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과의 만남]“소를 따라 느릿느릿 걸으며 영혼의 허기 채웠죠”
ㆍ화제의 독립영화 <워낭소리> 제작 이충렬 감독
80대 할아버지와 40살 소의 이야기를 그린 다큐멘터리 <워낭소리>는 독립영화로서는 처음으로 지난 주말 박스오피스 1위에 올랐다. 개봉 6주 만에 모은 관객은 전국 136만여명. 매 순간 한국 독립영화의 역사를 새로 쓰고 있는 영화이지만, 정작 이충렬 감독(43·사진)은 “지금 행복하지 않다”고 말했다.
그가 행복하지 않은 이유는 많다. 어떻게든 보호하려 했던 영화 주인공 최원균 할아버지의 삶이 노출됐고, 세간의 관심은 “얼마를 벌었냐”는 데에만 쏠려 있고, 이명박 대통령과의 만남을 비난하는 이도 있다.
예상치 못한 유명세를 치르고 있는 이 감독을 만났다. 그는 ‘경향과의 만남’을 마지막으로 당분간 인터뷰를 하지 않겠다고 했다.
-이렇게 많은 사람이 몰릴 줄 예상하셨습니까.
“독립영화를 하면서 스코어를 얘기한다는 것은 자신없는 일입니다. 빚만 안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믿어지지 않습니다. 기적이라고 하는 게 적절하겠네요.”
-왜들 <워낭소리>를 보러온다고 생각하시나요.
“마케팅 비용이 거의 없어서 관객만을 믿었어요. 인간과 동물의 교감을 다뤄서 연령, 성별에 관계없이 무난히 볼 수 있습니다. 노스탤지어를 자극했다는 시선도 있고, 누구에게나 통용되는 고향, 아버지, 어머니를 끄집어내서 공감시켰다는 평도 있습니다. 무엇보다 영화가 단순히 추억을 돌이키게 하는 데 머물지 않고 관객 자신과 부모, 고향의 관계를 다시 생각하게 만드는 것 아닌가 합니다. 저 스스로도 반성문을 쓰는 심정으로 만들었고요.”
-처음부터 소가 죽을 때까지 찍으려고 하셨나요.
“네. 작정을 했습니다. 누군가는 ‘뺨 때려서 울리려 했다’고도 하더군요. 제 인생에서 마지막 힘을 쏟아부었습니다. 기술적인 부분 이외에 마음을 전달하는 다큐가 되길 원했습니다.”
-다큐멘터리에서 흔히 들을 수 있는 내레이션이 없습니다. 음성과 영상이 맞지 않는 등 ‘연출’ 논란도 있습니다.
“기존 다큐멘터리의 작법과 달라 오해의 여지가 적지 않습니다. 다큐의 본질은 진실을 얘기한다는 것입니다. 할아버지, 할머니의 삶을 새로 만들어내서는 안됩니다. 그러나 카메라가 들어서는 순간, 삶은 ‘리얼’하지 않습니다. 그분들 삶의 ‘아우라’를 그대로 옮겨올 수가 없습니다. 카메라를 들이대는 순간, 말투부터 어색해지는 거죠. 가까이 가면 어색해지고, 멀리 있을수록 자연스러워졌습니다. 전 비디오의 허상을 잘 알고 있어서, 비디오에 의존하지 않으려 했습니다. 대신 소리를 찍으려고 작정했습니다. 담아낸 소리에 일상이 반복되는 영상 중 가장 자연스러운 그림을 넣는 것이 타당하지 않습니까. <워낭소리>에는 농기계 소리, 워낭 소리, 농민들의 시위 소리 등 현재 농촌을 구성하는 원형적인 소리들이 담겨 있습니다. <워낭소리>가 ‘드라마타이즈’(극적으로 구성)됐다는 얘기도 들었습니다. 하지만 할아버지, 늙은 암소, 할머니, 젊은 암소의 관계가 설정된 이상 자꾸 무엇인가가 파생될 수밖에 없는 겁니다. 당연히 극 형식이 나오는 거죠. 전 진실을 규명하는 다큐가 아니라 ‘아버지의 정서’를 전달하는 다큐를 만들려 했습니다. 이 원형질로 제 정서,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필요한 방법을 찾았습니다. 요리를 하는 데 맛있게 조미해서 맛나게 먹였다는 게 죄가 되지는 않습니다.”
