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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정의 기술
그럼 두 마리엔 5천 원?
잭 런던은 <야생의 외침>에서 가축으로 전화된 짐승들도 야생의 상태에 남아있는 동족의 울음소리를 들으면 피가 역류한다고 한 바가 있죠. 그렇다면 저한테 어떤 흥정가(?)적인 기질이 잠재돼 있었던 것인지 솔직히 저 말을 듣는 순간 살짝 피가 역류하는 것도 같더라구요.-_-;(화투판으로 진출해서 제2의 정마담이 됐어야 했나?--;) 뭐랄까, 외형은 상당히 돈키호테적 무대뽀로 보이지만 기실은 그 안에 치밀한 계산과 현실에 대한 냉정한 판단을 숨기고 있는 저 대담성에 순간적으로 매료당했달까요.
그래서인지 집으로 돌아오는 길, 삶이라거나 세상이라고 하는 것이 문득 흥정의 연속으로 유지되고 있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흥정에서도 이겨야 하겠죠? 지는 건 언제나 기분이 나쁜 법이니까. 그렇다면, 흥정에서 이기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을 겁니다.
그것과 관련해서 제일 먼저 생각나는 게 이현주 목사에 대한 이야기네요. 이런저런 사회활동과 왕성한 저술활동으로 유명한 이현주 목사는, 한편으로는 ‘털보 목사’라는 별명으로도 유명하신 분입니다. 헌데 그 양반이 털보가 된 사연이 재밌어요. 하루는 면도를 하려고 아침에 거울 앞에 섰는데 문득 그런 생각이 들더랍니다. 수염은 나서 자라기 마련인데, 즉 그것이 수염의 속성인데 나는 왜 이걸 깎고 또 깎으려 드는 것일까? 그러자 면도라는 행위가 마치 평생을 가도 끝나지 않을 싸움처럼 느껴지더랍니다. 그래서 걍 수염을 깎지 않고 내버려두기로 했다나요?
그런가 하면 신약에서 빌라도는 그랬죠. 유대인들이 예수를 데리고 와 처형시켜달라고 하자 그는 조용히 물었습니다. 이 사람의 죄목이 무엇이냐? 유대 군중은 무조건 죽이라고만 소리칠 뿐이었습니다. 그냥 죽여! 이유 따윈 중요치 않다구! 무조건 십자가에 매달란 말이야! 빌라도는 예수가 무고하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예수의 처형을 거부할 경우 군중이 폭동을 일으킬 것이라는 사실도 감지하고 있었습니다. 하여 빌라도는 대야에 있는 물에다 ‘손을 씻습니다’. 그러면서 대답하죠. 알았다. 하지만 나는 이 사람이 흘리는 피에 책임이 없다.
또 이런 예도 있습니다. 몇 년 전 일산에서는 러브호텔 난립이 큰 문제가 됐었어요. 그때 주민들이 대책위까지 꾸려서 다양한 활동을 했는데, 러브호텔이 밀집해 있는 전철역 인근의 한 아파트 벽면에는 ‘고학력 젊은 세대가 많이 사는 동네’라고 알려진 곳답게(?) 이런 현수막이 내걸렸더랬습니다. 당신의 차 번호가 인터넷에 뜬다.
그리고 어떤 철학자는 ‘자뻑’을 흥정의 무기로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제1판 서문에서 서문에서 쇼펜하우어는 그랬죠. 일단 자신의 저술을 높게 자평하고^^ 그런 책을 독자들이 제대로 이해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장황하게 설명합니다. 그 설명 때문에 독자들이 분개할 것이라고 예견하는 일 또한 잊지 않았죠. 고작 한 권의 책을 읽기 위해 그토록 번거로운 절차를 밟아야 한다면 대체 누가 그걸 끝까지 읽어낼 수 있겠냐고 따지려 들 게 분명하다구요.
그에 대해서도 쇼영감은 이렇게 자답합니다. “이러한 비난들에 대해 답변할 필요는 조금도 없으므로, 나는 다만 위에서 말한 요구를 충족시키지 않는다면 이 책을 통독하더라도 하등 효과가 없다고 미리 경고하여, 독자들이 책을 읽는 데에 시간을 헛되이 사용하지 않도록 한 것에 대해 어느 정도의 감사를 기대할 뿐인 것이다.”
그러더니 서문의 마지막에 이르러서는, 참으로 놀랍게도, 이런 깜찍함을 보여줍니다! “서문만을 읽고 반감을 가진 독자는 이 책을 사기 위해 돈을 지불했으므로, 그 손해는 무엇으로 보상받을 것인가 하고 자문할 것이다. 이제 나의 마지막 변명은, 책이란 읽지 않아도 여러 가지로 이용될 수 있다는 것을 그들에게 알려주는 것이다. 다른 많은 책들과 마찬가지로 그것은 서고의 빈틈을 메울 수 있을 것이며, 장정이 훌륭하다면 보기에도 좋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학식 있는 여자 친구의 화장대 위나 차 마시는 테이블 위에 놓아도 좋다. 혹은 마지막으로 이 책에 관해 비평을 쓸 수도 있다는 것인데, 이것이야말로 최선의 용도이고 내가 특히 권하고 싶은 것이다.”^^
그때 시장에서 흥정이 어떻게 마무리됐는지는 모르겠습니다. 끝까지 지켜보고 싶었지만 일행이 있어서.... 저는 손님과 주인이 에이, 그렇겐 안 되지, 안 되긴 뭘... 하다가 손님이 “아, 일단 담아 봐요.”라고 하는 부분까지만 들었습니다. 결과는 어떻게 됐을까요? 두 마리에 한 5500원쯤으로 해서 서로 오케이? 아니면 그 손님이 진상 중의 진상이라 끝까지, 바득바득 자기 의견을 관철시키려 하다가 결국에는 봉다리에 담긴 생선을 사지도 않고 걍 돌아가버렸을까요?
