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백호의 ‘무대책 낙관주의’에 물들다
» 〈슬램덩크〉
내 인생의 책 /
〈슬램덩크〉
이노우에 다케히코 지음/대원씨아이
만족스러운 인생이란 ‘내가 하고 싶은 것’과 ‘하라고 요구되는 것’사이의 적당한 균형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대부분 삼 대 칠 정도의 비중으로 주어진 미션을 허덕이며 해나가는 것에 치여 사는 것이 현실인 것 같다. 자기주도적이지 못한 현 상황은 어쩌다 잘 풀려도 내 것 같지 않다. 또 못 되면 미련만 남고 후회의 한숨만 나온다. 나도 이 책을 만나기 전까지는 그랬었다. 과거의 실수에 얽매이고, 남들의 평가에 일희일비하고, 미래의 불확실한 인정에 목을 매달았다. 그런데 이노우에 다케히코의 <슬램덩크>라는 만화책을 보면서 서서히 변하기 시작했다.
주인공 강백호의 힘과 투지에 반한 유도부 주장은 어떻게든 그를 스카웃하려고 했다. 그러나 풋내기 농구부원 강백호는 “나는 바스켓맨입니다”라고 단호히 뿌리치고 농구장으로 향했다. 그전까지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몰라 좌충우돌을 일삼던 문제학생 빨강머리 강백호는 정체성을 만들어가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무엇이건, 인정을 받건 안 받건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시작하고 나면 인생은 최소한 후회로 만신창이가 되지는 않는다.
누가 뭐라고 해도, 잘하건 못하건 “나는 바스켓맨”이라고 여기고 자기가 즐기고 싶은 일을 해나간다. 이전 세대의 가치관과는 확연히 달랐다. 까치나 오혜성처럼 복수를 위해, 질투심이 노력의 동기가 되지 않는다. 그냥 즐긴다. 좋아하는 일을 한다. 게다가 서태웅이 모차르트처럼 천재적 플레이를 하지만 살리에르적인 열등감에 시달리지 않는다.
“난 천재 바스켓 맨이야, 잘 될거야”라고 여기는 대책없는 낙관주의가 기본 옵션이다. 긍정의 힘은 풋내기슛부터 한 걸음씩 한 걸음씩 나아간다. 이런 태도는 강백호뿐만 아니다. 북산이 강력한 상대 팀과 대등한 경기를 해나가자 감동한 채치수 주장이 ‘고맙다’고 하자 모든 선수들이 “웃기지 마! 날 위해서 하는 거야!”라고 소리를 지른다. 오직 국가와 민족을 위해, 최소한 가족을 위해 살아야 한다는 의무감은 족쇄일 뿐이라는 것을 한방에 일깨운다. 팀워크란 전체를 위해 나를 희생하는 것이 아니라, 각자 자신의 목적을 위해 최선을 다할 때 진정 만들어지는 것이다.
<슬램덩크>를 만난 다음부터 물밑으로 삶은 조금씩 바뀌었다. “짧은 인생 내가 좋아하는 것을 즐기면서 살자”는 ‘나’ 중심의 삶과 “잘 될거야 걱정 마”라는 낙관적 태도가 서서히 몸에 물들어왔다. 남과 비교하면서 애태우지 않고 그냥 내가 좋아하는 것을 즐길 수 있게 되었다. 지금 주변을 돌이켜보면 보통의 정신과 의사와는 사뭇 다른 독특한 정체성이 만들어진 것 같다. 이로 인해 이런저런 현실적 고단함은 있다.
» 하지현/건국의대 정신과 교수
그러나 만족하며 살아가고 있다. 강백호가 그랬듯이. 만일 내가 <슬램덩크>를 읽지 않았다면? 조금 더 학문적으로 성공하고 좋은 지위를 갖고, 훨씬 더 경제적으로 성취를 했을 것이다. 하지만 어딘가 쫓기는 듯, 결핍된 채 지내고 있을 것이 분명하다. 그래서 오늘도 애장판 스물네 권은 내 책장 한 구석에 순서대로 가지런히 꽂혀 나를 내려다보며 말한다. “괜히 억지로 잘하려고 힘주지마. 무릎을 살짝 튕기고 왼손은 거들 뿐이야”라면서.
하지현/건국의대 정신과 교수
※ 각계 명사들이 쓰는 ‘내 인생의 책’이 이번주부터 ‘한기호의 출판전망대’ ‘베스트셀러 읽기와 함께 3주에 한 번씩 실립니다.
