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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스턴 리갈> : 퐁탕쥬와 케이크 위의 장미꽃 장식1

프리댄서 조회수 : 1,058
작성일 : 2009-04-28 20:23:46
전에도 잠깐 언급한 적이 있는데요, 가제트(gadjet)라는 게 있습니다. 장 보드리야르라는 사람이 <소비의 사회>라는 책에서 아이디어 상품들에 부여한 명칭이죠. 아이디어 상품이라는 것이 그렇습니다. 없어도 돼요. 하지만 있으면 그런 대로 생활의 편리와 재미를 가져다 주곤 합니다. 홈쇼핑 채널을 보다 보면 그런 게 많죠. 현대는 바야흐로 가제트의 전성시대고 저는 그런 것에 많이 끌리는 편입니다.  

다시 말해 가제트는 ‘유용이 끝나는 지점에서 탄생한 물건들’입니다. 그런데 ‘유용이 끝나는 지점’이라는 뜻이 꼭 ‘불필요하다’는 뜻은 아닐 거예요. 오히려 ‘유용’의 범위를 확장시키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혹은 그 ‘유용’을 장식해주는 것? 그렇기 때문에 홈쇼핑 채널과  옥션, 지시장 (오선생^^, 원글, 시월드처럼 여기 와서 처음 들은 말이랍니다. ‘지시장’이라는 말을 처음 들었을 땐 단어장, 일기장, 종합장처럼 선생님의 지시사항을 적는 ‘지시장’이란 게 따로 있는 줄 알았어요. 흐흐 촌년^^) 등을 수놓는 저 신기한 가제트들은 현대 소비사회의 가장자리를 보다 때깔나게 혹은 ‘풍성히’ 꾸며주는 장식물이라고 할 수도 있을 듯합니다.  말하자면 블라우스의 프릴, 케이크 위에 꽂힌 모조 장미꽃, 검은색 긴 생머리에서 문득 눈에 띄는 한 가닥의 분홍색 블리치 등과 비슷하다고도 볼 수 있다는 거죠.

저것들은 ‘기능’만 놓고 보면 없어도 됩니다. 하지만 블라우스의 프릴이나 케이크의 모조 장미꽃 혹은 드레스 자락을 바람처럼 부풀려주는 패티 코트가 없다고 상상하면 어떤가요? 꼭 뭔가가 빠진 것 같지 않나요? 왜냐하면 우리는 이미 그런 것들이 존재하는 단계에 살고 있으니까요. 그리고 그런 것들이 존재하는 단계를 저는 ‘문명’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제가 생각할 때 문명이 발전했다는 건 그만큼 많은 가제트들이 출현했다는 뜻인 것 같습니다.--;

또한 매우 당연하게도 문명의 발전은 경제력과 밀접한 상관이 있습니다. 가제트의 출현을 이끌어내는 건 한 마디로 여유죠, 경제적 여유. 여유가 ‘유용이 끝나는 지점’을 연장시키고 연장시키면서 수많은 가제트들을 출현시키고 그 중 ‘검증된’ 가제트들을 역으로 유용의 범주 속으로 편입시키고 맙니다. 하여 지금 우리는 케이크 위의 모조 장미꽃 장식을 꼭 있어야 할 것으로 여기게 된 것이죠.  

극단적인 예를 하나 들어볼까요? 몇 년 전 한겨레신문에 ‘세계 최장수국과 최단명국’에 대한 기사가 실린 적이 있습니다. 세계 최장수국은 일본, 최단명국은 아프리카의 시에라리온이라고 하는 나라입니다. 기사는 두 나라에서 태어난 여자아기들의 삶을 가상적으로 구성하여 보여줌으로써 세계화시대의 빛과 그늘을 조명하고 있었죠. 당시 일본 여성들의 평균수명은 85세가 조금 넘었고 시에라리온 여성들의 평균수명은 채 36세가 되지 못했습니다. 사사오입하여 전자는 85세, 후자는 36세라고 해보겠습니다.

