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이들이 한국을 한국답게 만드는 것이 무엇인가라는 수수께끼를 놓고 오랫동안 고민해 왔다.
어떤이는 모든 한국인의 정신세계에 존재하는 ‘신’과 ‘한’ 이라는, 충돌하는 양극단의 구현체인 무당을 해답으로 내놓았다.
또 어떤이는 한국인의 성격에 대한 적절한 상징을 김치라고도 한다. 불같이 맵고 짜고(특히 한국남자들처럼 말이다), 그리고 분명 일정한 노력을 해야만 음미할수 있는맛.
이사벨라 버드와 많은 이들은 한국인이야말로 한국에서 가장 특유하고 매력적인 부분이라고 말했는데, 나도 이 부분에는 반대하지 않으련다.
그러나 나는 가장 한국적이며 초월적인 경험을 매일매일 서울에서, 그리고 이 멋지고 당당한 나라 전역의 길거리 모퉁이에서 찾아낼수 있다.
이 거대도시의 깊은 땅속 북적거리는 지하철역에서 다음 기차가 도착할 때까지 그것을 찾아낸다.
한국 대재벌의 본부에서, 그리고 경제가 돌아가게끔 역할을 하고 있는 셀수없이 많은 중소기업 사무실에서도 찾아낸다.
김포공항이나 부산 국제 페리터미널에서 작별을 고할 준비를 하거나 감상적이 되어서 또 한번의 가장 한국적이고 초월적인 경험을 갈망할 때면 언제나 찾아낸다.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한국땅 어디에나 구석구석 버티고 서 있는 경이롭기 그지없는 한국의 물건, 인스턴트 커피 자판기다.
솔직히 말새 한국에 오기전까지 난 커피에 대해 무척 까다로운 편이었다.
내가 자란 샌프란시스코 베이 지역에서는 강력한 향의 커피는 거의 광적으로, 심지어는 신비스러운 열정의 대상으로까지 숭배된다.
내 친구들 대부분은 동네 카페를 하루도 거르지 않고 매일매일 찾아가는데, 우리는 그곳에서 이탈리아에서 직수입한 비싼 에스프레소 기계에서 뽑아내는 3층의 카페라테나 천국의 맛인 계피가루가 뿌려진 카푸치노에 빠져든다.
‘인스턴트 커피’같은 것으로 우리 입맛의 수준을 끌어내리는 건 상상할 수도 없었다.
인스턴트 커피는 우리 사전에 들어 있지도 않은 단어로, ‘인스턴트 와인’이나 ‘인스턴트 위스키’처럼 상상도 못해본 말이다.
한국에 처음 왔을때 슈퍼마켓에 가서 원두커피 값이 미국의 4,5배나 된다는 사실을 알아내곤 치를 떨기까지 했다. 분명히 이건 잔인한 음모요, 비인간적인 사기다. 놀라서 비틀거릴 지경이었다.
근처 카페에 들어가 메뉴에 카푸치노가 포함되어 있는걸 보고는, 비록 3천원이라는 다소 비싼 가격이었지만 그래도 마음이 누그러졌다. 아예 없는 것 보다는 나은데 하며 웨이터에게 재빨리 주문을 했다.
잠시후, 카운터쪽에 눈을 돌려 어떤 종류의 에스프레소 기계를 갖고 있는지 보려다가, 웨이터가 조심스레 인스턴트 카푸치노 가루봉지를 뜯고 있는 것을 보고는 다시한번 놀라 자빠졌다.
웨이터는 컵에 그 가루를 톡톡 털더니 뜨거운 물을 부어 서둘러 내 자리로 날라 왔다.
잘 섞이지도 않아 인스턴트 카푸치노 가루가 컵 위를 동동 떠다니고 있었다.
나는 커다랗고 푹신푹신한 소파에 쑥 가라앉아 환히 웃고있는 그 젊은이에게 “탱큐”라고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 ‘카푸치노’는 계피가 뿌려진 것도, 천국의 맛도 아니었다.
그 악몽같은 경험이후에도 나는 몇 번 더 다른 카페를 찾았지만 그때마다 언제나 지나치게 커다란 소파에 파묻혀, 지나치게 비싸면서도 더러운 구정물에서 퍼온것만같은 흐릿한 커피를 홀짝일 수밖에 없었다. 한동안은 슈퍼마켓에서 구입하여 집에서 과학적으로 거른 원두커피로 만족하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날 그만 새벽까지 일을 하다가 지각 일보직전 지하철역으로 무섭게 뛰어가야 할 상황이 발생했다.
그 와중에도 나는 커피가 무척 땡겨서, 낡아빠진 인스턴트 커피 자판기 앞에 끼익 멈춰섰다.
캄캄한 주변에서 눈에 먼저 들어온건 96도라는 알맞은 온도로 커피가 뽑아질 걸 알려주는 붉은빛.
다양한 선택의 가능성에 나는 일순 당황스러워 졌다.
2백원짜리 블랙커피, 2백원짜리 프리마커피부터 3백원짜리 밀크커피까지, 무려 아홉종류나 있었다.
