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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와 법의 지배>를 읽고
시나 제 글을 읽고 위 책을 한 번 읽어봐야지 하는 생각이 드신다면 저로선 글을 쓴 보람을 찾을 수 있을 것입니
다. 제 글이야 워낙 허접해서 그러기 힘들겠지만...;;; 글을 좀 수정하였습니다.
1. "섭리의 힘"
한인섭 선생님께서 쓰신 <5.18 재판과 사회정의>이라는 책을 전에 읽었습니다. 워낙 성실하지 못한 탓에 다 읽진
못하고 진도가 안나가서 지지부진 하다가 중간에 약간 포기상태지만요. 아무튼 (적어도 제가 읽은 부분에서는)
위 책에서는 5. 18과 관련된 법적 책임-그 수사 과정, 공소제기 과정, 공판 과정 상의 많은 법적 쟁점들과 관련된
논의이지요-, 그리고 그 이후의 역사적 책임에 관해서 쓰고 있습니다. 다들 아시다시피 김수환 추기경님께서는,
무수한 우여곡절 끝에 결국 (부족하지만) 전두환, 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이하에서는 전직 대통령들에 관해서는
직책은 생략하고, 성명만 쓰겠습니다.)의 법적 책임을 묻게 된 과정에 관해서 "이 과정은 정말 섭리의 힘이라고 밖
에 달리 표현할 말이 없다"고 하신 바 있지요.
무수한 사람들이 무고하게 희생되었지만, 오늘까지도 아직 충분히 해명되지 못한 부분이 많은 5월 광주. 1987년
민주화가 시작된 이후, 광주 "민주화운동"에 관해서 진상을 규명하고 책임을 추궁해야 한다고 많은 사람들이 꾸준
하게 문제제기를 했었습니다. 그럼에도 책임 추궁은 지지부진하다가 1995년 급기야 전두환, 노태우의 내란죄 등
에 관해서 공소시효가 만료될 지경에 이르렀고, 각계각층에서는 5.18을 이렇게 지나가게 할 수는 없다고 소리높
혀 외치게 되었지요.
이 와중에 우리의 검찰은 무엇을 하였을까요.
처음부터 검찰은 처벌의지가 별로 없었습니다. "성공한 쿠테타는 처벌할 수 없다"는 해괴한 논리로 전두환, 노태
우에 관해서 기소유예 처분을 내렸었지요. "기소유예"란 결국 죄는 지었지만 국가발전에 기여한 공로 등 여러 정
상을 참작해서 이번에 한해서 "봐준다"는 것입니다. 아마도 김영삼 전 대통령의 의지를 반영한 결정이었겠지요.
김영삼 전 대통령께서도 당시에 유명한 말씀을 하셨었지요. "역사가 책임을 물을 것이다." 정말 지나고 나서 요즘
다시 생각해봐도 헛웃음만 나오는 명언이셨지요. 진상규명도 안되었는데, 어떻게 역사가 책임을 묻는다는 것인
지? 그러다가 대학가의 동맹휴업에서부터 시작해서 연일 계속되는 집회, 시위, 각계각층에서 쏟아지는 비난,
그 이외에 충분히 밝혀지지 않은 다른 배경 등에 따라 결국 김영삼이 "중대 결심"을 하게 되시고, 검찰은 수사를 재
기하게 되지요. 그리고 기소, 공판, 판결이 이어졌습니다. 이 때 김영삼이 "중대 결심"을 하게 된 배경이 무엇이었
는지에 관해서는 아직 충분히 밝혀지지 못한 것 같습니다만, 제 생각에는 전두환, 노태우 및 그와 관련된 정치세
력들을 제거함으로써 확실히 당을 장악하려는 김영삼의 생각이 반영된 결과가 아닐까 합니다. (그와 관련된 자료
는 아직 충분히 검토하진 못했습니다;;; 비자금 때문이려나?) 뭐 여러가지 의문이 남긴 하지만요.
