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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픈 쎄일

시애틀에서 조회수 : 1,623
작성일 : 2008-11-25 12:53:13
제가 아끼는 양복 세 벌이 있습니다.
10년전, 오리건주에서 살 때, 본국에서 이른바 IMF 세일이라고 하여 속칭 보따리장수들이
미국까지 물건을 들고 와 팔던 양복이었습니다.

미국의 어느 기성품보다도 훨씬 폼나고 멋있는 이 양복은,
별로 양복 입을 일이 없던 제게 특별한 일 있을 때마다 입는 옷이 되어 주었고,
질은 얼마나 좋은지 산 지 10년이 넘도록 늘 입을 때마다 새로운 느낌을 줍니다.

물론 양복이라는 옷의 특성상, 노동자로 살아가면서 별로 양복 입을 일 없는 미국에서
몇번 꺼내입을 일도 없다지만, 그래도 원단이나 재봉질의 우수함이 그대로 드러나는 것이 한국 옷입니다.

실제로 이곳에서도 한국산은 이제 '고급품'으로 쳐 줍니다.
미국에 처음 올 때만 해도 월마트에나 깔려 있던 한국 의류나 신발류가
지금은 '메이시즈'나, 혹은 고급 전문 몰 등 백화점 내 고급품 매장에만 들어와 있다는 사실도
우리 공산품의 우수한 품질을 그대로 입증해 줍니다.

그런 우수한 우리제품이 이른바 '떨이 세일' 상품으로 전락하는 것을 보는 것은,
그 당시에 제겐 참으로 기분 찜찜한 일이었고, 그 당시엔 양복 하나 사 입을 형편도 아니었지만,
아내와 저는 이것도 그냥 애국의 한 방편이다 싶어서 양복을 새로 사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저는 10년이 넘도록, 그 양복들을 기쁜 마음으로 입고 있습니다.


그 전해, 저는 H 일보 시애틀 지사에서 기자로 일하고 있었습니다.
지사장은 어느날 1면 탑 기사의 제목을 커다란 중고딕체로 이렇게 달아놓고 있었습니다. "1달러=9백원".

그때까지 7백-8백원선을 왔다갔다 하던 환율이 갑자기 9백원대로 올라간 것도,
미국에 살던 우리들에겐 정말 큰 뉴스였습니다. 그러나, 환율은 거기서 진정되지 않았습니다.
어느날 1천원대를 돌파해버린 환율은 기어이 1천 2백원, 1천 3백원...
말 그대로 자고 일어나면 환율이 올라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폭은 1천 5백원 선도 금방 넘어버리고 있었습니다.

지사 영업부를 관리하던 K 형이 농담처럼 이렇게 말했습니다.

"자고 일어나면 봉급이 올라가 있네..."

씁쓰름한 농담이었지만, 그것은 사실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곧 실물경제의 변화가 되어 저희 옆에서 생활의 변화를 몰고 왔습니다.
한국이 IMF 관리체제로 들어가자마자, 우리는 그것을 일상의 곳곳에서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일단 한국마켓의 물건값들이 떨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더니 IMF 특선 명품 세일이라 하여,
남자 양복이 가장 먼저 찾아왔습니다. 아마 본국에서 살기 어려워지니 일단 그 상품의 특성상
불황이면 가장 먼저 수요가 떨어지는 상품들이 들어오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더니 구두들이 들어오고, 전엔 구하기 힘들었던 한국산 플라스틱 바가지나 손톱깎기 같은 잡화류도
대량으로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 물건들은 동포사회 뿐 아니라, 일용품 잡화 소매를 하는
그로서리 업계에도 대량으로 팔렸고, 미국인들에게도 꽤 불티나게 팔리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은 '슬픈 세일'이었습니다. 힘들여 만든 물건을 제 값도 못 받으면서, 그것도 폭락한 원화 때문에
세상에서 가장 잘 만든 물건들을 미국에 와서도 떨이로 내 놓아야 하는 아픔의 세일이었습니다.
이 때문에 희희낙낙하며 좋은 물건 싸게 샀다고 기뻐할수만은 없는 것이 제 진정한 속내였고,
이 세일들에 대한 안내 기사를 쓸 때, 기분은 더욱 착잡하고 진지해졌던 기억이 납니다.

한국에서 오는 관광객들로 살아가는 여행사, 숙박업체, 본국인 상대 식당 들은 직격탄을 맞기 시작했습니다.
그 해 겨울은 이상했습니다. 그리고 과거에 미국 동포들을 '똥포'라 불렀던 사람들이 우리에게 전화를 걸어
"미국에 갈 방법이 없을까"라며 물어보곤 했습니다.

