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계육. 조선을 창업한 태조 이성계의 이름을 갖다 붙인 돼지고기 중에서도 비곗살을 일컫습니다. 민간에 흘러오는 설에 의하면 '성계육 씹듯한다' 라는 말은 태조 이성계를 돼지고기 씹듯 저주 한다는 말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러나 과연 속설에 의해 민간에 전해 오는 이 말이 정녕 타당한가는 한 번 뒤집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당시 고려말의 상황이란 정사와 야사를 막론하고 그대로 두어도 망하고 말 그런 나라였습니다. 망해가는 원나라의 지배를 받고 있으며, 골목의 양아치 출신인 주원장에 의해 새로이 중원의 강자로 떠오른 명나라의 간섭을 받기 시작한 고려는, 그 엄중한 국제 정세의 상황에도 불구하고 왕들은 무능과 무력함으로 허우적거렸으며, 그런 왕에게 여자나 붙여 놓고 자기들만의 세상을 만들어 신하들은 나라를 거의 절단내고 있었습니다.
이름하여 권문세족. 이들은 정말로 부패하고 무능한 아귀나 다름이 없었습니다. 이들은 산과 강을 경계로하는 토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순전히 백성들의 재산을 강탈하여 축첩했던 것이지요. 정사에 나오는 한 대목을 보자면 심지어 권문세족의 노비들이 백성의 토지를 강탈하려는 현장에 나온 관리들을 거의 합법적으로 구타해서 돌려 보내는 대목이 있습니다. 오늘날로 이야기 하자면 횡포와 폭력을 부리는 현장에 나온 경찰 공무원을 일반 가해자들이 폭행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었습니다.
이런 나라였지요. 그래서 백성들은 농사를 지어도 7할에서 9할에 이르는 세금을 나라도 아닌 권문세족에게 바쳐야 했으며, 그런 현실을 견디지 못한 백성들은 도적이 되거나 유랑민이 되거나 또는 그 권문세족의 노비로 들어가는 참담한 시대였습니다.
그런 시대에 젊고 새로운 기운이 싹트는 것은 당연한 일. 신진 사대부라는 젊은 관료와 무장들이 나타납니다. 이름하여 저 유명한 정도전, 이성계, 조준, 정몽주 등, 주로 개혁성을 띄었던 대학자 목은 이색의 제자들이었습니다.
당시의 시대는 그런 혼란과 새로운 기운에 대한 백성의 염원과 희망이 동시에 드러난 시대였지요.
우리는 여기서 최영이라는 노장군을 한 번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는 근본적으로 기득권세력이었으며, 친원파이자 권문세족의 일원이었습니다. 그 자신은 상당히 청렴한 대신이었지만 그는 권문세족의 일원으로, 그들의 부패에 대해 묵인 또는 방조하는 태도를 보임으로써 분명한 한계를 드러내는 정치적 행보를 하고 있었습니다. 신진 사대부와는 잘 결합되지 않는 태도를 견지하고 있었지요.
그동안 전장에서 노련하고, 명장으로서 명성이 화려했으며 유능했던 그는 왠지 말년에 자꾸 정치적 판단을 오판하게 됩니다. 나라 전체의 국운이 쇠하여 백성의 원망이 그득하고, 그런 시대를 개혁하고자 나타난 젊은 신진 사대부들과 융화하지 못하며, 새로이 부상하는 성리학적 이데올로기에 기반하고 있는 정치적 현실을 잘 분석하지 못했던 것으로 신진 사대부, 즉 이성계의 요동정벌 불가론을 감정적으로 물리치며, 설득하고자 노력도 하지 않고, 곧바로 출정을 시켜 돌이킬 수 없는 정치적 감각을 보입니다.
정사에서는 이런 최영의 말년 행보를 잘 이해가 안 된다는 것이 통설이지요. 결국 그는 이성계를 상징으로 하는 신진 사대부에 의해 처단되고 말았습니다. 안타까운 일이지요. 그나마 부패한 권문세족 세력 중에서 거의 홍일점이다 시피 청렴성과 능력을 겸비하고 있던 대신하가 말년의 어이없는 판단으로 생을 마감했다는 것은 그 자신은 물론이요, 나라를 위해서도 결코 바람직한 일은 아니었습니다.
이런 최영과 이성계의 정치적 결과물로 인하여 '성계육'이란 말이 나왔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고려의 충신을 죽인 조선 창건자 이성계를 백성들이 그 원한을 풀어준다는 것으로 마치 돼지비계를 이성계살 씹는다는 것으로 본다는 것이지요. 주로 당시의 고려 수도를 중심으로 한 평안도와 경기도 지역에서 흘러 온 말입니다.
