 죽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네요....

  • 22. 하늘을 날자
    '09.8.25 11:00 AM (121.65.xxx.253)

    아웅, 오시마 나기사 감독에 관한 <씨네 21> 기사를 비롯해서 링크해주신 글들 참 재밌네요. 특히, 블로거 분의 '타인들에게까지 순수한 의식을 강요하는 것이 얼마나 잔인하고 폭력적이고 파시즘적이며, 먹물적이고 엘리트주의적인 것인지'라는 부분은 참으로 마음이 아프군요. (사실, 저는 이렇게 '~적'이 마구 쓰이는 문장이 좀 불편하긴 합니다만.;;;)

    대학 2학년때인가 3학년때인가 그러니까 1998년 아니면 1999년이었을 겁니다. 그 때 제가 '학회교사'라는 걸 했었어요. 참 다시 생각해봐도 쓴 웃음이 나오는데, 왜 그렇게 1년 후배 붙들고 '김대중 정권은 기대할 게 전혀 없다'라고 강변했었는지... 대우차 사태때문이었나... 아무튼 그 때 숱하게 있었던 구조조정 이야기를 하다가 그랬을 겁니다. 정말 아는 게 아무 것도 없었던 주제에 아는 척이라곤 혼자 다 했던 그 시절... 아... 정말 쓰라린 기억이에요. 그 후배는 목포 출신이었어요. 대학 입학 직전 김대중 대통령의 당선을 (전혀 과장 없이) 눈물 펑펑 흘리며 기뻐했던 후배였어요. 그런데, 대학에 들어오자 마자 자신이 너무나 존경했던 김대중 선생님께서 완전 헌신짝 취급되는 모습에 큰 상처를 받았던 후배였어요. 그런 후배의 상처를 이해하고 다독여줄 생각은 못하고 계속 몰아쳤으니... 언젠가 그 후배가 술자리에서 저에게 울면서 "형, 형은 왜 그렇게 세상을 비관적으로만 봐요? 김대중 대통령이 그렇게 못마땅하기만 한가요?"라고 얘기했었어요. 그 때 얼마나 미안하던지...

    그 이후로 그 후배에게 다시 정치 이야기를 하지 못했습니다. 먼저 대화하는 방법부터 찾고 나서 다시 이야기를 해보자는 생각이 들어서요. 다시 만나면 꼭 아는 만큼만 신중하고 차분하게 이야기하자고 생각했었는데... 그러다가 그냥 그 후배와는 멀어져 버렸네요. 지금은 어디서 무얼하고 있는지... 언제나 그 후배를 떠올리면 미안한 마음뿐입니다. 철없던 시절 제 치기가 한 사람을 엉엉 울게 만들기까지 했던 것이 참 후회되네요. 2000년 남북정상회담을 보면서 '그 녀석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해야 되는데...'하는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순정은 강요될 수 없는 것인데... 그 본질상 그럴텐데...

    '관용이 빚은 참극'이라... 참으로 충격적인 말이군요. 그 역설적인 상황이라니... 아... <프라하의 소녀시대>도 사놓긴 했습니다만, 언제 저걸 읽을 수 있을지 영 기약이 없네요... 아웅.

    최완규라는 분은 저도 들어보긴 했어요. 드라마작가 회사를 차리셨다는 뉴스도 얼핏 봤구요. 근데, 그분이 그렇게 러브스토리 쓰는 걸 고통스러워 하셨군요. ㅋㅋㅋ

    혹시 가능하다면, 문소리가 어울릴 것 같아요. 절대 '많이' 예쁘지는 않고, 한편으로는 억척스러운 모습도 있는, '소' 같은, 활화산 같은 그런 여자. 뭐, 결국 '현모양처'라는 말로 집약할 수 있는데, 현모양처라고 하면 불쾌해하는 여자분들이 꽤 많으셔서 좀 주저되긴 하네요. 하지만, '현모양처'라는 말도 여성의 입장에서 적극적으로 해석해낼 수 있는 부분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서동만 교수님께서 '안보' 개념을 진보개혁진영 입장에서 적극적으로 해석해낼 수 있다고 강조하셨듯이.

