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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공의 적이 된 ‘일련번호 EC1195348A’

폭풍속으로 조회수 : 606
작성일 : 2009-02-27 20:47:21
[e뉴스탐구]공공의 적이 된 ‘일련번호 EC1195348A’

사람 목숨 갖고 장난치는(?) 이들을 잡기 위해 태어난 ‘좋은 놈’이었다. 하지만 세상과 인연을 맺자마자 ‘나쁜 놈’이 돼버렸다. 10억개가 넘는 복제품은 매장됐고, 일부는 ‘공공의 적’이 된 채 세상을 떠다니고 있다.

서울 강서구 제과점 여주인 납치 사건 때 납치범에게 몸값으로 건네진 모조지폐(일련번호 EC1195348A)는 모두 7000만원. 이 가운데 공범 정승희씨(32·공개수배)가 가짜 돈 700만원으로 오토바이를 구입했다. 이후 복권방, 포장마차, 슈퍼마켓 등 여기저기서 모조지폐가 발견되면서 우려했던 ‘가짜 돈 유통’ 대란이 현실화됐다. 경찰은 일련번호가 공개되면서 사용가치가 없어지자 남은 모조지폐 전량을 폐기하기로 했다.


-진짜 같은 가짜-

영화 ‘타짜’에서 주인공 고니(조승우 분)가 열차에서 혈투를 벌이다 공중에 날린 수십억원의 돈다발은 모두 가짜다. 제작팀이 1000만원을 들여 컬러복사기로 1만원권 80억원어치를 복사해 만든 것이다.

범인 추적의 단서가 되는 ‘수사용’ 모조지폐 또한 한국은행 밖에서 만들어졌다. 경찰에 따르면 2005년 8월에 1만원권 12억원어치가, 이후 2년 뒤에 신권으로 다시 제작됐다. 서울 5개 권역 중심 경찰서와 지방청에서 2억원씩을 보관하고 있었다. 모조지폐가 범인의 손에 들어가 시중에 유통된 것은 이번 제과점 여주인 납치 사건이 처음이다. 시중에 유통된 가짜 돈 액수 또한 사상 초유의 금액이다. 경찰은 범인을 잡지도 못하고 가짜 돈까지 빼앗겼다. 게다가 경찰은 가짜 돈의 시중 유통에 대한 대비책을 마련하지 않은 것으로 드러나 눈총을 사고 있다.

경찰은 애초 “수사용 모조지폐는 생김새가 조악해 한눈에 티가 난다”고 했지만 그 지폐를 받고 물건을 판 상인들은 눈치채지 못했다. 그만큼 정교하게 만들어졌다는 얘기다. 색감이나 질감에서 진짜 돈과 거의 차이가 없다. 다만 진짜보다 1㎜ 정도가 크다. 진짜지폐는 밝은 은색 홀로그램이 빛에 따라 변하는 반면 모조지폐는 홀로그램이 짙은 회색이며 모양도 변하지 않는다. 이에 일반인이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육안으로 구별하기가 어렵다는게 전문가들의 견해다. 현재로선 ‘일련번호 확인’이 그나마 가짜 돈을 가려내기 위한 유일한 대응책이다.

유명 백화점과 할인점 등지에서는 이미 위폐 식별을 위한 직원 교육을 마쳤거나 진행 중이다. G백화점은 현금 대신 카드 계산이 대부분이지만 만일의 사태에 대비, 계산대 하단에 위폐 일련번호 표본을 붙여놓고 보안요원을 계산대 주변 및 매장 곳곳에 배치했다.

반면 현금 거래가 활발한 슈퍼마켓 등 소규모 상점에서는 이렇다 할 뾰족한 수를 내놓지 못하고 있다. 경찰은 “일반인들의 신고가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말한다. 하지만 A슈퍼마켓(서울 수유동)의 업주는 “일련번호가 너무 길고 외우기도 힘들다”면서 “번호를 알고 있다 하더라도 기다리고 있는 손님 앞에서 지폐를 일일이 확인할 수 도 없다. 손님을 범인 대하듯 할 수 없지 않느냐”며 한숨을 내쉬었다. 과일 도매상을 하는 김모씨는 “수십장의 지폐 속에 가짜 돈 한 두장이 섞여 들어오면 그야말로 속수무책”이라고 말했다.


-피해 보상은 누가?-

이번 모조지폐 유통 사건에서는 경찰의 위법행위도 도마에 올랐다. 원래 화폐도안이나 화폐모양은 교육이나 연구 목적, 보도 목적, 재판 목적 외엔 만들 수 없게 돼있다. 영화촬영 등을 위해 가짜 돈을 만들더라도 한국은행의 승인을 받아야 한다. 경찰은 애초 한은의 승인을 얻었다고 했지만 한은측은 승인한 사실이 없다고 공식적으로 밝혔다. 모조지폐는 제작 전에 신고해야 할 뿐만 아니라 사용이 끝나면 한은 감독 아래 폐기해야 한다는게 한은 관계자의 설명이다.

가짜 돈을 받고 용의자에게 오토바이를 판 업주에 대한 보상문제도 논란이다. 현행법상 관련규정이 없다. 경찰 또한 명확한 답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한은 관계자 역시 “한은과는 상관없는, 경찰이 직접 만든 가짜 지폐인 만큼 한은이 어떻게 (보상)할 수 있다는 입장을 내놓을 수 없다. 경찰의 대응을 지켜볼 따름이다”고 말했다.

오토바이 판매자는 국가를 상대로 소송을 걸기로 했다. 그는 경찰에 피해보상을 요구했지만 제대로 된 답변을 듣지 못해 최근 소송 준비를 위해 변호사와 상담한 것으로 알려졌다. 향후 복잡한 소송절차가 그를 기다리고 있다.

경찰은 그동안 모조지폐의 존재에 대해 입을 다물고 있었다. 반면 미국 연방수사국(FBI)은 수사용 모조지폐를 갖고 있다고 공식적으로 밝혔다. 마약범죄처럼 수사에 돈이 들어가는 범죄가 많기 때문에 취한 조치다. 미국 수사당국이 사용하는 모조지폐는 시간이 흐르면 잉크가 손상되게 만들어져 있다. 아울러 선의의 피해자가 나오면 액면가 1:1 보상을 원칙으로 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경향닷컴 고영득기자 ydko@khan.co.kr> (경향신문)
입력 : 2009-02-27 16:19:02ㅣ수정 : 2009-02-27 16:21:21  
IP : 58.224.xxx.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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