-영화가 흥행하다보니 예상치 못한 부작용도 있습니다.
“돈 벌었다니까 우리 집(전남 영암)에까지 전화가 온답니다. 할아버지, 할머니는 애초 외부에 공개를 하지 않겠다는 원칙을 세웠습니다. ‘산골 소녀 영자’나 ‘맨발의 기봉이’의 선례가 있지 않습니까(이들은 다큐멘터리를 통해 세상에 알려지면서 삶의 굴곡을 겪었다). 그런데 세상이 내버려두지 않더군요. ‘소 무덤가에 가서 사진 한 번 찍자’ ‘얼마나 벌었나. 빌려달라’는 청이 자꾸만 온다고 합니다. 영화 개봉하고 찾아갔는데 할아버지께서 아는 척도 안하시더군요. 좋아하시는 긴 담배 하나 드렸더니 그제야 마음을 푸시면서 ‘귀찮아, 귀찮아’ 하시더라고요. 그 양반 좀 내버려두었으면 좋겠습니다. 영화에 나온 자식분들도 할아버지께 용돈을 많이 드리고, 좋은 집에 모시려고 합니다. 그러나 할아버지는 원치 않으십니다. 그분들은 스스로 불쌍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소로 농사 지어 9남매 모두 대학 보낸 분들입니다. 우리 모두 ‘효’라는 이름 아래 부모님의 의사결정권을 빼앗는 것 아닌가 생각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아버지를 생각하면서 만들었다”고 하셨는데, 아버지는 영화 보고 뭐라고 하시던가요.
“영화 속 최원균 할아버지하고 똑같아요. 표현을 안하세요.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와 소통이 안됐어요. 편한 말, 스킨십 한 번 해본 적 없어요. 그럼에도 아버지는 내게 듬직하고 우직한 분이셨어요. 그분의 노동을 통해 제가 자랄 수 있었죠. 그건 소의 본성과도 연결이 돼요. 아버지는 소, 소는 아버지예요. 우리 집이 3남1녀인데요, 학비 필요하면 아버지가 소 팔러 가는데 따라가기도 했어요. 소가 울고, 아버지도 눈물 훔치는 걸 여러 번 목격했어요. 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처음 <워낭소리>를 상영했습니다. 영화가 끝나니 아무 말씀 안하시고 30만원이 든 봉투를 건네시더라고요. 기껏 대학 보내놨더니 방송사 외주 PD랍시고 무슨 일을 하는지도 모르겠고, 40 넘도록 결혼도 안하니까 마음고생이 심하셨을 거예요. 영화가 유명해지니까 마을에 제 이름을 건 플래카드가 걸렸대요. 아버님은 아직 농사 지으세요. 평소 외출도 잘 안하시는데 밤이면 플래카드 앞을 왔다갔다 하신다더군요(웃음).”
-방송사 외주 PD의 생활이라는 게 쉽지 않죠.