    글고, 저 불륜 이야기 좋아해요.;;; 사랑의 광기야말로 정말... 뭐랄까... 좋은 거죠. ㅋ 특히, 남자를 미치게 만드는 여자, 그러니까 흔히 '팜므 파탈'이라고 불리는 여자. 그런 여자야말로 정말... 뭐랄까... 흥미로운 여자죠. ㅋ <인간과 초인>을 비롯해서 <피그말리온>, <성녀 조안>, <워렌 부인의 직업> 등 버나드 쇼의 희곡들을 보면 여자주인공이 능동적인 인물로 그려진 경우가 참 많은데요. 저는 <인간과 초인>을 특히 흥미롭게 읽었었어요. 거기 불륜이 나오지는 않지만 여자 주인공 애니가 참 매력적인 인물로 나오지요. 남자 주인공 잭은 애니에게서 끊임없이 도망치고 싶어하지만, 한편으로는 그녀에게 완전히 속박당하길 원하기도 하죠.

    셰익스피어의 <앤토니와 클레오파트라>에서 클레오파트라도 그런 매력적인 인물이죠. (제 생각에는요.) 앤토니는 클레오파트라로부터 끊임없이 도망치고 싶어하지만(그러니 클레오파트라가 아닌 옥테이비어와 재혼하는 것이 아닐까요? 단순히 옥타비아누스의 누이로서 정치적 화합을 위해서 정략결혼을 하는 것이 아니라 광기가 아닌 안정을 바라는 그럼 마음에서요.), 한편으로는 클레오파트라에게 완전히 속박되고 싶어하기도 하고요. (도대체 전쟁터에는 왜 데리고 간답니까? 도움이라곤 전혀 안되고, 오히려 앤토니의 판단력을 흐려놓기만 하는 그 클레오파트라를.)

    셰익스피어도, 버나드 쇼도 여자 주인공을 묘사하면서 한결같이 그려보고 싶어했던 것은 '팜므 파탈'이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그러고 보니 프리댄서님 소개해주신 <살로메>도 참 재밌게 읽었습니다.)

    밀도 그의 자서전에서의 겸손하고 차분한 서술과는 전혀 달리 내면에서는 엄청난 사투를 벌이지 않았을까요? 테일러 부인에 대한 연모의 정 때문에. 1830년 처음 만나 1851년 결혼할 때까지 21년을 한결같은 마음으로 기다릴 정도인 그 미칠듯한 순정. 밀의 그 내면이 정말 궁금해요. 그리고 그와 더불어 밀 같은 거인을 그토록 매혹시킨 테일러 부인의 매력 또한 정말 궁금하고요. 사실은 테일러 부인의 매력이 더 궁금하지요.^^;;

    영문학 전공자도 아닌 터에 셰익스피어, 버나드 쇼, 밀에 관한 제 개똥해석을 밝히자니 참 부끄럽군요. (뭐, 다행히 해석이랄 것도 없는 내용이긴 하지만요.;;;)

    음냐. 많이 길어져 버렸네요. 암튼 조만간 논문 독후감을 올려볼게요. 이제 가을인가 봅니다. 아침 저녁으로 바람이 꽤 선선하네요. 늘 건강 조심하세요.^^

  • 23. 프리댄서
    '09.8.26 12:56 AM (218.235.xxx.134)

    ‘개똥해석’ 잘 들었습니다. 재밌어요. 정말루요.^^ 이러니 더 궁금해지네요. 지금 구상하고 계시는 드라마 극본 속 여 주인공 모습이 어떻게, 어떤 방향으로 튀어갈지. 문소리가 좀 힘들겠어요. 열정으로 똘똘 뭉친, 억척스러운 이태영 변호사에 살짝 팜므 파탈적인 모습도 표현해야 하니. ㅎㅎ 거기에, 아아 합리적 보수주의자인 검사A가 들이대면서 요즘 유행하는 막장 스타일도 창출해내는 건가요? 암튼 재밌게 쓰셔서 국가보안법 같은 무거운(?) 사안이 소재로 등장해도 재밌는 드라마가 탄생할 수 있다는 전례를 남기시고, 획기적인 법정드라마로 우리 드라마사에 한 획도 그으시길...^^

