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지나갔는 지 모르게 일주일이 넘는 시간이 지나갔습니다. 그간 고인을 잃은 상실감과 비탄으로 어떤 이성적 판단을 내리기가 어려운 마음이었습니다. 오늘에서야 조금 생각을 추스리게됩니다.
제가 지금 이글을 쓰는 이유는 슬픔을 너머 과연 이 끔찍한 일의 실체가 무엇인가에 관해서, 애도의 마음을 잠시 한켠으로 하고 이곳 아고라에서 토론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생각때문입니다. 고인의 죽음의 객관적 실체를 분명히 하는 그 지점이, 앞으로 시작할 우리의 강력한 행동의 뚜렷하고 커다란 표석이 될 것이기때문입니다.
노무현 대통령이 돌아가실 시점으로 돌아가 봅시다. 어느누구도 노무현대통령님의 서거를 생각하지 못했던 때로 돌아가서 생각해보면 모든일들의 실체가 그꼬리를 보일 것입니다.
1. 냉정히 보면 노무현대통령님은 그렇게 쫓기는 입장이 아니었습니다. 나올 것은 거의 다 나왔고 사과도 했고 정치적인 활동 중단도 선언했고 저들이 야심차게 준비한 최고 메인이벤트인 검찰출두도 끝났던 상황입니다. 검찰조사 후 제시하는 증거가 별거 없다는 자신감도 보이셨고 ,, 그랬습니다. 처음에 들끓던 민심은 오히려 노무현대통령에 대한 동정으로 이어져 여론도 우호적으로 바뀌고 있었습니다. 구속이냐 불구속이냐가 문제였는데 ,,사실 이것은 언론이 궁금해 했을뿐 여론은 이미 무리한 정치보복수사로 판단을 하고 있었기에..노무현 대통령입장에서 어느 쪽의 경우던 전보다 여유가 있는 입장이었습니다. 억울한 일로 맞을 매 다 맞고 이제 하나 하나 따져 볼 일만 남은 경우라고나 할까요.
2.이명박 입장에선 생각지 못한 여론의 움직임에 구속, 불구속 그 어떤 선택도 국면을 전환 시킬 수 없고 법정에서 가려질 경우 아직 사법부를 전부 장악하지 못했고 신영철 문제로 가뜩이나 민감해진 사법부에게 정치적 영향력을 자신할 수 없는 시국이었습니다.
3.북핵문제가 아마 큰 고민이었을 것 같습니다. 이미 북한은 수일 후에 핵실험 일정을 잡았었고 정부는 알고 있는 상황이었죠.(이부분에 문제를 제기하시는 경우가 있는데...미국과 한국의 정보기관들은 일반인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무서울 정도...) 핵실험이후는 여론의 촛점이 당연히 북핵으로 옮겨가고 가뜩이나 너무 길고 무리한 수사로 국민들이 염증을 느끼던 노무현대통령문제는 희석되겠지요. 반대로 노무현대통령이 북핵실험을 알고 있었다면( 그랬을 가능성이 무척 크지요.전임 대통령이지만 그정도의 정보력은 있었을 겁니다) 한층 여유있는 입장이 되겠지요.노무현 대통령님은 명석하신 분이셨습니다.
4. 바로 그즈음에 대전에서는 화물노동자들의 대규모 집회가 있었고 400여명이 연행되는 사건이 생겼습니다. 한분의 희생으로 이후 노동자들의 그어느때보다 강력한 파업과 시위가 예정되어 있었습니다. 한마디로 불이 붙는 정국이었지요. 시민들의 강한 호응도 예상됬었구요. 아마도 노무현대통령님의 서거가 없었다면 서울도심은 지난주 내내 노동자들이 중심이 된 시위 정국이었을 것이고 노무현 대통령문제는 당연 일정하게 희석되었겠죠. 이명박은 사면초가 똥줄 타며 앞이 안보이는 그런정국이었을 테구요..객관적으로 누구에게 유리해집니까..
5. 바로 일주일 후면 6월 국회가 열리고 미디어법을 포함한 이명박 정권이 명운을 걸고 진행하는 여러 사업들의 초석이 되는 여러 입법들이 줄줄이 통과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시기를 놓치면 올해도 사업들을 추진하기가 힘들어 지고 내년엔 지방선거가 있는 때라 만에 하나 선거에 질경우 동력을 다 잃어버리고 그야말로 아무 일도 못하는 식물정권이 될 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09년 6월을 놓치면 먼가 빨리 보여주고 싶어하던 일들을 하나도 못하는 상황이 될 수 있을 가능성이 매우 컸던 상황입니다. 그런데 노무현 수사로 발목을 잡힐 수 있었습니다
6. 검찰의 수사는 현재의 이명박권력측근으로 옮겨가야하는 상황이었고 그시기는 공교롭게도 6월 국회와 맞물리는 아주 골치아픈 상황이었습니다. 그리고 천신일 입에서 혹은 다른 측근의 입에서 어떤 자백이 나오느냐에 따라 굉장히 난처해질 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이부분은 일종의 판도라의 상자인데..현재 많은 이야기들이 있고 ..하지만, 분명한 것은 대선자금과 박연차 로비와 얽혀서 매우 구린 구석이 많은 이명박이라는 겁니다
7.국제정세는 북핵을 중심으로 긴박하게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개성 공단..의 일들은 그 바운더리 속에 있는 사건일 뿐이지요. 이명박 정권은 현재의 남한 정권은 적어도 대북 문제에 있어서 미국과 협의없이 독자적으로 그어떤 결정과 행동도 할 수 없다고 봐야 합니다. 더우기 이명박정권은 미국과 대북문제에 있어서 만큼은
어떤 이견도 없이 100프로 충성하는 정권이라고 봐야겠지요.