일본에서 태어난 여자아기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양질의 의료혜택과 영양가 높은 식단을 제공받습니다. 자라면서는 부모들의 보살핌 속에서 역시 질 높은 교육을 받죠. 아이는 교육을 마친 후 전문직(의사, 변호사?^^) 종사자로 안정된 삶을 영위하다가 노년에는 마찬가지로  양질의 의료서비스와 식단 등을 제공하는 실버타운에 들어갑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85세에, 죽는 순간까지 ‘양질’이라는 울타리에 둘러싸인 채 숨을 거두게 됩니다.

그런가 하면 시에라리온에서 태어난 여자아기는 태어날 때부터 부모에게서 물려받은 에이즈에 걸려 있습니다. 아기는 제대로 먹지도 못할뿐더러 그 흔한 예방접종 한 번 받지 못합니다. 그러다 유아 때 죽는 경우가 허다하지만 아기는 운 좋게 살아 남습니다. 하지만 학교는 문턱도 밟아보지 못하죠. 그리고 십대 때 등 떠밀리다시피 결혼해서 아기엄마가 됩니다. 그 아기도 에이즈를 안고 태어나죠. 그렇지만 아이는 섹스를 피할 방법도 없고 피임은 꿈도 꾸지 못합니다. 하여 또 줄줄이 에이즈에 걸린 아기들을 낳습니다. 그 중 일부는 잃기도 하고요. 에이즈에 걸린 채 태어나 빈곤과 기아, 성적 학대 속에서 에이즈에 걸린 아기들을 줄줄이 낳았던 그 여자아이는 그러다 36세에 죽습니다. 이미 일본의 70 먹은 노파처럼 늙은 채로. 육체적으로는 그 70 먹은 노파보다 더 심하게 늙어있는 상태로.

매우 극단적인 사례로 조명된 저 두 나라의 대비는, 그 사례처럼 극단적으로 거칠게 요약하자면 가제트를 많이 가질 수 있는 나라와 가제트라는 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나라의 차이입니다. 뭐가 저런 간극을 불러왔을까요? 문득 드는 생각은 원래 ‘세계사’라는 용어 자체가 (헤겔인가 하는 사람이 처음 사용한 것으로 아는데) 서구의 역사를 중심에 둔 사고의 결과였고요, ‘세계화’라는 용어 역시 서구가 조금 확장된, 가제트들이 많은 출현하는 나라들끼리 더 많은 가제트들을 차지하기 위해 만들어낸 수사가 아닐까 하는 겁니다.

아무튼 진보적인 사고에도 가제트들이 존재합니다. 저는 ‘정치적 올바름’이 그 가제트에 해당되는 것 같습니다.--; 서양 바로크시대에 퐁탕쥬라는 머리 장식이 여자들 사이에 유행했었어요. 우리나라의 ‘가채’쯤에 해당하는 퐁탕쥬는 가짜 머리를 위로 높게 얹는 장식품인데,  가제트의 단순한 팽창을 대표한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정치적 올바름’에도 퐁탕쥬처럼 가제트의 단순한 팽창으로 치부되어 도태된 것도 있고 케이크 위의 장미꽃 장식처럼 좀 과하다 싶지만 필요한 것으로 인정되어 유용의 범주 안으로 편입된 것이 있을 겁니다.  

<보스턴 리갈>은 그걸 보여주는 것 같아요. 진보에서의 퐁탕쥬와 장미꽃 장식. 저는 그 멋진 드라마를 보는 내내 그런 생각이 들었답니다. 근데 쓰다 보니 길어져서 일단은 여기까지...-_- 안무도 짜야 하고...

