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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례요한과 살로메 그리고 페드라...
아일랜드 출신의 작가 오스카 와일드는 성서에 나와 있는 그 짤막한 이야기를 가지고 한 편의 희곡을 완성했습니다. 예술이 세상을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예술을 모방한다고 했던 예술지상주의자. 그 예술은 또한 절대적인 아름다움을 그리는 데 복무해야 한다고 믿었던 유미주의자답게 희곡 <살로메>는 아주아주 탐미적입니다. 묘하게 ‘탐미’와 에로스는 뗄 수 없는 관계를 맺고 있는 게 대부분입니다. 하여 <살로메>는 아주아주 관능적인 작품이기도 하죠.
헤롯왕은 동생의 부인과 결혼을 한 사람입니다. 범해서는 안 될 금기를 넘어섰기 때문에 ‘거칠 것 없었던 사내’(저한테는 세례요한의 이미지가 그래요) 세례요한은 비난을 퍼붓습니다. 그래서 옥에 갇혔던 것이고요. 그때 헤롯왕의 부인은 딸을 데리고 재혼을 했는데, 성서에서는 헤롯왕과 그 의붓딸의 관계에 대해 별 언급이 없습니다. 하지만 무한한 상상력을 발휘할 여지는 있었죠. 새 아빠와 다 큰 의붓딸. 더구나 그 새 아빠 앞에서 춤추는 다 큰 의붓딸이라니 말입니다. 오스카 와일드는 그 행간에 자신의 탐미적인 상상력을 십분 발휘하여 헤롯왕이 살로메를 탐하는 것으로 그립니다. 헤롯왕의 부인이자 살로메의 엄마인 헤로디아는 그걸 눈치 채고 질투하는 모습으로 나오고요.
그리고 살로메는 아름답기 그지없는 소녀입니다. 이 세상 사람들 모두 그 아름다움 앞에서 넋을 잃고 마는. 그래서 자뻑이기도 한. 하지만 그 ‘사람들’ 속에 세례요한 같은 자는 없었습니다. 음부처럼 깊은 곳에 갇혀있는 세례요한에게서 소녀는 처음부터 알 수 없는 매혹을 느끼게 되죠. 제 머릿속에서 세례요한은 비쩍 마르고 수염과 머리털은 자랄 대로 자랐을 것이나 눈빛만은 형형하기가 이를 데 없는 이미지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뭐 목소리도 우렁찰 테고요.
살로메가 세례요한에게서 풍겨 나오는 그 서슬 푸른 ‘기’에 자기도 모르게 끌렸는지 어쨌는지는 모르지만 하여튼 처음부터 이유를 알 수 없게 매혹당한 살로메는 끊임없이 그를 유혹합니다. 하지만 세례요한은 코웃음만 칠 뿐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분’께 네 죄를 고하고 죄 사함을 받으라고까지 합니다. 그런 반응에 입술을 앙 깨문 소녀는 자신을 음탕한 눈으로 바라보는 헤롯왕 앞에서 ‘일곱 베일의 춤’을 춰서 새 아빠로부터 소원을 다 들어주겠다는 약속을 받게 됩니다.
그리고는 소원대로 잘린 세례요한의 목이 은쟁반에 담겨 나오자 그 얼굴에 키스를 합니다. 그때 살로메가 막 독백을 하는데 그 독백이 매우 ‘그로테스크+에로틱+애절’하답니다. 그리고 그것들이 하나로 용해되면서 불러일으키는 느낌은 ‘치명적인 아름다움’이고요. 정말 아름다워요, 그 마지막 장면은. 참고로 와일드 희곡에서 지문에 ‘일곱 베일의 춤을 춤다’라고만 묘사된 장면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오페라 <살로메>에서는 스트립 댄스로 ‘구체화’됩니다. (오페라 원작이 와일드의 희곡이에요) 오페라에서의 ‘일곱 베일의 춤’은 말 그대로 살로메 역을 맡은 가수가 일곱 베일을 차례로 하나하나 벗어제끼면서 추는 것이기 때문에 저 오페라가 상연될 때마다 과연 여주인공이 과연 어디까지 ‘노출’할지가 초미의 관심사가 되곤 하죠.
오스카 와일드는 사실 의붓딸을 탐하는 헤롯왕, 그런 새 아버지를 가지고 노는 발칙한 어린 소녀. 그리고 그 소녀가 세례요한을 향해 퍼붓는 엽기적인 애정에 도덕적인 잣대를 들이밀려 하지 않습니다. 그것들이 서로 부딪치면서 발생시키는 치명적인 아름다움, 그것에의 기꺼운 감염만 있을 뿐입니다.