‘프리마’가 무언지도 모르겠고 주머니 속엔 3백원밖에 없었던 난 밀크커피를 마시기로 했다.
동전을 집어넣자 컵이 톡 떨어지며 물이 쫄쫄 떨어졌다.
10초도 채 안되어 작은 종이컵속에서 달콤한 내음과 김을 무럭무럭 뿜어내는 인스턴트한 즐거움을 손안에 쥐고서 지하철역으로 서둘러 갔다.
달콤하면서도 지나치게 달지 않은 그 커피는 섬세하기도 하고 초콜렛 향기가 느껴지기도 했다.
무엇보다 한모금 마실때마다 기절할 정도로 나를 흥분시키는 무언가가 있었다.
마침내 지하철역에 도착했을땐 땅에서 붕 떠 있을 정도로 기분이 좋았다.
러시아워의 북적대는 인파도 안중에 없었다. 보통때라면 아무생각없이 어깨를 마구 밀쳐대는 사람들에 거의 미칠 지경이었을 텐데 말이다. 덕분에 난 하루종일 육백만불의 사나이가 된 듯했다.
그날이후 나는 한국식 인스턴트 커피의 코노세르, 즉 애음가가 되었다.
어불성설이긴 하지만, 그 맛을 부정할 이는 아무도 없으리라.
무수한 시행착오 끝에 집에서는 흑설탕과 커피크림(프림)을 섞은 맥심 모카골드의 맛이 파리 유명 카페에서 맛보는 커피맛과 당당히 어깨를 겨눈다는걸 알아냈다.
집에 온 손님들은 경탄과 즐거움을 감추지 못하며 항상 말하곤 한다.
“어찌나 맛있는지, 내 혀를 못믿겠어!”
물론 만드는데 엄청 편하다는 것도 두말하면 잔소리.
내 사전에서 이제는 귀찮게 필터로 걸러먹어야 하는 원두커피는 삭제!
나는 특히 맥심 커피의 맥심(금언)이 좋다.
이 힘겹고 짐스러운 인생에 대해 던져주는 현명한 충고 한마디.
“당신이 추울때는 맥심이 당신을 따뜻하게, 더울때는 시원하게, 지쳐있을때는 기분좋게.”
사시사철의 활력소, 쓸쓸할때의 친구....
파리의 길거리 카페라면 같은 특권을 누리기 위해 최소 커피한잔당 10달러는 지불해야 한다.
그것도 느려터지고 콧대높은 웨이터들과 끝임없이 신경전을 벌이면서 말이다.
그런데 여기 서울에선 인생의 가장 멋진 즐거움 중 하나를 누구든지 즉시 누릴수 있다.
부자건, 가난하건 누구에게나, 인종과 피부색과 종족의 차별없이 누구에게나.
그러고 보니 저가로 고품질과 편리를 한꺼번에, 이것이 바로 한국경제 기적의 비결이 아닌가
개편이전의 자유게시판으로 열람만 가능합니다.
스콧 버거슨의 '맥시멈 코리아' 중 커피에 관한 에피소드
... 조회수 : 581
작성일 : 2008-10-14 09:06:26
IP : 58.141.xxx.94
6 개의 댓글이 있습니다.
1. ^^
'08.10.14 9:13 AM (125.177.xxx.52)재밌네요...멜마민 골칫덩이에서 사랑스런 애국상품으로 이미지 급상승중..^^
2. ㅠㅠ
'08.10.14 9:13 AM (125.177.xxx.52)멜라민
3. 음
'08.10.14 9:17 AM (122.17.xxx.154)고품질이라고 하기엔 자판기 커피는 좀...
자판기 안에 바퀴벌레가 많이 산다고 하던데요 -_-;;;
저 학교 다닐땐 자판기 커피를 '알탕'이라고 불렀었어요...(바퀴) 알탕...;;; 웩;;;;4. 아우 참...
'08.10.14 9:47 AM (123.111.xxx.22)믹스커피 끊을라는 참인데... 어제부터 자꾸만 먹고 싶게끔 만드네요...
믹스커피와 라면은.... 정말로.... 끊기 힘든 것 같습니다.5. ...
'08.10.14 10:06 AM (211.35.xxx.146)자판기는 좀 지저분해 보이긴 하지만 정말 믹스커피가 맛있긴 해요ㅜㅜ
많이 알려져서 잘 만들어 수출하면 좋겠네요.6. caffreys
'08.10.14 11:54 AM (203.237.xxx.223)재밌네요.
저도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대학때부터 근 20년간 하루 몇 잔씩
"멜라민 커피"(저는 이제 자판기 커피를 이렇게 부릅니다)를
하루도 거르지 않고 거의 매일 서너잔씩 어떨땐 대여섯잔씩
홀짝 거리던 나로서는, 100원 200원 300원씩 조금씩 값이 올라갈때마다
투덜거리면서도... 가격대비 만족 100%라고 늘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전요... 나쁜거 진작부터 예상했구요.. 왜냐.. 맛있으니까
신장결석 걸려도 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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