* 근데 날씨가 왜 이런가요? 어제 소나기 내릴 때는 무슨 지구 종말의 날 같더군요.--;
IP : 218.235.xxx.134
17 개의 댓글이 있습니다.
  • 1. ^^;
    '09.4.28 9:02 PM (119.71.xxx.171)

    무얼 보고 그리 생각하셨을까요?
    진보와 보수의 무게가 너무 판이한 대한민국 사람으로서,
    그 둘을 양 손의 사과처럼 나란히 쳐들고
    마음껏 찬미하고 비판하고 비틀고 할 수 있는 유연한 정치적 자세를
    흠씬 보여주는 보스턴 리갈은 참 별세계처럼 느껴졌네요.
    미국의 민주당은 남부 유지들이 시작한 당인데 어쩌다가
    유럽의 노동당 사회당과 엇비슷한 궤를 가고 있는지.. 역사의 아이러니겠지요.
    그나 저나 뜬금 없이 종영을 해버려서.... ㅜㅜ

  • 2. 현랑켄챠
    '09.4.28 9:10 PM (123.243.xxx.5)

    좋은 비유네요. <보스턴 리갈>에서 나오는 그 남자 주인공의 눈빛이 맘에 들어서
    자막도 안나오는 호주티비에 그 사람 눈빛만 보고 있었네요.
    무슨 내용인지도 모르고...ㅠㅠ...가끔 한국전쟁 얘기도 나왔던 것 같은데....

    어쩌변 변호라는 것이 그 검사, 판사, 변호사 놀음(?)이라는 것 자체가
    '유용이 끝나는 시점'에서 탄생한 것들일 수 있겠네요.
    인간미가 다 사라진 그 끝지점에서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인간미가 사라진 끝 지점에서
    테라스에 나와 시가를 피우는 두 인간의 눈빛은
    그렇군요...
    마치....케익 위의 꽃장식 같았습니다................

  • 3. ㅎㅎ
    '09.4.28 9:27 PM (121.161.xxx.236)

    그간 뜸했더니 프리댄서님을 잊었네요.^^
    최고의 가제트 인터넷에서 뒤적거려 봐야겠어요. 그간 올리신 글들을..^^

    미드 한번 빠지면 헤어나질 못하는데 음..봐야하나??

    댄서님 글들은 언제나 재미있다!!!

  • 4. 프리댄서
    '09.4.28 10:40 PM (218.235.xxx.134)

    저도 보스턴 리갈이 별세계처럼 느껴졌어요. 아, 말하면 뭐할까요?
    위즈라는 드라마에서도 어린 아이의 입을 빌려 '부시는 역대 최악의 대통령'이라는 독설을 퍼붓더니 보스턴 리갈에서는 시도 때도 없이, 그토록 적나라하게.. ㅎ.. 앨런이 데니에게 맥케인을 찍을 거냐고 노골적으로 물어보면서 찍지 말라고 하는 장면에서는 더더욱 할 말을 잃었어요. 페일린도 까면서 맥케인은 노령이라서 임기 중 죽을 수도 있는데 그때 멍청한 페일린이 대통령직을 제대로 할 수 있겠냐고 조롱하는 대목에서도 떡실신!

    따라서 우리한테는 별세계도 그런 별세계가 없는, 그런 부분은 아예 차치하고요, 그냥 앨런 쇼어가 보여주는 진보의 '내용'을 한번 말해보려고 했어요. (다 끝내진 못해지만요...)

    그리고 제임스 스페이더 눈빛, 목소리 정말 죽이죠? 그 목소리 때문에 저 여러 번 정신이 혼미해졌었습니다. (하지만 갑자기 중년의 아저씨로 나타나서 마이 슬펐구만요ㅠㅠ) 누가 감히 우리의 하우스 박사를 누르고 에미상을 가져갔을까나... 했더니 제임스 오빠가 탔다 그러더라구요. 데니는 조연상인가 받았다면서요? 첨엔 데니한테서 느껴지는 백일섭 삘 때문에 좀 괴로웠는데 점차 극복이 됐습니다. 그 페이소스 짙은 얼굴 표정.... 오. 짜증나는 일 생길 때마다 그러려구요. 속으로 '데니 크레인~'

