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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을 비판하지 않는 교양은 휴지조각일 뿐

리치코바 조회수 : 318
작성일 : 2008-12-20 14:30:10
가토 슈이치, 한 교양인의 죽음



  한승동 기자  

  

» 가토 슈이치, 한 교양인의 죽음  

  

디아스포라의 눈 /

“전쟁을 비판하는 데 보탬이 되지 않는 교양이라면, 그건 휴짓조각일 뿐입니다. 전쟁을 되풀이하는 세계로부터 빠져나갈 출구는 교양밖에 없습니다. 그 길은 교양을 발판삼아 서서히 쌓아올리는 것일 테지요.” 가토 선생은 90년의 생애를 바로 자신이 말한 대로 살았고 이제 우리가 함께 탔던 객차에서 조용히 내렸다.


가토 슈이치 선생이 돌아가신 것을 오늘 신문(12월6일치 <아사히신문>)을 보고 알았다. 나는 인생을 열차와 같다고 상상할 때가 있다. 우리는 누구나 어떤 우연한 계기로 이 세상이라는 열차에 타게 된다. 어떤 시대에 어떤 사람들과 같은 차에 함께 타게 될지는 개인의 뜻대로 선택할 수 없다. 일본이 조선을 식민 지배하고 조선이 분단된 결과 나라는 인간은 우연히 20세기 후반, 일본이라는 차에 함께 타게 됐다. 그것 자체는 그다지 유쾌한 일은 아니지만 우연히 함께 탄 승객들 중에 가토 슈이치라는 ‘먼저 탄 승객’(선객)이 있었던 것은 내겐 작은 행운이었다. 때가 오면 누구나 그 차량을 내려간다. 지금 선객 가토 슈이치 선생이 객차에서 내렸다.

가토 선생을 아는 사람이 한국에는 많지 않을 것이다. 그는 1919년생이다. 한국식으로 하면 올해 90살이다. 연령상으론 그런대로 불만 없는 편안한 죽음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번에 부고를 접하고 놀라지 않았다. 다만 “소중한 선객이 하차했구나” 하는 감개가 있을 뿐이다. 아직도 이 시대는 그가 필요하건만.

가토 선생에겐 <양의 노래>라는 자서전이 있다. 1968년에 나왔다. 꼭 40년 전이니까 가토 선생이 50살 때다. 당시 그는 캐나다의 대학 교단에 있었다. 18살 고등학생이었던 내게 그 책의 인상은 선명했다. 거기에는 2차대전 전 일본 엘리트 가정에서 태어난 청년이 수준 높은 교육을 받고 고상한 예술을 이야기하며 리버럴한 사람들과 사귀면서 성장해가는 모습이 그려져 있었다. 그 내용에 나는 강한 동경과 동시에 심한 반감을 느꼈다. 1968년이라면 전세계에서 베트남 반전운동을 비롯해 기성세대에 대한 젊은이들의 반란이 번져가고 있던 시대다. 일본에서는 전공투(전학공투회의)가 ‘대학 해체’를 외치며 격렬하게 싸우고 있었고, 한국에서는 박정희 군사독재에 반대하는 학생·지식인들이 어려운 싸움을 계속하고 있었다. 그 투쟁의 치열성에 비하면 가토 슈이치는 너무나도 미온적으로 보였다. 어느 일본인 학우가 나에게 <양의 노래>를 권했을 때 나는 내심 그를 경멸했다. 요컨대, 그대는 엘리트적 교양주의를 동경하고 있는 데 지나지 않아, 현실의 투쟁은 훨씬 더 치열하고 비타협적인 것이야, 라고.

그로부터 긴 세월이 흘렀다. 그 당시 반체제를 외쳤던 젊은이들 대다수는 그 뒤 경제성장 과정의 수혜자가 됐고 지금은 정년퇴직 시기를 맞고 있다. 1990년대 이후 일본 사회는 급속히 우경화했으나 거기에 대해 그들은 거의 무저항이었다. 그러기는커녕 “나도 옛날에는 싸웠어” 따위의 공허한 노스탤지어에 잠겨 저항하는 젊은이나 소수자에게 냉소를 퍼붓고 있다. 그런 황량한 풍경 속에서 문득 정신을 차려보니 <양의 노래>의 저자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말하자면 수학적인 명석함으로 평화와 인권이라는 보편적 가치를 위해 계속 싸우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생의 마지막 5년 동안 평화헌법을 지키기 위한 ‘9조 모임’에 헌신했다.