하지만 영화 <페드라>는 그와는 다릅니다. (솔직히 영화 전반부는 별로였는데 중반부부터 조금씩 흥미로워지더군요.) 영화의 후반부. 페드라는 의붓아들의 결혼을 막으려고 남편에게 의붓아들과의 관계를 털어놓습니다. 그러자 남편은 아들을 불러 “니가 감히~!” 하면서 귀싸대기를 연달아 날리죠. (<아내의 유혹>에서라면 뒷목을 잡고 쓰러졌을 텐데...) 그 남편의 손바닥이 쇠갈퀴로 되어 있는지는 몰라도 아무튼 안소니 퍼킨스의 얼굴은 이내 엉망이 됩니다. (갈퀴로 긁은 것 마냥 핏자국이 생겨요) 페드라의 의붓아들이자 어린 연인. 그러니까 안소니 퍼킨스는 그 얼굴을 한 채 수돗가로 가서 드러눕습니다. 수돗물을 틀어놓은 채.
그 와중에도 전 수돗물이 안소니 퍼킨스의 귓구멍으로 흘러들어가는 게 막 걱정이 됐구요.-_- 암튼 그때 페드라가 천천히 안소니 퍼킨스 곁으로 걸어옵니다. 그리고는 수돗물로 그 사랑스럽고도 애달픈 연인의 얼굴을 씻겨줘요. 자신의 얼굴도 씻고요.
예, 일종의 세례의식이라고 할 수 있겠죠. 인간은 유성생식을 하여 후손을 이어갑니다. 한 마디로 섹스를 해서 새끼를 낳는다는 말인데, 유감스럽게도 어느 시점에 다다르면 아버지와 딸, 어머니와 아들, 오누이간의 교미가 가능해지죠. 사실 아주아주아주아주아주 옛날에는 그러면서 생식을 이어갔을지도 모르지만 어느 순간부터 인간은 그 행위가 인간 자신이 속한 집단을 뿌리부터 흔들 수 있다는 걸 알게 됩니다. 그래서 고대 때부터 근친상간은 우리 가련한 인간이 범해서는 안 될 제1의 금기로 자리 잡아 왔죠.
고대 그리스 비극은 한 마디로 그런 식의, 인간사회를 유지시키기 위해서는 반드시 ‘금기’로 못 박아두어야 하는 선을 넘어버린 영웅들의 슬픈 이야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주인공이 영웅들인 까닭은 우선 그 시대가 계급사회였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영웅들의 이야기를 통했을 때라야 설득력이 더 강해지기 때문이기도 하죠. 금기를 어긴 영웅들의 추락. 그러니 인간들아, 까불지 마라, 까불면 안 되는 것이 우리들의 운명일지니 애통하고 절통하구나 우리들의 운명은. 그것이 <오이디푸스 왕>을 비롯한 고대 그리스 비극 작품이 한결같이 전하는 메시지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런 고대 그리스 비극 작품을 현대로 옮겨온 영화 <페드라>는, 그러나 기독교 탄생 이후에 만들어진 작품입니다. 에우리피데스의 <페드라>에서는 주인공들이 죄 사함을 받을 기회가 없었지만 서기 1960년대에 만들어진 영화 <페드라>에서 주인공들은 그런 기회를 가질 수도 있다는 뜻이죠. 예, 고대 그리스 비극은 인간들의 ‘죄’를 장엄하게 보여주는 데서 그쳤다면 그것의 위대한 유산을 물려받은 기독교는 이 보잘 것 없는 우리들, ‘인간’이라 이름 붙은 호모 사피엔스 종족이 스스로 그 죄를 씻을 수도 있다는 걸 ‘보여’줍니다.
그래서 페드라는 불소와 염소가 잔뜩 함유된 수돗물로 어린 연인의 죄를 씻어주고 자신의 죄도 씻어냅니다. 하지만 어린 연인은 고마워하는 대신 페드라에게 이렇게 말하더군요. “당신이 죽었으면 좋겠어요. 나는 스물네 살이에요. 그게 전부죠. 단지 스물넷....” 그리고는 부르릉~ 스포츠카의 시동을 걸고 해안도로를 질주합니다. 헤이 걸, 가 볼까? 그래, 고 고 고~. 음악을 들어보지. (바흐의 ‘토타카와 푸가’가 흘러나오고) 그래, 좋아. 좋다구. 페드라는 날 사랑했어. 바로크 시대 사람들 방식으로! 스해, 그건 인정하자구. 나나나나~ (대충 이런 독백을 하면서)
정말 그때 안소니 퍼킨스의 연기는 일품이었답니다. 그러다 마주 달려오는 트럭에 부딪히면서 “페~~에~~드라~~아!”.ㅠㅠ 그 장면 하나만으로도 <페드라>는 충분히 볼 만하다는 생각입니다. 영화의 모든 결점과 단점이 그 장면 때문에 커버가 되고도 남으니까요. 그 후 침몰한 배 ‘페드라’호 사건 때문에 그 저택에 몰려든 동네 아낙들 틈으로 안소니 퍼킨스의 시체가 들려오던 것도 너무나 인상적이었구요...