사실 저는 위에서 언급한 예들 중에서 ‘당신의 차 번호가 인터넷에 뜬다’라는 현수막에 하고 싶은 말이 많습니다. 하지만 그 현수막 자체가 아주 영리한 전술이었던 것만은 분명해 보입니다. 흡사 흔적을 남기지 않는 솜씨 좋은 킬러를 보는 느낌이었달까요....
뭐 그거야 어쨌든 만일, 지금 당신도 흥정을 하고 있다면, 이기십시오.
당신이 흥정에서 이기기 위해 어떤 방법을 사용하건 세상에 한 사람, 제가 응원해 드리겠습니다.
비록 지금 조금 졸리긴 하지만요.--;
1. 야호
'09.4.24 9:47 PM (173.3.xxx.35)늘 재미있는 글을 써주셔서 고맙습니당.
저는 물건 살 때의 흥정은 안(못)합니다.ㅜㅜ
옛날(?)엔 시도해 봣는데,아무도 내겐 깎아주지 않아서
아예 정찰제만 다닙니다(시간이라도 버니깐 ㅎㅎ)
그런데 우리 삶의 순간순간은 또 다른 자기와의 흥정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제가 한 선택에 대해 프리댄서님이 응원해 주셨음을 기억하겠습니다(야호~ ^^)2. 하늘을 날자
'09.4.24 10:32 PM (220.93.xxx.8)재밌게 읽었습니다. 쇼펜하우어의 서문이 무척 재미있네요. ㅋㅋㅋ
그런 현수막이 있었군요... @..@ '흥정'은 참 흥미로운 주제인데... 뭐, <협상론>이라는 제목으로 강좌가 여기저기서 개설될 정도니까요.
더 길게 댓글을 달고 싶으나, 애가 언제 깰지 몰라서... 첫째 재우기는 아내가 맡고, 둘째 재우기는 제가 맡은 터라... 월요일에 다시 이어서 달게요. 에공. 즐거운 주말 보내세용~~~3. 프리댄서
'09.4.24 11:23 PM (218.235.xxx.134)야호님, 재래시장에 들렀던 저 날,
동네 단골 닭집에 들러 닭똥집 한 봉지를 샀는데요 (닭똥집 마니아...--;),
주인 아줌마께서 저울에 똥집 한 주먹을 올려서 달아보시더니 몇 개를 더시더라구요.
그래서 제가 소심하게(재래시장에서 고수들의 흥정을 본 것도 있고...)
"단골인데 그거 그냥 주시면 안 돼요?" 그랬어요.-_-
그랬더니 아줌마께서 덜어낸 똥집 중에서 하나를 더 담아 주시더라구요. ㅎㅎㅎㅎ
근데 닭똥집 한 봉지에 2천 원이에요. 그걸 뭐하러 더 달라고 했는지...--;
(아줌마, 내일 닭 사러 들를게요.ㅠㅠ)
하늘을 날자님. 예, 수고가 많으십니다. ㅋㅋ 아기가 깨지 않고 잘 자야 할 텐데...^^4. 후훗...
'09.4.25 12:40 PM (115.161.xxx.219)엄마랑 아파트상가에서 티를 하나삿는데요. 프린트된무늬도 괜찮고 천도 나름늘어나는 면티에 쫀쫀한게 이쁘더군요.
엄마와 그집언니와의 흥정의 기술...
엄마 '이거 괜찮네 얼마에요?"
그집언니 '이만 팔천원이에요. 옷이 브라브라'
엄마 '음 이만원에 줘' 끝...이만원에 사왔다는. 단골도 아닌데....어째.
그리고 그언니 이만원에 팔아도 남으니까 줬겠지만 원가는 얼만지..ㅎㅎ
나름 둘다 만족해하시더군요.
역시 후려치는 기술도 있어야 되요.5. 프리댄서
'09.4.25 8:47 PM (218.235.xxx.134)후훗님. 맞아요....'후려치는 기술'! 그 표현이 생각 안 났었는데...^^
친구 중에 엄마가 식당 하시는 애가 있습니다.
걔가 이직을 하느라 중간에 좀 쉬는 기간에 한 달 정도 엄마 식당에 나가 일을 도왔대요.
나중에 걔가 하는 말이, 만일 자기한테 그 식당 맡아서 하라고 하면 못 하겠더래요.
엄마하고 시장 다녀오고 나서 그 생각이 들었는데,
엄마가 시장 단골 상인들과 물건값 흥정하시는 거 보니 '아, 이건 내가 감히 끼어들 영역이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래요.
다른 건 다 어찌어찌 해보겠는데 반말과 존댓말을 '스리슬쩍' 넘나들면서 '후려치는 것' 그것만큼은 도저히...ㅎㅎ
그 옷가게에서의 상황 상상이 가요.^^
울 엄마도 그러시죠. 제가 생각하기엔 정말 얼토당토 않은 가격으로 '한 번에' 후려치세요.
전 어리버리 서 있다가 '엉? 벌써 끝난겨?' 하면서 엄마 뒤를 졸졸 따라 나왔던 기억이... ㅎㅎ
근데 인생에서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할 때, 가끔은 그 기술이 부러울 때도 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