5.18 재판이 진행되는 과정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5. 18 재판은 여러가지로 분석을 해봐야 할 중요한 사안인데
요. 우리 사회에서 검찰이 시민사회의 요구를 받아들여 "정의의 실현"에 나섰고, 그에 따라 권력형 범죄의 "수
괴"가 처벌된 거의 유일한 사례니까요. 그 과정은 그야말로 "신의 섭리"와도 같이 진행되었고, 그런 만큼 5. 18 재
판은 "풍부한 광맥"이라고 불릴 정도로 다양한 쟁점들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 재판이 이루어지기까지의 과정도
그렇고, 재판 자체도 그렇지요. "별들의 재판"이자 "건국 이래 최대의 재판"이라고도 불렸으며, 재판부조차도 "상상
을 초월하는 어려운" 재판이었다고 실토할 정도의 재판이었으니까요. 제가 5.18 재판과 관련해서 관심을 가지는
부분은 법의 지배가 실현되기까지의 과정입니다.
우리는 "삼성 재판"을 봤습니다. "론스타 재판"도 보았지요. <민주주의와 법의 지배> 서문에서 최장집 교수님이 지
적하셨듯이, 특히 삼성 재판은 민주주의와 법의 지배가 서로 충돌하는 중요한 사례입니다. 또한 결국 검찰이 정의
의 실현에 나서지 못했고, 그에 따라 권력형 범죄가 뭍혀지는 사례였지요. (물론 이렇게 단정적으로 말할 수 없는
여러가지 복잡한 측면이 있겠지만요.)
삼성 재판에서도, 그 이외의 많은 사례에서도 실패했는데, 왜 5.18 재판에서는 (불완전하나마) 성공할 수 있었는
가. 도대체 우리 검찰은 어떤 상황으로 몰고가야 권력형 범죄의 처벌에 나설 수 밖에 없을까. 어떤 방식으로 압박
해야 검찰을 움직일 수 있단 말인가. 어떤 조건을 만들어 주면 검찰이 나서려고 할까. 또 어떤 상황 또는 여건을 만
들어 줘야 법원이 권력형 범죄에 관해서 "속이 시원하게" 강력한 처벌을 내릴 수 있을까.
<민주주의와 법의 지배>는 위와 같은 의문들에 조금이나마 답을 줍니다.
특히, 11장의 "정치적 무기로서의 법의 지배", 9장 "수평적 책임성 도구로서의 법원"을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여기에는 프랑스와 이탈리아, 그리고 마지막으로 스페인에서 각국의 법원과 검찰이 정치적으로 중요한 사건들에
관해서 어떤 행동을 했는가를 대략적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2. 마니풀리테
전에 영화관에서 <공공의 적 2>를 보았습니다. 친구가 하도 재밌다고 해서 한 번 보게 되었지요. 아시다시피 <공
공의 적 2>는 설경구가 검사 역으로 출연해서, 오만 가지 나쁜 일은 다 하고 다니는 학교 재단 이사장 역인 정준호
를 처벌하는 내용이지요. 정준호는 재산 상속 받으려고 자기 아버지도 죽이고, 악행을 목격한 중요 참고인을 매수
하고, 정치인에게는 뇌물을 주고, 사건을 조사하는 검찰 수사관도 죽이고, 급기야 검찰 수사가 시작되어 자신의
처지가 위태로워지자 자신의 수족이었던 엄태웅조차 버리고 재산을 처분하고 해외로 뜨려고 하다가 엄태웅이 배
신감에 뒤통수 때리는 바람에 결국 발목이 잡혀서 처벌받지요. (제가 영화를 본 지가 좀 오래되어 내용이 맞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뭐, 마지막엔 부장검사, 검사장까지 신분증을 반납할 각오로 정치권의 외압을 이겨내는 모습
도 나름 숙연하게 그려져 있지요.
저는 <공공의 적 2>를 보는 내내 뭔가 불편했습니다.