    그리고 미드는 이제 더는 안 볼 생각이에요. 무슨 뽕 같애요. 일단 발을 들여놓으면 정말이지 생활을 피폐하게 만들죠. 자꾸만 뽕을 맞고 싶게 만들어요! 보스턴 리갈 때문에 할 일들 몰아서 하느라 얼마나 애 먹었는데...하우스 박사와 위즈도 시즌2까지만 봤고, 더 안 볼 거예요. 진짜 안 볼 거예요. 위기의 주부들만 남은 거 띄엄띄엄 보고..ㅠㅠ 그치만 'ㅎㅎ'님 보스턴 리갈은 함 봐볼 만해요. 그 뽕만 맞으세요. ㅎㅎ

    마이클 J. 폭스도 오랜만에 봤네요. 근데 C'est la vie라는 말을 남기고 죽어버리더군요.ㅠㅠ

  • 5. 보스턴리갈..
    '09.4.28 11:06 PM (124.3.xxx.161)

    어디서 볼수있을까요? 시즌몇까지 하고 종영했나요?
    올리브티비에서인가 해줄때 정말 재미있게 봤는데
    시즌1만 해주고 마는것 같더군요..아쉬웠는데 저도보고싶어요...

  • 6. 엘런쇼어
    '09.4.28 11:18 PM (118.91.xxx.216)

    시즌 5로 종영했구요.. 정말.. 최고의 드라마 맞지요..^^
    그런 유머스러운, 가볍지 않은, 생각할 꺼리가 있고, 비판이 있는.. 그런 드라마가.....
    또 없군요....

  • 7. ^^;
    '09.4.28 11:57 PM (119.71.xxx.171)

    제임스 스패이더의 호연과 그 식겁하게 좋은 목소리 탓에
    WASP 중심 사고에 대한 비판과 페미니스트로서의 자각을 잊게 하는
    조금 못된 드라마기두 하지요.
    제가 코미디를 좋아해서.. 애지중지했는데 종영 때 무지 슬펐어요.
    코미디가 취향인 분들은 메디컬 코메디 - 하우스MD와
    이공계 코미디 - 빅뱅 씨어리 시즌1 추천드려요.

  • 8. 자유
    '09.4.28 11:59 PM (110.47.xxx.176)

    미국 드라마인가봐요...<보스턴 리갈>이라..
    저는 한국 드라마도 잘 안 챙겨보는 사람인데다, 영어가 워낙 딸리는지라..
    (미드에 한글 자막 뜨나요? 요런 무식한 질문만 ㅎㅎ)
    프리댄서님 글을 읽다보니, 보고 싶다는 생각 들어서요.ㅎㅎ

    원글 내용과는 상관 없이...인용하신 한겨레 기사 잘 읽었습니다.
    서구 중심의 세계화란 양극화 양상으로 진행될 수밖에 없겠지요.
    아까 자게에서 읽었던 글 중, 시급 3,800원을 받는 노동자들의 슬픈 연대
    제겐...이 기사와, 그 글이 겹쳐서 읽히네요.
    일본/시에라리온이 아닌, 한국에서 태어난 여아들끼리도
    얼마나 상이한 환경에서 자라는가...
    82를 보면 생각이 많아져요. 맥주량도 늘고...
    82자게도 끊고, 맥주도 끊어야 할텐데...--::
    이리 재미 있는 글이 올라오니, 끊기도 어렵고 말입니다.^^::

  • 9. 슬픈 연대
    '09.4.29 12:37 AM (203.229.xxx.234)

    저도 이 시리즈 다 봤습니다.
    광우병 이야기도 잊을만하면 나오죠?
    데니 크레인~~~ 중독성이 큽니다.
    앨런의 장광설도 듣다가 조는 경우가 가끔 있지만..

  • 10. 프리댄서
    '09.4.29 7:16 AM (218.235.xxx.134)

    일단 굿모닝 인사 드리고요, 예정보다 일찍 눈이 떠져버리니까 좀 허무하네요.--;

    미드를 가장 손쉽게 보는 방법은 판도라TV를 이용하는 거예요. 회원가입 할 필요 없고, 다운로드 같은 번거로운 절차도 거칠 필요가 없답니다. 한글 자막, 당근 있죠. ㅎㅎ 미드 보는 사람들이 다 쏼라쏼라를 알아들을 거라 생각하지 마세요.^^ 자유님, 보스턴 리갈은 정말 볼 만해요. 근데 그거 다 보려면 시간이 엄~~~청 많이 든다는 거~!

