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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백수 다!!

해커 조회수 : 1,037
작성일 : 2008-11-27 12:51:39
D-day

내 나이 서른을 한 달 앞두고 백수가 되었다.

점심시간 10여분 전, 바로 밑의 찌니 씨가 로이터 메신저를 통해 메시지를 보낸다.

“차장님, 저 잘릴 듯해요.”

엥? 하며, 나는 답변을 보낸다.

“뭔 헛소리인겨…”

다시 온다.

“저 대표가 이따 보재요.”

찜찜한 느낌으로 나도 내 아웃룩의 이메일 계정을 봤다.
‘inbox’에 새로 온 이메일은 다름아닌 R대표에게서 온 것이었다. 살짝 긴장하며 이메일을 열었다.

“Danny, can we have a meeting 4P.M. today to a little catch up, will come and grab you.
Regards,
R”

직감이라는 게 있다. 전세계 금융위기가 어느 순간 개별 회사들의 구조조정으로 포커스를 옮겨가고,
단숨에 몸담고 있던 회사가 그 중의 하나가 되었음을 인지했을 때.
한국에 진출한 회사 내 그룹 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했던 IB그룹이 어제 30여명을 아웃시켰다는 소식을
오늘 아침에 들었을 때. 유일하게 아는 한 명의 리서치 그룹의 주니어가 아침에 같이 담배를 태우며
오늘 우리 그룹이 역시 레이 오프를 발표할 계획이라는 이야기를 했을 때.
나는 어느 정도는 예감을 하고 있었는지 모른다.

전날밤, 나는 진작에 가지고 있던 찜찜한 마음을 토로하고자 같이 일하는 세일즈 선배 둘에게 술자리를 권유했고,
그렇게 만들어진 자리에서 셋 모두가 만약에라도 그런 일이 발생하면 자기가 먼저 나가겠다느니 하는
마음에도 없는 말들을 하면서 결국은 얼마나 서로들 불안해 하고 있는지를 인정하고 이해했던 것이다.

1시 가까이에 끝났을 정도로 몸이 피곤해서였을까.
나는 마치 모든 것을 경험하고 어떤 일이 발생해도 끄덕없을 것 같은 사람인냥
이런 이메일로 말미암아 짐작되는 사실이라는 것이 그냥 귀찮을 따름이었다.

열 두시를 넘기 전, 나는 회사건물을 나와 ‘갱생병원’이라는 곳을 찾았다.
에이, 어떻게든 될대로 되라지, 하는 심정이었다. 네게 필요했던 것은 단지 휴식뿐이었다.
젠장, 일전에 회사에서 인플루엔자 예방 접종을 하며 간호사가 얘기했던 것은 말뿐이었을까.
술 먹고 쉬러왔다는 내 말에 그 간호사는 나이며, 주민등록번호며 시시콜콜한 내 개인정보를 캤다.
그것도 모자라, 나더러 일단 진료실로 들어가라 하더니, 진료실엔 의사 한 명이 한심하게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디가 편찮으세요. 저어, 불편한데는 없는데요. 아, 그럼 어디가 편찮으시다고 할까요.
음……저어, 어깨라고 해두시죠. 아, 그렇게 하겠습니다.

멀쩡하 어깨에 물리치료 장비를 잔뜩 붙이고 엎드려누워 생각했다.

“아아, 일단 그만두는 것은 기정사실인 것 같다. 이제부터 뭐하지….?”

마음을 정리하기 위해 애썼다. 만약 내가 오늘 그만두게 되는 것이 사실이라 할지언정,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별로 없으며, 어쩌면 나는 그 상황에 놓인 나를 동정조차 하지 않을지 모른다.

진료를 마치고 돌아온 나는 마음을 가다듬으려 했다. 노력할 필요까지는 없었다. 희한하게도.

나는 아직 확신할 수는 없었지만, 짐작은 했다. 그래서 만에 하나를 대비해 클라이언트들에게,
그리고 회사 동료들에게 굿바이 메일을 쓰기 시작했다. ‘Send’ 버튼만 누르면 되게끔 마무리를 지어놓았다.

드디어 오후 4시. 여의도로 외근 나갔던 전무님과 이사님이 15분 전에 급하게 불려 들어왔다.
모든 것은 귀결되어 가고 있었던 것이다.

