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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아이가 고교 자퇴하던 날

dull 조회수 : 1,801
작성일 : 2008-12-30 01:12:21
내 아이가 고교 자퇴하던 날



  

  

» 김진석/인하대 교수·철학

  

고등학교 1학년 아들이 결국 자퇴를 했다. 입학하자마자 자퇴시켜 달라고 조르던 아이였다. 우열반 편성·0교시 수업에 두발 검사까지 하면서 애들을 때리는 ‘한심한’ 학교를 아이는 싫어했고, 나와 아이 엄마도 이해는 했다. 그런 학교는 자퇴할 수도 있겠다 생각하면서도, 우리는 쉽게 동의하지는 못했다. 부모 마음은 그런 것이었다.
그래도 나는 아이에게 조건을 걸고 동의하기는 했다. “공부 말고 네가 하고 싶은 다른 일을 찾으면, 혹은 최소한 웬만한 대학 갈 정도의 성적을 내면, 동의하마”라고 말했다. 그러나 하고 싶은 것을 찾지 못하는 아이에게, 그걸 찾으면 학교 그만두어도 좋다는 말은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것만 새삼 깨달았을 뿐이다.

다시 몇 달 동안 아이와 줄다리기. 그 와중에 나는 스스로 불안과 공포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을 느껴야 했다. 대학 잘 나오지 못하거나 최소한 다른 잘하는 것 없으면 살기 어렵다는 것을 ‘사실’이라 말하면서, 사실은 나부터 걱정하고 겁을 내고 있었으니. 나는 아내보다도 상대적으로 불안과 공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결국, 나는 아이의 자퇴에 동의했다. 아이가 자퇴하는 날, 나는 하루 종일 내 안의 불안과 공포를 몰아내느라 조용히 바빴다. 그것들에 가까스로 맞서면서 나는 느꼈다, 부모 스스로 현재의 경쟁 시스템이 유발하는 불안과 공포에 맞서야 한다고. 그래야 아이들도 그 불안과 공포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그렇지 않으면 이 교육 전쟁은 끝나기 어렵다는 것을.

미친 교육에 대한 진보적 비판 자체가 우리 사회에 없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런 비판은 상당히 많다. 최근에는 교육 문제에서 총파업 수준의 혁명적 태도를 요구하는 이야기들도 꽤 있다. 그러나 이번에 내가 경험하고 느낀 바는 그런 ‘혁명적’ 요구와 좀 다르다. 지적인 비판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것이다. 이명박 정부가 학교를 투자와 도박 시스템으로 거칠게 몰아가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정부 정책 탓만 하거나 교육 체제에 대한 거대 담론적 비판만 해서는 크게 바뀌는 것이 없을 듯하다. 부모 스스로 ‘공포의 문화’에 맞서지 못하면, 공포의 문화는 바뀌지 않으리라. 정부가 공공연히 조장하고 또 이용하는 것도 바로 이 공포의 문화 아닌가?

물론 불안한 사회에서 자식이 공부를 잘하면 부모가 안도하고 기뻐하는 것은 충분히 이해할 만하다. 그러나 부모들이 불안과 공포에 사로잡혀 자기 자식은 그저 좋은 대학 가기만을 내심 바란다면, 공포의 문화는 장기 지속할 것이다. 특히 말로는 교육 체제를 비판하는 진보적인 부모들도 그저 자식들이 공부 잘하기만을 바라고 거기 기뻐한다면? 교육에 대한 지적인 비판은 지식인의 이기적 과시에 그칠 것이다. 말로는 비판했던 나도 사실은 겁쟁이였던 셈이다.

아이는 앞으로도 대안적 삶을 모범적으로 추구하는 신념은 없을지 모른다. 지금은 그냥 공포의 문화가 싫어 도망가는 것일 수도 있다. 그래도 좋다고, 나는 자신에게 말하고 또 말한다. 아이가 자퇴한 후 우리 집도 이제 별난 집이 되었다고 말하는 나를 보고, 아내는, 그리고 친구도 말했다. “뭐가 별나, 그게 정상이지.”

사실 내 말도 그 말이었다. 별나게, 삐딱하게 살아도 좋다는 뜻이었다.

김진석/인하대 교수·철학



IP : 59.18.xxx.196
2 개의 댓글이 있습니다.
  • 1. ^^
    '08.12.30 1:59 AM (118.32.xxx.61)

    왜 전에 아버지와 할머니를 살해한 대학생 있었죠.
    아버지는 모 대학교수였고 어머니는 조기유학 간 동생들 뒷바라지 하러 외국에 나가 있었던. 아버지가 그렇게 그 아이를 다그쳤다고 하더군요. 아니, 다그친 게 아니라 한국사회 수준을 봤을 땐 평균적으로 들볶았다고 해야 하나? 공부해라, 왜 공부 안 하냐, 공부해! 답답한 놈, 왜 이거밖에 못해! 대학은 어떻게 갈 거야, 한심한 녀석 같으니라구....

    전 그거 보면서 학벌사회의 비극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사례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KS 출신의 아버지로서는 정말 '순수하게' 화딱지가 났을 겁니다. 정말 답답하고, 내 유전자를 물려받는 아들놈 성적이 이만큼밖에 나오지 않는다는 놀라움, 당혹감, 자괴감... 학벌사회의 혜택을 가장 톡톡히 누렸기 때문에, 즉 한국에서는 그 과실이 정말로 달콤하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에 더더욱 아들이 높은 학벌의 소유자가 되기를 바랐을 텐데, 아이러니하게도 그 때문에 비극의 주인공이 되어버린 것이죠. 다시말해 그 사람에게 달콤한 열매를 가져다준 학벌사회의 강박이 그 사람을 비극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은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도 학부모의 각성(?)이 참 중요한 것 같아요. 저는 개인적으로 촌지 교사 얘기가 나오자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각자의 기억을 끄집어 내며 비토를 금치 못하는 것에 놀랐습니다. 그런 경우를 서울 전역으로 확대시키면 정말 적지 않은 숫자가 될 듯한데, 그러면서도 왜 부패에 관대한 교육감을 뽑은 것인지 전 정말 이해불가입니다.--;

  • 2. 저도 아침에 한겨레
    '08.12.30 9:19 AM (61.72.xxx.58)

    신문에서 읽으면서 감명 깊었습니다.

    공포가 스스로의 공포라는 부분요
    결국 부모가 자기가 겪은 모순을 그대로 자식에게 물려주려한다는 말이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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