여담입니다만, 제가 인간의 정염에 대해 가장 강렬한 인상을 받았을 때가 강화도 전등사에 갔을 때였습니다. 전등사 대웅전 처마의 네 귀퉁이에는 ‘나부상’이 조각돼 있는데, 그것과 관련해서 이런 전설이 전해져 내려와요. 대웅전 공사에 참여했던 목수 하나가 절 아래에 있는 주막을 드나들다 거기 주모와 눈이 맞았답니다. 그래서 전등사 공사에 참여하면서 받은 수당들까지 “임자가 맡아가지고 있어.” 하면서 주모한테 다 줘버렸는데 그걸 갖고 주모가 튀어버린 거예요. 여자에게 배신당한 목수는 마음의 지옥에 갇힌 채로 절 공사를 하게 됩니다. 그 번뇌의 결과물이 대웅전 처마 네 귀퉁이에서 벌거벗은 채로 (꼭 뭉크의 ‘절규’에 나오는 인물처럼) 고통스러워하는 나부상이죠.
제가 전등사에 ‘놀러’ 갔을 때는 봄이었어요. 마침 대웅전 안에서 젊은 스님 한 분이 절을 올리고 계셨습니다. 매우 젊었고 머리는 파르라니 깎고 있었고, 절 마당에서는 봄 햇볕이 지글지글 끓고 있었습니다. 봄꽃들은 방탕할 정도로 만개해 있었고 처마 네 귀퉁이에는 그런 사연을 간직한 나부상이 조각되어 있었죠. 그 극명한 대비라니. 저는 불손하게도 스님이 절 하시는 모습을 보며 인간의 정염이라는 것을 떠올렸더랬습니다.
그렇다면 스스로 죄 사함을 행한 페드라와 그의 어린 연인은 구원을 받았을까. 그건 알 길이 없지만 오스카 와일드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유명한 사람에게는 항상 많은 제자들이 따르지만, 그의 전기를 쓰는 제자는 유다다. (저는 성서의 묘미가 가롯 유다 같은 캐릭터를 등장시키고 그를 자살하게 만든 거라고 생각해요) 우리는 그냥 그런 존재들일 뿐이죠. 유다가 쓴 ‘그의 전기’를 보면서도 페드라와 안소니 퍼킨스처럼, 전등사의 목수와 주모처럼 숱한 욕망과 번뇌를 벗어던지지 못한 채 살아가는, 그런 ‘한낱 인간’.... 저는 인간이 그보다 더 대단한 존재라고 생각해본 적도 없는데, 새벽에 영화 다 보고 나서 잠이 안 오기에 함 끼적여봤어요. 근데 썰이 참 길었네요.
1. 프리댄서
'09.3.8 9:06 AM (218.235.xxx.134)혹시 페드라 보고 싶은 분들은 여기로 가보세요. 다음에서 혹시나 하고 ‘페드라’를 쳐봤더니 여기 이 블로그가 뜨더라고요. 저는 <페드라> DVD를 예전에 ‘digital remastering film archive(www.drfa.co.kr)’라는 사이트에서 샀어요. 거기 가면 구하기 힘든 영화를 리마스터링해서 팔았거든요. 근데 오랜만에 가보니 무슨 작가스쿨 같은 데로 변했네요....? 암튼 저 블로그에 올려진 게 제가 구입한 DVD랑 똑같은 거예요. 화면 왼쪽 상단에 드리워져 있는 게 drfa 사이트 로고구요. 저 블로그 주인장은 실력이 좋으셔서 그걸 저렇게 올려놓으셨나 봐요. 근데 이탈리아에서 제작한 게 아닌데 이탈리아라고 표시해두셨네.--; 무단링크랍니다.ㅠㅠ 보실 분들은 번역을 아마추어들이 했다는 걸 감안하시고 보세요.
.http://blog.daum.net/stlim923/15023900?srchid=BR1http%3A%2F%2Fblog.daum.net%2...2. 산철쭉
'09.3.8 9:30 AM (116.125.xxx.165)너무 잘 읽었어요 글이 참 좋네요
3. *^^*
'09.3.8 9:44 AM (222.103.xxx.181)짧지 않은 글인데 거의 단숨에 읽어 내리게 하시네요... 감사합니다.