    근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 검사B에는 송강호보다 하정우가 어울릴 듯싶네요. 현빈과 송강호 콤비보다 현빈과 하정우가 그림도 더 보기 좋고 훨씬 더 파트너 같아 보이구요. 또 하정우가 진보주의자면서 애 키우느라 잠도 제대로 못자는, 다소 능글맞기도 한 캐릭터를 잘 소화해낼 것 같아요. 더 막장으로 가자면, 막판에 현빈과 하정우가 함께 일하는 동안 자신들의 진정한 성정체성을 깨닫게 되어 동성 연인으로 발전하는 상황도 생각해볼 수 있겠네요. 문소리가 갈등과 번민 끝에 현빈의 사랑을 받아들이기로 하고 이혼하려고 결심하는 순간, 두구둥~ 현빈의 커밍아웃! (그만큼 흥미롭게 기대한다는 뜻이에요.^^;;;;)

    음.. 전에 김형수 시인을 언급하셨잖아요? 그 분이 고등학교를 제대로 마치셨다고 했던가, 아니면 고등학교 때 (집안사정 때문인지, 기타 사정 때문인지) 방황을 하다가 미처 졸업을 하지 못했던가.... 그런데요, 예전에 읽었던 그 분 글 중에서 아직도 기억나는 게 그 분이 술집 웨이터로 일하던 시절의 일화예요. 시간만 나면 술 상자가 쌓여 있는 창고에서 맥주 상자를 깔고 앉아 책을 읽었는데, 무슨 책이었지? 광주항쟁에 대한 책이었나? 암튼 무슨 책을 읽다가는 그 창고에서 막 울었다 하더라구요. 세상에 대한 기대도 없고 누군가를 사랑하지도 않았던 청춘의 어느 한 시절, 그 암담했던 시간에.^^ 그러다 뒤늦게 광주에 있는 한 대학에 진학해서 공부하셨죠. 그 분이 글에서 한 말 중에 또 생각나는 게 그거네요. 어떤 글을 읽으며 독자가 ‘눈물’을 흘린다면, 작가는 그 글을 쓰는 동안 ‘피눈물’을 흘린다는... 드라마 극본 얘기를 하시니, 뜬금없이 김형수 시인 얘기도 생각나고 그러네요.^^

    그리고 최완규 씨는 얼마 전에 도박 혐의로 붙잡혔다는 뉴스를 들은 것 같은데. 그 뉴스 들으면서 그 양반도 참 사는 게 심심했나 보다. 또 글 쓰면서 생긴 스트레스를 그거 하면서 풀었나 보네? 하는 생각을 했었답니다. ㅋㅋ 소박하면서도 푸릇푸릇한 열정이 빛났던 <종합병원>의 신참 작가에서 짬짬이 도박으로 긴장과 권태를 날리는 성공한 중견이라... 그 분도386세대의 어떤 한 초상을 보여주는 듯....^^ 암튼 거듭 홧팅이구요, 하늘을 날자님네 큰애가 동생 장난감을 뺏지 않는 날이 어서 오기를 바랍니다.^^ 지들도 쪼끄만 것들이 졸지에 언니, 오빠 된 것도 좀 애잔한 구석이 있는 것 같애요.^^

  • 24. 프리댄서
    '09.8.26 1:29 AM (218.235.xxx.134)