고교 시절에 그토록 거부감을 가졌던 가토 선생을 내가 실제로 가까이서 뵙게 된 것은 2000년 무렵부터다. 번득이는 커다란 눈의 안광은 노령인데도 사람을 외포(畏怖)에 젖게 하는 힘이 있었다. 2003년에는 라디오방송에서 가토 선생과 4회에 걸쳐 긴 대담을 한 적이 있다. 다수가 무관심과 냉소주의에 사로잡혀 있는 한편으로, 이라크 전쟁을 비롯한 폭력은 브레이크 장치 없이 마구 자행되고 있는 시대에 ‘교양’은 어떤 역할을 수행할 수 있을까? 그것이 내 문제의식이었다. 그 대담 때 나는 젊은 시절의 반감을 생각해내고는 “선생은 조부가 대지주였고 부친은 의사였던 혜택받은 집안 출신이지요”라고 교양의 특권성을 화제로 삼았다. 그러자 가토 선생은 “나는 부당한 혜택을 받았다고 생각합니다”라며 진지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리고 이런 얘기를 했다. “전쟁은 몹시 가혹하고, 식민지주의는 극단적 차별을 폭력으로 강제하는 일이지요. 그런 전쟁을 비판하는 데 보탬이 되지 않는 교양이라면, 그건 휴짓조각일 뿐이라 생각합니다. 전쟁을 되풀이하고 있는 세계로부터 빠져나갈 출구가 있다면 교양밖에 없으며, 거기에 거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희망은 거기밖에 없어요. 넓은 의미에서 교양은 정글의 법칙, 곧 강자가 이기는 약육강식의 세계로부터 인류가 탈출하는 길입니다. 그 길은 교양을 발판삼아 서서히 쌓아올리는 것일 테지요. 그것이 지금 매우 무기력하게 보이는 것은 쌓아올리는 일이 어쩌면 어렵기 때문일 겁니다. 때려부수는 것은 하루면 됩니다.”

가토 선생은 90년의 생애를 바로 자신이 말한 대로 살았고 이제 우리가 함께 탔던 객차에서 조용히 내렸다.

위의 대담까지 포함해서 나는 2005년에 일본에서 가토 선생, 노마 필드 시카고대 교수와 함께 쓴 책을 출간했다. 그 책은 <교양, 모든 것의 시작>(노마드북스)이라는 제목으로 한국에도 번역 출판됐다. 그 한국판 서문에 나는 다음과 같이 썼다.

“본서 저자의 한 사람인 가토 슈이치 선생은 전쟁 때부터 지금까지 지식인으로서의 저항을 관철해온, 일본에서는 드문 인물이다. 물론 전쟁 중의 그의 저항은 자신의 내면에 머무는 소극적인 것이었고 전쟁을 막는 효과도 없었던 게 사실이다. 하지만 그런 그가 90살을 눈앞에 둔 고령이 된 지금도 거의 절망적으로 보이는 일본 사회에서 평화헌법을 지키기 위한, ‘승산’이 희박한 싸움을 계속하고 있다. 가토 슈이치라는 인물은 도쿄대학 프랑스문학과를 기반으로 한 인문주의자 계보에 속한 지식인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사람들은 좌익이라기보다 오히려 리버럴한 휴머니스트라 불러야 하는데, 일본 근대사에서 가늘지만 귀중한 저항의 맥락을 형성하고 있다. 앞으로 그들과의 공동노력으로 인간을 ‘기계화’ ‘야만화’하는 힘에 저항하는 것이 한국과 일본뿐만 아니라 세계의 평화를 위해서도 매우 중요하다는 걸 믿어 의심치 않는다.” 한국에서 <양의 노래>를 번역할 계획이 있다고 한다. 한국의 독자가 가토 슈이치를 어떻게 읽을지, 꼭 알고 싶다.

서경식/도쿄경제대학 교수, 번역 한승동 선임기자
출처:한겨레신문

IP : 118.32.xxx.2
1 개의 댓글이 있습니다.
  • 1. 그러게요
    '08.12.20 3:20 PM (125.187.xxx.16)

    교양이란 게 알고보면 상식이라는거지요. 조금만이라도 남을 생각하고 조금이라도 인류와 지구를 생각해야 한다는 도덕심 같은거요.... 학교에서조차 인류학은 폐기되고 철학보다는 영어가 중요하게 다뤄지는 이 몰락의 시대... 안타깝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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