8. 미국의 입장에서 북핵은 이미 실체를 갖고 있고, 이에대한 통제력이 급격히 약화 되는 과정에 있었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은 젊은 대통령이었고 (만약 서거하시지않으셨다면 향후 20년은 정치적 활동을 할 수있는 분이셨죠) 현재는 고향에서 계시지만 정세에 따라 언제든지 현실 정치의 중심으로 나설 수 있는 , 특히 대북관계에 있어서 하나의 채널 내지 큰 구심이 될 수 있는 개연성이 아주 큰, 대북관계에 있어서만큼은 저들에게 통제가 어려운 뇌관과 같은 존재라고 인식되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남한 내 소위 386이라 불리는 그들 눈에는 친북세력들로 비치는 사람들과 정치적 동지관계에 있는 분이셨죠. 부시시절 내내 미국의 네오콘들은 이러한 노무현 정권을 늘 불안한 시선으로 보았고 반미집단으로 논평했습니다. 한나라당과 마찬가지로 그들에게도 노무현대통령은 불안한 좌파 친북 정치인이었습니다.
행여나 미래에 남한의 민족주의 세력 내지 자주를 표방하는 세력이 남한 정치의 헤게모니를 잡는 상황은 미국으로선 매우 위기라고 느낄 것입니다. 이미 박정희때 미국은 경험을 한 바있죠. 한반도의 지배력 유지와 대북견제. 이러한 현재와 미래의 전략 속에서 봤을 때 노무현 대통령은 가까운 혹은 조금 먼 미래의 확실한 불안요소였습니다.
9. 홈피에 나를 버려라 라는 글이 그들을 고무 했을 것 같습니다. 권양숙여사님을 재소환 하는일정과 칩거..
제대로된 타이밍이라고 판단할 수 있었을 것 같습니다. 물론 그런 근거가 될 수도 있지만 위에서 열거 했듯이 몇일만 지나면 상황이 새로운 국면으로 진입하고 그혜택을 이명박이 아닌 노무현 대통령깨서 볼 수 있는 객관적 정황이었습니다.분명히.
10. 서거이후 언론들은 북핵정국으로 몰고 가려 했던 모습이 너무나 뚜렷했고 미국정부의 여러 행동과 네오콘언론들의 대대적인 지원이 있었습니다. 상상을 뛰어넘는 대대적인 추모열기만 아니었다면 충분히 적당한 선에서 묻히는 일이었습니다.
11. 아고리언들이 제기했듯 너무나 헛점이 많은 수사발표는 당시 노무현 대통령서거가 매우 급하게 어떤 일정에 쫓긴 것이 아니었나 강한 의심을 갖게 합니다. 꼭 어느 시점을 정해 암살을 해야했던 것이라면 이해가 되는 부분입니다.
12. 노무현 대통령님의 서거가 그들의 직접 암살이 실체라 한다면 이는 이명박 정부차원이 아닌 이러한 이해관계가 얽힌 미국의 공모 내지 묵인이 있어야 가능하다고 봅니다. 박정희도 그렇고 전두환도 그렇고 김대중도 그렇습니다. 짧게 전두환만 언급하자면 87년 당시 그는 계엄령선포를 하려고 했다가 미국의 반대로 결국 호헌철폐를 했습니다. 당시 신문에서까지 계엄령실시를 기정사실화 했으니까요.
어떻게 해서든 덮으려하겠죠.. 아마 적당한 선에서 꼬리를 자르려 할 것입니다.
객관적 정황들을 간략히 정리했습니다. 정리하면서 다시 느꼈지만 기존의 구체적인 의문점들을 차치하고라도 어떤 당시의 상황이 적어도 노무현대통령님이 절망을 느낄 만한 그런 상황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반전을 이루고 시시비비를 가리기에 유리한 정황이었다는 거죠. 여러 아고리언님들의 고견을 제시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공론화 해주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싸움은 적어도 진실과 실체를 규명하는 일부터 시작해야합니다, 슬픔을 걷고 시작합시다
무한펌질 무한첨삭 적극 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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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거에 의뭉이 드는 여러 정황들 (펌)
ㅠ.ㅠ 조회수 : 280
작성일 : 2009-06-03 11:31:09
IP : 203.250.xxx.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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