도대체 왜 그랬을까... 뭐가 불편했을까... 하는 생각이 자꾸 났지요. 나름대로 대답을 찾게 되었는데요. <공공의
적 2> 같은 노골적이고 단순한 구도를 가진 검찰 찬양 영화야말로 현재의 검찰의 모습을 제대로 보지 못하게 하
고, 권력형 부패의 청산을 오히려 가로막는 면이 있기 때문에 그렇게 불편했던 게 아닐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설
경구가 정준호에 대한 개인적 원한을 너무 드러내는 점에서부터 오로지 나쁜 점뿐인 정준호라는 인물, 부하검사
를 "쪽팔리게" 하기 싫어서 수사를 지원해주는 검사장까지. 저처럼 별로 아는 것이 없는 사람에게조차 현실은 <공
공의 적 2>와는 달리 훨씬 복잡합니다. 결국 부패 청산이란 검사 하나가 마음 먹고 "미친 놈"처럼 휘젓고 다니면
가능하다는 게 <공공의 적 2>가 말하고 싶은 내용인 것 같은데요. <공공의 적 2>는 현실의 어떤 면도 제대로 비춰
주지 못하고 있습니다.
권력형 부패의 청산이란 굉장히 특별한 조건 위에서만 가능한 것 같습니다. 상시적으로 부패의 청산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제도화"시키는 일은 더더욱 어렵구요. 모두가 권력형 부패 청산의 한 모델로 알고 있는 이탈리아의 마
니풀리테 조차도 상부로부터 자율적인 검사, (검사보다 더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볼 수 밖에 없는) 언론, (더이상
이탈리아 기민당과 결탁할 필요가 없었던) 여전히 부패한 거대 기업가들이 암묵적으로 동맹을 맺은, 그야말로 "우
연한" 결과라는 주장이 많았습니다. 마니풀리테의 결과로 이탈리아 정치가 공동화된 상태에서 갑자기 혜성처럼
베를루스코니가 등장해서 이탈리아 언론 및 이탈리아 정치를 장악해버린 후에는 마니풀리테가 상당히 힘을 잃었
으며, 급기야 요즘에는 베를루스코니에 관해서는 이탈리아 검찰이 수사할 엄두조차 못내고 있는 상황이니까요.
마니풀리테로 유명한 바로 그 "자율적인" 이탈리아 검찰이 말이지요. (애당초 마니풀리테 수사 당시부터 언론을
소유하고 있는 "피아트 그룹" 등에 관해서는 이탈리아 검찰이 상대적으로 훨씬 조심스레 수사했었지요.)
스페인의 사례를 보면 더욱 분명합니다. 스페인은 "부패의 청산" 내지는 "법의 지배"을 빌미로 프랑코 정권 이후에
인기가 높았던 사회당의 곤잘레스를 보수 야당인 국민당이 무너뜨렸고, 이 와중에 "자율적"인 검사들이 큰 역할
을 했지요. 국민당은 곤잘레스를 무너뜨린 후엔 검사들을 앞세워 좌파 언론을 탄압하고, 언론을 장악했지요. 이
모든 것이 "부패의 청산"을 기치로 내세워서 행해진 일들입니다. 마라발의 주장대로 검사가 자율적-혹은 "독립
적"-이라고 해서 정치적으로 중립적이라고까지 기대할 수는 전혀 없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 반대로 자율적인 검사
들-혹은 판사들도-이 정치적으로 편향적인, 그것도 보수 기득권 층을 옹호하는, 결정을 내린 적이 많지요.
3. 나름대로 내린 결론 -잠정적인 결론일 뿐입니다만-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제가 <민주주의와 법의 지배>를 읽고 특히 느낀 점은 바로 이것입니다. 검찰 수뇌부의 지
시에 구애받지 않는 "자율적"인 검사라고 해서 정치적으로 중립적인 검사라고 기대할 수는 없다는 것이죠. 5. 18재
판의 경우 전혀 자율적이지 않은 검사들이 비자금 의혹 등과 "국민의 힘"에 등떠밀린 김영삼 대통령의 지시를 받
아 결국에는 전두환, 노태우의 처벌을 이뤄냈으며, 삼성 재판의 경우 적어도 명목상으로는 자율성이 보장되어 있
었던 특별검사들이, 그리고 재판부가 피고인들에게, 일반인이 잘 납득하기 어려운, 관대한 처벌을 내렸지요.