이메일이 한 통 날라왔다. 서무대리였다. ‘혹시 대표님과 미팅 약속이 있으셨나요? 3층으로 내려오시라는데요.’

어제 다른 IB그룹의 30명이 아웃될 때, 그들은 모두 HR로부터 3층으로 내려오라는 통보를 받았다고 했다.
그 통보가 드디어 나에게 온 것이다.

나는 덤덤했다. 다행히도. 3층 데스크의 안내로 들어간 방에는 HR의 상무 한 분과 R대표가 있었다.
R대표의 표정에서 그도 적잖이 곤혹스러운 상황에 놓여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래서 나는 더 덤덤한 척 했다.

한국말이 능통한 R대표가 우선 한국말로 설명을 시작했다.
마켓의 상황이 너무 안좋다. 모든 그룹이 슬로우한 비지니스 상황에서 코스트를 줄여야 하는 상황에 직면했고,
윗선에서 한 방편으로 인력을 줄이는 것에 대한 지시가 내려왔다.
결코 개인적인 자질이나 능력의 평가로 결정된 것이 아니다, 라는 언급은 오히려 거슬렸다.
나도 마켓 상황을 이해하고 있고, 자리만 차지하고 회사에 돈 한푼 벌어다주지 못한지
2,3개월이 되었다는 것은 알고 있다.

나는 불편한 표정으로 말을 꺼내는 R대표에게 괜찮다는 표정으로 대꾸를 했다. 정말 괜찮은 것 같았다.
홍콩의 세일즈 헤드와 통화를 하고나서, HR의 상무가 해고에 대한 반대급부에 대한 설명을 시작했다.
나름 나쁘지 않았다.
근무경력에 비례하는 위로금과 정기휴가 보상비, 퇴직금까지 다하면 그다지 나쁜 조건은 아니었다.

“OK”

이로써 그 방에서의 협상은 끝났다. R대표가 옆 방에 전무님이 기다리고 있다고 말했다.
HR직원의 안내로 그 방으로 들어갔다. 사무실에서 내 옆자리에 자리한 전무님이 방에 서있었다.
술 몇잔만으로도 얼굴이 새뻘게지시는 양반이 정말 그만치 달아오른 얼굴로 나를 맞이했다.

전무님은 무슨 말로 시작해야 하는지 모르는 것 같았다. 결국 내뱉은 말이 ‘미안하다’였다.
자신도 어쩔 수 없었으리라. 외려 내가 전무님을 위로하는 형국이었다.
눈시울이 붉어지다못해 결국 안경 밑으로 눈물을 훔치는 모습에, 여태껏 한번도 표현한 적이 없었던,
동생처럼 여겼는데, 라는 말 한 마디에 그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40대 초반의 그는 강하게 자라온 자. 결코 누구에게도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던 사람이었다.

전무님과의 길지 않은 접견 후, 다시 HR 직원을 또 다른 방에서 만났다.
블렉베리와 아멕스 법인카드를 반납하고, 몇 가지의 서류에 사인을 했다.
그 사이, 혹시나 싶어 물었더니, 역시나.

최근에 외국계 IB들이 사람들을 자를 때의 절차가 업계에서 회자되곤 했었다.
대체로 미국계가 빡세다라는 평이 많았는데, 가장 최악의 경우가
윗사람이 담배 한대 피우자고 건물밖으로 나간 뒤, 미안하지만 이 시간부로 다시 들어올 수 없다, 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내 컴퓨터의 네트웤은 이미 끊겨 있었다.
즉, 더 이상 일년 반동안 사용해오던 내 컴퓨터를 더이상 열어볼 수 없다는 뜻이었다.
아까 미리 써놓은 두 개의 이메일도 날아가 버렸다. 참 살벌하구나.

짐을 싸는 사람은 둘이었다. 내 밑에 찌니 씨와 나. 그것도 서로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혼자가 아닌 둘이기에 덜 쪽팔린 건 사실이었다.
짐을 다 싸고 나니 박스 하나를 채우고, 종이백 하나와 빵빵하게 찬 가방이 전부였다.
나름대로 일년 반 이곳에 묻혀 일을 해왔는데, 해고 통지를 받고 싼 내 것들이라는 것은 그것이 다였다.