    저 한겨레 기사 읽고 나서 시에라리온이 대체 어떤 나라인가 찾아봤었어요. 저는 그런 나라가 있는 줄도 몰랐거든요. 그랬더니 '시에라리온의 별'이라 불리는, 세계에서 3번째로 큰 다이아몬드가 생산되는 나라라고 하더군요. 그 다이아몬드 채굴권을 놓고 정부와 반군이 격한 내전을 벌였고, 그 때문에 민중들이 대량 학살되는 킬링필드가 연출됐다고 합니다. 자세한 건 모르고 대충 그렇다는데, 솔직히 더 알고 싶지도 않아요.--; 그냥 짜증난달까요? 그렇게 생산된 '시에라리온의 별'이 누구의 손으로 들어가든, 유럽의 왕족 또는 헐리웃 스타? 아니면 포르투갈의 국민 총생산과 맞먹는 소득을 올린다는 빌 게이츠? 혹은 중동 석유재벌의 세 번째 아내? 혹은 그 나라에 무기를 팔아먹는 업자의 정부? 아무튼 그 누구의 손에 들어가든 간에 그냥 좀..... 짜증이....납니다.

    아, 데니 크레인~ 한번 외치고 하루를 시작해야겠네요.

  • 11. phua
    '09.4.29 9:38 AM (218.237.xxx.119)

    ""누가 감히 우리의 하우스 박사를 누르고 에미상을 가져갔을까나""
    이 대목에 무한동감이요.
    그런 방송도 제한없이 만들 수 있는 것을 보면
    미쿡이 아직도 괜찮은 나라인 것이 맞긴 맞는 것 같아요.

  • 12. phua
    '09.4.29 9:39 AM (218.237.xxx.119)

    아~~~ 더분에 많이 유식해졌다는 인사를 빼 먹었어요.
    캄~~솨~~~~

  • 13. 프리댄서
    '09.4.29 5:20 PM (218.235.xxx.134)

    제가 오히려 푸아님께 늘 감사한 마음입니다.
    궂은 일 다 맡아서 하시고... 저번에 쑥떡 만드실 때도 수고 많으셨죠?^^
    푸아님께서도 하우스 박사를 좋아하시나 봐요. 아, 반가워라.
    비록 시즌2까지밖에 안 봤지만 하우스 박사, 진짜 매력 덩어리입니다. ㅎㅎ
    홈즈를 하우스로, 왓슨을 윌슨으로, 헤시시를 비코딘으로 바꿔서 그런 드라마를 만들 수 있는
    재치, 환경 등이 살짝 샘 나는 드라마이기도 했구요.^^

    푸아님을 필두로 한 82의 언니들에게서 제가 더 많은 걸 배워요.^^

  • 14. 하늘을 날자
    '09.4.30 10:02 AM (121.65.xxx.253)

    뒤늦게 답글을 답니다.

    저는 보리를 너무너무 재밌게 봤어요... 아직도 앨런과 데니의 발코니가 너무나 그리운... ㅠ.ㅠ

    <보스턴 리갈> 시리즈의 모든 에피소드에서 가장 강조되는 미덕은 (제 생각에는) '관용과 자비'인 것 같습니다. 시즌 4의 에피소드 17편을 보면, 앨런이 미연방대법원에서 레너드 세라라는 아이큐 70의 흑인 강간범에게 사형을 선고해서는 안된다고 변호하면서 그런 이야기를 하지요. 미연방대법원의 뒷편에는 '자비에 의해서 완화되는 정의'를 형상화한 훌륭한 조각상이 있는데, 자신은 늘 그 조각상을 볼 때마다 감탄한다고. 그리고 이 법정에서도 바로 그런 자비가 넘치기를 바란다고. '자비에 의해서 완화되는 정의'라...