“방송은 영화와 달리 방송사의 가이드라인에 맞춰야 합니다. 그러다보니 정체성에 혼란이 왔어요. 내가 월급쟁이인가, 창작자인가. 나이는 먹어가고, 하고 싶은 건 못하고…. 무언가 해야 했어요. 마음이 급하다보니 방송사의 ‘컨펌’도 안받고 제 작품을 만들어 가져갔어요. 비전향 장기수, 동성애자, 무당, 탄광 노동자를 찍었어요. 6개월간 광부와 함께 살면서 테이프 200개를 찍었습니다. 방송사에 가져갔더니 첫 마디가 ‘칙칙해’라는 겁니다. 강원랜드와 탄광 노동자의 선악 구분이 너무 명료하다는 지적도 나왔죠. 방송사에선 탄광 노동자의 삶을 르포 형식으로 담자고 했지만, 그건 함께 지낸 탄광 노동자에 대한 태도가 아니었어요. 고생해도 되는 게 없다는 생각을 하니까 마음 조절이 안돼요. 밤마다 호흡이 곤란하고 머리가 터질 것 같은데 병원에 가보면 아무 이상 없다고 하고…. 너무 힘들어서 죽고 싶다는 생각까지 했어요. 그러던 중 봉화 쪽에서 연락이 왔어요. <워낭소리>를 찍으면서 마음이 치료됐어요. 제게도 ‘힐링 무비’가 된 셈이죠. 모든 병의 원인이 ‘서두름’에 있었던 거예요. 할아버지와 소를 따라다니며 느릿느릿 걷다 보니 참 좋아요. 세상에 근심이 없고 목적도 없는 노동이잖아요. 내가 정말 잘못 산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생각하지 말고 바람 부는 대로 살자고 마음먹었어요. 계속 괜찮았는데 요즘 다시 옛 증상이 나타나요. 별로 행복하지 않죠.”
-영화가 성공하니까 사람들이 돈 얘기만 합니다.
“전 PD로서 인정받고 싶었을 뿐입니다. 이명박 대통령한테도 그런 얘기를 했습니다. 배고픈 건 참아도 영혼이 고픈 건 못참는다고. 독립영화 하는 분이 다 그렇듯 <워낭소리>도 그렇게 시작했습니다. 제 지향은 돈이 아닙니다. 이제 여러 상도 받았으니 다 이뤘습니다. 돈 얘기를 강조하는 건 독립영화에 도움이 안됩니다. <워낭소리>에 성공이란 마침표를 찍으면 그건 불행입니다. 속도전, 효율을 중시하는 정권에서 <워낭소리>를 ‘독립영화도 경쟁력 있다’ ‘상업영화 테두리 안에 넣고 이용하자’는 식으로 잘못 이용하지 않길 바랍니다. 마찬가지로 다양성, 실험성이 생명인 독립영화 진영에서도 ‘<워낭소리>같이 만들어야겠다’는 식으로 나오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대통령을 만난 데 대해 일부에선 뒷말이 나왔습니다.
“만나서 독립영화의 현실을 얘기했습니다. 독립영화가 관객과 소통하지 못하는 시스템, 영화진흥위원회에서 다양성 영화 마케팅 지원 사업을 없앤 것의 문제점, 심지어 독립영화라는 개념을 없애려는 시도까지…. 그런 제안을 했는데 일부에선 ‘가지 말았어야 했다’고 하더군요. 만나서 얻을 수 있는 게 있다면 만나야 하는 것 아닐까요.”
이충렬 감독은
1966년 전남 영암에서 태어났다. 중학교 때까지 라디오 하나 들고 소 꼴 먹이러 다닌 것이 그의 원체험이다. 그림 그리길 좋아했지만 “좋은 대학 가는 것이 미덕”인 고향 분위기에선 어림없었다. 미술을 포기하고 고려대 교육학과에 입학했다. 졸업 후 한때 애니메이션을 그렸으나, 단순 반복작업에 질려 임시방편으로 다큐멘터리를 시작했다. 어린이, 노인, 여행, 음식 등 온갖 장르의 방송사 납품용 다큐를 찍었다. 그는 “스승도 없고 문법도 없었다. 주먹세계의 ‘시라소니’가 싸우면서 배운 것처럼, 무식할 정도로 이것저것 과감히 시도했다”고 말했다. <워낭소리>는 그의 첫 극장용 장편 다큐멘터리다.
<글 백승찬·사진 박재찬기자 myungworry@kyunghyang.com>
입력 : 2009-02-23 17:30:05ㅣ수정 : 2009-02-23 23:2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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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를 따라 느릿느릿 걸으며 영혼의 허기 채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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