사무실의 다른 직원들이 건물 바로 앞 택시정류소까지 짐을 날라줬다.
대충 다른 부서 사람들과 인사를 마치고, 우리 부서 몇몇이 같이 배웅을 나와줬다.

먼저 짐을 날라준 사람들이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전무님이 자기도 담배 하나 달라고 했다.
일년 하고도 수개월동안 담배를 끊었던 그였다. 괜찮다고 몇 번을 얘기했지만,
전무님은 결국 담배를 입에 물고 불을 붙였다.
직속부하직원으로서의 나와 피우는 마지막 담배라고 말하면서.
그에게 저런 센친함이 있었는 줄 몰랐을 정도로, 나는 그를 안심시키는 편이었다.
나는 다 이해하고, 괜찮을 거다, 걱정하지 마라.

오늘 같이 짤린 찌니 씨와 난 한 방향이었다.
전무님은 굳이 삼만원을 찔러주며 모범택시를 타고 가라고 말했다.

찌니 씨가 오전에 오후에 다시 메시지를 보냈을 때, 나는 이렇게 답했었다.

‘마음 독하게 먹어.’

‘쪽팔리니까, 절대 울지는 마.’

그녀는 정말 택시가 출발할 때까지 태연한 모습을 보여주려고 했다.
하지만 택시 안에서 홍콩으로 출장가있는 트레이더와 내가 통화하는 소리를 듣고 난 뒤
옆에서 조금씩 훌쩍거리기 시작했다.

찌니 씨를 그녀의 집 앞에서 내려주었다.
내 밑에 있으면서 많이 도와주었고, 한없이 동생같았던 그녀였기에 참 고마웠다는 말을 하고 싶었다.
더구나 그녀는 자기 휴가를 내서 네팔에 자원봉사를 이 주 동안 다녀왔을 정도로 심성이 착한 사람이었다.
그런 그녀에게도 세상은 이렇게 모질었다.


집에 들어온 나에게 가장 큰 고민은 어떻게 아내에게 털어놓을 것인가였다.
어차피 피하거나 숨길 수 있는 상황도 아니다.
아내는 집에 들어오자마자, 택시에서 건 내 전화번호가 이상했다는 말을 꺼냈다. 그럴수밖에.
회사명의로 되어 있었던 휴대폰에 저장된 전화번호 목록들을 그대로 옮기기 위해
HR과의 면담 이후에 곧장 대리점으로 가 신규개통을 했던 터였다.
그리고 그 전화번호 뒤 네자리는 우리 집 현관 비밀번호였던 것이다.

아내에게 해줄 수 있는 말은 나는 괜찮다, 가 전부였다. 실상 그랬다.
아내를 데리고 나와 동네에 있는 독도참치에 들어갔다.
참치회와 술을 들여가면서 정말 나는 괜찮다는 것을 이해시켜야 했다.

나는 이 순간부터 백수다. 어제까지는 그래도 잘나가는 외국계 증권사의 차장이었지만,
지금부터는 정말 아무런 대책이 없는 백수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시절이 시절인데.
두고보시라. 이 백수의 하루하루가 어떻게 성장해가는지를.
그것이 비참하거나 초라할 수 있는 나의 오늘을 이렇게 길게 서술한 까닭이다.

한 잔 들어간 술이 나를 취하게 만드네. 잘 자라. 이제 백수생활은 시작일 뿐이다.


IP : 121.187.xxx.23
4 개의 댓글이 있습니다.
  • 1. ...
    '08.11.27 12:55 PM (58.121.xxx.153)

    맥퀴리 증권...사무직 외의 ib맨들 전체의 20% 감원.
    그런데 이게 끝이 아니라 1차 감원이라네요..
    눈물납니다 ㅠㅠ

  • 2. 유로아
    '08.11.27 1:51 PM (59.9.xxx.251)

    힘내세요.....얼마나 많은 생각과 고민들이 스쳐가실지... ㅠ.ㅠ

  • 3. ..
    '08.11.27 2:22 PM (211.189.xxx.101)

    29살에 외국계증권회사 차장이었고.. 글쓰는거 보니까 보통은 넘으시는데 어디가셔도 뭘하셔도 잘하실것 같아요. 화이팅임다.

  • 4. 작은겸손
    '08.11.27 4:46 PM (221.149.xxx.253)

    여기서도 뵙네요. ^^
    힘내세요!! 파이팅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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