    셰익스피어의 <베니스의 상인>을 무척 재밌게 읽었었습니다. 거기서 포셔가 재판관 행세를 하면서 샤일록에게 안토니오의 살점을 꼭 떼어내야 하겠냐고 되풀이해 물으면서 샤일록에게 자비를 베풀라고 말하지요. 샤일록이 왜 내가 나를 무시했던 안토니오에게 자비를 베풀기를 강요받아야 하느냐고 말하면서 포셔의 제안을 거절하자, 포셔가 자비에 관해서 말하지요. '자비란 강요되는 것이 아니며, 자비를 베푸는 자와 받는 자 모두에게 이중의 축복을 내리는 것입니다. 자비로 정의를 완화할 때 세상의 권력이 하늘의 권세에 다가설 수 있는 것입니다.' 정확하게는 기억이 나질 않는데, 대충 위와 같은 이야기를 했던 것 같습니다. 제가 정말 좋아하는 문구였는데, 정확하게는 기억이 안나네요... ㅠ.ㅠ 물론 샤일록은 자비를 베풀기를 거절함으로써 오히려 더 곤경에 빠지게 되는데요. 결말이야 어떻든 자비에 관한 포셔의 대사는 정말 정말 인상적이었습니다. 바로 그 '자비에 의해서 완화된 정의'라는 표현을 다시 보리에서 보게 되니 너무 반갑더라구요.

    근대 국가란 도대체 뭔가, 그 이전의 국가나 정치 공동체와는 좀 다르긴 한 것 같은데, 도대체 뭐가 다른 거냐...라는 물음에 베버는 -<직업으로서의 정치>에서- 이렇게 대답했지요. (매우 거칠게 제가 이해한 대로 표현하자면) 자기 영토 내에서 물리적 강제력을 유일하게 향유하는 조직이 바로 근대 국가라고. 근대 국가가 성립된 후에는 국가 이외의 다른 조직에서는 물리적 강제력을 (적어도 공식적으로는) 행사할 수 없게 되었으니까요. 가령, 근대 국가에서는 학교에서의 체벌도 (공식적으로는) 금지되며, 가정이나 마을 내에서의 체벌 역시 (공식적으로는) 금지되게 되었고, 오로지 적법절차에 의해서만이 한 사람에게 강제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되었잖아요.

    이렇게 근대 국가가 성립하면서부터 오랜 논쟁이 있었던 것이 바로 사형제 존폐 논쟁이죠. 물리적 강제력의 독점적 향유자가 국가인 건 인정하겠는데, 과연 그 강제력 행사에 한계는 없는거냐... 한 사람을 죽일 수까지 있는 것이냐... 국가라는 게 과연 그럴 수도 있는 것이냐... 자연히 이런 의문이 생기니까요. 300년은 족히 된 이 오래된 논쟁-아직도 계속 되고 있지만-이야말로 근대 국가가 향유하는 권력의 본질과 그 정당성과 관련해서 굉장히-어쩌면 가장(!!!)- 중요한 논쟁인 것 같아요. 사형제에 대한 태도야말로 교도소 내의 재소자에 대한 처우와 더불어 한 나라가 얼마나 '야만'에서 벗어났으며, '문명사회'에 가까워졌는가를 드러내 주는 척도-일종의 '리트머스 시험지'-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보리에서는 사형제와 관련된 에피소드가 여러 번 등장합니다. 미국드라마의 어떤 '수준'-내지는 '품격'-을 보여주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미국이라는 나라의 어떤 '수준'도 보여준다고 생각하구요. 솔직히 무척 부럽더라고요. 정말로.

    단순히 사형제와 관련된 에피소드가 등장할 뿐만 아니라 '자비에 의해서 완화된 정의'라는 표현까지 등장하니... 참 보리를 좋아할 수 밖에요.