출처: 한겨레신문(2008년 10월 11일)
개편이전의 자유게시판으로 열람만 가능합니다.
강백호(슬램덩크)의 ‘무대책 낙관주의’에 물들다
리치코바 조회수 : 215
작성일 : 2008-10-11 14:18:24
IP : 203.142.xxx.171
0 개의 댓글이 있습니다.
☞ 로그인 후 의견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N
번호 | 제목 | 작성자 | 날짜 | 조회 |
---|---|---|---|---|
682633 | 자유게시판은... 146 | 82cook.. | 2005/04/11 | 154,570 |
682632 | 뉴스기사 등 무단 게재 관련 공지입니다. 8 | 82cook.. | 2009/12/09 | 62,238 |
682631 | 장터 관련 글은 회원장터로 이동됩니다 49 | 82cook.. | 2006/01/05 | 92,518 |
682630 | 혹시 폰으로 드라마 다시보기 할 곳 없나요? | ᆢ.. | 2011/08/21 | 19,971 |
682629 | 뉴저지에대해 잘아시는분계셔요? | 애니 | 2011/08/21 | 21,669 |
682628 | 내가 투표를 하지 않는 이유 | 사랑이여 | 2011/08/21 | 21,374 |
682627 | 꼬꼬면 1 | /// | 2011/08/21 | 27,408 |
682626 | 대출제한... 전세가가 떨어질까요? 1 | 애셋맘 | 2011/08/21 | 34,601 |
682625 | 밥안준다고 우는 사람은 봤어도, 밥 안주겠다고 우는 사람은 첨봤다. 4 | 명언 | 2011/08/21 | 34,787 |
682624 | 방학숙제로 그림 공모전에 응모해야되는데요.. 3 | 애엄마 | 2011/08/21 | 14,845 |
682623 | 경험담좀 들어보실래요?? | 차칸귀염둥이.. | 2011/08/21 | 16,990 |
682622 | 집이 좁을수록 마루폭이 좁은게 낫나요?(꼭 답변 부탁드려요) 2 | 너무 어렵네.. | 2011/08/21 | 23,212 |
682621 | 82게시판이 이상합니다. 5 | 해남 사는 .. | 2011/08/21 | 36,189 |
682620 | 저는 이상한 메세지가 떴어요 3 | 조이씨 | 2011/08/21 | 27,396 |
682619 | 떼쓰는 5세 후니~! EBS 오은영 박사님 도와주세요.. | -_-; | 2011/08/21 | 18,306 |
682618 | 제가 너무 철 없이 생각 하는...거죠.. 6 | .. | 2011/08/21 | 26,626 |
682617 | 숙대 영문 vs 인하공전 항공운항과 21 | 짜증섞인목소.. | 2011/08/21 | 74,074 |
682616 | 뒷장을 볼수가없네요. 1 | 이건뭐 | 2011/08/21 | 14,553 |
682615 | 도어락 추천해 주세요 | 도어락 얘기.. | 2011/08/21 | 11,622 |
682614 | 예수의 가르침과 무상급식 2 | 참맛 | 2011/08/21 | 14,356 |
682613 | 새싹 채소에도 곰팡이가 피겠지요..? 1 | ... | 2011/08/21 | 13,388 |
682612 | 올림픽실내수영장에 전화하니 안받는데 일요일은 원래 안하나요? 1 | 수영장 | 2011/08/21 | 13,639 |
682611 | 수리비용과 변상비용으로 든 내 돈 100만원.. ㅠ,ㅠ 4 | 독수리오남매.. | 2011/08/21 | 26,037 |
682610 | 임플란트 하신 분 계신가요 소즁한 의견 부탁드립니다 3 | 애플 이야기.. | 2011/08/21 | 23,534 |
682609 | 가래떡 3 | 가래떡 | 2011/08/21 | 19,753 |
682608 | 한강초밥 문열었나요? 5 | 슈슈 | 2011/08/21 | 21,813 |
682607 | 고성 파인리즈 리조트.속초 터미널에서 얼마나 걸리나요? 2 | 늦은휴가 | 2011/08/21 | 13,805 |
682606 | 도대체 투표운동본부 뭐시기들은 2 | 도대체 | 2011/08/21 | 11,929 |
682605 | 찹쌀고추장이 묽어요.어째야할까요? 5 | 독수리오남매.. | 2011/08/21 | 18,075 |
682604 | 꽈리고추찜 하려고 하는데 밀가루 대신 튀김가루 입혀도 될까요? 2 | .... | 2011/08/21 | 21,832 |