그리고 이른바 IMF 세일은 계속되었습니다. 우리는 열심히 이 물건들을 사 주었습니다.
이곳의 한인회 등 동포 단체장들도 한국에서 물 건너온 옷들을, 책들을, 반찬거리들을 사 주십사 하며
동포사회에 계속해 호소했습니다.
캐나다 국경을 월경하다가 잡힌 한국인들의 이야기는 심심치않게 이곳 로컬뉴스를 장식했습니다.
그리고 저도 한번은 이민국 철창 뒤에 앉은 어느 중년 남성과 젊은 여성을 취재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언젠가부터 경제가 조금 나아졌다 싶었습니다. 그리고 한국에서 오는 관광객들도 다시 늘어났습니다.
모든 것이 다시 활황으로 돌아가는 듯 했습니다.

그러나 한국이나 미국이나, 부동산 값이 미쳐서 돌아간다는 것은 조금만 눈 부릅뜨고 바라보면
알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지난 2001년에 19만달러인가를 주고 샀던 우리 집 가격이 32만달러로 뛰어 있었을 정도로,
집값, 그리고 비즈니스 가격들도 뛰어올라 있었습니다.
프라퍼티까지 해서 60만달러에 샀던 부모님 가게는 어느새 2백만을 호가하는 상황이었고,
사방에서 새로 집 단지를 짓는 것이 눈에 느껴졌습니다.
어제까지 숲이었던 곳이 오늘은 집터가 되어 있는 상황은 이게 뭔가 잘못되어간다는 것을
조금씩 감 잡게 해 주었습니다. 사람들은 자기 집 에쿼티를 빼서는 투자 목적으로 새 집을 샀습니다.
이런 방법으로 재미를 본 사람들은 좀 잘나간다는 부동산들에 대해 묻지마 투자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때부터는 거의 '광풍'이라는 말이 어울릴 정도였습니다.

어느날, 누군가가 서브프라임 위기를 지적했을 때 사람들은 코웃음을 쳤습니다.
사람들의 목표는 오직 소비에 있는 듯 했습니다.
연비도 나쁜 커다란 미국산 SUV를 몰고 다니는 것은 이곳에서도 부의 상징이었습니다.

허머에서 나온 H2 를 몰고 다니던 한 친구는 부동산에 계속 투자를 하던 친구였습니다.
이 흥청망청의 분위기는 뭔가 이상했습니다. 적어도 제겐, 그렇게 느껴졌습니다.
그것이 정확히 뭔지 감을 잡지는 못했지만, 저는 이 분위기에 휩쓸리지 않으려 애썼습니다.

심지어는 아내마저도 "우리, 이제 큰 집으로 이사를 하자"며 여기저기 집을 보고 다닐 때,
사인을 바로 앞두고 저는 "이건 아니다. 우리가 이 페이먼을 감당하며 큰 집으로 갈 이유가 없다.
우리의 작은 행복을 그냥 지키자"며 지금 살고 있는 집에 눌러앉을 것을 주장했습니다.
아내는 서운해했지만, 그것은 나중에 다행히 현명한 판단이었던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그리고 실지로 거품 붕괴가 시작됐습니다. 처음엔 애리조나와 네바다 같은 신흥 투자처에서부터, 거품은 그렇게 쉽게도 꺼졌습니다. 인랜드 엠파이어라고 불리우던 캘리포니아 LA 동쪽 샌버나디노 같은 경우,
'포어클로져 밸리'라고 불리울 정도로 주택 차압이 횡행했고,
자신의 홈 에쿼티를 빼내 투자했던 수많은 사람들이 그대로 넘어가버리고 말았습니다.

일단 꺼지기 시작한 거품의 붕괴속도는 사람들 마음속에 혹시나 하는 모습으로 자리잡고 있던 불안감을
현실로 만들면서, 그들이 가지고 있던 무한성장에 대한 기대가 얼마나 허망한 것이었는지만
되새겨 주고 있었습니다.

일단 부동산을 하던 친구들이 옆에서 허덕이기 시작했습니다.
부동산 가치가 폭락하면서, 이에 관련된 융자 역시 갑자기 하늘에 별따기가 되기 시작하고,
부동산 매매 자체가 거의 끊기다시피 하자 이에 관련된 여러가지 업종들 - 융자, 에스크로,
심지어는 집청소에 집수리까지 - 의 경기가 완전히 멈춰버리다시피 했습니다.

그때부터는 천천히 패닉이 돌기 시작했습니다.
이미 국제투기자본의 영향으로 쌀과 유류 등 기본 생필품의 가격이 마구 올랐던 상황에서 함께 벌어진
이같은 일들은, 해당 피해자들에게는 '죽어라 죽어라'라는 말이 맞을 정도로 현실로 다가왔습니다.