    '관용과 자비'야말로 프리댄서님 말씀대로 '케이크 위의 장미꽃 장식'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야만'과는 다른, 문명사회에서는 너무나 당연하게 있어야 하는 바로 그런 것. 우리는 아직 그런 '장미꽃 장식'을 가지지 못하고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같은 맥락에서 양창수 교수님의 대법관 취임사를 이해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흔히 '보수'로 아주 거칠게 분류되기도 하는, 민법학의 대가이신) 양창수 교수님께서 대법관직을 시작하시면서 취임사에서 '인사청문회에서 본인에게 진보냐 보수냐를 묻는 질문을 많이 받았는데, 우리 사회는 진보냐 보수냐가 아니라 문명이냐 야만이냐로 봐야 한다고 생각하며, 우리에겐 아직 야만의 단계를 벗어나지 못한 부분이 많다'는 취지의 언급을 하셨습니다. 그 말씀을 듣고 저는 깊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음냐. 쓰다보니 무척 길어졌네요.;;;

    아아... 2편이 기다려지네용... 빨리 써주세요~~~~~~~~~~

  • 15. 프리댄서
    '09.4.30 9:44 PM (218.235.xxx.134)

    음... 이 ‘사려 깊은 명석함’! 혹은 부드러운, 따뜻한 명석함이라고 할 수 있으려나요? 어떻게, 아기들은 잘 잡니까?^^

    <파이트>에서 ‘정글에서의 대결’을 그린 노먼 메일러의 솜씨가 아주 일품이었습니다. 캬... 그 인간, 소름 끼치는 구석이 있더군요. <사자와 나자>를 비롯해 노먼 메일러 작품을 다 찾아 읽어보리라 마음먹었답니다. 육아로 힘든 젊은 아빠, 하늘을 날자님을 위해 메일러표 스페셜 서비스 들어갑니다. 드디어 경기가 시작됐어요.

    ....두 선수는 링 중앙으로 와 주의사항을 들었다. 서로 상대방에게 두려움을 선사하는 시간이다. 리스턴은 알리를 만나기 전까지는 모든 상대방 선수들로부터 두려움을 자아냈다. 하지만 스물두 살의 캐시어스 클레이(알리의 본명)는 오히려 강단 있게 리스턴과 맞서 쏘아보았다. 포먼은 차례로 프레이저와 노턴을 눈빛으로 제압해 왔다. 무거운 관 뚜겅을 덮는 듯한, 가혹하고 죽음처럼 무거운 표정이었다.
    그런 포먼에게 알리는 말했다. (나중에 모든 사람이 알게 된 이야기다.) “어렸을 때부터 내 얘기를 들었겠지. 어린아이였을 때부터 나를 보고 자랐을 거야. 이제 나, 네 영웅을 맞이하게나!” 기자들은 당시 알리가 하는 말을 듣지 못했다. 하지만 알리는 입을 움직였고 30센티미터 떨어진 곳에서 포먼과 얼굴을 맞댄 채 눈을 부라리는 중이었다. 포먼은 눈을 끔벅였는데, 생각했던 것보다는 약간 더 놀란 표정이었다. 그는 알리의 글러브를 건드리면서 대꾸하듯 말했다. “그건 당신 혼자 있을 때 얘기고. 이젠 나를 상대해야지.”

    그리고 알리가 1라운드에서 ‘번개처럼 오른손 스트레이트를 뻗어 어리둥절한 상태인 포먼의 머리 정 중앙을 향해 찌르듯 날렸다. 힘이 엄청나게 실린 주먹이 명중했다. 탄성이 울렸다. 포먼이 맞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지난 몇 년 동안 이렇게 강하게 포먼을 때린 상대는 없었고 연습경기 상대 역시 감히 그러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에 대한 메일러의 코멘트.