    그리고 내친 김에 더, 저 위 댓글에서 한 얘기를 이어가자면, 와카마츠 코지 감독은 시게노부 후사코의 자서전 <사과나무 아래서 너를 낳으려 했다> 때문에 알게 됐습니다. 거기 보면 일본에서 영화감독이 아랍으로 날아와 자신들의 활동상을 찍어갔다는 대목이 나옵니다. 그 영화가 나중에 일본에서 상영됐다는 얘기도 나오구요. 그래서 그 감독이 누구이며, 어떤 영화인가 하는 궁금함이 생겨서 인터넷을 뒤졌더니 와카마츠 코지라는 이름이 잡히더라구요. 1971년에 와카마츠 코지는 동료 감독인 아다치 마사오와 함께 칸 영화제에 참가했다가 귀국하던 중 아랍으로 날아가 시게노부 후사코를 비롯한 일본 적군들을 만났던 거죠. 그리고 그들의 안내를 받아 아랍에서의 일본 적군과 ‘팔레스타인 해방 인민전선(PFLP)’의 활동을 그린 기록영화 <적군 PFLP : 세계 전쟁 선언>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와카마츠 코지 감독에 대한 자료들을 접하면서 새삼 한 번 더 일본의 문화적 저력에 놀래지더군요. 와카마츠 코지의 저런 과격한 핑크영화들과 오시마 나기사의 작품들이 동시에 생산될 수 있었던, 그 저력은 어디서 나왔는지. 그런 생각을 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우리의 상황을 돌아보게 됩니다. 우리는 분단국가니까 어쩔 수 없이 약간의 ‘통제’란 게 필요했겠지...... 그런데 서독으로 가면 꼭 그렇지만도 않았구요. 영화 <바더 마인호프>에 나온 70년대의 서독 감옥을 보면서 저는 정말로 ‘문화적 충격’을 받았는데요, 적군파면 우리의 간첩과 다름없다고 할 수 있을 텐데도 수감된 공간은 널널하고 책과 필기구 등은 충분하게 주어지더라구요. 저 위에서 링크한 DJ 수감사진에도 나와 있듯이 우린 ‘죄수’들 머리를 다 빡빡으로 밀어서 모두 다 쓰레기 잡범처럼 보이게 만드는데 그쪽은 그렇지도 않고. 다른 조직원들은 어디에 숨어 있는지 불라며 고문(!) 같은 것도 안 하고. 아아, 정말 놀랍더라구요. 같은 분단국가인데.

    그러다 보면 독일이 자기들끼리는 전쟁을 하진 않았다는 것, 그래서 ‘다른 편’에 대한 강박적 거부감이 적다는 것, 수령론을 정점으로 하는 주체사상이 일반적인 사회주의 사상보다 전염력이 강할 수 있다는 것, 거기다 주체사상이 항일무장투쟁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것, 하여 친일파 청산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남쪽의 상황과 비교해 더더욱 그것에 정당성과 정통성을 부여할 수 있다는 것 등이 복합적인 요인으로 작용해 우리사회에서 더더욱 사상과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게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답니다. 물론 결정적으로는 독일이나 일본에는 우리와 같은 기형적이고 폭압적인 독재정권이 들어서지 않았죠. 그래서 그런 정권을 탄생하게 된 배경을 또 생각하다 보면 식민지 경험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가게 되구요. 그것이 남긴 유산 혹은 잔재가 참 거시기하구나... 하는, 일견 진부한 생각까지, 와카마치 코지에 대한 자료를 접하며 잠깐 해봤더랬습니다.

    금자씨가 결혼을 했다는 소식을 듣고 또 혼자 주절거려 봤네요. 아웅. 그 뉴스 듣고 깜놀했어요. @.@

  • 25. 하늘을 날자
    '09.8.26 10:48 AM (121.65.xxx.253)

    댓글 잘 읽었습니다. <대장금>도, <친절한 금자씨>도 본 적이 없어서... 이영애에 대해서는 아무런 느낌이 없어요. 물론 많이 예쁜 배우라는 생각이야 하고 있지만...;;; 사실 제가 영화고 드라마고 잘 안봐서...;;; 이미 봤던 것만 보고 또 보고 또 보고 하는 버릇이 좀 있어요. 그래서 <매트릭스>나 <대부>나 <아마데우스> 정도만 계속 보고 또 보고... 모두 최소 20번 이상 봤지요.;;;

    갑자기 모니카 벨루치 생각이 나는군요. 이영애 결혼과는 물론 아무런 상관이 없지만, <라빠르망>을 보고 정말 숨이 멎을 정도로 아름다운 여자가 저기 있구나...라고 생각했었는데, 그녀가 이미 벵상 카셀과 결혼했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 좌절했었지요. 뭐, 모니카 벨루치야 전세계 남자들의 로망이니 그녀의 결혼 소식에 좌절한 게 저 하나 뿐이겠습니까. <말레나>는 별로 재미없을 게 뻔하지만, 그래도 그녀가 나오니 보지 않을 수 없는 그런 영화였던 걸로 기억합니다. 구체적인 내용은 하나도 기억이 안나는군요. 오직 그녀가 담배를 입에 물었을 때 모든 남자들이 주위를 둘러싸고 라이터로 불을 붙여주려고 하던 그 유명한 장면만 기억이 나네요. 모니카 벨루치야말로 '클레오파트라' 역할에 정말 잘 어울리는 여자가 아닐까 생각해요. 정말 팜므 파탈. <카사블랑카>에서 잉그리드 버그만을 처음 봤을 때도 정말 예쁜 여자 배우구나...하는 생각은 들었지만, 숨이 멎을 정도는 아니었는데, <라빠르망>을 봤을 때는 정말... '관능'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알게해 준 여자지요. 음냐. 갑자기 엉뚱하게 모니카 벨루치 이야기만 해버렸네요... 음냐. 모니카 벨루치 찬가라면, 1시간을 쉬지않고 나불나불 댈 수도 있는데... 에고...;;;