참여 정부 시절에 "공직자 비리 수사처"(이름이 정확히 맞는지 모르겠습니다.;;)라는 조직을 만들자는 논의가 있었
고, 조국 교수님은 <성찰하는 진보>라는 책에서 특검을 상설화하자는 주장을 펼치신 바 있습니다. 이런 논의들은
모두 "자율적"인 검찰 조직을 만들어서 움직일 수 있도록 해주면, 우리가 그토록 바라는 "부패의 청산"을 이뤄낼
수 있다는 전제를 깔고 있는데요. 저는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저는 '지금 우리가 어떤 "제도"를 하나 도입하는 것
만으로 정의를 실현하기에는 아직 역량이 부족하지 않은가'하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특히, 삼성 특검을 보면
서 그런 생각이 많이 들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자는 이야기냐.
제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경험의 축적'입니다. 심상정 대표가 그런 표현을 쓰신 적이 있었던 것 같은데요. "되
돌릴 수 없는 진보의 경험"을 축적해 나가자는 것입니다. 우리는 참여 정부 시절에 과거사와 관련된 꽤 많은 위원
회들을 봤습니다. 그 위원회들은 여러가지 중요한 활동들을 했습니다. 위원회들의 활동에 관해서 보수언론들
은 "위원회 공화국"이니 하면서 많은 비판들을 했었는데요. 제 생각에는 이런 위원회의 활동들이 정말로 제일 중
요하다고 보입니다. 미래의 부패 청산을 위해서 먼저 "과거사 청산"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부패 청
산의 모델을 하나하나 만들어 나가자는 것이지요. 이런 문제의식을 가지고 "경인문화사"에서 출판한 <공익과 인권
> 시리즈 <재심, 시효, 인권>이라는 책을 읽어보는 것이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도대체 맘에 들지 않는 어정쩡한 글이지만, 일단 여기서 글을 끝맺기로 하겠습니다. 제가 아직 내공+글재주가 부
족해서 이런 커다란 주제에 관한 글을 쓰기에는 역부족이구나...하는 생각이 많이 드네요. 에공. 휴......
1. 자유
'09.1.2 3:31 PM (211.203.xxx.58)지난 번 쓰셨든 글 찾아 읽느라, 애먹었네요.(검색창이 밑에 있는 것을 모르고..ㅠㅠ:)
단순한 독후감이라고 하셨지만...저 같은 사람들에게는 많은 반성을 하게 만드는 글이네요.
읽다가 덮어둔 많은 책들도 떠올리게 되구요.^^:: 많은 자극이 되는 글이네요..
다음 글도 기대하겠습니다.
앞으로도 많은 지적 자산 나누어 주세요.2. 베를린
'09.1.4 11:24 AM (84.171.xxx.178)독립과 자율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나라의 교육이 초중고 및 법대와 사법고시와 연수원에 이르기까지 이런 교육이 전무했기 때문이겠죠.
정치적 편향성이 법률해석에 최소한의 영향을 주는 국가권력제도를 '법치주의'를 지향하는 사회에서 추구하는데 우리나라는 정치인, 중간권력자, 시민 모두 헌법에 적어놓은 것과는 달리 그리 바라는 것 같지는 않더군요. 저는 요즘 이 부분이 고민입니다. 형식적으로 겉돌고 있는 우리의 위선적인 '법치주의'라는 판례의 문구들에 대해서..3. 자유
'09.1.8 12:02 AM (211.203.xxx.23)글 마무리하셨군요.^^ 고생 많으셨습니다~!!
"되돌릴 수 없는 진보의 경험을 축적"하자는 말씀에 참 공감이 갑니다.
신년 초에 겪었던 우리 현실을 볼 때,
과연 진보된 의식은 후퇴하지 않는가 의심스러웠으나.
1차적 승리와, 그것이 끝이 아님을 파악하고 있는 사람들을 보면서...
다시 한번 희망을 생각해 보게 됩니다.
법에 대해,(특히 법의 정당성) 많은 것을 알고 싶으나...
원론적인 정도의 내용만, 그것도 수박 겉핥기 식으로만 읽은 사람이라...
짬 나실 때 가끔 이렇게 글 올려주고 그러세요.
많은 이들에게 자극이 되고 그럴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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