    ....챔피언은 다른 챔피언을 오른손을 앞세워 공격하지 않는다. 그것도 첫 라운드라면 더욱 그렇다. 그런 동작은 가장 어렵고도 위험하다. 그렇게 주먹을 뻗기도 어렵거니와 자신이 위험해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거의 모든 자세에서 오른손은 왼손보다 목표까지 최소한 한 걸음 정도 거리가 멀다. 권투선수들은 일 인치아 반 인치를 두고 승부를 겨룬다. 조금 더 먼 오른손이 목표까지 날아가는 데 추가로 걸리는 시간 동안 상대방이 가진 경보장치가 울리고 상대 선수는 반격을 시작한다. 상대방을 몸을 수그려 날아드는 오른쪽 주먹을 피한 뒤 왼쪽 주먹으로 머리를 노릴 것이다. 그러니 뛰어난 선수라면 마찬가지로 뛰어난 상대를 맞아 오른손을 앞세워 공격을 하지 않느다. 그것도 첫 라운드라면 더더욱 그렇다. 우선은 기다리는 법이다. 오른손은 아껴둔다. 오른손은 상대방의 왼손이 느리게 날아올 때 상대방을 혼내줄 준비를 하고 기다린다. 오른손은 왼손을 몇 번 던지다가 날리는 법이다. 상대방의 왼손 훅을 오른쪽 팔뚝으로 막은 다음 오른손으로 짧게 끊어 치듯 반격할 수도 있다. 고전적인 권투의 기본이다. 권투 기자라면 누구나 안다. 그런 원칙들을 가지고 기자들은 해설을 한다. 기자들이 인디애나폴리스에서 일하는 실력 좋은 기능공 수준이라면 알리는 이미 달로 날아가는 중이었다. 오른손으로 선제공격을 하다니! 세상에!

    음...챔피언은 다른 챔피언을 오른손을 앞세워 공격하지 않는다고 하는데, 맹박이형과 검찰이 요즘 하는 짓거리를 보고 있자면 자기들이 무슨 무하마드 알리가 된 줄로 착각하고 있는 것만 같습니다. 꼭 한국의 데이빗 E. 켈리가 되시길.^^ (결론이 생뚱맞은가요? 쿠쿠)

  • 16. 프리댄서
    '09.5.1 2:21 AM (218.235.xxx.134)

    안무 연구하다가 잠시 또 접속했습니다.--; 그러고 보니 보리 시즌1 1화에서 알리 얘기가 등장하는군요. 테라스에 앉아있는 데니에게 폴이 다가와서 그런 말을 하죠. 알리가 '무슨 경기(아마 마지막 경기였던 듯싶어요)'를 할 때 자네와 난 관중석에 앉아서 그가 싸우는 모습을 지켜봤었지. 생각나나? 그때 알리는 무력했어. 그는 몰랐던 거지. 자기가 나이가 들었다는 걸. 이보게, 데니. 우리도 늙었네. 그걸 인정해야 해.... 아마 그런 내용이었던 것 같은데.. 흐 정확히는....

    법조인? 법학도?로서^^ '관용과 자비'를 이땅에 뿌리내리게 할 수 있는 방법은 많겠지만 대중들에게 그것의 필요성을 폭넓게, 강렬한 기억으로 인식시켜주는 데는 드라마만한 게 없다고 봅니다. 하늘을 날자님표 드라마에서 주인공이 '자비에 의해서 완화되는 정의'가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는 장면을 기대해볼게요. 그리고! 중요한 거! 로맨스도 잘 섞으셔야 해요. 그래야 여성팬들을 많이 끌어들일 수 있답니다.^^

  • 17. 하늘을 날자
    '09.5.1 12:39 PM (121.65.xxx.253)

    오!!! <더 파이트>는 정말 재밌겠는데요... 인용해주신 부분만 봐도 정말... @..@ '어제밤 나는 잠자리에 들기 위해서 형광등의 스위치를 내렸고, 불이 꺼지기 전에 잠자리에 들어갔다.'고 나불나불 허풍 떨던 알리의 그 엄청난 스피드(!!!)가 생생하게 느껴지는군요. 오... @..@

    프리댄서님께서 이리 격려해주시니 정말 '한 번 써볼까...?'하는 생각도 (조금) 드네요. ('내 주제에 무슨...' 이런 생각이 더 많이 들긴 하지만요...;;;) 음냐.;;;

    좋은 글과 좋은 댓글 너무 잘 봤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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