    아... 아무튼 이런 댓글을 달려던 건 아니었고요. 감옥에 관해서 이야기가 나와서요. 사형제도에 대한 태도와 교도소 내 재소자의 처우에 대한 태도야말로 문명이냐/야만이냐를 말해주는 리트머스 시험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인섭 선생님께서 주구장창 강조하시는 말씀이죠. 저도 정말 동의합니다. 서독의 감옥도 놀랍지만, 진짜 놀랄만한 감옥은 북유럽의 감옥들이에요. 특히, 스웨덴의 감옥들. 스웨덴의 감옥은 폐쇄형 교도소와 개방형 교도소가 함께 있는데요. 얼마나 재소자가 '갱생'되었는지를 주기적으로 평가해서 폐쇄형 교도소에서 개방형 교도소로 옮겨주는 방식입니다. 개방형 교도소는 정말 '개방형'이에요. 일본의 법학자 한 분이 스웨덴의 교도행정을 연구해보러 와서 개방형 교도소를 둘러보고는 "둘러보신 소감이 어떠십니까?"라는 물음에 "그런데 교도소는 어디 있습니까?"라고 반쯤 농담으로 되물었다는 유명한 일화도 있을 정도니까요.

    일제 식민지 시절에도 교도소 내에 펜과 종이와 책은 상당한 정도로 허용되어 있었던 것 같은데(신채호 선생님의 <조선상고사>, 한용운 선생님의 시들이 다 옥중에서 집필되었었잖아요.), 오히려 해방 후, 특히 6.25를 거치면서 그리고 독재정권을 거치면서 모든 '문명'의 흔적들이 다 없어져 버리고 '야만'만이 남게 된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도 듭니다. 교도행정만 놓고 보면, 차라리 일제 식민지 시절의 교도행정이 해방 후 교도행정보다 더 나은 면도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조차 듭니다. 어쩌면 그것도 일본이 수용한 독일법의 어떤 경향 때문인지도 모르지요.

    김구 선생님께서도 <백범일지>에선가 어디선가 해방이 되면 꼭 덕망있고 학식있는 훌륭한 분들을 제일 먼저 교도관으로 모시고 싶다고 말씀하신 바 있잖아요. 조영래 변호사도 교도행정에 꽤나 관심이 많으셨고요. 조영래 변호사는 당신 스스로가 전학련(민청학련의 전신) 사건으로 이미 1971년 경부터 1년 6개월 정도 옥살이를 하신 바 있으니까요. 김구 선생님이야 뭐, 말할 것도 없고요. 5. 18 세대 국회의원들 상당수도 본인들 스스로 옥살이를 하셨는데, 그래서 감옥이라면 생생히 체험하셨을텐데, 왜 그리 교도행정의 혁신은 더디기만 한지... 본인들은 일반 잡범과는 다른 정치범으로서 옥살이를 한 것이고, 잡범들 생활이야 내 알 바 아니다 라고들 생각하시는 것은 설마 아닐텐데... 국민의 정부, 참여정부를 거치면서도 '개방형 교도소'의 도입 논의가 사회적 의제로 한 번도 설정된 적이 없다는 사실이 참 씁쓸합니다.

  • 26. 하늘을 날자
    '09.8.26 10:53 AM (121.65.xxx.253)

    꽤나 길어서 링크하는 것이 좀 주저되긴 하는데... 한인섭 선생님께서 스웨덴 교도소를 둘러보신 경험을 일기 형식으로 정리해 놓은 글이 있습니다. 혹시 시간 나실 때, 흥미가 있으시면, 읽어보시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월간조선>에 좀더 정리된 르포 기사도 실으셨는데, 그건 찾기가 좀 힘드네요. 제가 <형사정책> 수업 들으면서 수업시간에 받은 자료집에는 있는데, 그게 집 구석 어디에 처박혀 있는지 찾을 수가 없어서... 에고...