4. ^^
'09.3.8 10:20 AM (122.43.xxx.9)부러운 프리댄서님~~
5. 존재
'09.3.8 10:51 AM (124.54.xxx.44)글에서...
우리는 어쩔수 없는 인간이구나를 느끼게 되는군요.6. 잘 읽었습니다
'09.3.8 11:50 AM (221.146.xxx.39)원글님은 재료의 맛을 잘 살려주시는 훌륭한 요리사이세요~
전 뭘 먹는지도 모른채 허겁지겁 배만 채우고 마는 사람인데
눈으로만 보아도 감사한 한 상, 천천히 음미하며 잘 먹었습니다ㅎㅎ7. ...
'09.3.8 2:57 PM (116.125.xxx.37)아! 페드라~~ 20년도 더 된 옛날 KBS 주말의 명화시간에 본 기억
그때 영화평론가 정영일의 놓치면 후회.. 이런 평도.. 별 다섯개?8. 프리댄서
'09.3.8 3:45 PM (218.235.xxx.134)정영일. 윗님, 와... 실로 오랜만에 들어보는 이름입니다.
맞아요. 옛날에 정영일이 명화극장 시작되기 전에 맨날 영화에 대해
간단하게 설명해주곤 했었는데.
그 꺼먼 뿔테... 그분 때문에 명화극장이 더 재밌었던 것도 같아요....9. ㅎㅎㅎ
'09.3.8 5:58 PM (211.243.xxx.231)중학생때, 영화광이었던 저는 매 주 정영일의 영화소개를 빠짐없이 스크랩하곤 했었어요.
여기서 그 이름을 보니 너무 반갑네요.10. 프리댄서
'09.3.9 5:19 AM (218.235.xxx.134)정영일을 통해 연식들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11. 하늘을 날자
'09.3.9 11:12 AM (124.194.xxx.146)잘 읽었습니다.^^ 늘 좋은 글에 정말 감사합니다.^^
12. ...
'09.3.9 2:08 PM (121.124.xxx.146)링크걸어주신 페드라 오랜만에 옛날 생각하면서 잘 봤습니다~
라 라라라라라라~`오 태양이여 요한 세바스챤 바하여 페드라!
정말 예전 TV 명화극장에서는 극장에서 볼수 없었던 흑백영화들이 많았지요
경복궁앞 불란서 문화관에서 보던 200원짜리 영화들 하며..
까칠한 말투의 정영일씨와 영화 음악에서 빠질 수 없는 서남준씨...
'정염'이란 단어에서 '사랑아 나는 통곡한다'라는 영화도 문득 떠오르고
프리댄서님 덕분에 잠시 행복했습니다13. 프리댄서
'09.3.10 12:28 AM (218.235.xxx.134)위에 점 세 개님. 이 답글을 보실까요?^^
<사랑아 나는 통곡한다>가 어떤 영화일까 궁금해서 검색해봤더니 허걱, 이거 히치콕의 <나는 고백한다>와 내용이 같은 거네요? 전에 아는 사람 때문에 하나TV를 잠깐 달았던 적이 있는데 하나TV 영화 메뉴에 <나는 고백한다>가 있었어요. 내용이 완전 같아요. 사제 역할로 몽고메리 클리프트가 나오는 것도 그렇고. 어찌된 영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오, 신기신기..^^
그리고 서남준. 거기다 와... 불란서 문화원에서 보는 200원 짜리 영화.
그랬군요. 저보다 연배가 높으신 거 같은데^^ 옛날에는 200원만 내면 불란서 문화원에서 숱한 명화들을 관람할 수 있었군요. 신기해요. 하긴 예전에 집에 오빠가 보던 세계문학전집이 있었는데(삼성출판사에서 나온 거) 사춘기 때 제가 그걸 열심히 읽었고 (오빠와는 띠동갑) 몇 년 전까지도 그 중 몇 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아직도 기억나는 게, 그거 가격. 각권의 가격이 750원이었어요.^^ 당연히 세로쓰기구요. 거기서 세계 대문호들의 이름들뿐만 아니라 김붕구, 박형규 같은 출중한 번역가들의 이름까지 익혔는데. ㅋㅋ 정말 책 한 권 값이 750원이라니. 그리고 200원으로 볼 수 있는 영화라니. '불란서 문화원'이라는 이름도 참 좋네요.... 무슨 영화음악실 프로그램 같은 데서 들려주는, 과거 문화청년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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