그런데 정말 그랬을까요? 개성의 덕물산이라는 곳에서 최영의 혼을 모시고 굿을 할 때, 돼지를 올리고 굿이 끝나면 그 돼지 살을 사람들이 씹는다는데서 나왔다는 그 설이 과연 타당한지 한 번 살펴보자면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닌듯 합니다.
신진사대부의 추대로 왕에 오른 이성계와 그 세력이 새로운 정치세력으로 권력을 잡았다면, 그 역사적 사건으로 몰락한 세력은 부패와 부정, 그리고 말할 수 없는 권력의 횡포로 백성을 도탄에 빠뜨리고 결국 나라마저 망하게 한 권문세족 아니었겠습니까?
급진적 개혁파이자 천재 정치가인 삼봉 정도전과 유능하고 유연하며 능력있는 정치인 조준 등의 노력으로, 백성을 도탄에 빠뜨린 핵심 사안이었던 토지 문제를 개혁하고 세법을 '과전법' 으로 돌려 백성들의 숨통을 돌려놨습니다. 그리고 이 건국 세력들은 차분하게도 정치적 안정을 찾아갑니다. 권력을 바꾸는 과정에서도 일종의 쿠테타임에도 불구하고 소수만을 희생하는 아주 세련된 과정을 밟지요.
그렇다면 과연 백성들이 정말로 부패하고 자신들을 나락으로 떨어뜨렸던 구 세력 즉 권문세족을 지지했을까요? 아니면 새로운 세력인 왕조 창건자들을 지지했을까요? 그것은 당연히 후자를 지지했을 것임을 유추하기 어렵지 않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성계육이란 말이 나돌았을까요? 그것은 다음의 두 가지 정도를 생각해 볼 수가 있습니다. 첫째는 부자는 망해도 삼년은 간다는 속설이 있듯이 아직까지 남아 있던 권문세족의 부류들이 덕물산 밑에 가서 나름대로 자기들의 부류에 속하면서도 백성들의 원망을 덜 들었던 최영의 원혼을 달랜다는 핑계를 삼아 이성계에 대한 저주의 한 표현이 민가에 나돌았을 가능성이고, 또 하나는 결국 동서 고금을 막론하고 토지 문제는 바로 권력과 기득권과의 직결된 문제로써 수도를 개성에서 한양으로 천도해 버렸던 이성계에 대한 개성의 토호들과 지주들의 저주가 아니었나 생각됩니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지난 행정도시 문제로 시끄러웠던 현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고, 결국 강남에 거의 거주하는 헌법재판관들에 의해 행정도시 이전의 문제는 위법으로 판결된 것을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같은 세력이었던 박정희의 천도 계획마저도 무력화 시켜버렸던 오늘날 기득권 세력들이 과연 노무현 대통령이 그 계획을 실행해 버렸다면 그들은 아마도 '무현육' 이라는 왜곡된 역사속설을 민간에 유통시켰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하여간 여러가지 떠오르는 잡념들이 많습니다. 같은 쿠테타라도 소수의 희생으로 마감하며, 도탄에 빠진 백성들을 위무하고 정치적 안정을 찾아갔던 사람들과, 역사의 질곡 속에서 항상 양지만 좇았으며, 명분도 없는 쿠테타를 통해 수없이 많은 인명을 18년 동안 앗아가고, 사람의 인생을 비틀어 놓은 박정희나, 2000 여명의 죄없는 광주 민중을 학살하고 역시 명분 없는 쿠테타를 한 전두환 일당 들의 오랜 군사 독재와는 그 성격과 철학적 기반에서부터 전혀 다름을 볼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정말 오늘날 어쩌면 감정이 북돋아 '성계육' 이라는 일종의 왜곡된 역사 속설보다는 '정희육' 또는 '두환육' 이라는 말이 회자 되지 말란 법이 없을 것 같습니다.
'갱제'를 살리겠다는 사람은 나라를 외환위기로 몰아 넣어 망조가 들게 하더니, 10년 뒤 또 한사람, '갱제'를 무기로 대통령에 오른 사람은 여전히 똑같은 모양으로 국민을 거의 도탄에 빠뜨리고 있습니다. 오호 통재라~ 제발 왜곡된 형태가 아닌 재대로 된 평가 속의 '명박육' 이란 말은 결코 회자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출처:국참네트워크(단재몽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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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계육(成桂肉)의 유래
리치코바 조회수 : 352
작성일 : 2009-02-09 16:25:18
IP : 118.32.xxx.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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