그리고 국제투기자본이 충분히 투자액을 회수하고 다시 유류가가 주저앉을 무렵엔
집값들도 완전히 주저앉은 이후였습니다. 부동산 서치 전문사이트인 질로우 닷 컴을 통해
저는 작년 이맘때 32만달러까지 올라가 고점을 쳤던 제 집이 28만달러 정도로 떨어져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그나마 실수요자가 많은 우리 동네 같은 경우 별 타격을 입지 않은 거였고,
투자용 부동산들이 잔뜩 모여있는 고급 동네의 부동산 가격은 말 그대로 30% 이상 빠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문제는, 그동안 진행돼 왔던 글로벌라이제이션의 결과로 인해,
이같은 불황이 전 세계로 체인 리액션이 되어 퍼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불똥은 결국 우리나라에까지 튀었습니다.

속된 말로 '미국이 기침하면 한국은 감기 걸린다'는 식으로, 우리나라에서 불황은 IMF 때와 같은 모습으로
더욱 심각한 중증이 되어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IMF 때 볼 수 있었던 '폐업세일' 같은 것도 이제 눈에 띌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식당 등 자영업들이 문을 닫고, 기업들은 이 꽁꽁 얼어붙은 경기 속에서 당연히 감원과 고용동결을
가장 먼저 생각할 것이고... 그런데, 문제는 이번의 경제 불황은 '전 세계적'이라는 겁니다.

과거에, 미국이 그래도 지금보다 나았을 때 일어났던 한국의 IMF 때,
이곳의 동포들도, 그리고 조금 여유 있는 미국인들은, 기쁜 마음으로, 혹은 착잡한 마음으로
한국산 고급 물건들을 살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이곳조차 허덕이는 상황이라, 그나마 그 당시에 있던 '슬픈 세일'들 조차
쫓아갈 여력이 되지 못합니다. 그 때문에, 이 불황은 10년전 그때보다 훨씬 그 폭이 깊고
오래 갈 것이란 생각들을 하는 주위사람들도 많이 봅니다.

그리고 더욱 나쁜 문제는 그때나 지금이나 '리더십의 부재'는 여전하다는 겁니다.
그리고 우연인지 필연인지, 똑같은 사람이 한국이라는 나라의 재정을 담당하고 있고 말이죠.
그리고... 이제는 그 '슬픈 세일'조차 없습니다.



시애틀에서....

IP : 121.187.xxx.23
7 개의 댓글이 있습니다.
  • 1. 소심소심
    '08.11.25 12:58 PM (203.229.xxx.213)

    오늘은, 왜 이렇게 슬픈 이야기들이 많이 올라온답니까?
    ㅠㅠ

  • 2. 감사
    '08.11.25 1:02 PM (59.10.xxx.194)

    정말 정성껏 올려주셨네요.
    감사합니다.

  • 3. 은석형맘
    '08.11.25 1:10 PM (203.142.xxx.73)

    정말 슬픈세일이군요..
    저도 얼마전 가게를 정리하면 슬픈세일을 했었답니다..
    제가 수입해온 가격의 반 가격도 안되는 금액으로 처분해도..
    반응들은 그냥 그랬습니다.. 더 싸게 안파냐는 사람들의 물음이 제겐 상처도 되었지요,
    그분들은 그렇게 물건을 가져가며....제가 슬픈세일을 한다고 생각해 줬을까요......
    물건값만이 반가격이지..
    운송료와 관세,부가세는 포함하지도 않은 가격.....
    그래도 제발 다 팔려주기만을 바랬습니다..
    그래도 아직 끌어안고 있는 물건이 좀 되네요...

    님의 글에..그냥 제 상황이 이입되어버렸네요..ㅠ.ㅠ

  • 4. ㅠ.ㅠ
    '08.11.25 1:20 PM (59.5.xxx.115)

    그저 쳐울고 싶습니다...ㅠ.ㅠ

  • 5. 뱅뱅이
    '08.11.25 1:40 PM (116.47.xxx.7)

    밤잠을 설치네요 또다시 슬픈계절이 올까봐 불안하기도 하고 어서빨리 이 태풍이 지나가기를 납작 엎드려 기도합니다.

  • 6. .
    '08.11.25 2:02 PM (125.176.xxx.57)

    현실을 바탕으로써주셨네요.집 살 시기를 저울질하는 저로선 가슴에 와닿습니다.감사합니다

  • 7. 슬픈세일
    '08.11.25 2:27 PM (121.129.xxx.95)

    지금의 이 상황은 아니지만.
    언젠가 아파트 앞에서 똑같은 여자 남방을 단돈 천원에 팔고있었어요.
    하나 사서 지금까지도 아주 잘 입고 있는데요,
    그 옷을 볼 때마다 누군가의 눈물로 얼룩진 옷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천원이라니..
    어느 하청공장에서 또는 수입업자가 한숨과 함께 내다 버린 옷이 아닐런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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