    1편
    http://jus.snu.ac.kr/~ishan/bbs/zboard.php?id=board4&page=1&sn1=&divpage=1&ca...

    2편
    http://jus.snu.ac.kr/~ishan/bbs/zboard.php?id=board4&page=1&sn1=&divpage=1&ca...

  • 27. 프리댄서
    '09.8.26 12:15 PM (218.235.xxx.134)

    말씀하신 북유럽의 교도소는 저도 TV에서 본 적이 있어요. EBS였나, MBC였던가... 방송사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내용은 자세히 기억납니다. 그 다큐에선 노르웨이의 개방형 교도소를 보여주더군요. 와, 교도소가 마치 공원 한가운데 자리 잡고 있는 것 같았어요. 여의도공원처럼 인공적으로 다듬어진 공원 말고, 18세기나 19세기 서양소설에 나오는, 혹은 장 자크 루소 같은 사람이 산책했던, 그런 숲 산책로 같은 공원? 늦가을 무렵이었고 바닥에 낙엽이 수북히 쌓여있어서 그런 느낌이 더 강했는지 모르겠지만, 보면서 '와... 저건 감옥이 아니라 무슨 펜션 같잖아!'하고 생각했던 기억이 나네요.^^

    그 와중에 저는 또 저 중에 자작나무도 있겠지? 라는 생각도 잠깐 했구요. 말하자면 진짜 자작나무라고 할까? 음... 이거 또 얘기가 옆길로 새는데, 전 자작나무가 북위 (그러니까 한반도에 38선이 있으니까 그보다 훨씬 위) 한 50도 이상쯤 되는 곳에서만 자라는 줄 알았어요. 저쪽에 툰드라 지대가 펼쳐져 있고 백야가 있고 해는 막 하이라이트에서 곧바로 바다 속으로 직하하면서 져버리는 뭐 그런 곳에서만 크는 줄 알았죠. 중학교 때 톨스토이의 <부활>을 읽었는데, 거기에 남자 주인공 네흘류도프 백작네 집 마당에 자작나무가 있다는 대목이 들어있기도 했었구요... 근데 어떤 블로그에서 주인장이 등산 갔다온 얘길 하면서 자작나물 봤다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멍청하게 댓글로 물어봤답니다. 뭐 검색하다가 우연히 들어간 블로그에다 말이죠. 우리나라에서도 자작나무가 크나요??? 그랬더니 주인장이 아닌 다른 사람이 답을 해줬더라구요. 어머, 그걸 말이라고 하세요? 우리 집 앞 호수공원에도 자작나무가 있다구요...(누가 지한테 물어본 것도 아니구만-_-) 암튼 그랬는데, 마침 그때 제가 또 호수공원과 가까운 동네서 살고 있었거든요. 그래서 담에 호수공원 갔을 때 찾아봤더니, 정말로 있더라는.--; 그래서 아, 백야는 어디로 갔으며 툰드라의 황량하고 쓸쓸한 풍경은 어딨는 것이며 눈보라 휘몰아치는 밤 자작나무 숲길 사이를 달리는 트로이카의 방울소리와 붉은군대 합창단이 부르는 <스텐카라친>은 다 어디로 간 것이냐... 뭐 잠깐 그랬었네요.

    아흠-_-. 암튼 거기서도 폐쇄형 교도소와 개방형 교도소에서의 '갱생율(?)'을 각각 비교해서 보여주었던 것 같아요. 더 놀라웠던 건 그 숲에 있는 교도소 자체만으로도 놀라웠는데 거기서 모범적으로 복역한 사람들은 또 시내에 있는 아파트로 보내더라구요. 사회 적응 훈련 차원에서. 그 아파트가 개방형 교도소의 연장이라는 걸 주민들은 모르는 상태구요. 정말 여러 모로 '깜놀'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건 어쨌든 21세기의 교도소였구요.... 따라서 저는 영화 속에 나왔던 (실제의 교도소를 그대로 재현했다 하더군요) 70년대 서독 교도소가 더 충격이었어요. 적군파 주제에 왜 우리를 분리해서 수감하느냐, 독방 싫다, 같이 있게 해달라, 고 요구하는 모습도 참 할 말을 잃게 만들었습니다.--; (그건 그렇고 한인섭 교수는 외모가 참 구수하시네요.^^ 전에 링크 걸어주셨던 사마리아 여인이 나오는 글에서처럼 따뜻한 분위기도 느껴지고요. 암튼 구수하시네요.^^;;;; 잘 읽어볼게요.)

