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개론' 혹은 '악의 평범성'에 관하여
배재희 (timewood)
"국민들은 수준 높은데 정치인이 늘 문제야!"
아마 건국이래 가장 많이 들어본 '범국민적 푸념'이 아닐까. 실제로 대다수 한국인들 우려와 같이 실제로 한국정치 수준을 높이 사줄만한 근거들은 별로 없다. 50여년을 갓 넘긴 민주주의 시스템은 여전히 제도적 보완을 고민하고 있다. 사실 적어도 200~300년 이상 된 민주주의 시스템을 갖춘 유럽국가들의 정치 현실을 우리가 부러워하는 것은 당연하다. 늘 정치가 문제였다. 그런데 한편으로 생각해본다. 그렇다면 과연 정치인들을 답답하고 노여운 목소리로 탓하는 우리 '국민'들의 의식과 소양은 얼마나 선진적인가. 한국 정치의 봉건성을 견인하고 계몽할 만큼 한국인의 의식 수준은 높다고 자신있게 단언할 수 있을까?
골드하겐 테제
2차 대전 독일에서 발생한 온갖 전쟁범죄들은 가히 혀를 내두를 법하다. 하지만 70년이 훌쩍 지난 지금까지도 많은 이들을 당혹스럽게 하는 진짜 이유는 그런 패륜범죄가 르완다나 우간다, 이라크나 콜럼비아 류의 나라가 아닌 '독일'에서 일어났다는 사실이다. 당시 가장 높은 제도적 민주주의를 구가한 나라, 괴테와 칸트의 나라, 세계 최초 초등의무교육과 대학교육의 나라, 품위있는 고전 음악과 맥주와 노천카페의 나라. 이 당대 제일의 선진국에서, 사람으로 비누를 만들고, 장애인이나 집시를 독극물 주사로 절멸시킨 일이 '거국적으로' 일어난 현실을 대체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는가.
사람들은 이 문제를 설명하기 위해 편리한 방법을 고안했다. 모든 책임을 히틀러와 나치의 탓으로 돌리는 것이다. 히틀러는 분명 아주 아주 '나쁜 놈'이었지만, 결코 그 모든 전쟁 범죄의 처음이자 마지막은 아니었다. 독일인들은 스스로를 선동에 놀아난 피해자라 강변했다. 즉 히틀러는 적당한 필요에 의해 적당히 악마화되었다. 하지만 차례차례 밝혀지는 현실은 모두를 불편하게 했다. 평생을 도망다니던 1급 전범 '아이히만'의 재판장을 TV로 시청하던 독일인들은 당황했다. 마치 뿔 달린 도깨비 같은 모습을 상상했지만, 재판정에 선 아이히만의 모습은 맥주를 사랑하고, 고전음악을 들으며 노천카페에서 수다 떨기 좋아하는, 늘상 보는 평범한 독일 중년의 모습 그대로였다.
과연 그 모든 비극의 책임은 히틀러와 나치에게만 있는 것일까. 이러한 문제의식을 담은 이른바 '골드하겐 테제'는 하버드 대학 골드하겐(Daniel Jonah Goldhagen) 교수의 저서 <히틀러의 자발적 추종자들>이 출판됨으로써 시작되었다. 그 논지는 유태인 학살에 '평범한' 독일인 아저씨, 청년, 교수, 회사원들이 얼마나 적극적으로 가담하였는가를 학문적으로 입증하는 것이었다. 결국 비극은 독일인, 모두의 책임이었던 셈이다.
악(惡)은 모두가 골고루 나눠 가지고 있었다
내가 여기서 장황하게 골드하겐 이야기를 꺼내든 이유는, 오늘날 우리들이 괴로운 현실을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과거 독일인들의 자세가 엿보이는 듯해서이다. 생각해보자. 독일인들은 부단히 전쟁범죄나 지난 날 독일의 광기를 나치당과 특정 정치인에게 책임지우고 싶었지만, 그들이 부인할 수 없는 것은 히틀러를 민주적으로 선출했던 이는 평범한 독일인들 바로 자신이었다는 점이다.
히틀러는 경제공황에 빠진 독일인들에게 빵과 직업을 약속했다. 실제로 그는 미사일과 탱크 공장, 경찰 부대를 세워 독일인들에게 일자리를 주었고, 필요한 원자재와 물품은 힘없는 나라에서 마음껏 빼앗아 국민들에게 나누어주었다. 얄미운 유대인들을 모조리 동네에서 분리수거해 주었고, 악취를 풍기던 집시들은 하루 아침에 대도시에서 사라졌다.
깨끗해지고 풍요로워보이는 현실에 독일인들은 다시 투표로 환호했고, 목회자들은 축복기도로 안수했다. 어머니들은 밥상머리 교육으로 아들, 딸에게 왜 유대인과 같이 살아야하면 안되는지 가르쳤고, 아빠들은 주일에 성경책을 읽고, 주중에 집시를 때려잡기 위해 열심히 출근했다. 히틀러는 '나쁜 놈'이었지만, 결코 악마는 아니었다. '악'은 모두가 골고루 나눠가지고 있었다.
'국개론' 혹은 '악의 평범성'
경제가 더 나빠질 수 없을 만큼 급전직하하고 있다. 고환율 정책 이후 마침내 1500원을 돌파한 환율을 강변하듯, 중소기업의 떼도산이 진행중이다. 아파트 매매가로 대변되는 경제회복(?)의 신화에 도취되어 오랫동안 지적되어 왔던 대통령의 치부에 무감각했던 한국인들은 또 예년처럼 대통령에게 책임을 묻고 있다. 하지만 그런 대통령에게 압도적으로 투표한 이들은 '우리들'이다. 1920년대의 독일도, 2008년의 한국도 정치지도자는 국민의 손으로 뽑힌다. 과연 국민들은 위정자를 탓할 만큼 '비극적 현실'의 책임에서 가벼운가?
유명한 사회학자 '한나 아렌트'는 전범 아이히만의 선량해 보이는 평범한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아, 후일 '악(惡)의 평범성'이라는 개념을 발표했다. '악'은 히틀러나 아이히만에게 쏠려있는 것이 아닌, 모두에게 만연해 있었다. 요즘 시중에서 '국개론'(국민 개새끼론)이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는가? 굳이 '국개론'이라는 치욕적일만큼 자조적인 표현이나 '골드하겐 테제'를 빌리지 않더라도, 나는 늘 우리가 해왔던 "국민들은 수준 높은데 정치인이 늘 문제야!"라는 식의 상투적인 나랏님 탓에 대해 진지하게 되묻고 싶다.
"우리는 과연 이 비극에서 얼마나 떳떳한가."
출처 : 국민들 수준은 높은데 정치인이 늘 문제다? - 오마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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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들 수준은높은데, 정치인이 늘 문제다?
리치코바 조회수 : 370
작성일 : 2008-11-21 14:13:08
IP : 118.32.xxx.2
1 개의 댓글이 있습니다.
1. 리치코바
'08.11.21 2:15 PM (118.32.xxx.2)우리(한국)의 경우는 국민에게 정치인을 올바로 알려야 하는데, 왜곡하여 진실은 호도하고, 거짓홍보를 일삼는 언론이 문제다!
대표적인 예: 이명박의 티브이토론 쌩까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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