    모두들 (이미 점심 때지만) 좋은 하루 되세요.

  • 28. 프리댄서
    '09.8.27 6:40 AM (218.235.xxx.134)

    <미시마 유키오 VS 동경대 전공투> 당시의 토론 동영상이 있어서 링크합니다.
    8분이 조금 넘는 동영상이에요.
    그니까 이런 식으로 토론이 이루어졌다, 맛만 보실 수 있는 거죠.

    근데 다운받아서 보는 거고, 다운로드도 클럽박스 아이디가 있어야 가능해요.
    그리고 주소는 똑같아도, 저 두 개 몽땅 다 다운받아야 한국어 자막이 나온답니다.
    하나는 동영상 파일, 하나는 자막 파일이라나?
    또 혹시 '박스에 가입하시겠습니까?'나 그 비슷한 메시지가 나오면 '예'를 누르래요.
    http://down.clubbox.co.kr/maxtor2/joc512 (요건 동영상 파일)
    http://down.clubbox.co.kr/maxtor2/koc512 (요건 한국어 자막 파일)

    근데 클럽박스에서 '미시마 유키오'를 검색하면 이 목록은 안 뜨던데, 잘 될지 모르겠네요.
    혹시 안 되면 클럽박스 내 '고전 명작 영화제 희귀영화 2관'이라는 커뮤니티로 가서 바로 가입하면 목록이 보인대요.
    커뮤니티 주소는 http://clubbox.co.kr/maxtor2

    새 글로 올리려다가, 뭔 뜬금없는 전공투? 하실까봐, 걍 여기에 이어서 올립니다.
    (정말 좀 뜬금없는 주제인 것이 사실이기도 하니까요..^^;;;;)
    관심 있으신 분은 함 보세요....

  • 29. 하늘을 날자
    '09.8.27 10:47 AM (121.65.xxx.253)

    아! 제가 저 위 댓글에 '개방형 교도소의 도입논의가 한 번도 사회적 의제로 설정된 적이 없다'고 말했는데, 성급한 단정인 것 같아서 수정합니다. 댓글을 달고 다시 생각해보니 우리에게도 개방형 교도소가 있긴 있었던 것 같은데... 하는 생각이 들어서 한 번 검색해 봤어요.

    그랬더니 정말 있더군요. 1988년에 천안개방교도소가 문을 열고 담장을 허문 후, 아직까지 국내 유일이긴 하지만 잘 운영되고 있다고 하네요. 과실범이나 (고의범의 경우) 초범 중심으로 운영되고 있는 듯 하여 북유럽처럼 중범죄자라고 하더라도 폐쇄형 교도소에서 점차 개방형 교도소로 옮겨가며 교화하는 방식은 아닌 것 같긴 하지만요. 안양교도소 옆에는 <소망의 집>이란 중간처우시설이 올해 초 생긴 것 같군요.

    '사회적 의제'로 설정되어 치열한 논의가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아무튼 우리나라에도 개방교도소나 중간처우시설이 없진 않다는 점만은 소개해야 할 것 같아서요.

    법무부 교정본부 홈페이지가 제 컴퓨터에서는 잘 접속이 안되네요. 왜 그런 건지... 교정본부 홈페이지의 자료를 링크하고 싶지만, 컴이 말을 잘 안듣는 관계로 법무부 정책 블로그의 글을 하나 링크합니다 안양 <소망의 집> 관련 기사입니다.

    http://blog.daum.net/mojjustice/8703327?srchid=BR1http%3A%2F%2Fblog.daum.net%...

    음냐. 교도소 댓글도 좀 뜬금없긴 한데... 암튼 성급하게 내뱉은 말이 있는 이상 뒷수습은 해야 해서... 에공...;;;

  • 30. 프리댄서
    '09.8.27 4:16 PM (218.235.xxx.134)

    예. AS 고맙습니다.^^
    그런 시도가 이루어지고 있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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